354. 외전 역전의 제나 19
"우와아… 실물이다… 느에헿…."
대뜸 최재훈의 손을 감싸더니 음침하고 칠칠치 못한 미소를 흘리는 이린.
제나의 기억 속의 이린의 분위기는 딱 맞는 군복처럼 항상 꽉 죄여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슨, 밴드가 늘어난 추리닝처럼 느슨했다.
앞머리가 만들어낸 그림자에 잡아먹힌 음침한 눈가.
성공한 사업가의 날카로운 눈은 더 이상 없었다.
영락없는 폐인 몰골이었다.
뒤늦게 이린의 음침한 시선이 제나에게도 향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눈을 보니 아예 맛탱이가 간 것 같지는 않았다.
분위기 자체만 놓고 보면 마약을 한 게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맛탱이가 갔는데, 눈에서 느껴지는 총기는 분명 '이린'의 것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
제나는 그녀를 보며 별 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이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그저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동시에 서로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제나는 뒤늦게 여전히 최재훈의 손을 감싸고 있는 이린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이린의 몰골과 그 손을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지금 그 손으로 남의 손 잡는 건 과연 어떨까 싶은데."
"항상 청결을 유지하니다만?"
제나가 최재훈을 대할 때와는 달리 냉정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답했다.
드디어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이린의 모습이 나왔지만, 그 일관성 부재된 모습에 제나는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 몰골로 말하니까 설득력이 엄청난데?"
제나가 특유의 비웃음과 함께 비꼬자 이린은 제나 대신 최재훈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혹시 재훈 씨도 신경 쓰이시나요? 그, 그럼 냄새라도 맡아 보실래요?"
이린이 치켜뜬 음침한 눈으로 최재훈을 올려다 보았다.
"아, 그. 괜찮아요."
최재훈은 그렇게 말하곤, 신경이 쓰여 붙잡힌 손을 한 번 힐끔 쳐다봤다.
"아… 이건 너무 반가워 가지고… 죄송해요, 혹시 기분 나쁘셨나요?"
"아이고~ 기분이 나쁠 게 어딨겠어요. 이렇게 반갑게 맞이해 주시니까, 저까지 덩달아 기쁘네요."
최재훈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 악수. 하실래요?"
"헉… 그러면 지금 저희가 하고 있는 건 뭐죠…?"
이린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이미 최재훈의 손을 감싸 잡고 있는 손.
그 손을 위아래로 천천히 몇 번 흔든 뒤, 최재훈을 바라봤다.
최재훈이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느에헿…."
이린이 칠칠치못하고 음침한 미소로 화답하곤, 조심스럽게 손을 떼어 놨다.
못내 아쉬운지, 떼어 놓은 자세 그대로 굳은 손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저 이 손 이제 못 씻을 것 같아요."
이린이 그 손을 그대로 위로 올려 자신의 얼굴을 감싸곤 황홀하다는 얼굴을 했다.
마치 손에 남아 있는 무언가를 느끼듯.
"어후… 쉿…."
이린의 기행에 옆에서 제나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눈을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예… 아무쪼록… 손이랑 원만히 잘 합의 보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느에헿… 농담."
이린이 음침하게 웃으며 얼굴에서 손을 떼어놓았다.
그리곤, 헐렁해서 치마처럼 보이는 긴 바지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가죽 장갑.
그녀는 그대로 그걸 손에 착용하더니, '짠~'하면서 최재훈에게 보여줬다.
"이러면 되지요~"
뭘 이러면 된다는 걸까.
뒤늦게 이린이 제나에게도 인사했다.
"삼피 님도 안녕하세요."
다시 또, 사무적인 태도로 돌변하여 정중한 어조로.
제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방금 그녀가 최재훈에게 악수를 하자 했던 게 떠올라 먼저 손을 건넸다.
그런데 이린은 앞으로 손을 모은 상태로 제나가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난처하다는 듯 쓰게 웃었다.
