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 외전 역전의 제나 17
창구로 이동한 뒤 이마에 맺힌 땀을 팔뚝으로 닦았다.
러블리하우스 BGM을 재생시킨 뒤 뿌듯한 마음으로 편의점 내부를 둘러본다.
-따라다란단♪
"하… 거, 새끼… 누구 닮아서 그런지 훤칠하게 잘 생겼다."
오늘은 평소보다 특히 더 공을 들여 청소한 편의점 내부는 새집(Bird House아님ㅎ)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이사 가기 전 깨끗하게 비운 집을 보는 것 같아서.
'아… 이사 하니까 또….'
우리 가족 형편이 어려워져 기존의 집을 뒤로하고, 지금의 집으로 이사 왔던 그날이 떠올랐다.
주변 인프라가 독도와 자웅을 겨룬다든가, .
이전 집에 비하면 너무 낡고 허름해서 재은이 혼자서 3달 동안 산 집 같다든가.
이사 첫 날에 가장 먼저 만난 네이버후드가 Mr.WheelBug씨 일가라든가.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추억이 담긴 정 든 집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강제적으로 떠나야만 했던 게 무엇보다 슬프고 서러웠다.
처음 잠들고 깨어난 그 날, 워메 시방 여기는 워디냐면서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가 현자 타임을 느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 날, 반드시 다음 이사로 이 끔찍한 이사의 기억을 지워버리겠다 다짐했다.
'이것도 나름대로 이사라 볼 수 있나….'
오늘을 마지막으로 나는 지난 1년 가까이 정들었던 이 편의점을 떠난다.
첫 사회진출, 첫 알바라 잔뜩 군기가 잡혀 내 가게를 관리한다는 심경으로 열과 성을 다했다.
그래서인지 날 유독 이뻐해 주셨던 사장님과 동료 분들은 가, 족같지 않고 가족 같았다.
그래서인지 지금 내 심경은 이사를 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섭섭하고.
떨리고.
기대된다.
섭섭하고, 착잡하고, 걱정됐던 그때의 이사와 비교하면 상당히 성공적인 이사라 볼 수 있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방송을 시작한다.
집안 형편 때문에 급히 내몰린 감이 없잖아 있지만, 내 꿈은 애초부터 게임으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게임으로 성공'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프로게이머라 단순히 그걸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지금에 생각해 보니, 방송인이라는 길도 있었구나 싶다.
따지고 보면 '방송인 되기'가 '프로게이머 되기'보다 퀘스트 난이도가 낮은데, 왜 진즉에 못 떠올렸던 걸까.
'방송인이 되기는 쉬워도, 방송인으로 성공하는 건 프로게이머로 성공하는 것만큼 힘드니까?'
프로게이머가 되는 것과, 방송인으로 성공하는 것.
어느 쪽이 더 힘든 일인지는 몰라도, 후자가 더 복잡한 일인 건 확실했다.
그만큼 불분명했기에, 방송이라는 선택지를 고려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싶다.
한시라도 빨리, 분명하게 지금의 암담한 현실을 바꾸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1년을 넘게 프로게이머만을 보고 달려와 놓고, 이제 와서 방송인을 노리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그렇게 악착 같이 달려온 프로게이머의 길보다.
며칠 전 의도치 않게 들어선 방송인의 길이, 더욱 성공이라는 목표에 가깝다 느낀 것이다.
"진짜, 사람 인생이라는 게 참… 하."
다시 생각해 봐도, 일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간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척척 잘 풀린 걸 보면 이게 바로 팔자나 행운이라는 거겠지.
그리고 가장 큰 행운이라고 하면 당연히 그 김성민 방송 타서 이름 알린-
"…아니지."
제나 웨스트.
걔를 만난 게, 가장 큰 행운일 거다.
걔가 아니었으면 김민성 방송을 타서 이름을 알렸어도 방송을 시작할 생각을 못 했을 테니까.
설령 방송을 시작한다 했더라도, 상황이 지금처럼 원만하게 돌아가진 않았을 거다.
게다가-
"…."
주머니에 들어 있던 5만 원 지폐 두 장을 꺼내서 바라봤다.
오늘도 제나에게서 받아 버린 10만 원.
거절했지만 억지로 쥐어 주길래 마지못해 받은 건데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내가 걔 밑에서 도움을 주긴커녕, 도움을 받고 있는 실정인데 이런 거금을 받다니
그리고, 이 돈이 없으면 방송에 도전할 형편이 안 된다니.
"하…."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는 점- 아니지, 변명 거리 삼을 수 있는 점은.
