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 외전 역전의 제나 16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했던 스포츠 영웅을 꼽으라면 반드시 거론될 마라도나와 펠레.
은퇴하고 수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지금, 둘은 축구의 영웅을 넘어서 신으로 칭송받는다.
활동 시기 당시, 마치 미래에서 오기라도 한 듯 주변 사람들보다 몇 단계는 높은 수준에 있어 세계를 충격과 공포에 빠트렸던 그들의 플레이는 수십 년이 지난 현재 미튜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들을 축구의 신이라는 전설로 접한 젊은 이들은 한 번쯤은 관심을 갖고 그 영상을 찾아 보았고.
그 중 적잖은 수는 공통되는 특정 반응을 보였다.
-이게 뭐임?
-수준 ㅈㄴ 낮은데?
-축구의신(웃음)
-축구의신도 병신처럼 무슨 욕인가요?
실망이 담긴 조롱.
축구의 신의 수준이 왜 이렇게 형편없냐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반응을 보인 이들은 응당 비추천과 욕설 세례를 받기 마련이다.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지 않은 무지한 발언이이기에.
그들이 있기에 지금의 축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을 기준으로 발전의 발전을 거듭해 온 게 지금의 축구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사실이기도 했다.
과거에서 발전의 발전을 거듭해 온 현대인의 관점에서 단적으로 보자면, 과거의 수준은 분명 현저하게 낮았다.
축구뿐만이 아니다.
야구, 농구, 격투기, 심지어는 장기와 바둑까지.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ㄴ뉴턴 현대에 태어났으면 다 아는 만유인력 발견했다고 좋아하는 ㅄ행 ㅋㅋㄴ예수 7일만에 부활? ㅋㅋ 어 ~ 나는 수술받으면서 심정지됐다가 20초만에 되살아났어~ㄴ솔직히 비틀즈 요즘에 활동했으면 렛잇비 강북 스타일한테 발렸다 ㅇㅈ? ㅋㅋㄴ알프레드 히치콕 영화에 색도 못 입히는 색맹 행 ㄷㄷ
두 선수들의 실력을 폄훼하는 댓글에 달린 극단적 예시의 반박들도, 아주 잘못되진 않은 것이다.
그러니 E스포츠와 레오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레오레 초창기를 대표하는 슈퍼 플레이가 있었다.
일명 '에이전트 킥'.
캐릭터 '이신'의 궁극기는 상대방을 걷어차 전방으로 크게 넉백시키는 특성을 가졌는데.
이러한 특성을 활용하여, 적진의 후방으로 파고 든 뒤 최후방의 핵심 공격수의 진영을 이탈케 하는 기술이었다.
당시 해설의 말을 빌리자면-
-아, 에이전트 섹!!! 적팀의 에이스를 걷어차서 아군들의 접시 위로 날려버렸습니다!
-그런 기술이었다.
기술의 주인인 '에이전트 섹'은 중요한 공식 경기에서 '에이전트 킥'을 선보임으로써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플레이는 전세계 팬들을 충격에 빠트렸고, 그렇게 '에이전트 킥'은 '에이전트 최'의 상징이 되어 그를 세계 최정상 선수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 년 후.
-아니 이걸 보고 감탄했던 거임? ㅋㅋ
-이거 ㅅㅂ 브론즈도 할 듯 ㅋㅋ
당시 전세계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던 에이전트 킥은 초보자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기술이 되었다.
제나는 그렇게 초보자가 과거의 세계 최정상 플레이어를 비웃던 시대에서, 그 무시당하던 플레이어가 세계 최정상으로 군림하는 시대로 회귀한 것이다.
마치 현대에서 구석기 시대로 돌아간 꼴.
최재훈은 물론이며, 모든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조잡하고 조악해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그걸 감안해도….'
최재훈의 수준은 제나의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지금 이 시대의 게임 수준을 감안해도 말이다.
원체 그에게 가진 기대가 큰 탓이었다.
