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 외전 역전의 제나 9
"그런 줄 알고, 오늘 학교 끝나고 남아. 언더 스탠?"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제나.
최재훈은 무릎 꿇은 자세로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말을 해석했다.
이윽고 그녀의 말이 해석되자-
"크허어어엉!!!"
바닥에 엎드려 대성통곡하는 시늉을 했다.
"뭐야, 그렇게 감동 받았어?"
제나가 최재훈을 내려다봤다.
그의 정수리가 자신의 발 밑에 있었다.
왠지 그 위로 발을 올려놓고 싶었지만 인간적으로 참았다.
인간적으로 정수리는 참고, 등 위에 발을 올려놨다.
친히 신발까지 벗어 줬으니 참으로 자비롭고 대단한 위인이셨다.
최재훈이 더욱 크게 통곡했다.
그의 등 위에 올려놓은 발에서 진동이 타고 올라왔다.
제나는 간지러워서 급히 발을 떼냈다.
그러자 벌떡 몸을 들어올려 제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최재훈.
"이건 완전 얼빠진 가시내 아니야!!!"
"뭐야 갑자기. 조울증 있어? 갑자기 왜 지랄이야."
"니 말하는 거 봐라! 내가 지랄 안 하게 생겼어!?"
"나? 싸가지 없다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네."
뻔뻔함이 경지를 넘어서면 자각조차도 없게 된다.
제나가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면 혹시 뭐, 그건가? 나 같은 년 밑에서 일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
"아니, 임마…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임마. 사내자식 찡찡대는 소리 듣기 짜증나니까 그만 찡찡대고, 뭐가 불만인지 확실히 말해. 뭔지 알아야 해결해 주든가 말든가 하지."
제나의 말대로 이제 와서 그녀의 싸가지 없음에 불쾌함을 느끼는 건 참으로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최재훈이 지금 난리 법석을 피우는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자신의 새로운 보스의 싸가지가 심히 결여되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
"그러니까 니 말은, 니가 날 방송 도우미로 고용하겠단 소리잖아. 시급 2만 원에, 정식으로. 그렇지?"
"그렇지."
"그러면 나한테 임금도 니가 주겠고. 그렇지?"
"그렇지."
"당연히 임금 줄 돈은 있겠고, 그치?"
"당연한 걸 묻냐."
"아까 최소 3개월 이랬으니, 천만 원 정도 있겠고."
"오, 정확해. 짜식. 이때부터 똘똘했구나."
제나가 피식 웃었다. 기특하다며 그의 팔뚝을 툭툭 두드려줬다.
검은 양말 신은 발로 말이다.
최재훈은 이번에도 역시 새삼 불쾌함을 느끼거나 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의 또래 남자들의 업계에선 포상에 속할 상황이었다.
"뭐 그래서, 결국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친구야, 혹시나 해서 묻는데. 너 따로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니? 했었거나."
"아니?"
"그래, 그렇겠지."
"그래 그렇겠지? 뭐지 그건, 무슨 의미지? 묘하게 꼴 받는데?"
"뭔 의미긴, 니가 세상 물정 1도 모르는 철없는 아가씨라는 의미지! 야 이 자식아!"
최재훈이 답답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그 돈을 어떻게 받아 이 자식아!"
"뭐?"
"그 돈이, 니 돈인 줄 알아!?"
싸가지가 심하게 없어 싸이코패스인 게 아닌가 의심되는 동급생을 보스로 받들어 모시는 건 전혀 문제가 안 된다.
그녀가 세상 물정 모르는 철 없는 꼬꼬마라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러한 점은 최재훈의 입장에선 귀엽고 기특하게까지 느껴졌다.
그 기저에 자신에 대한 호의가 깔려 있다는 걸 거듭 느끼고 있었으니.
결국 그가 신경 쓰는 부분은, 돈.
정확히는 돈의 출처였다.
세상물정 모르는 철 없는 고등학생이 아르바이트도 안 하고 천만 원을 모을 수 있을가?
단연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돈이 어디서 나왔을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친인척들의 지갑이다.
부모에게 받은 돈.
친척들에게서 받은 돈.
용돈.
최재훈은 그 돈을 임금으로 받을 수가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 코 묻은 돈을 어떻게 받아!'
같은, 윤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저, 그 돈의 안정성을 믿지 못해서였다.
용돈으로 받은 돈인 이상, 그 돈의 주도권은 오롯이 제나에게 있지 않다.