제나는 당장 이 돈이 없어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돈을.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을 때까지 어느 정도 여유가 있다.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제나에게 빚을 하나 지워 놓긴 했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슈퍼 세이브'.
남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날 나는 제 한 몸 바쳐 제나의 인생을 구했다.
내가 한 일이 그런 거창한 일인가 싶어 낯간지럽지만, 그런 거창한 일이 맞단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
그러니, 제나의 여윳돈을 빌릴 자격이 있을지도 모른다.
제나의 호의를 누릴 자격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걔도 은혜 갚으려고 이러는 거라 했으니까….'
내가 걔 인생을 구해준 대가로, 걔도 내 인생을 구해준다.
'이러면 딱 등가교환이구만, 음.'
물론.
그렇다 해서 제나가 내게 해주는 것들을 당연하다 여길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각하니 그나마 마음의 짐이 가벼워진다.
"하…."
그날 내가 행동이 얼마나 좋은 결과를, 만남을 만들었는가 깨닫고 보람을 느낀다.
'역시 사람은 착하고 볼 일이라니까, 최재훈. 장하다 이 새끼. 니가 이렇게 멋진 새끼니까, 응? 유유상종이라고. 알아서 멋진 사람들이 꼬이잖아.'
갱식이도 그렇고, 신소하도 그렇고.
무엇보다 제나.
새삼 느끼는데, 참 대단한 녀석이긴 하다.
무슨 할리우드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비쥬얼에.
그 나이답지 않은 성격과 분위기.
그리고- 오늘 보여준 그-
"아니, 그게 진짜 말이 되나?"
다시 떠올려 봐도 말도 안 되는 레오레 실력.
처음엔 우연인가 싶었다.
우연이라 믿고 싶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참패였기에.
하지만 아니었다.
플레이에 분명 근거와 의도가 담겨 있었다.
난 결과가 아닌 그 두 가지에 휘둘려 버린 거다.
지금까지 꽤 많은 프로를 만나서 상대해 봤지만, 이 정도로 엄청난 격차를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 말은 즉-
제나가 그 프로들보다.
지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1군 프로들,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들보다 높은 수준에 있다는 게 된다.
그리고 내가 느낀 바, 그 높은 수준은 약간 높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차원이 다른 수준인데-
"하…."
역시 믿기 힘들다.
나랑 같은 나이에 있는 애가 그 정도라니.
'게다가 걔는… 여자잖아?'
내가 딱히 여성 게이머에게 편견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여성 게이머 중 최상위 프로급 실력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워낙 드물어서 역시 특별하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럴 거다.
어지간한 최상위급 프로 선수들 발라 먹는 실력의 여성 게이머라니.
그런 게 정말로 존재한다면-
단연코 E스포츠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힐 슈퍼스타가 될 자질을 타고난 거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런 애한테 내일부터 강의를 받는 거고….'
문득 그때 걔 모습이 떠오른다.
마치-
입 닥치고 따라오기나 해.
그러면 알아서 잘 될 거니까.
-라고, 말하는 듯한 그 표정.
"크…."
-짤랑~
"어이, 슈퍼세이브남~"
그때 한률이 형이 도착했다.
"응, 표정이 왜 그래?"
"네?"
"아주 그냥 좋아 뒤지려 하네. 뭔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아, 제가요?"
"그래 임마."
"곧 한률이 형 만날 거라 생각하니까 그랬나 보네."
"지~랄~"
피식 웃으며 주먹을 날리는 시늉을 하는 한률이 형.
"니 임마 오늘 부로 일 그만 두잖아. 그럼 새꺄, 이제 나랑 안 봐서 좋아 그 표정 한 거 아니야. 이 정 없는 새끼."
"아니~ 뭐 말을 그렇게 하세요.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 만나면 되죠."
"아 꺼져~ 사내새끼가 징그럽게 무슨. 너 시발, 앞으로 별 일 없는데 연락하면 뒤질 줄 알아."
"이게 한국인의 정?"
그렇게 한률이 형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와중 누군가가 다가와 카운터에 물건을 올려놨다.
"아 예~ 지금 결제해 드리겠습니다~"
바코드를 찍으려는데-
"저기요."
"넵?"
"그, 덕성고 최재훈 학생 맞죠?"
"네?"
"맞네~! 와, 대박. 실물이 더 잘생기셨다~"
손님이 내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아는 척을 해 왔다.
처음 이런 상황에 직면했을 땐 엑, 윽, 익 거리면서 사지를 달달 떨었는데.
"엑, 윽-"
지난 며칠 동안 거듭 겪다 보니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졌다.
'며칠 만에 유명해지고, 그 유명세에 익숙해지다니. 이게… 월클…?'