그녀가 아는 원래 세계의, 그러니까 스포츠 분야에서 '남성'들이 상대적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세계의 최재훈.
그는 성별을 초월하는 재능의 소유자였으나, 동시에 치명적인 결점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바로, 현저하게 좁은 플레이의 폭.
최후에 이르러선 결국 그 한계를 이겨내고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으나.
거기에 이르기까지 항상 그의 발목을 무겁게 옭아매는 족쇄였다.
제나는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
결점이 보완된 완벽한 최재훈이 또 다른 성공을 써내려나가는 게 않을까 기대했다.
'뭐지? 성별이 게임 실력이랑 관계있다는 건 역시 헛소리였나?'
하지만.
방금 그의 플레이에서 느낀 재능은 시대상을 감안해도 지극히 평범했다.
그 어떤 번뜩임이나 충격도 느껴지지 않는다.
엄청난 노력으로 그 재능을 개화시킨다 해도-
이전의 최재훈을 넘어설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진 않았다.
단 한 번의 관전으로 모든 걸 내다볼 수는 없지만- 제나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확신이 담긴 제나의 비판에 최재훈은-
"…."
멍하니 눈을 꿈뻑였다.
"하."
그러더니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아이고 그랬쪄요~? 우리 제나 학상이 보기엔 제 플레이가 형편이 없었쪄요~?"
제나의 살벌한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녀를 아이 대하듯 마냥 귀엽게 여겼다.
그럴 수밖에.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서 보면 방금 최재훈의 플레이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편에 속했다.
국내 최상위 랭커 300명에게 부여되는 챌린저 티어를 가진 이들이 모인 게임이었다.
그런 게임을 휘어잡고, 다른 챌린저들의 찬사를 받지 않았던가.
그 중에는 심지어 유명한 선수는 아니지만 프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챌린저와 프로들도 극찬을 보내는 마당에, 홀로 삐딱하게 통렬한 비판을 해 온다?
제나가 세계 최정상 플레이어이자 군필 여고생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최재훈으로선, 그녀가 평소 하듯 삐딱하게 비꼬기부터 하는 거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런 최재훈의 반응을 이해한 제나 역시 실소를 터뜨렸다.
서로가 서로를 가소로워하며 귀엽다 여기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최재훈의 재능이 기존에 가졌던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친다 하더라도, 제나가 그와 함께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와 목표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의 뒤를 있는 힘껏 받쳐 주리라는 생각에 변함은 없다.
그런 제나의 보조가 온전히 빛을 발하려면, 최재훈이 그녀를 전적으로 믿고 등을 맡겨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는 제나가 자신의 등을 맡기엔 역부족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제나는-
서열정리의 필요성을 느꼈다.
등짝.
등짝을 보자.
못 미더워서 등을 맡길 수 없다?
힘으로 등짝을 탈취하면 그만이었다.
"그님티?"
최재훈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먼저 선공을 날렸다.
그래서 님 티어가?
게임계에선 점수가 곧 계급이며 신분이었다.
레오레 같은 경우엔 그 경향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기에, 보통 같으면 저 말 한마디로 서열이 정리되곤 했다.
그렇기에 제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하, 감당할 수 있겠어~?"
"천하의 제나 웨스트가 혀가 왜 이렇게 길어~ 쫄리면 뒈지시던가~"
"손목 날라갈 준비 다 되면, 전적 사이트에 PPP 검색해 봐."
레오필이 출시된 이후 레오레는 1위 게임 타이틀을 놓치게 되었으나, 그 뒤 대대적인 그래픽 리메이크를 비롯한 다양한 시도로 레오필 다음가는 게임의 자릴 사수했다.
더군다나, 레오레는 이미 한국인들에게 있어 민속놀이와도 같이 깊게 자리 잡아 버린 게임인 지라, 레오필 출시 이후로도 한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 레오레의 입지는 예전 만 못해도 분명 건재했다.
개발사는 이를 노리고 레오필과 레오레의 시즌 기간을 체계적으로 분리했다.