"제가 다른 사람이랑 접촉하는 걸 좀 꺼려해서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방금 얘 손으론 아주 빨래질을 하더만?"
제나가 실소를 터뜨리며 비아냥거렸다.
합당한 지적에 이린이 마지못해 그 손을 맞잡으려했다.
그 순간, 제나가 손을 내빼며-
"뭐, 싫다면 어쩔 수 없고. 간접 악수나 하지 뭐."
방금전 이린이 했던 것처럼, 최재훈의 양손을 감쌌다.
마치 거기에 묻은 이린을 닦아내듯.
이린이 그런 제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자, 제나는 그제서야 만족스럽게 비웃음을 그렸다.
'치킨 먹고 싶당.'
그런 복잡미묘하면서도 격렬한 기류 사이에 낑겨버린 최재훈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정신을 다른 세계로 피신 보내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집이 보기보다 좁은가 보네. 손님도 못 들이고 이렇게 문전박대하는 거 보면."
"…잠깐만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무언가를 손에 들고 나온 이린이 문을 열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그리곤, 그 무언가를 제나에게 건넸다.
아직 포장지를 뜯지도 않은 새 장갑과 슬리퍼였다.
"그리고 삼피 님은 이걸 착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회용 싸구려가 아닌, 고급 제품처럼 보였다.
그 사실이 묘하게 더욱 짜증을 돋웠다.
제나가 가만히 이린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선물'을 낚아챘다.
그걸 착용한 뒤에야, 자신을 기다리는 최재훈과 함께 집에 들어섰다.
집에 들어선 순간 에어컨을 켜 놨는지 서늘한 공기가 그들을 반겼다.
밖은 아직 대낮인데 커텐으로 외부의 빛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약한 조명을 켜 놓은 게 고작인 내부의 모습은 야밤처럼 어두웠다.
그래서인지 역시 불이 꺼져 있는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PC가 만들어낸 스산한 빛이 달빛처럼 느껴졌다.
누가 보면 외출했었던 집 주인과 같이 귀가한 줄 알겠다.
이쯤 되면 제나는 이린의 기행이 당황스러운 걸 넘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혹시나 해서 여쭙는데, 그, 뱀파이어는 아니시죠? 하, 하하. 그, 경고하는데. 저희 물면 큰일 납니다? 한국인 아시죠? 마늘을 아주 그냥, 어? 뱀파이어는 그냥 우리 땀만 핥아도 훅 가는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조심하세요. 분명 경고했습니다?"
최재훈이 이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고자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이린은 그의 농담이 마음에 드는지 '느에헿' 웃더니 면목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평소에 이렇게 지내다버릇해서 그만."
이린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그제서야 천장의 등이 존재감을 과시하며 집안 곳곳에 빛을 흩뿌렸다.
벽지며, 가구며 대부분이 순백을 기조로 되어 있음에도 조금의 떼도 타지 않은 깔끔한 풍경이 모델하우스를 연상케 했다.
너무나도 의외의 광경에 최재훈과 제나가 저도 모르게 '오…' 자그만한 감탄사를 흘렸다.
"재훈 씨는 여기 앉아 주시고, 삼피 님은 여기."
이린이 테이블 좌석의 자리를 지정했는데, 제나의 자리만 특별하게 무언가로 덮여 있었다.
천.
이 또한 슬리퍼와 장갑처럼 상당한 고급 같았는데, 그 사실이 이번에도 묘하게 더욱 짜증을 돋웠다.
"커피로 괜찮으신가요?"
둘이 자리에 앉자 이린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방금 갓 내린 듯한 온기 머금은 향 그윽하게 퍼지는 드립 커피를 정성스럽게 따른 잔을 받침 위에 올린다.
고풍스러운 상자에서 갓 꺼낸 정갈한 조각 케이크를 접시 위에 담는다.
그걸 둘의 앞에 내려놓으며, 제나에겐 사무적인 어조로 돌아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참고로, 그 식기는 가져가셔도 됩니다."