두렵다.
최재훈.
너의 가능성이.
도대체 무슨 재능을 개화시켜 버린 거냐?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노벨이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싶다.
(겸손의 최재훈 : 깝죽거리지 마라, 항상 겸손해라.)
머릿속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오긴 하는데-
"저 미튜브 채널 구독했거든요? 근데 그 뒤로 방송도 안 하고 영상도 안 올리시더라던데. 이제 방송은 안 하는 거예요?"
어쩌겠는가.
지난 며칠 동안 최재훈 학생 좋아 죽겠다는 분들께 이런 소릴 몇 번이고 들었는데.
헛바람이, 자신감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다.
세상이 나 최재훈을 원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내일부터 한 번 해 보려고 생각 중이에요. 워낙 그, 쏠쏠해 가지고."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그리자 까르륵 웃으며 박수를 치는 손님.
"와~~~ 잘 생각하셨어요. 방송 엄청 잘 되실 거예요. 응원할게요!"
그렇게 손님이라는 이름의 팬 분은 다른 손님이 올 때까지 신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뭐 먹고 싶은 거 있냐고 물어서 괜찮다고 답했더니 아 넣어두라며 고급 초콜릿 따위를 결제해서 일방적으로 건네주곤 그제야 편의점을 나섰다.
그 일련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한률이 형이 중얼거렸다.
"…같다…."
"네?"
"시…발! 방금 그 사람 완전 내 스타일이었는데! 근데 시발 나한테는 눈길 한 번 안 주고, 너한테… 이게 시발 말이나 되냐?"
어디선가 본 장면인데.
"경식이니?"
"이 새끼, 사내새끼가 돼서 면상에 비누 말고 다른 거나 쳐 바르고 다니고 말이야. 어!?"
"형님도 바르고 다니시잖아요. 그리고 평소에 저 보고 관리 좀 하라면서요."
"우리 상남자 재훈이가 이렇게 꼴보기 싫은 면상이 될 줄 알았겠냐!?"
"게임 뭐 같이 한다는 거랑 같은 식으로 해석하면 되나요?"
"아~ 꺼져. 말 걸지 마. 이제 내가 알던 순수한 재훈이는 없는 거 잘 알았다."
"그건 찐따라는 소리로 받아들이면 되고."
"끝까지 말귀 하난 존나 잘 알아듣는구나… 이 미워할 수 없는 새끼…."
"헤헤."
손님 분이 줬던 초콜릿 포장을 뜯어서 하나는 입에 넣고, 하나는 옆으로 건넸다.
한률이 형이 그걸 받으며 카운터에 기대서 편의점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야 거, 존나게 깨끗하다. 새 가게 같네. 막판이라 힘 좀 준 거냐?"
"그렇죠 뭐."
"…아, 시발. 어떡하냐. 나 눈물 나올 것 같아."
"에이, 형님 왜 그러세요 저까지 슬프게."
"이제 시발 화장실 청소 내가 다 해야 하는 거잖아."
"에이, 형님 왜 그러세요 막판에 추하게."
"하… 그, 그, 알싸한 암모니아 냄새 떠올리니까 벌써부터 너가 보고 싶어 가슴이 허하다. 포경수술 했을 때보다 더 허해."
"감동적이고 서정적인 표현으로 제 1년 편의점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 니가 진짜 가는구나. 여기서 깔쌈하게 맞담배 한 번 조져줘야 딱, 엔딩 그림이 나오는데. 담배 펴도 되냐?"
"사장님 껴서 범죄 스릴러로 장르 변경 되는 거 보고 싶으면 그러시던가."
퇴근 시간은 진즉에 지났는데도 한률이 형과 시덥잖은 얘기를 이어나갔다.
발이 선뜻 움직이질 않았다.
편의점을 나서는 순간 정말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
라는 느낌이라.
예감이 좋았다.
덕분에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쉬웠다.
그래서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 꼬라질 보니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것 같다.
프로 도전에 진전이 없었을 때 느꼈던 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불안감이 몸을 강하게 옥죄었다.
떨어지는 것엔 날개가 있다고 했던가.
처음으로 눈에 보일 만큼 커다란 가능성을 손에 넣었다.
그만큼 기뻤지만, 그만큼 불안했다.
이렇게 잘 풀렸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허무하게 망해 버리면 어쩌지.
일련의 사건으로 얻은 일시적인 인기를 너무 과신하는 건 아닐까.
최재훈.
네가 정말로 방송으로 성공할 만큼 매력적인 놈인가?
…
"YES."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최재훈.
각성 완료.
그렇게 초보자 사냥터를 졸업한 나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 찬란한 퓨처."
