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 외전 역전의 제나 15
최재훈에게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여자.
'줄여서 정자…!'
최재훈은 돌발 행동에 언제든지 대처할 수 있도록 정자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뒷걸음질을 쳐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자 뭐가 웃긴 건지 싱글벙글 웃는 정자.
'오, 세상에 시발… 하느님, 어떡해요 이거 너무 무서운데.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초등학교 때 4주 다녀서 문화 상품권 받은 뒤 바로 그만두고, 내년에 처음인 척 또 문상 타 간 거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겁니까. 거, 겨우 만 원인데. 십일조로 돈도 오지게 버시면서, 너무하시네.'
최재훈은 겁에 질려서는 거의 반 쯤 패닉상태가 됐다.
"어디 가요~~~"
그때 정자가 마치 '나 잡아봐라~'하면서 멀어지는 연인이라도 따라가는 양 살가운, 그래서 최재훈에겐 더 소름끼치는 어조로 말했다.
"으, 으아아아!!! 뭐야!!! 따라오지 마! 거기 멈춰!"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최재훈은 뒷걸음질을 멈추고 다가오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 손을 내밀었다.
"…?"
그러자 순수히 멈추는 정자.
최재훈은 긴장을 놓지 않고 정자에게 온 신경을 집중한 채 말했다.
"그, 그쪽 분… 도대체, 뭡니까…!? 왜 이래요 저한테!?"
"…네? 어… 뭐가요...?"
"아니, 저한테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냐고요!"
"아… 어… 죄송해요, 그… 갑자기 이렇게 찾아온 건 역시 너무, 부담스러우셨나요…?"
정자가 방금 전까지 싱글벙글하던 소름끼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한껏 주눅들어서 말한다.
'아니, 이러면 오히려 내가 겁을 준 것 같잖아.'
외관 자체는 평범한 여성인 그녀가 그렇게 위축된 모습을 보이자, 최재훈은 도리어 죄책감을 느껴 버린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사람 같지 않기는 한데….'
그제서야 다소 진정할 수 있었던 최재훈은 침착하고 차분하게 여자에게 말했다.
"아니, 그쪽 도대체 누구신데요? 저는 그쪽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쪽은 저를 아는 것 같고."
"예? 아 저 그… 누구라고 물으시면… 저는 그냥 재훈 학생- 아니, 최재훈 님 팬인데…."
"엥? 팬이요?"
"네…."
"아니, 뭔 팬이요…?"
"어… 그냥 팬이요."
"그, 아이돌 팬 할때 팬?"
"네, 네."
"…제 팬이라고요?"
"네…."
"…왜요?"
"네?"
"제가 뭘 했다고 팬이…."
"그때 그, 방송이랑 영상 보고…."
"예? 아…."
최재훈은 비로소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알 것 같으면서도, 납득하지는 못했다.
'도대체 내가 뭘 했다고…?'
이렇게 직접 찾아올 정도의 열혈 팬이 생긴단 말인가?
그의 사고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나가 지금의 이 상황을 보면- '아, 그래? 잘 됐네' 당연하단 듯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것이다.
태풍의 중심에 있는 당사자만이 그 사실을 모를 뿐,
현재 그를 중심으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니, 일단… 알겠습니다. 알겠고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네? 늦은… 시간이라고요…?"
아.
둘은 그제야 서로의 입장을 이해했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아, 어쨌거나 제가 죄송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 생각이 짧았어요. 이렇게 당황스럽고 부담스러워하시는 게 당연한데."
여자가 정말로 송구스럽다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아. 아니에요. 방금 제가 그, 당황하거나 부담스러워했다기보다는- 솔직히, 무서워 가지고…."
"무섭다고요?"
"에, 그 뭐…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아가지고 쫄아서…."
"아. 아! 진짜 그렇겠다."
최재훈의 표정에 서렸던 감정이 당황이 아닌 두려움임을 뒤늦게 깨달은 여자가 안도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죄송해요… 어떡해… 많이 놀라셨죠?"
"예, 진짜… 개놀랐습니다. 개무서웠어요…."