"거, 눈물 나게. 고맙네."
뒤늦게 이린이 자신의 식기를 갖고 테이블에 앉았다.
"…."
"…."
그러자 치재훈과 제나가 어색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자리 배치가 참 개성적이었다.
집 주인과 손님 둘이 이렇게, 앞뒤로 의자가 두 개씩 배치되어 있는 테이블에 앉는다면.
보통은 손님 둘이 나란히 앉아 집 주인과 마주하는 형태가 정석 아니던가.
그런데 이 인간은 서로 반대편 자리로 떼어 놓은 뒤, 최재훈 옆 자리를 자기가 떡하니 차지했다.
하고 싶은 말과 의문이 한 트럭이었으나.
최재훈과 제나는 그녀의 기행에 일일이 반응하자면 밑도 끝도 없을 것 같아, 그냥 그려려니 하기로 했다.
"먼저, 이렇게 양해해 주시고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밖에 나가는 걸 많이 꺼리는 성격이라. 아."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이린이 또 다시 앞머리가 만들어낸 그림자가 드리운 눈을 치켜뜨며, 조심스럽게 최재훈에게 물어봤다.
"지금 제 상태가 많이 안 좋죠? 미안해요. 지난 며칠 동안 재훈 씨 영상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어서."
"네? 제 영상을요?"
"방송 한 번 하실 때마다 인상적인 장면이 너무 많이 나와서. 하나하나 다 편집하다 보니, 하루가 부족해서…."
"아, 감사합니다. 그렇게 좋게 봐 주셔서. 그러면- 지금 그 모습은 저한테는 영광의 상처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니까, 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신경 안 쓰니까요."
이린이 그렇게 말하는 최재훈을 바라보다가 '느에헿' 특유의 음침하고 칠칠치 못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커피랑 케이크는 입맛에 맞으시나요?"
"아, 넵. 아주 좋네요."
"말 나온 김에, 재훈 씨는 원두 어떤 브랜드를 선호하세요?"
"예? 원두요? 아, 커피. 예, 뭐 저는 그냥. 가족들이 사다 놓는 거 먹거나, 대충 싼 인스턴트 커피 아무거나 사서 먹는 식이라. 취향이랄 게 딱히 없네요."
"아, 그러면 지금 드시는 건 어떠세요?"
"네?"
"어떻게 좀, 취향이신 것 같으세요?"
"아, 예. 잘은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제가 먹어봤던 커피들 보단 확실히 맛있네요."
"취향이 저랑 같으신가 보네요."
"아, 그런가요?"
"네, 분명 그럴 거예요."
이린의 음침하고 칙칙한 목소리에 확신을 담아 말하더니 혼자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이내 '느에헿' 미소를 짓는다.
"아, 하하하… 그렇…군요…."
그 광경을 바라본 제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일 얘기는 언제?"
"…."
이린이 흥이 깨진 듯, 몸을 자세를 바로 잡으며 사무적인 태도로 돌변했다.
미리 준비해 둔 계약서를 최재훈에게 보여주며,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진행하려 했다.
"아, 그. 편집자 님?"
"이린이에요. 편하게 부르셔도 돼요."
"예? 아, 그럼… 이린 편집자 님?"
"좀 더 편하게 불러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치켜뜬 눈에 기대를 담아 바라보는 이린.
최재훈은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 그러면 이린 씨…?"
"느에헿… 네, 왜요? 재훈 씨?"
"그, 계약 얘기는 저 말고. 저기, 제 일행. 삼피 님한테 부탁드릴게요."
"네…? 왜요?"
이린이 의아하면서 못마땅하다는 기색으로 반문했다.
"이런 건 저보다, 제 일행이 잘 알아 가지고."
"괜찮아요, 제가 잘 설명해 드릴게요."
이린이 강력하게 설득했지만 최재훈은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하는 수 없이 제나에게 시선을 돌리자, 자신을 보며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
이후, 이린은 특히나 냉철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제나와 이야기를 진행했다.