"장하다 김최재훈. 방송계를 니 손으로 멸망시켜 버리렴."
한률이 형의 작별 인사에 등을 보인 그대로 엄지를 들어 화답했다.
* * *
-
제나 : 니네집 컴 너무 똥컴이라 도무지 안 되겠더라
제나 : 진짜 프로게이머 한다는 애가 어떻게 그런 PC를 들고 설칠 생각을 하냐?
제나 : 게다가 컴맹?
제나 : 장난까냐?
최재훈 : 아니... 프로게이머가 게임만 잘하면 됐지...
최재훈 : 섭섭하네
제나 : 어쨌든
-
그런 내용의 문자가 오간 바.
오늘의 약속 장소는 Mr.WheelBug 씨와 최재은 양이 주거하는 호러블 하우스가 아닌 제나의 집이었다.
"재훈 학생~ 오랜만이에요~"
예전에 약속을 잡았다 여러 사정으로 불발되었던 최재훈과 제나 가족의 만남.
오늘이야 말로 기필코 만나고 말리라 다짐한 제나의 모친, 노라가 차를 이끌고 제나와 함께 최재훈을 마중 나왔다.
"재훈 학생, 저도 그 영상을 어쩌다 보게 됐는데, 어쩜… 너무 대견하세요… 이렇게 잘 자라 줘서 제가 다 고마울 정도예요… 가능하면 재훈 학생네 부모님께 제대로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아, 엄마 좀. 애 부담스러워 하잖아. 말 좀 그만 걸어요."
"어머머? 우리 공주님, 질투하는 거예요? 어쩜… 너무 사랑스럽다 둘이~"
"아, 좀…! 야, 이어폰 끼고 노래 튼 다음 눈 감아. 도착하면 알려줄게."
"허허."
천하의 제나 웨스트도 친구 앞에서 주책 떠는 엄마에겐 못 이기는 건가.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최재훈은 그녀가 허둥지둥 대는 아주 귀한 구경을 잔뜩 할 수 있었다.
"워메…."
최재훈이 집 앞에서 차를 타기 전에 담아두었던 전경이.
제나의 집에 도착하여 내린 지금, 눈앞에 펼쳐진 전경과 겹쳐졌다.
빈부격차라는 말이 떠오르는 극명한 대조.
제나의 집은 인근 지역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부촌에 위치해 있었다.
최재훈은 거적 데기를 걸치고 있어도 귀티가 흐를 모녀의 분위기 때문에 새삼 놀란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오히려 예상이 적중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겼다.
입구, 엘리베이터, 복도.
최재훈은 제나 모녀를 따라 일관되게 깔끔하고 세련되며 널찍한 공간들을 지나 그들의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여는 순간, 익숙하면서도 이국적인 요리 냄새가 물씬 풍겨와 후각을 자극했다.
문 여는 소리를 들었는지, 안쪽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정황상 주방에서 걸어오는 것 같았는데, 집이 얼마나 넓은지 한참이 걸려서야 모습을 나타냈다.
'워메….'
절로 그런 소리가 나오게 만든다.
제나와 같이 선명한 금발과 벽안을 가진 남성은 현재 앞치마 차림을 하고 있는데도 타이트한 남색 슈트가 절로 떠오르는 체격과, 안경을 쓰고 있지만 선글라스 역시 무난하게 소화할 것 같이 단정하면서도 쾌활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제나의 부친인 에단 웨스트였다.
'유전자 그냥 어이가 없네….'
최재훈은 이 가족의 일상이 외부에 유출된다면, 자괴감을 느끼고 한강에 다이브 하는 이들이 속출하지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이 됐다.
범국가적 수준의 관리가 필요한 가족이 아닐 수 없었다.
"오, 재훈 학생."
에단은 멀리서 최재훈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즉시 앞치마와 오븐 장갑을 벗어 던지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와 줘서 정말로 고마워요."
자신보다 눈높이가 약간 높은 남학생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선 호감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재훈 학생만 괜찮다면-"
그는 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셸 위 허그?"
최재훈은 '오… 개 부담스러워….'내심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저 반짝이는 눈을 보고 거절할 수가 없어 마지못해 고갤 끄덕였다.
그러자 산뜻한 향수 냄새가 몸에 배어 있는 그가 다가와 최재훈의 몸을 격하게 끌어안았다.
양팔로 등을 툭툭 두드리며,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훈 학생, 우리 제나 도와 준 일. 정말로 고맙습니다. 이제야 제대로 전하네요."
그때, 최재훈은 뒤쪽에서도 무언가를 느꼈다.