결과,
레오필과 레오레는 공존할 수 있었고.
한국 플레이어들은 기간에 따라 레오필 플레이어는 레오레 플레이어가 되기도 했고, 레오레 플레이어는 레오필 플레이어가 되기도 했다.
피지컬적인 면에선 이미 완성에 가까웠던 제나는 최재훈과 팀 활동을 하며 그에게 많은 부분을 배웠다.
그를 통해 결점을 보완한 제나는 더 이상 뇌없페가 아니었고, 프로를 통틀어도 그녀의 맞수가 될 만한 플레이어는 손에 꼽히는 수준이었다.
제나는 레오필 세계 최정상급 플레이어었다.
동시에, 레오레 세계 최정상급 플레이어였다.
제나에게 랭킹 한 자릿수 시즌 마무리는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 최재훈이 그녀의 아이디를 확인한다면 곧장 고개를 조아릴 게 분명했다.
"어디 보자, 플레이어 닉네임 PPP. 저번 시즌 티어 실버2. 현재 시즌 골드 3."
그녀의 '진짜' 아이디를 확인한다면 말이다.
"아."
맞다.
습관적으로 자신의 계정을 내세운 제나는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
최재훈이 고개를 좌측 상단으로 향한 뒤, 묘한 표정으로 제나를 흘겨봤다.
눈이 음흉하게 째졌고, 입은 w 모양이 되어서는.
제나조차 한 수 접어줄 우쭐대는 표정이었다.
"우리 사장님이 챌린저 티어 증표도 똑같은 '고올드 칼라'라 착각을 하셨나 보네. 쟤 티어도 '고올드 칼라'니까. 나랑 똑같은 '고올드' 티어겠구나~ 하고. 아이고 이걸 어쩌나- 하, 아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암, 그럴 수 있고말고. 뭐, 모르는 게 죄는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말씀 드리는데 사장님. 이게 이, 챌린저 티어라는 게~"
한껏 물이 오른 깝침.
만화였다면 제나의 이마에 빠직하고 혈관이 돋아났을 것이다.
세계 최고 플레이어로서의 자부심과 승부욕을 갖고 있는 제나였다.
현재 기준으론 자신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애송이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녀로선 참교육으로 응수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맛이 애송이는 못 견딜 만큼 알싸하고 매콤하더라도 말이다.
"야."
"음~?"
"미드빵 떠."
"워후후워~"
최재훈이 손가락을 꿀렁거리며 제나의 도전에 두려움을 떨었다.
"아니, 이거 너무 무서워서 워떡하나~?~ 잠깐! 내가 사망 보험을 들어놨었나!? 나 오늘 죽을 것 같은데!? ~"
"아니 천하의 최재훈이 혀가 왜 이렇게 길어. 쫄리면 뒈지시던가~"
서로를 장난스럽게 도발하던 둘의 유들유들한 표정은 지금에 이르러 결코 가볍지 않은 열기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이렇게 하자고. 지는 쪽이, 이긴 쪽 소원 하나 무조건적으로 들어주는 걸로."
"하, 아니. 저기요. 제나 씨. 진짜 감당 가능하시겠어요?"
"쫄?"
"쫄은 무슨 쫄. 콜. 나중에 가서 딴말 하지 마쇼."
둘의 시선이 교차하는 중간지점에 종이를 갖다 대면 불이 붙을 것만 같았다.
"너야 말로. 자 그럼, 어떡해. 근처 어디에 피방 있냐?"
"아니, 동생 방에 컴퓨터 하나 더 있으니까 그걸로 하면 됨."
"아, 오케이."
머리가 승부로 가득 찬 제나는 별 생각 없이 자신의 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최재은의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머지않아 첫 번째 경기가 시작됐다.
경기는 의외로 원만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로가 이길 거라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승부가 나고 패배자가 정해지면 결국 한 쪽의 기세는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게임이 시작된 초반.
