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외전 역전의 제나 18
제나는 말했다.
편집자를 구해야 한다.
돈은 신경 쓸 필요 없다.
혹시 돈을 대신 내 줄 생각이냐는 내 물음에 아니라 답하곤 이어서 하는 말이-
"딱 좋은 편집자를 한 명 알아봐 뒀다고?"
최재훈은 머릿속에서 그 말들을 억지로라도 연결시켜 그녀의 말을 이해해 보려 했다.
“어… 설마, 공짜로 편집해 주는 편집자라도 찾은 거야?”
“그건 아니지만,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매니지먼트 식으로 채널 관리해 주는 편집자들이 있는 건 알아? 모르겠지.”
"아니, 알아? 와 모르겠지 사이의 간격이 1초도 안 되는데요? 알아도 안다고 못 하겠네."
"알아?"
"모르긴 하는데, 마음은 아프네. 내 인격을 존중해 준다면, 적어도 대답할 기회는 주면 좋겠어."
"하, 귀엽네. 오케이. 그러면, MCN은 알아?"
"아니."
"대충 이쪽 업계 돌아가는 구조는 알아?"
"아니."
"…."
"날 그렇게 보지 마!!! 끼에에에엑!!! 너는, 너는 그렇게 잘난 것 같애!?"
"으… 아무튼. 이쪽 업계. 그러니까, 방송계에서 방송인과 편집자의 관계는 전형적인 갑을 관계야. 파트너가 아닌 사장과 고용자. 영상을 아무리 잘 만들어 봤자 받을 수 있는 돈은 정해져 있고, 못 만들면 바로 잘리지.
계약서 안 쓰는 경우도 파다하고, 임금도 평범해. 생각보다 꽤 열악한 환경이지. 그런 상황에서, 먹방이나 겜방하면서 월에 수천만 원씩 버는 방송인들 영상 편집하느라 하루 종일 붙잡고 있어. 그러면 기분이 어떨까?"
"메소드 이입법으로다가 추정해 보면 아마도 배가 아파 뒤질 것 같겠네요."
"그래서 대가리 좀 찼다 싶은 편집자들은 더 좋은 조건 찾아 나서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직접 방송인들을 키우는 거야."
"키워?"
"보통 영상 편집 시세가 분당 만 원대로 형성돼 있거든?"
"그러면 20분짜리 영상 편집은 20만원인 거야?"
"편집 실력, 영상의 부가적인 디테일에 등. 여러 요소에 따라 거기에서 더 비싸질 수도 있고. 조회수에 따라 인센티브를 지급해야 할 때도 있어."
"어이고야…."
"그렇지. 너 같이 방송 막 시작해서 영상으로 곧장 수익 올릴 수 없는 애들한텐 어이고야 소리 절로 나오는 일이지. 그래서 얘네는, 너 같이 싹쑤 노란 애들 찾아다가 제안을 하곤 해. 공짜로 편집을 해 주겠다."
"오?"
"대신, 채널 수익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 수익을 퍼센테이지로 분배하자."
"오호라… 근데 만약 채널 수익이 나와서 그걸 분배해도, 다른데서 읍질하면서 받는 돈보다 못할 수 있는 거 아냐?"
"맞아. 몇 달, 몇 년 동안 영상 편집해 놓고 결국 한 푼도 못 뽑거나 몇 십만 원 겨우 뽑고 청산하는 애들도 널렸어."
"저런."
"간단한 시장 원리야. 하이 리스크가 있는 곳에, 하이 리턴이 있다. 걔네 딴에는 자기 커리어 걸고 투자하는 거지. 그런 만큼, 영상 편집에서 그치지 않고. 말 그대로 편집자 생활 하면서 쌓은 짬으로 매니지먼트까지 해 주면서 어떻게든 방송인 키우려는 애들이 있어. 어떻게든 대형 방송인 키워서, 자기도 억대 수익 올리려고. 그런 애들이-"
제나가 팔을 벌리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 같은 애들이 막 방송 시작하려 한다는 걸 알면 어떻게 할까?"
아직 이룬 건 아무것도 없다 그 무엇도 확실치 않은데도.
이 치열하고 불안정한 세계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리라 일말의 의심도 갖지 않는 저 모습.
철없고 오만하며 어리석다.
보통 같으면 그렇게 보일 모습이었다.