그가 능청스럽게 무섭다는 시늉을 하자, 자연스러운 미소가 얼굴에 돈다.
"아무튼, 예. 감사합니다.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어… 응원해 주시려고? 찾아봬 주시고."
여자는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을 안심시키고 진심을 담아 감사를 전해오는 어린 남학생의 모습이 너무나도 기특하고 대견하며, 또 귀여엽다는 듯.
양손에 한가득 짐만 안 들고 있었다면, 가슴에 양손을 모으기라도 했을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감사하긴 제가 더 감사하죠. 아참, 재훈 학생. 괜찮으면 이것 좀 받아 주실래요? 이렇게 찾아 뵌 게, 이것들 전해 드리려고 한 거라."
여자가 다가와서 양 손에 든 쇼핑백을 건넸다.
"일단, 이건 화장품들이에요. 어제 보니까, 재훈 학생 피부 관리를 하나도 못 하시는 것 같던데, 화장품 살 여유가 안 돼서."
"아, 뭐 그건 딱히 화장품 살 돈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귀찮아서."
"에이! 안 되죠!"
"에이 안 되나?"
"그렇게 잘 생긴 얼굴 타고났는데! 열심히 관리해야죠! 아깝게!"
"음, 듣고 보니 그렇군."
최재훈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여자는 까르륵 좋아 죽으면서, 방송 볼 때도 느꼈지만 너무 재밌다니. 유머러스하다니. 젠틀하다니. 난리 블루스 탭댄스를 췄다.
최재훈은 그녀의 그런 태도가 멋쩍으면서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순수한 호의만이 느껴져서- 결코 나쁜 기분이 들진 않았다.
그렇게 최재훈은 '팬'이라는 존재를 실감했고.
자신에게 팬이 존재하는 상황에 차츰 적응되었다.
"아, 그리고 여기 이거! 몇몇 못된 인간들이 재훈 학생 가방 가지고 낡았다 놀려서, 요즘 학생들한테 가장 인기 있다는 브랜드로 구해 봤는데. 어때요?"
"아이고… 이건 그, 제가 받기엔 너무…."
"재훈 학생, 앞으로 이거 말고도 조공 많이 받으실 건데. 지금 미리 익숙해 지셔야 돼요!"
"조공…?"
"아, 이렇게 팬들이 선물 주는 걸 조공이라 하거든요."
"허허, 그거 참…."
'존나 거창하다!'
그가 알기로 조공은 종속국이 종주국한테, 그러니까 신하가 주인에게 예를 표할때 바치는 제물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런 단어가 팬이 선물을 주는 행위를 일컫는 데 사용되다니.
'팬이 갑 아니었어…?'
최재훈은 새로 알게 된 세계의 심오함을 이해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아, 어쨌거나 그.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사히, 잘 쓸게요."
최재훈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선물을 받아 들었다.
최재훈의 표정은 실로 복잡했으나, 머지않아 그는 선물을 흐뭇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 최재훈을, 그녀는 더욱 흐뭇하게 바라봤다.
"아, 맞다! 깜빡한 게 있는데-"
그녀가 쇼핑백 밑바닥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보여줬다.
노란색 줄무늬가 그려진 티셔츠 두 장이었는데, 각기 사이즈가 달랐다.
"꺄아아악~ 너무 귀엽죠~ 보시다시피 커플틴데요~ 이 큰 건 재훈 학생 거고, 작은 건 제나 학생 거예요~ 사이즈가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맞을 거예요! 제가 옛날 옷 가게에서 일했던 적이 있어서 정확하거든요!"
한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던 미소녀를 구원해준 미소년!
그 정체는, 힘든 환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소년 가장!
지금 커뮤니티에서 제나와 최재훈의 관계는 가장 뜨거운 화제 중 하나였다.
'이게 머선….'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최재훈으로선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보시다시피 커플티'를 왜 자신과 제나에게 선물한단 말인가.
'걔는….'
레즈비언인데…?
하기사, 모르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러면 재훈 학생! 그, 화이팅!?"
'화이팅? 뭘요?'
제나와 자신의 커플티를 주면서 화이팅이라니.