"오오올~ 뭐야~? 그 무빙~?"
최재훈은 제나의 플레이를 보며 그런 반응을 보였다.
마치, 어린 꼬마가 고난이도 기술을 흉내 내는 모습을 본 것처럼.
"오오!? 아니, 와… 뭔… 이야~ 좀 치네~?"
다음은 그런 반응을 보였다.
마치, 어린 꼬마가 고난이도 기술을 마냥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이해하고 따라한다는 걸 깨달은 것처럼.
"어어…?"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선 그런 반응을 보였다.
가소롭다 여기고 있었던 어린 꼬마에게 실점 당한 것처럼.
그 뒤로 최재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한계에 내몰려, 집중 외의 행동에 신경을 분산시킬 여력이 사라진 것이다.
그는 긴장되어 경직된 얼굴로 집중했다.
상대방에게 확연한 실력 차로 압도당한 것처럼.
머지않아 그는 입을 쩍하고 벌리며, 손으로 틀어막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당면한 것처럼.
"지지~?"
제나는 이 세계에 온 뒤로 레오레를 10시간도 채 하지 않아, 아직 이 세계 레오레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충분했다.
그녀는 고수가 맨손으로 칼 든 일반인을 제압하듯.
간단히 최재훈을 순수 실력으로써 찍어 눌렀다.
둘의 간극은 그토록 멀었다.
승리자의 여유 한가득 담긴 목소리가 최재훈의 귀를 간지럽혔다.
지독하게 얄미워서 반응을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목소리였지만.
아직 충격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최재훈은 미동도 없었다.
곧이어 최재훈의 방에 찾아온 제나가 그의 반응을 보더니, 더없이 만족스러운 비웃음을 그렸다.
"야, 이거 충격이 꽤 크신가 봐?"
그제야 최재훈은 흠칫 정신을 차렸다.
바로 제나에게 시선을 향하지 못하고 한참을 우물쭈물 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사, 삼세판!"
"사, 삼세판!? 서른세 판을 하자는 거야? 아니면 세 판을 하자는 거야? 그나저나, 한 판으론 부족해? 왜, 뭐. 더 하면 결과가 달라질 것 같아서~? 혹시, 첫 판은 내가 '고올드'~라 방심하셨나~?"
제나가 양손의 검지와 중지를 들어 굽혔다 피며 특정 단어를 강조했다.
"크르르르르…."
그런 극한의 약 올리기에도 패자에게 허락되는 대응은 부들거리는 것뿐이었다.
"그래, 그럼 뭐. 자비를 베풀어서. 해 줄게, 삼세판."
그렇게 말하더니,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최재훈 옆의 의자에 앉는다.
거만하게 등을 기대앉은 뒤 다릴 꼰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들어, 앉은 자세로 최재훈을 내려다보고 말했다.
"부탁하는 거 보고."
"부특흠느다…."
"부탁을 고개 빳빳이 세우고 노려보면서 한다라~ 이거 원, 이러면 부탁하는 건지 협박하는 건지 모르겠네~ 아~ 무섭다 무서워~ 너무 무서워서 진정이 안 돼 가지고 게임을 못 할 정도네~ 이 봐, 내 손 떨리는 거 보여?"
제나가 팔짱을 낀 팔을 풀었다.
그리곤 오른손을 내밀어 엄지가 아래로 향하게 한 뒤, 그걸 달달 떨었다.
물 만난 물고기!
제나의 사람을 빡치게 하는 능력이 상황과 맞물려 지금 전성기를 맞이했다!
평범한 조무래기 따위는 감히 이성을 유지하는 게 허락되지 않는 가공할 빡치게하기력이었다!
"크르르르르…."
하지만 최재훈은 엄청난 정신력으로 이성을 붙잡아두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엎드리며 말했다.
"뿌득…흠느드…."
그런데도 제나는 흐음~ 하며 고민했다.
더 뭘 해야 하나 싶던 그의 눈에 제나의 발이 들어왔다.