그런데, 최재훈이 느끼길 제나가 저러니까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
무슨 말을 하든 상대방을 강제적으로 납득시키는 폭력적인 자신감.
그런 자신감을 내뿜는 사람을 다라 가는 거라 생각하니, 자신까지 덩달아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기분이었다.
"아주 그냥, 눈들이 뒤집어지겠구만."
제나가 최재훈의 표정을 보더니 더욱 미소를 짙게 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같이 일 하고 싶다는 애들- 아니지. 제~발 같이 일해 달라는 애들만 해도 이미 무더기로 쌓여 있어. 간이니 쓸개니 죄다 내다 바칠 기세더만."
"크, 그러면 뭐. 만사 해결이구만."
"아니."
"응?"
"내가 말했잖아. 딱 좋은 편집자 한 명 알아봐 뒀다고. 우리가 받아야 하는 연락은, 걔 연락이야."
이미 받은 연락이 한 무더기인데, 연락을 줄지 안 줄지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의 연락을 기다린다니.
최재훈은 의문을 가졌지만 곧바로 지워 버렸다.
"뭐. 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런데,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지 능력 낭비하는 프릭이라 해야 하나."
"뭐? 능력을 낭비해?"
"뭐 대충, 생태계 교란종 같은 거지."
제나가 아까부터 최재훈의 반짝거리는 눈에 도취되어 평소에는 안 할 행동을 했다.
으쓱거리며 손등으로 자신의 뒷머릴 화려하게 쓸어 넘긴 것이다.
펄럭이는 망토처럼 공중에서 펼쳐지는 금빛 생머리.
"이 비쥬얼로 게임 방송이나 하려는 나 같은 년이랄까?"
제나가 최재훈을 흘겨보며 반응을 살폈다.
"…."
그는 눈을 꿈뻑이며 가만히 경청할 뿐이었다.
"…크흠. 어쨌든-"
멋쩍어서 귀가 뜨거워진 걸 느낀 제나가 다급히 헛기침을 하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을 돌렸다.
"우리가 방송하다 보면, 반드시 우리 둘 중 한 명한테는 연락이 올 거야. 그러면 조건으로, 우리 둘 다 맡아 달라 하는 거지."
"우리 둘 다? 가능한가?"
"걘 할 수 없어. 지 인생이 없는 년이라."
"어우. 아까부터 말하는 거 보니까, 무슨. 아는 사인가 보네?"
제나는 그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자, 어쨌든 그런 줄 알고. 정리하자면. 우리는 우리 일에나 집중하면 된다는 거야."
제나가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레오레에 클라이언트를 실행시켜 로그인 화면을 띄워 놓은 뒤 말했다.
"너, 레오레 부계정 있지?"
"응? 어, 하나 있긴 하지."
제나의 턱짓에 따라 최재훈이 자신의 부계정으로 접속했다.
그녀의 눈에 익숙한 아이디가 눈에 들어왔다.
'치킨퀸치퀸'
"하."
"응? 왜?"
"아니, 아이디 깜찍해서."
"헤헤."
"그래서, 티어가 어딘데."
"저번 시즌에 그랜드 마스터였고, 이번 시즌은 아직 배치 안 봤어."
"딱 좋네. 앞으로, 방송할 때는 니 본계정 쓰고. 나한테 배울 때는, 그 부계정으로 하게 될 거야."
"굳이 할 거면 본계정 쓰는 게 낫지 않나? 높은 수준에서 하는 게 연습하는 데엔 더 좋잖아."
"높은 수준?"
제나가 픽 웃으며 특유의 비소가 아닌, 정말로 가소롭다는 듯한 순도 100% 비웃음을 만들어냈다.
"어우, 야… 그래. 나도 궁금하다. 도대체 니가 어느 정도일지."
실망할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드디어, 그 일부만 접해도 엄청난 벽을 느끼게 만들었던 제나의 진짜 실력을 확인할 생각에 그저 설렐 뿐.
최재훈이 그토록 기다리던 강의가 시작됐다.
"일단, 너는 네가 어떤 플레이 스타일에 가장 적합한 지 알아?"
"나? 난 일단 미드 라이너고- 주로, 무난한 메이지 챔피언들 다루는데-"
"아니."
"응?"
"니 적성은 그게 아냐."
