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 외전 역전의 제나 11
"뭐라는 거야 시발놈이!"
자신이 코피를 흘린다는 사실을 확인한 유우준은 피를 본 야수처럼 이성을 잃었다.
그런데도 무작정 달려들지 않고 자세를 잡는 걸 보곤 최재훈은-
'싸움은 많이 해 봤거나, 애들 좀 패 본 애들이구나~' 느꼈다.
그리고, '그래도 따로 뭘 전문적으로 배운 것 같지는 않네-' 하고도 느꼈다.
그가 다시 또 만든 자세- 아니지, 흉내 내려 한 자세는 전문 용어로 하이 가드였는데.
하이가드의 기본적 특징이라면 팔을 들어 안면에서 상체 위쪽까지 가리는 자세로, 일반인들이 권투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통상적인 이미지의 자세라는 점이 있었으며.
자세 특성 상 시야가 제한되고, 체력 소모가 심하다는 점이 있었다.
최재훈이 배운 바 저 자세는 저렇게 자세를 취하는 순간 공방일치의 무적짱짱맨이 되기라도 하는 양, 무작정 취하고 보는 자세가 아니었다.
상대방과 거리를 좁힌 상태에서 고려하는 선택지 중 하나였지.
즉, 저렇게 멀리서 거리를 좁혀오는 자세론 몹시 부적절했다.
하기사, 지금 최재훈의 시선으로 유우준의 상태를 보면 그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가관이었다.
발의 움직임은 스텝이 아니라 엉거주춤 발을 질질 끄는 것 같았고-
"씨발!"
거리를 내주자 신나서 자세를 무너트리고 팔을 휘두르는 데 온 신경을 쏟아 붓는 모습은, '붕쯔붕쯔'라는 의성어가 절로 연상됐다.
중간중간 복싱을 어깨 너머로 배운 흔적이 느껴지긴 했다.
복싱 말고도 다른 격투기들의 흔적도 보인다.
하지만 최재훈에겐 없으니만 못하게 느껴졌다.
뭔가 덕지덕지 달라 붙어 있긴 하나 워낙 얄팍해 결국 그 근본은, 공격성과 거대한 몸집으로 상대방을 찍어 누르는 것이었다.
상대방에게 동등한 공격성과, 동등한 체급이.
그 이상의 전투 능력이 있다면 절대로 통하지 않는 방식.
그런 방식에 특화되어 있었다.
즉, 전형적인 강약약강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게 지금까지 폭력적 분위기를 아낌없이 표출하며 자랑하던 유우준의 실체였다.
그의 난폭한 폭력성의 근원이 되는 폭력의 알맹이는, 아낌없이 자랑하기엔 많이 미숙했다.
"허억… 허억…."
최재훈의 얼굴을 가격하려다가 헛손질 하기를 여러 차례.
어느새 유우준의 호흡이 사람들에게 다 들릴 만큼 커져 있었다.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이 씨발아!!! 그만 안튀어!?"
그렇게 될 때까지 최재훈은 장담한 대로 그에게 단 한 번의 정타도 허용하지 않았다.
붕!
또 한 번 주먹질이 날아왔지만, 의도대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최재훈은 상체를 약간 뒤로 젖힐 뿐으로 간단하게 피했다.
유우준은 더 이상 그러지 못하도록 코너로 몰아 넣으려 했지만-
코너로 몰아넣는 건 말 그대로 몰아넣을 실력이 돼야 가능한 것이었다.
유우준은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최재훈이 그걸 허용하고 장려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산보하듯 가벼운 스탭.
최재훈은 유유히 옆으로 빠져나가 다시 거리를 벌린 공간을 만들었다.
다시 또 답답한 상태로 원상복귀되자 유우준은 마침내 이성을 잃었다.
"시-발놈이…!"
그는 뒤가 없는 듯 전력으로 발을 구르며 날아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최재훈은 그가 뭘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유우준의 통나무같은 다리가 올라-
-퍽!
가기도 전에, 최재훈은 다시 거리를 좁혀 그의 얼굴에 가볍게 잽을 꽂아 넣었다.
"악!"
유우준의 몸이 허공에 뜨는 동시에 뒤로 나자빠졌다.
"발 쓰려고? 어림도 없지."
"시, 빨! 놈아!!! 누가 복싱 룰로 하쟀어!?"
"누가 뭐래? 발 계속 써 봐, 쓸 수 있으면."
최재훈이 한쪽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려 이빨을 보이자, 유우준은 저도 모르게 위축됐다.
도망만 다니던 그가 자신이 발을 사용하려 하자 공격했다.
'시발….'
자존심이 상했지만, 저 놈의 개 같은 면상을 작살내려면 다리 사용은 자제해야 할 것 같았다.