제나를 바라보는 이린의 눈엔 그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잠깐."
하지만, 머지않아 제나가 발언했고.
이린의 무심한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현재 이린이 제시한 계약서는, 그녀가 변호사의 자문을 구하여 표준 계약서를 보완한 계약서였다.
이린의 기준에서 완벽한 계약서.
제나는 그러한 계약서에서, 맹점과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해 나갔다.
의문을 제기하는 이린을 충분히 납득시키며 상세하게 수정을 지시했다.
그럴 때마다 계약의 내용은 더욱 촘촘하고 세심해졌고.
그렇게 완성된 계약은 기존 계약보다 훨씬 더 공정했으며.
또, 훨씬 더 유연해서 보다 다양한 상황에서의 기준이 되어줄 수 있었다.
높은 수준의 전문적 지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주, 잘 아시네요?"
무의식중에 제나를 가볍게 여기고 있었던 이린이 의외라며, 다소 자존심이 상해서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자 제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 쪽으로 빠삭한 지인이 있어서."
"…."
워낙 인상이 인상인 지라, 서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린으로 하여금 호감을 느끼게 하는 종류의 미소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린은 그 미소에, 제나에게서 느끼던 거리감이 줄어드는 느낌을 받았다.
형용 못할 신비로운 느낌이 이린의 등을 떠밀어, 제나에게 스스로 가까워지고 싶게 만들었다.
이린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제나 웨스트, 삼피에게 열광하는지.
다른 이들보다 더더욱 자세히 알게 된 기분이었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최재훈은 둘의 사이가 어느 정도 누그러진 걸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이린이 펜을 꺼내며 제나와 최재훈 둘 중 누구에게 건네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그때였다.
"아, 싸인하기 전에."
"네?"
"아까 말했던 그, 작업물 한 번 보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는 제나의 태도는 상대방을 시험하는 듯, 어딘가 도발적이었다.
보통 같으면 충분히 무례하다 느낄 우려가 있는 행위였으나.
제나에겐 그런 무례를, 무례로 느끼지 않도록 하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고.
이린은 그러한 무례를, 무례로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을 오래가지 않았다.
둘을 방 앞으로 안내한 이린이 아차 당황했다.
"워메…."
"왓 더 퍽 디스…."
다수의 모니터가 나란히 나열되어 있는 거대한 컴퓨터 책상, 컴퓨터 자리 주변으로 쓰레기 울타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말했잖아요… 지난 며칠 동안 정신이 없었다고…."
과연 이건 어쩔 수 없는지, 수치심으로 귀를 붉힌 이린이 멋쩍게 중얼거렸다.
셋은 쓰레기를 피해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며 컴퓨터 자리로 나아갔다.
"오, 그런데 이게 자세히 보니까. 생각보다 꽤 체계적으로 어질러 놓으셨네요. 페트병은 페트병끼리, 캔은 캔끼리."
"그렇게 따지면 변기도 체계적이지."
"제가 죄송하니까, 쓰레기 얘기는 그만 하죠…."
"어?"
그때 제나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됐다.
그녀가 눈에 힘을 집중하더니 이내-
"왓…더…."
얼굴을 혐오감으로 한계까지 일그러졌다.
"헤이,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인간적으로 아니지 않아?"
제나의 말에 최재훈과 이린이 그녀의 시선을 쫓았다.
거기엔 페트병이 있었고.
페트병 안엔 짙은 노란색 액체가 들어 있었다.
"화장실이 바로 옆에 있는데…."
"예? 저게 뭐가- 아, 아!? 아니, 다, 당신 미, 미쳤어요!?"
"판사님 저는 앞이 안 보여서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입을 쩍 벌리며 경악한 최재훈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아니, 재, 재훈 씨! 잠깐만요! 오해예요!"
"아, 음… 그래. 생각해 보니 그, 오, 오해인 것 같아. 그, 그렇지?"