"나는 검보다 활이 어울려?"
"뭐라는 거야."
"그런데 미드빵 한 번 했다고 그런 걸 알 수 있어? 대박이네. 그래서. 너가 보기엔 내 적성이 뭔데? 어디 포지션으로 가야할까?"
"포지션 문제가 아니야."
"응?"
제나가 '캐릭터 목록'으로 간 뒤.
검색창에 특정 단어를 기입했다.
그러자 특정 성향을 가진 캐릭터만이 남는다.
제나는 거기에서 몇 가지 캐릭터들을 첨삭한 뒤, 최재훈에게 말했다.
"암살자. 이게 니 적성이야. 특히, 이거. 텔론."
최재훈이 "쓰…"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살자? 나 암살자는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데…."
"쯧쯧쯧. 그러니까 지금 니가 그 모양이지."
"허허, 아니 그리고. 그. 암살자. 지금 니가 추천한 저 챔피언들 대부분은 지금 메타에 안 맞지 않나?"
메타.
현 시점 가장 효과적인 전략 전술을 일컫는 말인 Most Effective Tactic Available의 약어다.
최재훈이 알기로 현재 레오레의 메타는-
'침대' 메타였다.
침대 축구처럼.
게임의 양상이 일단 들어 누워서 최대한 시간을 끌고, 버티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처럼, 최대한 게임을 길게 끌며 초반을 버티고.
중후반에 커다란 한 방을 꾀하는 게 현재 메타였다.
그리고 그러한 메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게 바로 미드 라이너였다.
제나가 조사한 바.
이 시기의 레오레는 정글러와 서포터의 암흑기였다.
게임 내에서 둘에게 분배되는 자원이 아주 적었고, 그렇기에 다른 포지션들과의 전력 차이가 극심했다.
그런 상황에서 둘이 게임에 기여하는 가장 큰 방법은 완벽한 희생이었다.
이 시기의 정글과 서포터는, 팀원들의 협력자가 아닌 도구였다.
게임은 사실상 3:3 구도.
그리고 정글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미드라이너는 그 세 명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팀 내 최중요 전력이었다.
비유하자면.
현재 메타에서의 게임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성벽 뒤에 숨은 두 군대의 공성전이었으며.
그러한 공성전에서 미드는 병기 역할을 맡았다.
어느 쪽 병기가 더욱 빨리 완성되느냐!
그리하여 성벽을 조금이라도 더욱 빨리 함락시키느냐! 가, 승부의 관건이었다.
레오레에서 그러한 병기 역할에 가장 적합한 게 바로 메이지 캐릭터였다.
반대로, 가장 부적합한 것은 암살자 캐릭터였고.
메이지, 마법사는 성장하면 성벽에 운석을 떨어트려 한 번에 함락시킬 수 있다.
그런데 암살자는?
암살자에겐 성벽을 무너트릴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최재훈으로선 메이지에서 암살자로 전향하라는 제나의 제안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의문에 제나가 답했다.
"예를 들어 보자."
"응?"
"다이아몬드 티어가 다섯인 팀이랑, 챌린저 티어가 다섯인 팀이 게임을 한다고 쳐. 다이아몬드 애들은 메타에 딱 맞는 캐릭터들을 골랐지만, 챌린저 애들은 메타에 안 맞는 캐릭터들을 골랐어. 상성에서부터 완전히 지고 들어가는 거지. 자, 그러면 두 팀 중에 누가 이길까?"
"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지만 그 답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간단했다.
"어, 그 뭐냐. 어떻게 되긴. 당연히 챌린저들이 이기지."
"잘 아네."
"뭐?"
"상성? 메타? 전략? 결국엔 수준이 어느 정도는 비슷해야 통하는 거야."
제나가 아는 최재훈의 암살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점일지라도, 적의 마법사가 성장하기 전에 성벽을 무너트리는 일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마법사가 성장하기 전에 성벽을 타고 넘어가, 마법사의 멱을 따고.
다른 중요인물을 암살하여 성 내부를 초토화시키는 일은 가능했다.
성벽을 무너트리지 않고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살던 시대의, 아주 높고 발 디딜 빈틈없이 견고한 성벽이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이 시대의, 낮고 허술한 성벽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지금 제나와 이 시대의 플레이어 사이엔, 현대와 고대만큼의 격차가 존재했다.