유우준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마음과 자세를 잡고 자시고.
최재훈이 자신에게 주는 어드밴티지를 자존심을 버리고 적극 활용하려 하려는 시점에서, 이 싸움은 더 이상 경기라 볼 수 없었다.
놀이- 아니, 그 이하.
농락이었다.
유우준에겐 유감이게도 최재훈은 아웃복서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아웃복서란 세상에서 주먹질을 가장 잘 피하는 종족들이었다.
이 좁디좁으며 아무런 도구도 없는 링 위에서 유우준이 아웃복서에게 정타를 꽂아 넣을 수 있는 방법은, 팔 외의 신체 부위를 적극 활용하는 것뿐이었지만-
방금 최재훈의 대처, 그를 통해 명료해진 신체 능력과 기술의 차이를 보면 팔 이외 신체 부위를 적극 활용한다 해도 정타를 꽂아 넣을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 볼 수 있었다.
유우준도 은연 중에 그걸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악착같이 달려드는 이유는, 최재훈이 그를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
-ㄲㅂ
유우준이 최재훈을 향해 헛손질을 할 때마다 그런 소리가 나오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 최재훈은 아주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하길 거듭하며 그에게 아깝다는 생각과 함께 의욕을 심어주었다.
유우준은 홀린 듯 계속해서 최재훈을 향해 달려들었다.
"허억! 허어억!"
그렇게 호흡은 더 이상 호흡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진다.
누군가가 물을 끼얹은 듯 몸에 땀이 흥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힘들어서 팔의 위치가 다소 내려간 자세는 전보다 좋았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을 얻기에 그는 더 이상 제정신이 아니었다.
"시발아!!! 덤비라고 개새끼야!!'
그가 마침내 파업을 선언했다.
발을 멈추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시발 새끼가 쫄아서는, 하루 종일 도망만 치고…! 허억...!"
코피 자국이 광대의 우스꽝스러운 분장처럼 코와 입가 주변을 듬성듬성 물들인 상황에서도 여전히 강압적 태도를 일관한다.
구경 온 유우준 패거리 사이에서 몇몇이 표정을 관리하고자 입가에 힘을 줬다.
-아니 저 ㅈㄹ 나고도 계속 쎈척하네 ㅋㅋ
-저 ㅈㄹ 났으니 더 그래야지 ㅋㅋ
-ㄹㅇ 나같으면 쪽팔려서 울었을듯
-걍 여기까지 하자 우준아 더 추해지기전에
-저 ㅄ새끼 그냥 ㅈㄴ 쎈척하는 거였네
-돼지새끼 허세 ㅈㄴ부리더만 별거없누
-^^ㅣ발 ㅋㅋ 내가 저런새끼한테 삥을 뜯긴 거였냐
-ㄹㅇ; 저딴 새끼한테 얻어맞던거 생각하면 치가 떨리네
평소의 행실이 업보가 되어 돌아온다.
채팅창에서 그에 대한 조롱이 빗발쳤다.
누가 봐도 유우준은 한계에 몰린 상태였다.
최재훈은 그걸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오케이. 덤비지 뭐."
지금 막 무대에 올라온 듯, 호흡은 산들바람처럼 평온하고 피부는 이제 스트레칭을 끝낸 것처럼 수분기가 막 올라오기 시작한 최재훈이 그렇게 말했다.
그는 유우준의 공격을 피할 때와 달리, 더 이상 자세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저 길을 걷는 것처럼 태연히 그에게 다가갔다.
'어, 어?'
정말로 올 줄은 몰랐는지 유우준이 당황하여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최재훈은 계속해서 걸어오고-
"이런 씨-!"
유우준이 그를 향해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퍽!
그렇게, 마침내 유우준의 주먹이 최재훈에게 닿았다.
"어!?"
-뭐야?
유우준을 비롯한 모두가 그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그들이 당황한 이유는 더 이상 유우준의 정타 성공이 아니게 되었다.
딱 봐도 일부러 맞아준 것 같은 최재훈의 태도였으며.
유우준의 주먹이 코를 스쳤는데도 눈 하나 꿈쩍 안 하는 최재훈의 모습이었다.
그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모습은 유우준처럼 조금도 꼴사납지 않았다.
무표정인 상태로 피를 흘리는 모습은 어딘가 섬찟했다.
그게 최재훈이 의도하는 바였다.
최재훈은 지금 이 모습을 지켜보는 유우준이 섬찟한 감정을 느끼길 바랬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어… 어…."
유우준이 처음으로 당황을 겉에 드러내곤 뒷걸음질 쳤다.
최재훈은 지체 없이 따라갔다.
"이, 이런 씨!"
유우준이 공격보다는 위협을 목적으로- 그러니까, 최재훈이 다가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팔을 휘둘렀다.