"어? 아! 생각해 보니 그렇네. 응. 그렇지. 저건… 어, 그래. 보리차네. 응."
"아니, 아니!? 진짜 보리차 맞거든요!? 저기 상표 띠 안 보여요!?"
"아, 아니. 누가 뭐래? 보리차 맞다니까. 응… 누가 봐도 보리차네."
"아니, 안 믿잖아요! 기다려 봐요!"
이린이 성큼성큼 다가가 페트병을 집어 들고 뚜껑을 열었다.
최재훈과 제나가 저도 모르게 오만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 뭐예요 그 반응!?! 보리차라면서요!? 보리차 맞다니까요!?"
"아, 알겠다니까!"
"이린 씨 알겠으니까 진정하세요!"
"아니, 뭘 진정하라는 거예요! 두 분이나 좀 진정하고, 냄새 맡아 보시라니까요!?!"
음침한 몰골로 병의 입구를 내밀며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광기에 사무친 연금술사 혹은 마녀 같았다.
"으아악!!! 이린 씨 안 돼요!!!"
"가까이 오지 마, 미친 지지배야!!!"
둘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정말로 억울한 이린이 울상이 되어 소리쳤다.
"아니, 왜 도망가요!!! 그러면, 이봐요!!!"
그리곤 입에다가 병의 입구를-
"이린 씨 안 돼요!!!"
"으아아악!!! 미친년아!!!"
"아니,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보리찬데!!!"
"알겠으니까 제발 그만 하세요!!! 어리석은 짓 하지 말고!!!""
"뭘 알겠다는 건데요!!!!!!"
이린이 간신히 무고를 증명한 뒤에야 셋은 컴퓨터 앞에 도착했다.
"하, 그러면…."
기진맥진한 상태의 이린이 키보드와 마우스를 조작했다.
불이 꺼져 있던 모니터들에 불이 들어오고-
다양한 최재훈이 미소 지으며 이린을 반겼다.
"…느에헿."
모니터들의 배경화면이 전부 각기 다른 최재훈의 사진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어후…."
제나가 다시 한번 못 볼 걸 봤다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오늘 저녁 치킨 먹어야징.'
너무나도 강렬한 상황을 받아들이길 거부한 최재훈의 정신은 잠깐 다른 곳으로 외출을 나갔다.
"재훈 씨?"
하지만 곧장 이린에 의해 불려온다.
"넹…?"
"어제 방송하면서 생각해 두셨던 편집점 있으세요?"
"네? 편집점이요? 그게… 뭐지용…?"
"쉽게 설명하자면. 방송하면서 '아, 이 장면은 진짜 미튜브 감인데'라고 느끼는 순간이요."
"어… 잠시만요…."
최재훈이 핸드폰을 조작하여 어제 방송의 다시보기 영상의 특정 부분으로 이동한 뒤, 그걸 이린에게 보여줬다.
이내, 모니터에 영상 하나가 재생되었다.
정확히 최재훈이 언급한 순간을 편집한 영상이었다.
"오."
이린과 제나가 흥미 가득 담긴 눈으로 그 영상을 시청했다.
그녀들은 드문드문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던가, 실소를 터뜨렸다.
'간장 치킨이 좋겠당.'
갑작스럽게 시작된 멋쩍은 상황, 수치 플레이에 최재훈의 정신이 다시 한번 머나먼 곳으로 피신했다.
몇 개의 영상을 추가적으로 확인한 제나가 만족스럽게 고갤 끄덕였다.
자신이 아는 이린과는 전혀 다른 모습.
어쩌면 그 실력까지 전혀 달라진 게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과하지 않으면서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편집.
방송인이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편집점을, 방송인의 매력을 포착해내는 감각적 능력.
담당 방송인을 향한 애정이 만들어내는 병적인 열정.
그러한 병적인 열정이 만들어내는 말도 안 되는 능률.