"하…."
최재훈은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메타를 초월한다.
최재훈이 알기로 그 어떤 플레이어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였다.
이는 솔랭 1위 따위보다, 국내 리그 우승 따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경지였다.
그런데 제나는 말한다.
지금부터 자신을 메타를 초월하는 플레이어로 만들어 주겠다고.
"슬슬, 내 머리로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힘들어진다. 내 상상력이 못 따라가."
"그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더 입 털어 봐야 뭐하냐."
최재훈이 어딘가 지친 기색으로 말하자 제나가 도발적으로 미소 지으며 턱짓했다.
그녀가 자리를 비켜주자, 최재훈이 의자를 끌고 와 컴퓨터 자리를 차지했다.
둘의 거리가 서로의 의자 팔걸이가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무의식적으로 눈을 마주쳤다.
최재훈이 입을 열었다.
"야."
"뭐."
"갑자기 든 생각인데."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면서 제나는 괜스레 긴장이 되었다.
"…아, 아니다."
그런데,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피하는 최재훈.
"아, 뭔데 임마."
제나가 촉구하자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 심상치 않은 태도에, 제나는 더욱 긴장하며.
"…뭐가?"
기대하며 입을 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 영어로 뭐야?"
"…."
스읍, 후.
스읍, 후.
제나가 눈을 감고 몇 차례 심호흡을 거듭한 뒤에야, 다시 눈을 뜨고 말했다.
"말했다시피. 앞으로 나랑 연습할 땐 부계정만 사용할 거고. 방송할 땐 본계정만 사용할 거야. 알겠어?"
"백문이-"
"……………."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부계정으로 플레이할 때는 암살자만 연습하게 될 건데. 본계정을 할 때는, 하던 대로 계속 메이지 챔피언만 플레이 해."
"어…? 왜?"
"자, 생각해 보자. 어느 날 초신성 같이 등장한 정체불명의 플레이어가 배치고사에서부터 파격적인 플레이와 차원이 다른 실력으로 엄청난 승률 기록하면서 유명 네임드들이랑 프로들 다 발라 버리고, 1위를 찍는 거야. 사람들은 그 플레이어의 정체가 궁금해서 아주 미쳐 돌아버리겠지. 그때!"
제나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을 이었다.
"챌린저에서 빌빌대고 있던 버러지인 너가 중대 발표가 있다면서 어그로 끈 다음, 짜잔~ 사실 모두가 궁금해 하던 정체불명의 플레이어는 바로 저였습니다~ 밝히는 거지. 방송인이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알리려면,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쯤은 있어야 돼. 근데 너 정도쯤 되는 애가 그런 사건이, 고작 '시즌 종료 기간도 아닌데 1위 찍는 거'면, 너무 시시하지. 안 그래?"
최재훈의 머리에서 나왔으며, 실제로도 효과가 기가 막혔던 '힘숨찐 쇼'.
제나는 최재훈에게서-
"아아니!!!! 그런 완벽한 연출을!!!!!!! 역시 제나 웨스트!!!!!!!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너밖에 없다!!!!!"
-그런 열렬한 호응이 나올 거라 기대했다.
'후후….'
"어때?"
그런 기대와 자신감이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제나가 물었다.
"음…."
그런데 정작 최재훈의 반응이 미묘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 그런 거 좋아했구나. 그, 뭐라 하더라. 그래. 힘숨찐."
최재훈이 알기로, 음습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장르로-김경식의 취향이기도 했다.
이 시기, 아직 힘숨찐의 묘미를 몰랐던 최재훈.
그는 모든 걸 이해해 줄 수 있다는 듯 자애로운 눈빛으로 제나를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짓곤 말했다.
"너도 경식이 과였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
제나가 넋이 나가선 한참 동안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침대로 가서 베개를 갖고 오더니-
"악!!! 악!!! 악!!!"
악!
악!
악!
악!
악!
악!
제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베개를 내려놓았다.
"큐 돌려."
나머지 분노를 그를 갈구는- 아니, 가르치는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 비축해 두자는 판단을 내리고.
최재훈은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심대한 불안감을 느꼈고.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이런 썅! 내가 몇 번이나 처 말했어! 라인 무작정 밀고 당기고 하지 말고, 니 다음 행동에 따라서 능동적으로 조절하라 했지!?"