얼마나 간절한지, 여지껏 가장 맹렬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최재훈은 역시 가볍게 피했다.
그리고-
"어…."
여지껏 부드럽게, 그리고 경쾌하기만 했던 최재훈의 동작이 바뀌었다.
격렬하고 경동적으로 근육을 한껏 수축시키며 주먹을 장전했다.
유우준은 처음으로 최재훈의 주먹이 날아오는 과정을 눈으로 포착했지만 감히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신 생각했다.
'끝났다'고.
저걸 맞으면 자신은 반드시 다운된다.
뇌진탕에 걸려, 바닥에 꼴사납게 쓰러진다.
어쩌면-
'죽을지도….'
-툭.
"…어?"
유우준이 김 빠지는 소릴 냈다.
최재훈의 주먹이 닿기 직전 급제동이 걸리더니, 유우준의 턱을 툭 치는 수준에서 그친 것이다.
-해치웠나?
-??? 머야
-아니 뭐야 드디어 끝내나 했는데 ㅋㅋ
-ㅅㅂ 설마 저렇게 겁만 주고 끝내려는 거임? ㅋ
-점마 진짜 개쫄보 새끼네
-그냥 싸움만 잘하는 찐따네 ㅋㅋ
-그래도 마음 여린거 귀엽네 ㅋㅋ
-유우준이랑 척지면 피곤하긴하지
최재훈의 행동을 지켜본 몇몇이 지레짐작했다.
뒷감당을 생각해서 아무래도 저렇게 유우준에게 겁을 주는 정도에서 끝낼 생각인 것 같다고.
유우준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을 건드리고 난 이후의 뒷감당이 두려워 선을 넘지 않는 것이라고.
긴장이 풀린 그가 "하, 하, 하." 웃으며 폐에 남아 있던 긴장 섞인 숨을 내보냈다.
'그럼 그렇지.'
아무래도 격투기 좀 배운 것 같은데, 그래봐야 결국 찐따구만.
유우준이 다시 여유를 되찾고, 그렇게 우위를 느끼고 입을 열었다.
"잘 생가-"
-퍽!
그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날아온 최재훈의 잽이 다시 닫는다.
다시 또 유우준이 코에 통증을 느끼며 뒤로 밀려났다.
처음과 같이 코가 약간 짓눌리는 수준의 충격이었지만.
'아프다'고 느끼기엔 충분한 충격이었다.
동시에, 코피가 나오기에 충분한 충격이기도 했다.
유우준이 자신의 발 사이로 검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걸 확인하자 그의 안에 싹트고 있던 여유가 말라 비틀어졌다.
절망은 희망이라 느낀 게 사라졌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
드디어 끝났나 싶어 안심하려던 찰나 다시 시작되려 하자 유우준이 드디어 자존심을 버리고 소리쳤다.
"야, 그, 그만! 하, 항복! 항복!!!"
최재훈은 그걸 듣는 시늉도 안하고, 다시 또 커다란 한 방을 준비했다.
"씨, 씨발!"
유우준이 기겁하며 투정부리듯 휘두르는 팔을 간단히 피하고, 그의 안면에 그 준비된 한 방을-
-툭.
꽂아 넣는 척 하더니, 이전처럼 제동을 걸고 툭.
그러나 유우준은 이전처럼 안심하지 못했다.
예상대로, 뒤이어 잽이 꽂혔기에.
그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됐다.
유우준은 겁에 질렸다기보단 진절머리가 난다는 것처럼 소리쳤다.
"아, 항복! 항복이라고! 내가 졌다고 개새끼야!"
"상대방 KO 당할 때까지라며."
"뭐!?"
"니가 그렇게 각서 쓰자고 했잖아."
분명 시합 경기 전 유우준은 최재훈에게 도망칠 여지를 완전 빼앗기 위해 그렇게 적어 넣었었다.
"아니, 시발아! 그건 그거고!"
최재훈이 커다란 한 방을 정말로 먹일 의중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언제 죽었었냐는 듯 다시 살아나는 주둥이.
최재훈은 좀 더 확실한 계기를 줘야 할 필요를 느꼈다.
"우욱!"
유우준의 배에 주먹이 꽂힌다.
뭐, 주먹이래 봐야 코를 쳤을 때처럼 부상을 입진 않고 적당히 속이 뒤집어져 토악질을 할 정도의 압박을 준 거지만-
최재훈의 목적엔 적합했다.
유우준과 달리 최재훈의 목적은 상대방을 반 불구로 만들어 놓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상호 협의 하에 각서를 쓰고 안전기구를 착용한 뒤 링 위에서 진행한 스파링이라곤 하나,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부상을 입히면 일이 복잡해질 수가 있었다.