최재훈의 눈동자가 빠르게 진동했다.
"그, 뭔지 몰라도 화이팅 하겠습니다."
그렇게 최재훈과 몇 번의 인사를 더 나눈 여자는 그대로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차를 타고 유유히 떠났다.
'차 삐까번쩍한 거 보소. 능력 쌉오지는 누님이셨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선물에 대한 부담감을 지운 최재훈.
"…하."
그가 가만히 선물 보따리를 바라보더니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그의 발걸음은 등교할 때와 비교하면 묘하게 경쾌했다.
최재훈은 그렇게 정말로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구나 생각했다.
아니었다.
오늘도 어김 없이 책상에 엎어져 잠을 청하던 최재훈.
그는 자신의 귓가를 간지럽히는 웅성거림에 잠에서 깨어났다.
또 무슨 난리가 났나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무수히 많은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스파링 사건 이후 첫 등교 때와 같았다.
그러나 스파링 사건 이후 첫 등교 때와 다른 점은-
그들의 눈에서 경계심이나 두려움이 아닌, 호의와 관심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 너희 때문에 재훈이 깼잖아~"
당연한 듯 최재훈의 옆에 앉아 있던 신소하가 그들을 나무랐다.
"맞아, 맞아~ 재훈이 어제- 아니, 오늘도 밤늦게까지 연습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우리 좀 조용히 하자!"
"그래그래!"
여학생들끼리 대본 읽듯 작위적인 어조로 그런 대화를 나누더니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최재훈은 정신이 혼미했다.
도대체가 이게 괴롭힘인 건지, 호의의 표시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전처럼 말 안 걸고 무시하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재후낭, 재후낭~"
"그리고 넌 또 왜 여기 계세요…."
"애들이 재후닝 귀찮게 못 하게 지키고 있었징~"
"우리 민호는 어쩌구요…."
"아, 재, 재훈아 난 괜찮아!"
최재훈이 그러자, 신소하의 자리에 쭈볏쭈볏 앉아 있던 '우리 민호'가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신-소하! 너 이… 일찐 자식…! 저게 정말로 괜찮아 보이는 것 같애!?"
"뭐랭~ 아무튼 재후낭, 이것 봐랑~?"
최재훈이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무언가를 가르켰다.
고양이 귀 모양 귀마개와, 고양이 얼굴이 프린팅 된 안대 세트.
그리고 그 둘과 같은 문양이 그려진 담요였다.
"아까 1학년 애들이 너한테 전해주라고 주고 간 거당~? 귀엽지, 귀엽지~?"
"…뭐지, 그 꿀잠 세트 고양이 에디션은. 학교에서 다른 학생한테 주는 선물로 과연 어떨까 싶은데요."
"너가 할 말이야?"
"그렇긴 해."
"어쨌든, 받았으니까 한 번 써 봐."
"…아, 예. 뭐, 나중에 한 번-"
그때 어떤 여학생이 외쳤다.
"지금~"
그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울리듯, 반의 학생들 모두가 입을 모아 외쳤다.
지금!
지금!
지금!
지금!
"아…."
신나게 벌어지던 그들의 연회에 최재훈은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 이후로도-
"재훈아 힘내~~~"
"화이팅~~~"
대뜸 와서 매점에서 산 과자나 음료수를 전해주고 간다거나.
"응? 재훈이 왜 일어났어? 선생님 목소리가 너무 컸나~? 아니면 반이 너무 밝니~?"
평소 유령취급하던 교사들이 과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온다거나-다른 반 학생들이 연예인 구경하듯 몰려온다거나.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방과후나 되어서야 그들의 뜨거운 관심은 겨우 진정되었다.
"어우…."
지금 최재훈은 과한 애정과 관심에 체해서 속이 더부룩할 지경이었다.
그의 양손에 들린 쇼핑백과 새로 받은 가방은 여러가지 선물로 가득 차 있었다.