노라가 반대쪽에서 그를 껴안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재훈 학생. 제나야, 너도 어서."
"아…. 제발 좀…."
제나가 최재훈을 웨스트 샌드위치의 내용물로 만들어 버린 주책바가지 부모의 모습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야, 이거… 두 분을 보니 제나가 왜 그렇게… 어? 잘 자랐는지 알겠네요. 아주 그냥, 온 집안에 사랑이… 사랑으로 꽉 차서… 익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이내 그를 해방시켜 준 에단이 호탕하게 웃으며 최재훈의 팔을 두드렸다.
"하하하, 재훈 학생. 제나 말처럼 아주 위트 있고 유머러스하네요."
"내가 언제 그랬어. 웃기는 놈이라 그랬지."
"우리 공주님 왕자님 앞이라고 쑥스러워 하는 거 봐~ 어쩜…."
"하… 모르겠다 나는."
자포자기 기색의 제나.
그녀가 당장이라도 현기증을 일으키고 뒤집어질 것 같은 모습으로 먼저 집 안으로 터덜터덜 들어갔다.
"자, 자. 재훈 학생도 어서 들어와요. 점심은 먹었고요?"
"아. 아뇨. 아직 안 먹긴 했습니다. 아, 그. 말 편하게 놓으셔도 됩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어여 와서 식사 들게. 막 다 됐으니까. 아, 혹시 못 먹는 거라도 있나?"
최재훈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최재훈의 기준에선 자식의 친구에게 과하게 격식을 차리는 듯한 에단의 어조는 다소 어색했지만, 한국어 자체는 몹시 능숙했다.
아무래도 이 집에서 한국어가 아직 어색한 사람은, 어눌하게 극존칭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노라뿐인 것 같았다.
'이거, 여기서 넘어지면 최소 어디 부러지거나 사망 아닌가?'
최재훈은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대리석 바닥 위를 나아가 긴 복도, 넓은 거실을 거쳐 주방에 도착했다.
주방과 연결된 아일랜드 식탁 위에는 에단이 갓 만든 요리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아, 이 냄새였구만.'
한국식 가정식과 미국식 가정식을 적절하게 섞은 구성이었다.
거기에, 에단이 마지막으로 된장국을 갖다 주었다.
향을 보니 심지어, 일본식 된장이었다.
최재훈은 그 기묘한 조화가 너무나도 '제나네 집'스러워 실소를 터뜨렸다.
"응? 왜 그러나?"
"아, 아뇨. 그게. 그, 어-"
"아, 내 정신 좀 봐. 에단 웨스트. 아저씨라던가, 편한대로 부르게."
이전부터 느꼈지만, 최재훈은 제나의 부모를 도저히 아줌마나 아저씨라 부를 수가 없었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고, 그 호칭이 저 두 사람의 비쥬얼과 도저히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에.
"아, 그럼 에단 씨. 다른 게 아니라, 에단 씨가 그, 된장국을 들고 오시는데. 그게 심지어 일본 된장이라…."
"큭."
제나를 시작으로 그들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처럼 식사는 아주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웨스트 부부는 거듭 제나를 구해준 일에 대해 감사를 표하거나, 제나가 평소 밖에서 어떻게 다니는지 물어보곤 했는데.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최재훈 그였다.
처음 에단은 노라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음에도 최재훈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노라가 잔뜩 흥분해서 이야기를 전하긴 하는데, 와 닿지가 않았다.
노라가 그 특유의 어조로 엄~청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제나를 엄~청 멋지게 구했다는데.
그녀가 호들갑스럽게 과장을 한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최재훈의 스파링 영상을 접하게 되었고, 에단은 최재훈을 탐탁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자신의 딸이 이런 불량배 같은 녀석과 어울린다니.
하지만 이어서 그가 제나를 구하는 순간이 담긴 영상을 접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담긴 영상을 보았다.
지금에 이르러 에단과 노라, 웨스트 부부가 최재훈에게 가진 호감은 최대치에 가까웠다.
딸의 인생을 구해줬다.
그걸로도 모자라.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 한국에서의 생활에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정신적으로 고립되어 어두워졌었던 딸아이가, 그와 어울린 뒤로 커텐을 걷은 것처럼 밝아졌다.
용모단정, 품행방정, 성적우수 학생으로서 딸에게 좋은 영향만을 주는 또래 친구.
게다가 지금 이야기를 나눠본 바, 인성까지 된 아이 같았다.
하기사, 그렇지 않다면 영상에서 봤었던 그런 생활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보통 딸아이를 가진 부모라 하면, 또래 남자 아이와 어울리는 딸이 걱정될 수밖에 없다.