최재훈의 목적은 문제를 스마트하고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문제는 뭘까.
이번 일로 유우준을 비롯하여 학교 먹이사슬 최상위에 군림하는 김태한 패거리와 엮여서, 향후 김경식과 신소하의 학교생활이 복잡해지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떡해야할까.
김태한 패거리가 두 명에게 개수작을 부릴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들어야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김태한 패거리가 두 명에게 개수작을 부릴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들까.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셋을 건들면,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그렇다면 그 인식을 어떻게 심어주는가.
간단하다.
겁을 주면 된다.
여지를 남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그렇다면 어떻게 철저하게 겁을 주는가.
가장 간단한 건 역시 유우준이 자신에게 하려 했던 짓을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것이다.
철저한 폭력.
하지만, 그 경우 일이 상당히 귀찮아질 공산이 높다.
따라서, 최재훈은 번거롭지만 크게 돌아가기로 했다.
링 위에 올라서, 유우준을 자유롭게 풀어준다.
뭐든 할 수 있도록.
하지만 체력적으로나 한계에 달할 때까지 자신에게 손조차 대지 못한다.
그렇게 농락당하다보면 무기력감을 느끼고, 정신적으로 한계에 달하게 된다.
이는 심신을 극한 상태로 몰아넣어 여유와 판단력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철저한 폭력과 동일했다.
그리고, 철저한 폭력 뒤엔 모든 자극이 과장되어 공포로 다가온다.
폭력을 당한 뒤엔 상대가 손을 약간 들기만 해도 몸이 절로 웅크려지는 것처럼.
실제로, 바닥에 쓰러져 점심시간에 한가득 먹어 치운 빵을 게워내고 있는 유우준은 지금 최재훈에게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입은 부상이라곤 겨우 코의 찰과상과, 복부 압박뿐이었으나, 한계에 달한 몸과 마음은 사람을 유약하게 만든다.
속을 게워내던 유우준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속을 다 게워냈지만 여전히 엎드려있는 그에게 최재훈은 말한다.
"계속 해야지?"
유우준이 몸의 흠칫 떨렸다.
이내-
"재, 재훈아!"
다급히 최재훈의 다리에 매달렸다.
"내, 내가 진짜 잘못했으니까… 어? 그, 그만하자. 내가 졌어! 졌다고!"
그러자, 최재훈은 자리에 쭈구려 앉아 가까이서 유우준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유준아."
조금의 악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능청스러운 어조.
유우준이 기대를 담아 고개를 들었다.
최재훈은 목소리처럼 조금의 악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유우준은 그 얼굴을 보면서도 격렬한 불안감과 공포를 느낀다.
코에서 시작되어 입가 주위를 물든 핏자국이 섬뜩했다.
최재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우준은 부들거리는 팔다리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계속 이렇게 어물쩍거리면 저 표정이 어떤 표정이 될까 두려웠다.
그는 조금이라도 최재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씩씩하게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부들부들 떨리는 팔다리.
얼굴 가득 흐르는 땀인지 아니면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눈을 타고 떨어진다.
진정되지 않는 떨리는 호흡은 흐느낌과 다르지 않았다.
단언컨대, 여지껏 가장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
"…."
하지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웃음을 참지 않았다.
몇몇은 넋이 나간 듯 입을 떡 벌렸고.
몇몇은 입을 가리고 경악하고 있었고.
몇몇은 더없이 심각한 표정이 됐다.
최재훈이 구태여 유우준의 코피를 터뜨리고, 토악질을 유도하는 등의 시각적 연출을 신경 쓴 이유였다.
유우준이 느끼고 있는 '겁'이 순조롭게 다른 김태한 패거리들에게도 전이되었다.
최재훈의 목적이 더는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이뤄진 순간이었다.
그가 유우준과의 거리를 두 발짝에서 한 발짝으로 좁혔다.
유우준은 그저 자세를 유지한 채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동정심이 일거나 하지는 않는다.
유우준은 다른 사람이 눈앞에서 똑같이 애처로운 모습을 해도 눈 하나 꼼짝 안 할 위인이란 걸 알았으니.
하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아니 뭐냐 저거 ㅁㅊ;;
-저러다 진짜 돼지 잡겠는데?
-적당히 좀 하지;;
-이쯤되면 그냥 유우준이 불쌍하네
-너무 과한데
-누가 쟤좀 말려봐 유우준 진짜 죽겠다
-경찰에 신고해야하는거아님?
연출이 너무 효과적이었던 탓일까.
그 광경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어느새 최재훈이 가해자고 유우준이 피해자라 여기고 있었다.
"쯧."
김태한이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혀를 찼다.
최재훈을 노려봤다.
최재훈은 채팅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하진 못했지만, 자신이 무슨 행동을 취해야 할지는 알고 있었다.