"하… 경식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내가 묻고 싶다 재훈아, 내가 기억하기로, 예전 추천해줬던 애니에서 이것보다 훨씬 덜한 장면이 나왔었는데 그때 니가 뭐랬냐.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보는 내가 다 부끄럽다고 하지 않았냐? 그런데 지금 이건 뭐냐 재훈아. 그리고 나는 왜 부끄럽지가 않고 빡이 치는 걸까 재훈아. 왜 여자들이 가만있는 너한테 번호를 못 줘서 안달이냐?"
"뭔지 몰라도 미안하다 경식아. 그런데, 너 3D 여자한테는 관심 없다 하지 않았었냐?"
"…그래서, 사실은 너가 부럽지 않다."
그렇게 말한 김경식이 하늘을 쳐다봤다.
그의 눈이 새벽 이슬처럼 맑았다.
"겨, 경식아! 무슨 일이야! 그 슬퍼 보이는 눈은…!"
"어제… 아라드에 대전이가 일어나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거든…."
"앗…! 그런 것도 모르고 나란 남자는 이렇게 태평하게…!"
"아니, 치킨킹치킹. 이세카이는 내가 맡을 테니. 너는 이 세계를 구해라…."
"…끄덕."
또 영문 모를 헛소리를 주고받는 듀오를 보고 신소하가 '에휴'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김경식. 재훈이한테 이상한 물 좀 들이지 마 좀. 그리고 재훈아, 친구좀 가려 사겨."
"재훈이가 친구를 가려 사겼으면, 너하고도 안 다녔겠지."
"하, 니가 그 말 하니까 화도 안 나고 그냥 웃긴 거 알아?"
"님 그래서 저번 모의고사 성적이?"
"님 그래서 라톡에 친구 몇 명?"
"님 그래서 모험단 레벨 몇?"
"소하야, 진정해. 경식이가 저래 보여도 모험단 레벨이 엄청 높아. 함부로 까불었다간-"
"아, 뭐라는 거야 진짜!"
시끌벅적한 하교길.
머지않아 김경식, 신소하와 차례대로 헤어지고.
"하…."
마침내 혼자가 된 최재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쳤다기 보단, 여운이 진하게 묻어나는 달뜬 한숨이었다.
오늘 하루종일 자신의 주변을 가득 채웠던 활기찬 에너지에 감염된 기분.
최재훈은 오늘 하루를 돌이켜 보았다.
최근 학교를 다니면서-
아니지.
지난 몇 년을 통틀어 이리도 정신없게 활기찼던 날이 있었던가?
그렇게 최재훈은 지난 몇년을 돌이켜 보았고, 깨달았다.
당연한 듯 받아들임으로써 부정하고 있었지만.
가능하다면 당장 모든 걸 내팽개친 다음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일상에 휘둘리는 상황에 힘들어하고 있었음을.
그 날 이후.
오늘이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근심과 걱정을 까맣게 잊고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일상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최재훈은 오늘부로 더 이상 일상에 휘둘리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평소, 최재훈의 일상은 방과후 집에 귀가하는 그 순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김경식과 신소하와 헤어진 이후로도 한참을 걸은 최재훈은 낡은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와 마주했다.
"헤이."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제나였다.
삐딱하게 서서 핸드폰을 내려보던 제나가 고개를 들어 특유의 미소로 최재훈을 반겼다.
그녀의 시선이 최재훈의 양손에 들린 쇼핑백으로 향했다.
"이야, 아주 그냥. 아이돌 납셨어? 응?"
그리곤 그의 얼굴로 향하더니, 둘이 동시에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래서, 어땠냐? 방송 해 본 거."
"뭐, 나쁘진 않은 경험? 재밌더라고."
제나가 고갤 끄덕였다.
그들은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뜸을 들이길 잠깐.
"그러면, 제대로 시작해 볼 생각은?"
제나의 물음에, 최재훈은 기다렸다는 듯 곧장 씨익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제나 역시 한쪽 입꼬릴 끌어 올려 웃었다.
그리곤 손가락을 튕기곤 등을 돌려 먼저 나아간다.
뒤쳐져 있던 최재훈은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나란히 선 둘이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아 맞다."
제나를 데리고 집에 도착한 최재훈은 곧장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쇼핑백에 손을 집어넣었다.