문득, 어떤 매체에서 봤던 기사 서약 장면이 떠올라 거기에 입을 맞추-
"미친놈아!"
려고 했는데, 한껏 우쭐대던 제나가 기겁을 하며 다리를 내뺐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 동작이 너무 거세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그녀가 옆으로 떨어질 정도였다.
"어, 어! 야!"
최재훈이 당황해서 다급히 몸을 날려 그녀의 몸을 받았다.
그렇게, 최재훈이 제나를 뒤에서 끌어안는- 혹은 최재훈이 그녀에게 깔리는 구도가 되었다.
최재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니, 딱히 안 받아줘도 크게 다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어쨌거나-
"아니, 이 아가씨는 진짜. 가만히 냅 둘 수가 없네. 너는 뭐 중력을 남들의 몇 배로 받기라도 하냐? 툭하면 어디에서 떨어지려 하네."
제나는 바로 옆에서 발생하여 귓가에 곧장 전해지는 진동과 숨결에 말의 내용엔 안중에도 없었다.
곧장 떨어져야 하는 걸 아는데, 아래에서 느껴지는 최재훈의 존재감에 그녀의 이성이 온전히 작동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 이성으로 생각했다.
'어, 이, 이거 혹시 좋은 분위기 아닌가…?'
-(아니다.)
-어딜 봐서 얼빠진 것아
만약 누군가가 그녀의 속내를 읽었다면 그렇게 반응했으리라.
제나 역시 지금 최재훈의 어벙한 표정을 확인했다면 그런 착각 혹은 기대를 하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최재훈의 얼굴은 지금 제나의 뒤통수에 있어 볼 수가 없었고.
그렇기에-
"…."
"…."
그때, 제나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위화감의 정체는 문 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었다.
시선을 향하니, 거기에 선 최재은이 눈을 꿈뻑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재밌네, 계속 해 봐.'
-라고 촉구하듯.
제나가 사람과 마주한 경계심 많은 길고양이처럼 호다닥 최재훈에게서 떨어졌다.
"미, 미친놈아 뭐해!"
그리곤 변명하듯 도리어 그에게 성을 냈다.
"올, 대박. 오빠가 리드한 거임?"
"어, 왔냐?"
"어, 왔어. 헤브 어 굿타임하고 있는데 방해해서 쏘리?"
"뭐라는 거야."
둘의 만담은 평소와 같이 태평했지만, 그 내용은 전혀 태평하지 않았다.
제나가 당황해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재은 동생…? 재은 동생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거든…?"
성격도 성격이고, 최재훈이 세상 아끼는 여동생이라는 점에서 옛날부터 제나의 담당 일찐으로 군림해 온 최재은이었다.
제나가 저도 모르게 몸에 배어 있는 저자세인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흐음…."
최재은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제나는 왠지 방금 전 상황이 찔려, 절로 눈을 깔았다.
"제가 뭘 생각했길래요?"
"어? 아, 아니 그… 어쨌든, 우린 그냥 게임… 게임 하고 있었던 거야."
"둘이서 바닥에 밀착한 다음에 하는 게임이라… JYB 선생님 식 게임인가."
그 말의 자세한 의미는 몰라도, 그녀가 비꼰다는 것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제나가 눈을 깔고, 아무런 답도 못하며 안절부절못하던 그때였다.
"그냥, 얘 꼴값 떨다가 쓰러지려 하는 거 내가 잡아준 거야 임마."
최재훈이 거들었다.
정말 아무 일 아니었다는 듯, 아무런 감정도 못 느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설득력을 갖는 그 모습에 최재은이 고갤 끄덕이는 걸 확인한 제나가 겨우 진정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말 아무 일 아니었다는 듯, 아무런 감정도 못 느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설득력을 갖는 그 모습에 언제 진정했냐는 듯, 곧바로-
'꼴 받네….'
지금이라면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최재훈을 조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자 그러면, 바로 이어서 가자고."
"아, 오케이. 그르르르…."