그 남자 아이가 경계되어 명백히 거리를 두길 원한다.
하지만 지금 웨스트 부모는 오히려, 남자 아이의 딸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길 바라고 있었다.
아주 그냥 냅다 진지한 관계가 되길 바랐다.
집안 환경은 좀 좋지 못하지만, 어떤가.
자식이 이렇게 번듯하게 자란 걸 보니 필시 훌륭한 부모일 테고.
자식의 떡잎을 보아 하니 어떻게든 다시 일어설 집안이었다.
성적을 보니 최소한 이름 있는 명문대에 진학할 것 같고.
조건과 배경 그 이상으로 매력적인 사람 됨됨이!
미래를 내다보아도, 딸에게 이 정도로 좋은 짝이 생길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즉.
웨스트 부부는 지금 김칫국을 마시는 걸 넘어서 손주 이름까지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재훈 학생. 그, 영상에서 언급됐던 그 성적이 정말인가?"
"아, 예 뭐…."
"와… 어쩜… 너무 대단하세요 재훈 학생. 그렇게 바쁘게 사시면서, 어떻게 그런 성적을…."
"아이, 뭐. 겨우 고2 첫 모의고사 성적인데요. 3학년 들어가는 순간 난리가 날 걸요."
"그러면 벌써부터 난리가 난 우리 제나는 뭐가 되나."
"아,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
"아하하!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 재훈 학생만 괜찮으면 우리 제나 공부 좀 봐 줄 수 있겠나? 재훈 학생 지금 아르바이트 하고 있었지? 그거 그만두고, 우리 제나 공부 봐 주는 거야. 그, 뭐라고 하지. 어, 그래. 과외. 재훈 학생 지금 사정에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기 힘들었을 텐데. 우리 제나 공부 봐 주면서, 재훈 학생 공부도 하고. 돈도 버는 거야. 어때?"
"어머, 어머. 그거 너무 좋은데요?"
"공부 장소는 딱히 걱정 안 해도 되네. 근처에 좋은 도서실을 하나 아는데. 아, 아니면 이 집 자네 가족 집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써도 돼. 시간이 늦으면 나나 집사람 퇴근할 시간이라 배웅해줄 수도 있으니 걱정 말고. 아! 너무 늦으면 자고 가도 되지. 남는 방이 몇 개 있거든."
"맞아요, 재훈 학생. 그렇게 해요~"
"…?"
제나는 이 두 사람이 갑자기 왜 이렇게 자신과 최재훈을 못 엮어서 안달인가 싶었으나-
'뭐, 나쁘진 않긴 하네.'
안 그래도, 앞으로 최재훈과 적잖게 늦은 시간까지 같이 보낼 때 도대체 어떤 명분을 내세우며 부모님을 설득해야 하나 골머리를 썩고 있던 제나였다.
이 세계 부모들에게 있어 딸이 또래 남학생과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는 건 절대 금기였으니.
그런데 이렇게 부모님이 먼저 제안해 주시다니.
그녀로선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저런 명분이면 최재훈의 부모님도 쉽사리 납득이 가능할 것이며, 게다가-부모님께서 최재훈에게 별도로 과외비를 챙겨 준다니. 이는 그의 형편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 근데 이건 좀 아닌가?'
그렇게 표면상으론 마냥 좋았으나 중대한 문제가 하나 있다.
최재훈이 실상은 무언가를 가르치는 입장이 아닌, 무언가를 배우는 입장이 될 예정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비밀로 하고 과외의 대가라며 임금을 챙기면-사실상 부모님에게 사기를 치는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 그 제안은 정말로 감사하지만…."
역시 같은 생각을 한 쓰게 웃으며 사양했다.
"아니, 왜…?"
"그래요 재훈 학생. 부담스러워하시는 거면 괜찮아요."
"지금 바로 답 안 해 줘도 되니 천천히 생각해 보는 게 어떤가.
제나로선 현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여-
최재훈에게 돈을 챙겨 주진 못할지언정, 앞으로 그와 밤늦게까지 어울릴 명분을 만들어 두고 싶었다.
그런데 마땅한 방도가 떠올리지 않아, 속으로 끙끙 앓던 그때.
최재훈이 말을 이었다.
"사실, 안 그래도 제가 어제 부로 아르바이트를 그만 뒀거든요? 조금 여유가 생겨서. 그래서 한동안은 시간이 널널해 질 예정이에요."
"그러면 딱 아닌가?"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두 분께서 따로 부탁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겁니다. 딱히 그렇게 신경 써 주시지 않아도 제나만 원한다면 언제든지 공부를 도와줄 거니까요. 왜냐?"