만약 제나의 친인척이, 18살 딸 혹은 조카의 통장에서 매일마다 10만 원씩.
한 달 동안 총 300만 원이 넘게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돈의 사용처를 궁금해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용처가, 같은 학교 동급생을 시급 2만 원으로 부려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간섭할 여지가 매우 높았다.
외부 개입에 좌지우지될 불확실한 자금이요, 계약인 것이다.
최재훈의 우려는 몹시 합당했다.
제나가 잠깐 동안 최재훈의 말을 곱씹더니 고갤 주억거렸다.
"니가 뭘 걱정하는 건지는 알겠어."
그리곤 음흉하게 웃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걱정 안 해도 돼."
"뭐?"
"내가 번 돈 맞거든."
"가족이나 친척들이 준 돈을 '받은 돈'이라고 하지, '번 돈'이라고는 안 해."
"아까부터 묘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이네? 뭐, 알바하는 나는 너와 다르게 번듯한 사회인이다~ 어른이다~ 이거야? 깜찍하네."
"그래 임마! 니 같이 용돈으로 천만 원 모을 수 있는 애 앞에서 이런 거라도 자랑해야지!"
"뭐, 어쨌거나. 진짜야. 내가, 가족이나 친척한테 맏아서 모은 돈이 아니라. 진짜, 내가 번 돈이라고."
"…아까, 아르바이트 안 해 봤다며?"
"아르바이트는 안 해도, 다른 쏠쏠한 돈벌이가 있거든."
잇츠그램.
제나의 입에서 그 단어가 언급됐다.
"잇츠그램?"
"아무래도 내가 SNS에서 좀 잘나가는 것 같거든? 이것 저것 하면서 돈을 좀 모아 뒀더라고."
"…그걸로 돈을 벌 수가 있는 거야? 뭐, 어떻게 버는 건데?"
"그냥 뭐, 내 경우엔 워낙 미인이다 보니까- 뭐, 임마. 뭐야 그 눈빛. 뒤질래?"
"아니, 계속 말씀하시라고요."
"이곳 저곳에서 옷, 화장품, 구두, 하여튼 별의별 것들이 다 협찬 오거나 광고 문의가 오는데. 그러면 대충, 부탁 받은 거 입고 사진 찍어서 올리는 거지. 그리곤 짱이쁘다~ 와~ 너무 좋아~ 이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해 주고. 그러면 적게는 몇 십에서 많게는 몇 백씩 들어와."
"…."
제나의 말을 들은 최재훈의 얼굴에선 넋이 빠져나가 있었다.
"또 왜."
이내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쓰디쓴 소주가 나한텐 달디단 음료수 같다며 들이키곤 '적셔'라고 말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 그냥… 별건 아니고… 세상의 부조리함과 허무함을 느껴버렸다고 해야 하나… 내 피땀 어린 노동 한 달의 가치라 해 봐야 결국, 인플루언서의 1분보다 못하다는 거지…."
제나는 그런 최재훈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이번엔 자리에 일어서서 손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말했다.
"니도 나중에 그렇게 될 거야."
"뭐?"
"남들한테 세상의 부조리함과 허무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방도가 없으면서도, 확신에 들어찬 그 말에선 묘한 이끌림이 느껴졌다.
"자, 그러면. 이야기 끝난 거지? 오늘부터 니가 내 따까리 하는 거."
"…매니저라는 좀 더 건전한 호칭이 존재하는 걸 아시나요?"
"당연히 알지."
"당연히 알면서 왜-"
"당연히 알면서 왜 따까리라 불렀을까. 잘 생각해 봐."
최재훈의 얼굴이 불안감으로 구겨졌다.
"아, 그런데요 주인님."
"주인님? 뭐야 갑자기."
"지금부터 미리 마음가짐을 정해 둬야 나중에 가서 덜 힘들 것 같아서요."
"바람직한데?"
"헤헤, 감사합니다요."
최재훈이 간신배 같이 입가를 오므리며 비굴하게 손을 싹싹 비비며 말했다.
제나가 질색했다.
"그래서 뭐, 할 말이 뭔데."
"그 오늘부터 바로 주인님 따까리가 된다는 거 말인뎁쇼."
"말투 좀."
"그, 오늘부터 바로 시작하는 건 좀 힘들 것 같아서."
"왜? 아, 혹시 알바 때문에? 그거 어차피 이제 때려 칠 거잖아."