제나가 알던 것과는 다소 달랐지만, 그녀는 분명 이린이 맞았다.
"오케이,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또 뭐죠?"
제나가 신호를 보내자 최재훈이 이어서 말했다.
"그, 혹시 말인데요. 저뿐만이 아니라 여기, 삼피 미튜브 채널도 같이 관리해 주실 수 있나요?"
둘의 예상과 달리 이린은 곧장 거절하지 않고, 한참을 고민한 뒤에 신중하게 답했다.
"아뇨."
"아, 혹시 이유를 여쭤 봐도…."
이린이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와 진지하게 답했다.
"저는 지금 재훈 씨 말고 관심 없거든요."
"어맛."
"하."
제나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으로 눈앞의 이린이,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이린의 모습과 겹쳐졌다.
이제와서지만-
제나는 그 이린이 '여자'에서 여자가 되면 딱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도 좀 음침하고 음흉한 지지배였으니까.'
애당초 이렇게 될 줄 알고, 이린을 설득할 방법을 준비해 왔던 제나였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왜인지 기분이 좋아져서, 흔쾌히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그래, 어련하시겠어."
당황해하던 최재훈 역시 그런 제나의 반응을 보곤 어깨를 으쓱이며 이린에게 말했다.
"그러면 이린 씨,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그에, 이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마주섰다.
치켜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손을 건넸다.
최재훈이 쓰게 웃으며 그 손을 마주잡았다.
"느에헿… 저도 잘 부탁드려요."
그날.
최재훈의 미튜브 채널엔 수십 개의 영상이 업로드 되었다.
다른 채널 같았으면 한 달에 걸쳐 진행됐을 그 폭발적인 공세에, 최재훈의 채널은 '실시간 인기 급상승 게임 채널'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아직은 어림도 없다며 다그치기라도 하듯.
실시간 인기 급상승 게임 채널 목록은 금방 최재훈이라는 이름을 내쫓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개설된 지 반 년도 안 된 신생 채널이 감히 넘볼 자리가 아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사흘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여전히 최재훈의 채널은 '실시간 인기 급상승 게임 채널'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최재훈의 채널과 방송은 분명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벽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실시간 인기 급상승 게임 채널 목록'에 얼굴을 비춘 이후, 단 하루도 출석을 빠트리지 않은 '3P'채널과는 확연히 달랐다.
제나가 비현실적인 속도로 치고 나갔다.
최재훈은 언젠가부터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최재훈은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났다.
'3P'의 등장 이후, 3P가 아닌 다른 플레이어에게 이렇다 할 관심을 주지 않았던 레오레 커뮤니티.
그런 레오레 커뮤니티에서 오랜만에, 3P 말고 다른 플레이어가 주목을 받았다.
그 플레이어는 실로 난해한 플레이 스타일을 추구한다.
처음 그를 만난 네임드 플레이어 겸 방송인들은 대체로 당황하곤 했다.
"아니, 얘 뭐야?"
"뭐하는 새끼지?"
"얘 뭐, 대리 받았나…?"
플레이 의도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플레이가 메타에 적응하지 못한 조잡한 플레이라는 것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비웃었고.
"어…?"
"아니, 시발. 뭐야?"
"이게 이렇게 돼?"
그렇기에 당황했다.
그 플레이어는 항상 난해하고 이해할 수 없는 플레이로써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실력자들에게 하나둘 당황을 안겨주었고.
충격을 선사했다.
"아니 시발, 지금 봤는데 이 새끼 승률 이거 뭐야?"
"아니, 1군 프로 부캐도 여기서 이 승률은 안 나올 것 같은데?"
"지금 메타에 암살자로 이 승률이 나온다고?"
"아니 시발 이거 뭐 도대체 어떻게 이긴 거지?"
"얘 도대체 누구야???"
머지않아.
대한민국 레오레의 판도를 이끌어간다 평가 받는 플레이어 중,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SOOMCUT? 이게 뭔 뜻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