"유준아."
유우준이 대답대신 고개를 달달 떨며 주억거렸다.
채팅창의 반응이 더욱 격렬해졌다.
최재훈을 향한 비난이 거세졌다.
김태한이 글러브를 착용했다.
링위로 올라가려고 준비를 하던 그때였다.
들리지 않는 채팅창의 외침에 대답하듯, 최재훈은 명료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다른 애들 돈 뺏고, 괴롭힐 땐 그렇게 신나 보이더니. 지금은 왜 그래."
김태한과 유우준의 몸이 동시에 흠칫 떨렸다.
"당황스럽다 우준아, 내가 사실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아서. 너가 좀 알려 줘라. 넌, 이럴 때 어떻게 했어? 다른 애들이 너한테 울고 빌면서 제발 그만해달라고 싹싹 빌 때. 아니면 그렇게 힘들어 할 때. 넌 어떻게 했어?"
"…."
"일단, 방금 전 내가 봤을 땐. 어떤 여자애. 반 친구 도와주려는 그 착한 애를 반 애들 다 있는 데서, 믿는 구석도 없으면서 요즘 들어 부쩍 분위기 못 읽고 나대는 찐따로 만들어 버렸고."
"…."
"니 힘들 때 선뜻 돈 빌려줬다는 남학생, 걔가 돈 갚을 수 있겠냐 물어보니 마찬가지로 반 애들 다 있는 데서 빌린 돈 못 받아도 좋다고 실실대는 한심한 찐따로 만들어 버렸고."
"…."
"나도 그대로 하면 되나? 니 방식대로? 아니면 어떡할까. 알려줘 봐. 너 이쪽 방면에 전문가 같으니까, 전적으로 니 의견 따를게."
유우준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몸의 떨림과 흐느낌도 멈췄다.
채팅창의 규탄 역시 멈췄다.
대신, 물음표가 도배되기 시작했다.
일부는 잊고 있었던 사건의 전말이 기억난 것이다.
일부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사건의 전말에 그제야 관심이 간 것이다.
-??? 뭔 이야기임 저거?
-그러고 보니 얘네 둘 왜 싸우는 거임?
-나 최재훈 쟤랑 같은 반인데 오늘 유우준 쟤가 어떤 애 삥뜯고 빵셔틀 시키려는거 최재훈이 말렸음-ㅇㅇ 최재훈이 말리니까 저 새끼가 그냥 혼자 빡쳐서 주먹질하더니 학교 끝나고 각서 쓰고 스파링뜨자 한 거 -신소하라는 여자애도 말리려 했는데 다른 애들 앞에서 걍 걔 병신만들어버리던데?
-찐따 새끼가 뭐믿고 쳐나대냐고 했었나?
-아니 병신들아 말했잖아 유우준 저거 불쌍하다고 해주면 안되는 쓰레기새끼라니까 내가 저새끼한테 뜯긴 돈이 얼만데 -아 ^^ㅣ발 ㅋㅋ 저 좆밥새끼한테 괜히 쳐맞고 다녔네 -ㅅㅂ 돼지새끼야 내 패딩 언제 돌려줄건데 -화장실 구석 확인해보셈 ㅋ 내 체육복은 거기있더라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일부 시청자들이 목소리를 드높였다.
다른 시청자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소위 일찐, 그 중에서도 특히 질이 나쁜 유우준 같은 부류의 학생은 어느 학교에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부류들은 으레 학교생활을 하며 친구보다 더욱 많은 피해자를 만드는 법이었다.
그들은 때로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여론은 아주 간단히 뒤집혔다.
시청자들은 입을 모아 유우준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고 보니 김민성 얘는 뭔데 이딴걸 좋다고 찍고 자빠졌던 거임?
-얘 유우준이랑 친구잖아 ㅋ
-유유상종이 아니라 유우상종이네 ㅋㅋ
-김민성 이 새끼도 씨발 ㅋㅋ 빽믿고 허굿날 다른 새끼들 ㅄ취급하고 다녔잖아-지랑 썸타는 애 다른 여자애들이 괴롭혀도 그냥 냅두고 ㅋㅋ
그 불똥은 같은 부류인 김민성에게 튀었다.
그 불똥이 피워낸 불은 나아가 김태한 패거리 전체로 번진다.
수천 명의 시청자들이 일제히 그들을 비난했다.
그리고-
-야 근데 최재훈이랬나?
-쟤 그럼 김경식이랑 신소하 대신해서 유우준 정의구현한 거임?
-와 ㄹㅇ;; 쌉호감이네
-쟤 몇반임?