최재훈이 따봉을 치켜들며-
"디스 이즈 프랜드쉽."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웨스트 부부는 너무나도 밝게 빛나는 그 모습에 정신을 못 차렸다.
그렇게, 남학생과 여학생은 앞으로 여학생 부모의 전적인 지지 하에 밤늦게까지 함께 활동할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전적인 지지와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 * *
식사를 끝마치고 제나는 최재훈을 동반하여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웰 플레이."
제나가 방금 전 최재훈의 대응을 언급하며 주먹을 내밀었다.
둘이 씨익 웃으며 주먹을 맞댔다.
"편하게 앉아."
제나가 턱짓하자, 최재훈은 무의식적으로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집 방 두 개를 합친 크기의 내부를 훑던 그의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뭐하냐?"
"아니, 의외라서."
"의외?"
제나의 시선이 최재훈의 시선을 쫓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방의 모서리에 위치한 수납장이었다.
작고 귀여운 인형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다음은 책상 벽의 코르크 게시판이었다.
게시판엔 콘서트 티켓으로 추정되는 종이들이 아이돌 사진과 함께 잔뜩 게시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방 곳곳에선 평소 제나의 이미지와 연결시키기 힘든, 그녀 또래 평범한 여학생들의 흔적이 묻어나왔다.
최재훈이 의미심장하게 제나를 쳐다봤다.
그 미묘하게 짜증을 유발하는 표정에, 제나는 그의 얼굴에 한바탕 베개를 폭격한 뒤.
화제를 전환시키려는 듯,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일단, 니 시간표부터 손볼 거야"
"시간표?"
"내가 미리 짜 왔으니까, 니는 머리에 입력하기만 해. 먼저, 기본적으로 월, 수, 금, 토, 일. 이렇게 주말을 제외하곤 격일로 방송을 할 거야. 방송 시간은, 시청자가 가장 많은 시간대 저격해서. 오후 6시에서부터 자정까지. 그리고, 방송하는 날은 난 나대로 내 방송 진행할 거고."
"오오?"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사실, 나도 너처럼 게임 쪽으로 나갈 거야."
최재훈은 놀라길 잠깐.
"그래, 그렇지. 너 정도면 당연히 그게 맞지. 어 잠깐. 아까 너희 부모님 이야기 하시는 거 들어보면, 아직 너희 부모님은 모르시는 것 같던데, 맞아?"
"뭐, 그렇지."
"아이고야, 괜찮겠어?"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이 프로게이머를 목표로 하고 싶다 했을 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길 마련이었다.
"부모님이 납득하실 수 있게, 실적을 쌓아야지."
"실적?"
"방송 규모 어느 정도 키우고, 게임에서도 어느 정도 실적 쌓으면. 허락해 주실 거야. 이런 쪽으론- 뭐라고 해야 하나. 개방적? 아, 그래. 관대하시거든."
제나의 기억 속에 있는 부모님은.
자신이 한때 아이돌이라는 허황된 꿈을 목표로 했을 때도, 진심으로 기꺼이 응원해 주셨던 분들이었다.
물론, 중학교 시절이라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학생으로서 중요한 시기인 고2인 현재, 갑작스럽게 프로게이머에 대한 의지를 내보이면 부모님 역시 당황하겠지.
평소 게임이라곤 별 관심 없던 자신이었으니.
고로, 확실한 실적을 내서 가능성을 보여줘야만 했다.
안심하고 믿어주실 수 있도록.
"말했다시피, 나는 너랑 같은 날 비슷한 시간대에 방송할 거야. 너한텐 안 된 일이지만, 존나게 빡쎈 라이벌이 생기는 거지."
"쓰으… 난 그거 좀 회의적인데. 다시 한번 재고해 보시는 게…?"
"아이고~ 이걸 어째. 우리 재훈이, 많이 무섭나 보네~?"
"아이고~ 그게 아니라 널 위해서 하는 말인데? 굳이? 위험하게? 사자가 지배하고 있는 초원을 가로질러 갈 필요가 있을까? 그냥 안전하게, 응? 유노왓암셍?"
"사자라고? 니가?"
사자.
수사자를 자처하는 최재훈의 모습에 제나가 끅끅 웃음을 참으며 박수를 쳤다.
드물게 진심으로 폭소를 터뜨린, 진심으로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다는 그 모습에 최재훈이 뚱하니 표정을 구겼다.
"후… 웃을 수 있는 것도 지금 뿐이다…."
"아, 그래 그래 임마. 무섭다! 우리 숫사자!"
"크르르르…."