"…뭐하냐?"
"감정 잡음… 분노를 원동력 삼기 위해…."
"에휴, 쯧."
실소를 터뜨리며 자연스럽게 최재은의 방으로 돌아가는-
"…."
제나를 방주인이 멍하니 바라봤다.
"아, 그… 미안. 어쩌다 보니, 말도 안 하고 방을 쓰게 됐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제나가 상대방에게 순수이 잘못을 인정하며 비굴하게 사과했다.
최재은이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 없어여.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뭐."
제나가 알기로, 이 세계에서 최재은 또래 여학생들은 한참 예민할 시기였다.
말없이 자신의 방에 들어와 컴퓨터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노발대발하는 게 당연한데, 그녀는 한없이 쿨했다.
제나가 기억하는 최재은 그대로였다.
"뭐해, 안 들어와?"
최재훈이 재촉하자 제나는 최재은의 눈치를 한 번 더 보고, 겨우 컴퓨터 앞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험난한 여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웃차."
최재은이 제나 바로 옆으로 의자를 갖고, 함 뼘 떨어진 거리에 자릴 잡았다.
"쟤랑 게임 하는 거예요?"
"어, 어? 어, 응."
"듀오?"
"어? 아니, 그. 1:1."
"1:1이면 미드빵? 그건가?"
"어, 아네?"
"넹, 쟤가 하는 거 자주 옆에서 구경해서리. 근데, 자신 있어여? 쟤 레오레 엄청 잘하는뎅."
"내가 더 잘해."
"에이~"
"진짜야, 안 그래도 방금 한 판 이긴 참인데."
"오빠가 여자라서 대충 봐줬곘죠~"
"저 겜창이?"
"아, 그르넹."
거기까지 이어진 뒤 맥없이 끊기는 대화.
최재훈과 최재은의 컴퓨터는 사양이 어지간히 낮은지, 로딩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잠깐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선배님."
그보다 더욱 어색한 대화가 재개됐다.
"어, 응?"
"선배님 진짜 레즈비언이에여?"
"뭐!?"
제나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최재은을 쳐다봤다.
최재은은 그것만으로도 알겠다는 듯 고갤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역시."
잠시 뒤, 드디어 게임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 또한 험난한 여정의 끝이 아니었다.
"선배님."
"어, 어!?"
최재은이 옆에 있는 이상 말이다.
"그때 그, 막 전학오셨을 때. 교무실 앞에서 저랑 눈 마주치셨던 거 기억하시져?"
"어? 아. 응. 기억나네."
"그때 왜 그러신 거예여?"
"어? 뭐가."
"다른 애들 다 무시했는데 저랑 눈 마주치더니 억지로 웃어주셨잖아여."
과거 돌아온 시점에서 너가 최재훈을 찾을 단서가 될 것 같아서, 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니 뭐, 그냥. 눈 마주쳤으니 무시하긴 뭐해서."
최재은은 그 대답에 흐으음~ 잠깐 동안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전 그거 때문에 선배님이 진짜 동성애잔 줄 알았거덩여."
"뭔…."
"쟤한테 잘해주시는 것도 혹시 나한테 점수 따려고 그러는 건가~? 이런 생각까지 했었는데."
"…오, 마이…."
"히히힛, 그니까여. 개웃기져?"
"아니, 뭐… 재은 동생은 상상력이 풍부하네… 응."
그러는 와중에도 제나는 바쁘게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였다.
최재은은 입을 멈추고 그녀와 오빠의 승부를 감상했다.
어쩌면, 말을 고른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선배님."
"어, 어?"
"쟤한테 왜 그렇게 잘해주시는 거예여?"
"…뭔 소리야, 그게?"
"이번에 쟤 헛소문 퍼진 거 해명하는 것도 도와주시고. 막, 돈도 왕창 퍼주고."
"아니, 그건 돈 퍼주는 게 아니라-"
제나는 무슨 소용인가 싶어 정정하려다 말았다
"어쨌든. 그건 내가 얘한테 그날, 그, 알지?"