-쟤 우리반
-우리반이 어딘데 ㅄ아
-2학년3인데 쟤 맨날 퍼질러 잠 ㅋㅋ
-선생님들이 안 깨우고 냅두던데 무서워서 그런 거였누 ㅋㅋ-아 ㅋㅋ 싸우면 지는데 어케 체벌하냐고
-야 재훈아 김태한 그새끼도 참교육좀 시켜줘라
-ㄹㅇ ㅋㅋ 그새끼도 복싱 배운다고 ㅈㄴ 나대지 않나?
-야근데 지금 보니까 쟤 비율 ㅈㄴ좋은것 같은데?
-야 민성아 재훈이 얼굴 좀 자세히 보여줘봐
-여기 덕성고랬나?
-나 근천데 재훈이 동생 함 구경하러 가볼까 ㅋㅋ
-ㄹㅇ ㅈㄴ 기특하네
-나 학교 다닐때도 저런 애가 있었어야했는데
넋이 나간 김민성의 어깨 너머로 그 채팅창을 확인한 제나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김태한 패거리의 눈엔 얄밉기 그지없는 비웃음으로 보이는 그 표정은-
-굿 잡.
최재훈에겐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찬 아주 흡족스러운 미소로 보였다.
정확했다.
지금 제나는 현 상황이 아직 채 종료되지 않은 지금 벌써 다음 페이지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써내려나가고 있었다.
이 상황이, 자신이 바라는 상황으로 흘러갈 거라는 사실에 한 치의 의심조차 가지지 않고 말이다.
-쾅!
체육관의 문이 격하게 열렸다.
한성 체육관의 관장인 한성준이었다.
예상보다 이른 그의 도착에 김태한 패거리가 당황했다.
스파링 방송이 예상보다 지체되어 한성준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너 이 자식! 김태한! 저거 니 친구 아니야! 니 친구 얻어맞는데 뭐했어! 그리고, 장규성! 너 뭐야, 너 뭔데 애네 이 난리 피우는 걸 가만히 냅둬! 니가 뭔데 심판을 보냐고!"
관장이 그들의 심판을 봐 줬던 훈련생을 힐난했다.
"어, 아니… 그… 애들 학교에서 싸우는 거 깔끔하게 스파링으로 푼다길래…."
"그게 말이 되는!"
되도 않는 변명은 당연히 일갈을 불렀다.
"너, 이거 책임질 생각하고 있어."
관장, 한성준은 노발대발해서 다음은 링 위를 쳐다봤다.
보니까, 복싱 좀 배운 놈이던데-
어디서 굴러먹던 정신 나간 새끼길래, 일반인을 저렇게 반죽음을-
"최재훈?"
어디서 굴러 먹던 정신 나간 새끼의 얼굴을 확인한 한성준이 설마, 하며 목소리 끝을 물음표로 샾 처리했다.
최재훈이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갤 꾸벅 숙였다.
한성준은 당황하길 잠시-
"야, 최재훈! 너 이 자식! 내가 그렇게 입이 마르고 닳도록 얘기했는데! 너 임마! 이렇게 일반은 데려다가 반 죽여 놓으려고 복싱 배운 거야!? 이럴 거면 왜 그만 뒀어!? 사람 패는 게 그렇게 좋으면, 어!? 이 깡패 새끼…!"
격정적으로 꾸짖는 그는 화난 듯 보이기도 했고, 안타까운 듯 보이기도 했다.
"아, 관장님 잠깐만요. 진정하시고 제 이야기 좀-"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 쟤가 저렇게 만신창이가 됐는데!"
뭘 숨기랴, 최재훈은 솔직하게 말했다.
이번에도 역시 시청자들과 이들에게도 명확히 전달되도록 또박또박.
지금 유우준이 입은 부상이라 해 봐야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그저, 자기 친구들 못 괴롭히게 약간 겁을 준 거라 적당히 봐줬다고.
때문에 코피 약간 흘리고, 위 비운 게 고작일 것이라고.
관장은 즉시 유우준의 상태를 확인했다.
정말이었다.
아예 주저앉았을 줄로 알았던 코는 내부가 아주 약간 찢어진 게 고작이었고.
명치엔 멍이 들려는 징조조차 보이질 않았다.
최재훈의 해명처럼 아무것도 아닌 부상을 코피와 구토로 부풀려놓은 것뿐이었다.
오히려 부상의 정도는 적당히 봐준 주먹에 얻어 맞은 유우준보다, 혼신의 힘을 담아 내지른 주먹에 얼굴을 가격당한 최재훈이 더 클 정도였다.
뭐, 그것도 결국 뼈는 멀쩡하여 가벼운 찰과상에 불과했지만.
"그래 재훈아, 네가. 응? 그렇지. 그렇게 생각 없는 녀석은 아니지. 후…."
"악!"