쇼핑백을 뒤적거린 그의 손에 티셔츠 두 장이 들려 나왔다.
최재훈은 그 중 작은 쪽을 제나에게 건넸다.
"…?"
제나는 바로 티셔츠를 받지 않고 가만히 쳐다봤다.
이어서 최재훈의 반대쪽 손에 들린 티셔츠도 쳐다보더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저 두 티셔츠가 의미하는 바는 아주 잘 알겠으나.
최재훈이 저 두 티셔츠 중 하나를 건네는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뭐해 안 받고?"
"아니… 뭐. 이거, 내 꺼야?"
"그럼 누구 거겠어."
"나 주는 거라고? 니가?"
"응."
제나가 잠깐 동안 넋이 나간 상태로 있더니, 이윽고 만면에 특유의 비소를 띄우며 티셔츠를 받아 들었다.
티셔츠를 펼쳐 이리 저리 살펴 보더니-
"야, 잠깐 화장실 좀 빌린다."
그렇게 선언하곤 욕실에 들어갔다.
잠시 뒤.
최재훈에게 받은 노란 줄무늬 티셔츠로 갈아입은 제나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티셔츠의 어깨에 걸쳐진 제나의 황금빛 생머리가, 무난하기 그지없는 노란 줄무늬 티셔츠에 특별함을 부여했다.
제나의 한쪽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아니, 짜식.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알고 이렇게 딱 맞춰서."
제자리에 서서 한 바퀴 빙 돌더니 말한다.
"어때?"
제나가 저렇게 좋아하는 걸 처음 보는 최재훈 또한, 그녀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티셔츠가 응?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나 보네. 주인을 아주 그냥 제대로 만났어?"
그러자 제나는 더욱 신나서 최재훈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찰싹 두드렸다.
"뭐해 임마, 너도 빨리 입어 봐."
최재훈이 끌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야, 이렇게 좋아할 줄이야. 그분, 엄청 뿌듯해 하시겠네."
"?"
데이터가 리셋이라도 된 것처럼 제나의 표정이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야."
"응?"
"방금 뭐랬냐?"
"뭐가?"
"그분 엄청 뿌듯해 하시겠네? 뭔 소리야 그게?"
"아, 이거. 오늘 아침에 만난 팬 분이 선물로 준 거거든."
"…."
헤실거리며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최재훈을 제나는 가만히 바라봤다.
그렇게 눈을 두 번 정도 꿈뻑였을까.
제나가 자신의 몸에 벌레라도 달라 붙은 듯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티셔츠를 벗어 땅바닥에 있는 힘껏 내리쳤다.
티셔츠를 벗자 속옷 차림이 되었지만, 그녀는 엿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움츠러든 최재훈을 뒤로하고, 성큼성큼 그의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곤 외쳤다.
"뭐 해! 빨랑 안 기어 들어오고!"
"어, 어!? 아, 잠깐. 그, 티셔츠 좀 갈아 입고-"
FUCK!
여지껏 최재훈이 들어 본 것 중 가장 유창하고 절절한 FUCK이었다.
"그 염병할 티셔츠 쳐 버리고 당장 기어와!"
최재훈은 즉시 지시에 따라 티셔츠를 쳐 버린 뒤 방으로 기어갔다.
"앗…."
방에 기어들어간 그는 즉시 눈을 질끈 감으면서 고갤 돌렸다.
제나가 여전히 속옷 차림이었다.
"그… 제나 씨…?"
"뭐."
"옷, 안 입으시나요…?"
"…한 번만 더 저 엿같은 티셔츠 이야기 꺼내기만 해 봐."
도대체 뭐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려 버리고 만 걸까.
최재훈은 도저히 그걸 알 수가 없어 더욱 전전긍긍했다.
화장실에 가서 그녀가 놓고 온 교복을 가져다주고 싶었지만, 지금 이 방을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은 불길한 공포를 느꼈다.
그렇다고 제나를 저대로 놔두자니- 눈 둘 곳을 모르겠고.
최재훈은 잠깐 동안 고민하다가 방 구석에 있는 자신의 옷장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최대한 새것에 가까운 흰 티셔츠를 꺼내, 눈을 가린 채 그녀에게 건넸다.