"그거여? 쟤가 선배님 구해준 거?"
"아, 응 그거. 뭐, 그거 때문이지. 거의 목숨을 빚진 거니까, 응."
이 정도면 아주 완벽한 대답, 변명이 되리라 생각하고 제나는 자신만만하게 답한다.
"…."
하지만 돌아오는 건 의미심장한 침묵.
짐짓 어색하게 웃던 제나가 어색하게 굳어선 최재은의 답을 기다렸다.
그래서인지, 게임에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아 실수를 반복한다.
"뭐야 쟤한테 밀리는데요?"
너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이제 제발 좀, 가서 일 좀 봐라.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나는 속으로 혼자 끙끙거릴 뿐이었다.
결국, 두 번째 승부에서 제나는 패배해 버리고 말았다.
<패배!>
화면에 그 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하!"
옆방에서 들려오는 짧고 굵은 소리.
그 말에 최재은과 제나가 동시에 쓰게 웃으며 고갤 가로저었다.
"에휴, 여자 이기고 좋단다. 못났다. 그져?"
"아니, 뭐. 게임에 남자 여자는 딱히 상관없는 것 같기도 한데. 뭐, 그거 아니어도 못나긴 했지."
"오오… 게임에서 남자 여자는 평등하다라. 뭔가 멋있당. 오케이, 나도 반성반성."
-자, 막판 가 보자고~ 컴온~!
옆방에서 들려오는 잔뜩 달아오른 최재훈의 목소리.
나름 중요한 승부를 결정짓는 마지막 게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집중해야 되는데, 얘는 언제까지 여기 있으려나.
제나가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선배님. 우리 오빠한테 잘 해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좀 잘 부탁드릴게요."
"…뭐?"
제나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시선을 최재은에게 향했으나-
"오빠 ~ 나 혜원이랑 놀다 옴~"
"어~ 그래~ 너무 늦게까지 있진 말고~ 어둡고 사람 적은 곳으로 다니지 말고, 혹시 모르니까 우산이랑 비상금 챙겨 가고. 그리고-"
"아, 시꺼."
어느새 사라진 그녀는 이미 현관에서 가서 최재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아참."
그때, 얼굴을 쏙 내밀어 방 안의 제나를 들여다보는 귀신."
"아까, 그거 생각나서 그러는 건데요."
"그거…?"
"그, 둘이 거시기 저시기하고 있던 거요."
"아, 아니 그건…!"
"아, 괜찮아요 괜찮아."
최재은이 양손을 내밀곤, 다 이해한다며 눈을 감고 고갤 끄덕였다.
"선배님은 개방적인 미국 분이시니까, 응. 그리고, 요즘은 뭐 글로벌 시대고. 미국이 곧 한국이고, 한국은 곧 미국이고. 그래서 다 이해합니다."
도대체 뭘 이해한다는 걸까.
최재은이 의미 모를 소리를 늘어놓자 제나는 왜인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뎅. 그, 만약에 그런 상황 나오면 그거 깜빡하지 마세여?"
"뭐, 뭐? 뭘 깜빡하지 말라는…."
"그거 있잖아요."
최재은이 두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를 언급했다.
상상치도 못한 전개에 제나의 두 눈과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아, 아, 아, 아 아니 뭔…."
"저 지금 나갈 건데, 혹시 준비 안 해 오셨으면 편의점 들렸다 사다 드릴까요?"
"아, 아니, 뭐, 뭐라는 거야 얘 도대체!?! 미, 미쳤어!?"
얼굴이 신호등처럼 순식간에 붉은색을 띄게 된 제나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님 말공~"
그 모습에 최재은은 키득거리며 총총총 멀어졌다.
"미친…."
넋이 나간 제나가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임마!!! 신경 꺼!!!"