그 모두가 최재훈이 신경 쓴 결과라는 걸 어렴풋 눈치챈 한관장이 최재훈의 등을 퍽퍽 쓰다듬으며 안도와 분노가 반씩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어?"
"뭐야, 무슨 일이야?"
한관장에 이어서 선수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같은 체육관에 다니는 후배인 김태한에게 시선을 향했다가-
"어!? 최재훈?"
"너 재훈이냐?"
"아니, 이 새끼. 여긴 웬 일이야?"
곧바로 최재훈에게 관심을 빼앗겼다.
"한률이 형 보고 싶어서 왔죠."
"뭐라는 거야 미친놈아, 큭큭. 이 새끼 면상 봐."
"도대체 어떤 새끼야, 우리 재훈이 화장실 닦는 대걸레마냥 만들어 놓은 새끼가."
"재훈아, 도대체 누구한테 쳐 맞은 거냐?"
"지금 형들한테 맞고 있는 게 더 아픈데요."
그 중에는, 김태한 패거리를 아끼는 3학년 정찬욱도 있었다.
그가 유우준과 최재훈을 번갈아 보더니 쯧 혀를 차며 고갤 가로저었다.
"야, 재훈아. 미안하다. 어디 안 다쳤냐?"
그는 유우준이 아닌 최재훈에게 다가갔다.
"아니, 형은 갑자기 또 왜 미안해요."
"저 새끼들 간수 제대로 못한 내 잘못이지. 재은이는 잘 지내고?"
"혹시, 재은이 남친 생겼냐?"
"뭐!? 시발, 어떤 새끼야!"
"걱정 마십쇼, 형님들 꼴값 떨 것 없이 제 손에서 컷할 테니까."
"크, 이 믿음직스러운 새끼."
"처남, 재은이한테 안부 전해줘."
"처남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넌 오늘 좀 처맞자."
정찬욱이 자신들이 아닌 최재훈을 먼저 챙긴다.
최재훈이 체육관 식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김태한 패거리는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눈만 꿈뻑거릴 따름이었다.
"어, 거기 너! 김민성 맞지! 너 아직 방송 안 껐어!?"
그러던 와중 한 관장이 소리쳤고, 김민성은 다급히 핸드폰을 조작했다.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 * *
일명 스파링 사건 직후 덕성고에는 폭풍이 몰아쳤다.
가장 먼저, 방송 녹화분을 본 유우준의 부모가 최재훈을 고소하겠답시며 길길이 날뛴 것이다.
하지만, 방송 녹화분에 따르면 링 위에서 먼저 주먹을 휘두른 쪽은 유우준이었다.
장장 십 수 분 동안 일방적으로 공격한 쪽도 유우준이었다.
스파링의 발단이 된 교실에서의 사건에서도 유우준은 같은 반 학생을 겁박하며 갈취하고 있었고.
그걸 말리는 최재훈에게 먼저 팔을 휘둘렀다.
그들이 길길이 날뛴 바.
여론은 오히려 유우준에서 최재훈에게 더욱 가까워졌다.
그렇게 그들은 역풍에 휘말렸다.
스파링 사건으로 학무보회 사이에서 교내 괴롭힘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동안 유우준을 위시한, 폭력을 일삼은 불량아들에게 금품을 갈취당하거나 폭행당한 학생들의 부모가 입을 모아 강력하게 항의했다.
학생들이 괴롭힘을 당할 때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식이 부모들의 도움을 바라지 않아 그들에게 비밀로 하기 때문이다.
학교 일에 부모를 끌어들이는 일은 학생 사이에서 튀어 따돌림을 당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고.
처벌 받은 가해자에게 보복당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으니.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자식이 말하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부모의 귀로 들어갔고.
모든 부모가 나섰기에 딱히 자신이 튀게 될 일도 없으며.
무엇보다, 이번 스파링 사건으로 불량아들의 입지가 크게 추락하여 보복을 겁내지 않아도 됐다.
폭력으로 남들 위에 서는 그들의 대표격 존재였던 유우준이 방송에서 그런 망신을 당해 버렸으니.
덕성고에서 만큼은, 그들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자식들이 적극적으로 부모에게 협조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학교 내외로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던 주말은 금방 지나가고 월요일이 찾아왔다.
학교에 이렇다 할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건 아니었다.
아니었지만, 학생들은 변화를 피부로 실감했다.
학교 드문드문 악성 종양처럼 자리 잡고 있던 위화감이 사라졌다.
그 위화감을 자아내던 불량아들이 몸을 사려야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덕이었다.
그 중심에는 최재훈이 있었다.
알아보니 최재훈은 중학생 시절 전국 대회인, 대통령배 대회 중학생부 미들급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미친놈이더라.