"뭐야?"
"그… 그렇게 계시면 감기 걸리실까 봐…."
제나는 못마땅한 눈으로 한참이나 바라본 뒤에야 그의 손에서 티셔츠를 낚아챘다.
그녀가 티셔츠를 착용한 소리에 최재훈은 비로소 눈을 가렸던 손을 떼고 조심스럽게 앞을 쳐다봤다.
최재훈의 티셔츠는 제나에게 상당히 커서, 그녀가 입은 옷은 티셔츠가 아닌 헐렁한 박스티처럼 보였다.
제나는 고개 숙여 티셔츠 걸친 자신의 상반신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어깨를 들어 자신의 코에 갖다 대곤 킁킁 냄새를 맡았다.
다음은 앞자락을 들어 올려 코에 갖다 댔다.
그렇게 드러난 매끈한 배와 속옷에게서, 최재훈은 다시 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 그… 냄새 나? 다른 거… 드릴까요…? 아니면 그- 화장실에 가서-"
"아, 됐고."
목소리에 서린 노기가 가라앉은 걸 확인한 최재훈이 다시 제나를 쳐다봤다.
"가서, 의자나 갖고 와서 옆에 앉아."
"아, 넵…!"
"아, 그리고."
"넵?"
그녀가 최재훈이 입고 있는 하얀 티셔츠를 보더니 장난스럽게 미소지으며 선포했다.
"티셔츠 나 준 거 맞지?"
최재훈은 그녀가 무슨 티셔츠를 말하는 건지 몰랐지만 일단 고갤 끄덕이고 봤자.
왜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기분이 풀려서 천만 다행이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앞으로 니 방송 말인데-"
"넵."
"일단, 여러 컨텐츠를 하되. 메인 컨텐츠는 게임. 니가 잘하는 레오레를 메인으로 하게 될 건데. 이의 있어?"
"없슴다."
"그래서 말인데, 너 레오레 얼마나 자신 있냐?"
"뭐, 그래서 너는 레오레 좀 알아?"
"하, 말이라고."
"그래? 그러면 뭐-"
최재훈이 자신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깜짝 놀랄걸."
익숙한 그 표정에, 제나는 아주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그래? 그럼 일단, 니 실력이나 한 번 보자."
제나가 알기로 레오레는 최재훈이 가진 가장 강력한 장기 중 하나였다.
이전에도 그랬듯, 앞으로 그의 방송은 레오레를 중심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그렇기에 향후 최재훈의 방송을 성장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그의 레오레 실력을 자세히 확인해 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확인 과정을 앞둔 제나의 표정은 흥분과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뛰어날까.
원래 세계, 그러니까 남성들의 게임 실력이 상대적으로 뒤쳐지는 세계에서도 특출났던 최재훈의 재능이.
이 세계.
남성들의 게임 실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세계에선, 과연 어느 정도일까.
얼마나 거대할까.
최재훈의 게임과 함께, 제나의 관전이 시작됐다.
흥미진진했던 그녀의 표정이 게임이 진행될수록 차츰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승리!>
머지않아 화면에 승리의 증거가 떠오르고, 그 승리의 주역으로서 활약한 최재훈은 아주 만족스럽고 또 당당한 얼굴로 제나에게 물었다.
"어땠어?"
입을 쩍 벌린 상태로 말문이 막힌 그녀의 반응을 보면 구태여 확인할 것도 없었지만, 최재훈은 굳이 물었다.
제나는 깜짝 놀랄 거라는 최재훈의 말처럼, 정말로 깜짝 놀랐다.
처음 충격을 받은 순간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정신을 다 추스리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겨우 말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왓더퍽…."
"으흠~"
"디스 쉿…."
"으…흠?"
음미하듯 눈을 감고 고갤 끄덕이던 최재훈이 자신의 귀를 의심햇다.
아니 썅.
왜 이렇게 못하지?
그게 미래에서 온 세계 최고 플레이어가 크나큰 기대를 안고, 미래에 정점이 될 플레이어의 플레이를 감상한 소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