-아니, 왜 또 화를 내고 그러시나. 뭐, 이 최재훈 님께서 '진심'을 보이니까 슬슬 쫄리나? 허허껄껄~
이런 와중에 운 좋게 승리 한 번 따냈다고 좋아 죽는 최재훈의 목소릴 들으니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자, 그럼. 후딱후딱 막판 가자고. 각오는 됐겠지~?
소용돌이치던 제나의 눈동자는 어느새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최재은에게 한바탕 시달린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줄 화풀이 대상이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도 모른 채 신나서, 괴롭힘직스럽게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제나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았다.
여지껏 가장 집중해서 게임에 임한 최재훈을, 여지껏 가장 철저하게 짓밟아 주었다.
반대편 방에서는 찍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
제나가 조소를 흘리며 최재훈의 방에 찾아갔다.
"이거~ 우리 '챌린저', '고올드'한테 발려서 어쩌- …어?"
잔뜩 놀려줄 생각에 들떠있던 표정이 가라앉는다.
최재훈이 화면에 뜬 <패배>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답지 않은 심각한 표정에 제나가 당황했다.
'아.'
그녀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현재 그에게 있어 게임은 암담한 현실을 타계할 유일한 희망이오, 가장 소중한 재능이었다.
그렇기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을 터였다.
그런 자부심이, 전면에서 철저하게 부정당해 버렸다.
심지어는 자신과 같은 또래에게.
설상가상으로는, -최재훈이 이걸 신경 쓸 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에게.
자신감이, 자존심이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제나가 보기에 지금의 최재훈은 절망을-
벽을 느꼈고.
당장에라도 쓰러지거나 폭발할 듯 위태로워 보였다.
"야, 야… 괜…찮냐…?"
그녀가 상처 입은 야생 동물 대하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최재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그녀 앞에 섰다.
제나는 다양한 이유로 저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격앙된 분위기, 격정이 담긴 눈동자.
최재훈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뭐냐?"
"어…."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제나가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최재훈이 이어서 말했다.
"혹시 레오레의 신이냐…?"
"…?"
제나는 그제서야 자신을 바라보는 최재훈의 눈이 반짝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마지막쯤에 라인 그렇게 된 거. 설마 너가 의도한 거야?"
"그 세 번째 쯤 딜교 기억나지? 그거, 내가 왜 졌던 거야?"
최재훈은 극도로 흥분해서는, 신나서는.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였다.
"하."
제나가 허탈함에, 그리고 안도감에 실소를 터뜨리며 생각했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아니, 아니. 나 진짜. 와… 뭐지? 도대체? 나 진짜, 1군 프로 상대할 때 말곤 이렇게 벽 느껴본 적이 없는데. 아니, 1군 프로가 뭐야. 그 사람들 상대할 때도 이 정도로 벽 느껴본 적은 없는데. 너 도대체- 아니, 아니지. 선생님. 선생님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세요?"
제나를 바라보는 그 눈에선 존경심이 콸콸 흘러 넘치고 있었다.
방금 그의 말마따나, 신이라도 영접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이건 뭐….'
서열 정리가 아니라 가히 정복에 가까웠다.
좌우지간에, 잘 된 일이었다.
상태를 보니 최재훈은 자신의 지시라면 뭐가 됐든 기꺼이 따를 것이다.
제나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니 알바, 오늘까지랬지?"
"넹!"
"그러면 내일부턴, 10시까지 시간 싹 비워 놔."
최재훈의 방송.
그 대망의 첫 컨텐츠가 정해진 순간이었다.
"내가 사람 만들어줄게. 랭킹 1위부터 찍자."
랭킹 1위.
현재의 자신으로선 감히 넘보지 못할 아득한 목표였다.
그런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말을.
마치, 산책 갈 테니 따라 나오라며 턱짓이라도 하는 양 가볍게 말한다.
허황되기 그지없다.
제나는 그렇게 허황되기 그지없는 발언을 하면서 특유의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비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최재훈은 넋을 잃었다.
이내 그는 모든 이빨을 자랑하는 듯 커다란 미소,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갤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