김태한의 빽인 줄 알았던 체육관 다니는 3학년 선배들이, 사실은 최재훈의 빽이더라.
중학생때 최재훈을 건드렸던 놈들은 다음날 학교에서 보이지 않았다더라.
최재훈이 제대로 하면 유우준이고 김태한이고 5초 컷이 날 게 분명하다더라.
최재훈은 축지법도 쓸 줄 안다더라.
최재훈은 부랄과 젖꼭지가 각각 세 개인데 그게 바로 강함의 비결이라더라.
스파링 사건 이후 다음 등교까지 최재훈과 관련된 별의별 소문이 만들어져 모든 학생들에게 퍼졌고, 모든 학생들이 최재훈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들 또래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재훈은 간단하게 덕성고를 먹어 버린 것이다.
'이게 뭔….'
최재훈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간단하게 먹긴 뭘 먹어, 학교가 케이크도 아니고.'
이 시절의 최재훈은 아직 김경식에게 힘숨찐 물을 추천받지 않아, 그 참맛을 모르고 있던 때였다.
프로로 데뷔할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되어, 남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샤이한 영혼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용한 학교생활을 지향했던 그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학교에 일찍 등교하여 자고 있던 지금, 엎드린 자세 그대로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잠에 들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주변은 오히려 평소보다 조용했지만, 그게 이유였다.
자신은 신경도 안 쓰고 잘만 떠들어대던 녀석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며 음량을 줄이는 게 아닌가.
거기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자신과 관련된 속삭임.
최재훈에겐 익숙해져 화이트 노이즈가 되었던 2-3의 소리가 소음으로 변질됐다.
그때, 반이 조용해졌다.
김경식이 반에 들어오자, 행동을 일제히 멈추고 최재훈의 유일한 친구인 그에게 격렬하면서도 은밀한 관심을 보인 것이다.
김경식 역시 그런 반응이 부담스러워, 즉각 자리로 가 최재훈처럼 자리에 엎어졌다.
머지않아 신소하.
이번에도 학생들은 그녀의 눈치를 봤고, 신소하는 그런 반응을 즐겼다.
자신을 매정하게 내버렸던 이들에게 눈길 한 번 안 주고 모델이 워킹을 하듯 당당하게 반을 가로질러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싱글벙글, 콧소릴 내며 핸드폰 삼매경에 빠졌다.
이따금 최재훈을 쳐다보며 말이다.
갈수록 뒤통수와 등에 박히는 관심이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최재훈은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고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던 그때, 주변이 웅성거렸다.
툭툭.
누군가 등을 콕콕 찔렀다.
"어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몸을 들어 시선을 향한 그곳엔 특유의 짓궂은 비웃음을 머금은 전학생이 있었다.
그녀가 실실거리며 말했다.
"어이, 일찐참교육남."
"…!"
최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래, 내가 일찐참교육남이다."
근엄하게 선언하는 그의 팔다리는 롤케익처럼 돌돌 말려 있었다.
너무나도 오그라드는 명칭에 그는 심장마저 돌돌 말리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오그라들고 쪽 팔린지, 식은땀이 다이렉트로 나와 등골을 적셨다.
"큭큭큭."
그런 그를 보곤, 제나가 실소를 터뜨렸다.
최재훈은 뒤늦게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진심이냐? 그 네이밍 센스…? 그게 니 최선이니…?"
최재훈이 진절머리를 치자 제나는 마냥 웃기다며 '큭큭'웃음을 삼킬 뿐이었다.
이내, 그의 책상에 걸터앉는다.
긴 다리를 꼬곤, 속내를 알 수 없는 비웃음을 짓고 최재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지은 거 아닌데~?"
"…그럼 어떤 새낀가요? 제가 직접 처단하겠습니다."
"글쎄다, 보니까 사람들이 다 그렇게 부르고 있던데?"
"뭐?"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최재훈에게 제나가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잇츠그램과는 또 다른, 커뮤니티 성향이 강한 SNS의 한 게시글이었다.
조회수가 무리 수십만에 육박하는 그 글은, 예의 스파링 사건을-그 중에서도, '일찐참교육남'이라 불리는 누군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최재훈, 그의 활약이 담긴 편집 영상과 함께 말이다.
"우리 약속 미뤄진 거 기억하지? 오늘 학교 끝나고-"
제나는 거기까지 말한 뒤 어딘가 근질거리게 만드는 미소를 지으며 '으흠?'콧소릴 울렸다.
무슨 말인지 알지?
그 모든 게 어두운 교실 단 둘뿐이었던 이전과는 달리, 수십 명의 학생이 지켜보는 밝은 반에서 이루어졌다.
그녀의 의미심장한 행동에 반의 분위기가 요동쳤다.
거리낄 게 없어진 제나가 미쳐 날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