"아무튼. 방송은 그런 식으로 진행하는 걸로 알고. 화, 목. 그러니까 방송 안 하는 날은, 나한테 레오레를 배우게 될 거야. 주말에는 시간 널널하니까, 둘 다 진행할 거고. 아, 미리 말해 두는데. 미리 마음의 준비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무슨 마음의 준비?"
"지금 하는 일에 전념할 준비. 그러니까, 공부 포기하고 자퇴할 준비."
"아, 오케이."
"…왓 더. 아니, 너무 쿨한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조만간 자퇴할 생각 하고 있었거든."
"…그래? 벌써?"
"벌써라니?"
"하, 네버 마인드."
제나는 잠깐 동안 뜸을 들인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겠어?"
"아쉽기야 하겠지. 그래도, 후회는 안 할 자신 있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결의가 느껴지는 태도에 제나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질러 버려!?"
"워, 워. 캄 다운 듀드."
"두려운가?"
"왓? 아무튼, 아직은 넣어 둬."
"왜? 듣자 하니, 방송은 많이 할수록 좋은 걸로 아는데. 어차피 자퇴할 거. 조금이라도 빨리 자퇴해서,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게 낫지 않나?"
"방송 쪽 돌아가는 이치가 그렇게 단순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거든. 지금 니 이미지가 뭔지는 알지?"
"슈퍼세이브남?"
"그래. 성실하고, 대견한 학생."
"헤헤, 쑥스럽당."
"그런데, 유명해지자마자 바로 알바 그만두고, 학교 그만두고 방송에 몰빵하면. 사람들이 널 어떻게 생각하겠어?"
"성실하고 대견한데 기회를 놓치지 않는 화끈함까지 가진 새끼?"
"그렇지."
"헤헤히히."
"그런데 몇몇 새끼는 널 이렇게 몰아갈 거야. 알고 보니 기회주의적인 새끼다, 역시 방송으로 한 탕 하려고 어그로 끈 다음 쇼한 거였다."
"오호 통재라, 세상이 증오와 혐오로 가득 차 있구나."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이거야."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방송을 시작하게 된 최재훈은, 이제 오롯이 공부와 게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둬 시간에 여유가 생긴 덕에, 더 이상 시간에 쫓기듯 생활하지 않아도 됐다.
남들과 같은 시간에 잠들고 깨어나, 학교에서 성실하게 수업에 임한다.
학교가 끝나면 하루는 방송을, 하루는 공부를.
그렇게 성실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결정적인 계기가 찾아온다.
"랭킹 1위를 찍거나, 프로 제의를 받아서. 방송이나, 프로에 전념할 기회가 찾아왔다는 걸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거지."
"그렇게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자퇴할 당위성을 얻는다?"
"그렇지."
최재훈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내가 만약 2개월 그 둘 중 하나도 성공 못하면. 시험에서 내가 방송을 시작한 이후 공부를 하나도 안 했다는 게 까발려질 텐데?"
"2개월이면 충분해."
"그래?"
"왜, 못 믿겠어?"
"난 못 믿지. 지금까지 못했으니까."
제나가 최재훈답지 않게 소극적인 발언에 당황하여 입을 열려던 찰나.
"그런데-"
최재훈이 제나를 가리켰다.
"넌?"
그리곤 씨익 웃었다.
"네가 하는 말이니까, 믿을 수 있어."
그러자, 제나 역시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런 제나를 바라보며 최재훈은 더 크게 웃고.
둘은 서로가 해바라기요 태양이라도 되는 양, 서로를 바라보며 차츰 미소를 키워나갔다.
"하. 짜식, 귀엽네."
"이쁘게 봐 주십쇼, 스승님."
"오냐.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알지? 방송인이면 당연히 방송이랑 같이 미튜브 관리 병행해야 하는 거."
"아, 뭐. 어느 정도는."
"그래서 묻는데, 너 혹시 영상 편집 할 줄 아냐?"
"…흑."
"그래, 그럼 그렇지."
"어떡하죠, 스승님."
"일단, 내가 편집을 할 줄 알긴 해."
"오오…! 역시 스승님…!"
"그런데 손 놓은 지 좀 돼 가지고, 하는 법을 까먹었네."
"오오…! 그러면 왜 말한 거지…!"
"팔방미인이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
"젠장, 띠껍지만 반박할 수가 없군. 아니, 그래서 뭐 어떻게 하게."
"어떻게 하긴, 편집자 구해야지."
"쓰으… 그거 영상 편집, 비싸지 않아?"
"돈 쪽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아니… 너무나도 설레는 말이긴 한데… 저도 염치라는 게 있어서."
"아니, 그게 아니라."
"응?"
제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딱 좋은 편집자 한 명 알아봐 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