"헤이, 헤이! 뭐야! 살아 있네? 그런데 왜, 엿 같은 정글 위치 알 수 있는 단서 다 나왔는데도 멍하니 쳐 있는 거지?"
"아니 썅! 방금 그걸 도대체 왜 못 피해!"
"니 염병할 반응속도는 너무 느려서, 교통사고로 뒤져도 자연사 처리되겠다!"
"갑자기 궁금해지네. 옆에서 강도가 니 목에 총을 겨누고 있어도 그따구로 게임할까? 내가 존나 만만한 거야? 아니면 너무 용감해서 병신 같은 총 든 강도가 하나도 안 무서운 거야?"
"어헝헝헝."
최재훈은 스스로 자초한 바에 따라 지옥에 떨어졌다.
지옥에 떨어져-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었다.
그 날 이후.
최재훈은 시간이 날 때마다 제나에게 지옥 훈련을 받았고.
그럴 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었다.
시시각각으로 시야가 달라졌다.
높아졌다.
어제 바로 눈앞에 보였던 게, 내일 다시 보면 눈 아래에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따라 잡지 못할 높이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던 플레이어를, 어느새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다음 날 다시 보면, 그 플레이어는 자신의 아래에 있었다.
혼자였을 시절엔 감히 상상조차 못했을, 전능감이 느껴질 정도의 경이로운 성장 속도.
최재훈은 매일매일이 가져다 주는 충실한 향상심에 취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제목 : 와 슈퍼세이브남 얘 방송 시작했구나
내용 : ㄷㄷ 지금 알았네
ㄴ : 방송 시작한지 얼마 안됐는데도 ㅈㄴ 잘나가더라
ㄴ : 근데 그럴만해 ㅇㅇ;
ㄴ : 존나 ㅈ같이 생겼고 게임도 존나 ㅈ같이하더라
ㄴ : 업계 극찬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ㄴ : 저 와꾸에, 저 나이에, 챌린저? 심지어 공부도 잘해? 하 ㅅㅂ 갑자기 인생 존나 ㅈ같네
ㄴ : 그래도 쟤 흙수저잖아 ㅋ
ㄴ : 흙수저면 뭐해 ㅅㅂ 유전자가 금수전데
ㄴ : 나 금수전데 솔직히 쟤랑 인생 바꿀 수 있으면 바꾸고싶다
ㄴ : 나는 흙수저에 금수 백수인데 나랑 바꿀놈은 없냐?
ㄴ : 한강수는 항상 당신을 기다립니다
ㄴ : 어이, 가 볼까? 이세계로?
ㄴ : 애니 보니까 그쪽에선 우리 같은 애들이 잘나가더라
ㄴ : 거기 지금 일본인 과포화 상태라 동양인 더이상 안받아준답니다
ㄴ : ^^ㅣ발 또 쪽바리새끼들이야!?
제목 : 와 ㅋㅋ 최재훈 미모 실화냐?
내용 : [사진] 요즘 관리받는지 매일 최고점 갱신하네 진짜 미쳤다 ㅠㅠ
ㄴ : 쓰니야 얘 누구야?
ㄴ : [링크] 여기서 방송하는 앤데 한 번 봐바! ㄹㅇ 개귀여워
ㄴ : 오 얘 그때 그 슈퍼세이브남이구나 ㄷㄷ 인상 확 달라졌네
ㄴ : 그러게 ㄷㄷ 왤케 잘생겨졌어
ㄴ : 무슨 게임 해?
ㄴ : 레오레 하던데?
ㄴ : 아 ㅠ 아쉽네 나 레오레는 모르는데
ㄴ : 가끔 게임 말고 다른 것도 하더라
ㄴ : 어제 저녁에 가족들 밥 차려주는 거 여동생이랑 같이 찍던데 개귀여움 ㅋㅋ
ㄴ : ㄴ2222 진짜 ㅋㅋ 덩치 이따만해서 곰처럼 앉아 있는데 동네 할머니들처럼 멸치 손질하는 거 보고 귀여워서 미칠뻔
ㄴ : ㄴ3333 심지어 요리 잘해서 개웃김 ㅋㅋㅋ
ㄴ : 그니까 ㅋㅋ 반전매력 미쳤어
ㄴ : 부모님 바빠서 집안일 자기가 도맡아서 한다는데 ㅠㅠ 진짜 내 아들이었으면
그렇게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의 방송 역시- 게임 실력만큼은 아니지만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현실적이면서도 실로 이례적인 성장 속도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나의 경우엔-
제목 : 야 ㅋㅋ 니들 얘 누군지 암?
내용 : [내용] 방송하는 애라던데
ㄴ : 와 ㄷㄷ 와꾸 실화냐
ㄴ : 얘 걔잖아 삼피
ㄴ : 삼피?
ㄴ : ㅇㅇㅇ 제나 웨스트 방송 닉네임 삼피 최근에 방송 시작했음
ㄴ : ? 최근에 방송 시작했다고? 뭔 개솔임
ㄴ : 넌 또 뭔 개솔임
ㄴ : 얘 지금 시청자 5천이 넘는데 최근에 시작했다고?
ㄴ : 쟤 방송하는 거 보셈 ㅋㅋ 5천명도 적은 거임
ㄴ : ㄹㅇ; 분위기 쌉 오지는 갓양인 미녀가 집중하고 게임하는데 ㄷㄷ
ㄴ : 심지어 존나잘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 : 얘 배치부터 시작해서 지금 마스터까지 오면서 딱 두 판 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심지어 그것도 아군에 트롤 있어서 ㅋㅋ
ㄴ : 네~ 알겠습니다~
ㄴ : 저거 진짜임 ㅋㅋ (사진)
ㄴ : ?????? 저게 쟤 전적이라고?
ㄴ : 아니 시발 저게 말이됨?
ㄴ : 하는 거 직접 보면 더 말 안됨 ㅇㅇ
ㄴ : 아니 먼 여자가 게임을 저렇게 잘하누
ㄴ : 성별문제가 아님걍 ㅋㅋ 남자 중에서도 저만큼 하는 애 없음
ㄴ : ㅄ ㅋㅋ 겨우 마스터가지고 난리 났누
ㄴ : 니그럼 배치에서 마스터까지 2패로 올라갈 수 있는 애 있으면 대보셈
ㄴ : 마크누브랑 아일락도 저 승률은 안나올걸?
ㄴ : 얘 그냥 게임하는 거 보면 혼자 다른게임 하더라
ㄴ : ㄹㅇ; 첨보는 방식의 플레이라 뭐하는 건가 싶은데 암튼 이득봄
ㄴ : 아 ㅅㅂ 쟤 빨리 네임드들이랑 뜨는 거 보고싶다
제목 : 와 삼피 얘 방송 뭐냐...
내용 : 오늘 하루만 후원 500만원 넘게 받은 것 같은데 실화고...?
난 한달 꼬박꼬박 일해야 300버는데 현탐 오지네
ㄴ : 지금 이 순간 아프리카 아이들은 굶고 있습니다
ㄴ 글쓴이 : 어쩌라고 ^^ㅣ발아
ㄴ : 나 그거 옛날부터 후원했는데 내가 후원하는 애 커서 바다로 나갔다고 며칠전에 이메일옴
ㄴ : 와 ㄷㄷ 좋은일 하셨네
ㄴ : 해적 됐대
ㄴ : 잉
ㄴ : 원피스 보니까 해적? 이 착한 애들이던데? ㅠㅠㅠ 해군이 나쁜 애들이고 ㅠ
ㄴ : ㄹㅇㅋㅋ
ㄴ : 루피 이제 검은 수염에 검은 피부까지 상대해야 되네
ㄴ : SWORD IS SKIN ㄷㄷㄷ
ㄴ : 나쁜새끼들 숨쉬듯이 인종차별 나오는 거 봐 ㄷㄷ
ㄴ : 백인이 해야 인종 차별이지 우리가 하는 건 그냥 가벼운 농담이야 ㅋㅋ
ㄴ : ㄹㅇ ㅋㅋ 우린 흑인 노예로도 안 쓰고 유태인들 학살도 안 했는데 ㅋ
ㄴ : 와... 이 새끼들 산소 낭비하는 와중에 삼피는 또 100만원 후원 터졌누
ㄴ : 얘 방송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외국 애들도 보더라
워낙 비현실적인 존재인 만큼 제나의 방송 성장 속도는, 비현실적인 수준으로 이례적이었다.
인터넷 방송 역사상 전례가 없던 스타성.
그렇기에, 전례가 없던 성장 속도.
그런 마당에 방치되어 있는 그녀의 미튜브는 숱한 편집자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메일 제목 : 안녕하세요 제나 웨스트님
내용 : 다름이 아니라 혹시 미튜브 채널 관리에 관심이 없으시다면-
평범하게 권하는 편집자에서부터.
메일 제목 : 무급으로 개처럼 일하면서 책임지고 채널 키워 놓겠습니다 내용 :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등, 유명 미튜버들과 작업한 경력 보유중입니다.
제나 님께서 원하신다면 만남 주선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일단 마음부터 붙잡아 보려는 편집자까지.
하루에도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번의 러브콜이 쇄도했다.
하지만 정작 기다리던 '그녀'의 연락은 없었다.
이 세계에서는, 이전 세계에서처럼 회사를 차려서 성공시킬 정도의 원대한 야망은 없는 것 같지만.
그 대단하신 능력을 흥미 본위로 낭비하는 괴짜 기질은 여전하신지, 어렵지 않게 활동 정황을 포착할 수 있었다.
여전히 이쪽 방면으로 편집자 활동 중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철저하게 익명으로 활동하기에 먼저 연락을 취할 수단은 없었으나.
제나가 아는 그녀는, 편집자로서 자신을 놓칠 위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금방'이라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이 인간은.'
예상한 기한이 훨씬 지났는데도, 제나의 메일함에 '그녀'라 특정할 수 있는 메일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미튜브 성장이 너무 지체된다.
결국 제나는 마지못해 다른 편집자를 고용하는 것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제나가 차선책으로써 그나마 쓸만한 편집자들을 찾아 나서려던 그때.
최재훈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최재훈 : 야
최재훈 : 이거 그때 너가 말했던 그 편집자 아님?
그가 자신에게 온 메일 하나를 제나에게 전달했다.
메일을 확인한 제나가 미소 지었다.
메일을 확인 한 바,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그녀'가 확실했다.
'근데 내가 아니라 최재훈을 선택했다고?'
그녀는 그 점이 자존심보다는 다른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
"뭐야, 뭐 문제 있어? 표정이 왜 그래?"
"아니… 뭔가 이상해서."
"응? 뭐가?"
'그녀'와의 미팅 약속이 잡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미팅의 장소로 자신의 집을 지정했다.
공사 구별이 진절머리 날 만큼 철저해서-
'지 집에 최재훈도 함부로 안 들여 보내던 인간이었는데.'
더군다나, 그런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아도 이상한 일이라 더욱 이상했다.
그 격식 드럽게 차리던 인간이, 처음 만나는 방송인에게 '나 만나고 싶으면 니가 찾아 와라~'는 식으로 약속 장소를 자신의 집으로 지정하다니.
제나는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어 최재훈에게 물었다.
'그녀'가 도대체, 약속 장소를 지네 집으로 지정한 건지.
"집 밖으로 나가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는데?"
"뭔…."
제나는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똑똑
지금 최재훈이 문을 두드린 집의 주인이, 정말로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인지.
"저기, 편집자 님~ 접니다~ 오늘 뵙기로 한 최재훈이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머지않아 최재훈이 다시 한번 노크하려던 그때-
-♪
뒤늦게 도어락이 작동음이 들리면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일단, 맞다.
생긴 꼬라지를 보아 하니, 저 미모의 집주인은 분명 '그녀', 이린이 맞았다.
그런데, 제나가 알고 있는 '이린'은 아니었다.
제나가 아는 이린은 자신으로 하여금-
'거, 격식이랑 깔끔 안 떨면 뒤지기라도 하나?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린은?
며칠을 안 감은 건지, 이리 저리 뻗쳐 있는 상태로 떡진 산발머리.
목 잔뜩 늘어난 티셔츠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얼룩.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이린의 이미지와 완전히 역전되는 몰골로.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이린의 이미지와 완전히 역전되는 행동을 했다.
덥썩!
그녀가 대뜸 최재훈의 양손을 감싸 쥐더니, 칠칠맞으면서도 음침한 분위기로 말했다.
"우와아… 실물이다…."
그리곤-
"느에헿…."
헤벌쭉 웃는 모습에 제나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아니 시발, 누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