"이제 때려 쳐도, 제대로 때려 쳐야지. 다른 알바 구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대로 인수인계 하고."
"아~ 또 답답한 소리 하네, 짜증나게. 그거 그냥, 문자로 나 때려 칠 거니까 알아서 돈 붙여라~ 해도 사장이 아무것도 못해."
"기억해 뒀다가 다음 일하는 곳에선 꼭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으, 왓 어 뻐킹 덤브."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나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 간혹 보이는 융통성 없이 성실한 모습 또한 그녀가 아는 그의 모습이었기에.
"그러면, 뭐. 언제부터 가능할 것 같은데?"
"글쎄다."
"혹시 내일, 토요일에도 알바 나가냐?"
"어."
"그럼 저녁에 안 되면 아침에 시간 좀 내. 우리 부모님이 너 좀 보재신다."
"너희 부모님? 아 어제 그 분, 뭔지 몰라도 일단 오케이."
"아 그리고, 니 알바 6시라고 했지."
"응."
"학교 끝나고 알바 갈 때 까지 시간 좀 있겠네."
"그렇지?"
"그러면 학교 끝나고 시간 좀 내라."
"어… 그러면 그것도 시급 나오나요?"
"하."
제나가 특유의 비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서 최재훈과 마주선 뒤, 품에서 빳빳한 오만 원 권 지폐 두 장을 꺼냈다.
그리곤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최재훈은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공손히 양손을 내밀었다.
제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재훈이 따라서 고개를 가로저은 뒤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나가 삐딱하게 섰다.
최재훈도 따라서 삐딱하게 섰다.
제나가 왼쪽 손을 치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최재훈 역시 왼쪽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제나가 오른쪽 손을 거만하게 내밀었다.
최재훈 역시 오른쪽 손을 거만하게 내밀었다.
훨씬 낫네.
제나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유창한 영어로 중얼거렸다.
그의 오른손 위에 지폐를 내려놓곤, 그의 팔뚝을 툭툭 치며 이번에도 역시 영어로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영어로 말하는 그녀는, 한국어로 말할 때보다 목소리의 톤이 몇 단계는 높아져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신발 신은 발로 주저 없이 책상을 밟고 창문을 넘어가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곤 자신의 손에 놓인 5만 원 권 지폐 두 장을-
'왠지 잘못 걸린 것 같은데.'
-독이 든 성배를 마시는 기분으로 가방에 고이 집어넣었다.
그리곤 제나가 책상 위에 찍어 놓은 발자국을 지운 뒤, 다시 잠에 청한다.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걸까.
막 학교에 도착하며 잠을 청할 때 느꼈던 절박함, 무거운 불안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자신을 깨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이 기세라면, 오늘 방과 후까지 푹 자고 상쾌한 기분으로 제나와 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는, 그의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만다.
* * *
현재 덕성고 최대 화제의 인물은 단연코 전학생, 제나 웨스트였다.
어제 1교시부터 그녀의 비현실적인 외모와 비범한 성격은 꾸준히 학생들의 입에서 귀로, 귀에서 입으로 이동하길 반복했다.
결과, 방과 후때 쯤 2학년 안에서 만큼은 제나에 대해 모르거나 무관심한 이는 전무하다시피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사건이 터져 버린 것이다.
정문 계단 꼭대기에서 정신을 잃고 난간 아래로 추락하는 제나.
엄청난 높이에서 떨어지는 제나를 감히 구할 엄두 못 내고 도망치는 난간 밑 사람들.
그 사이에서, 홀로 주저 없이 뛰쳐나가 제나를 구하는 '누군가'.
-키 ㅈㄴ 크던데?
어떤 대화방에선 그런 이야기가 오간다.
-이야기 들어 보니까 얼굴도 나름 귀엽다던데
어떤 대화방에선 그런 이야기가 오간다.
-와 진짜 무슨 ㅋㅋ 난 무슨 영화 촬영하는 줄 알았다니까? ㅈㄴ멋졌음 ㄹㅇ 내가 여자였으면 반했다 -난 남잔데도 반했다 ㄹㅇ;
-게이야...
어떤 대화방에선 그런 이야기가 오간다.
-근데 걔 도대체 누구임?
-ㅁㄹ 구경한 애들 중에 아는 사람 아무도 없다던데?
-??? 아무도 모른다고?
-말이 되냐? ^^ㅣ발 전학생보다 인지도가 낮은 게?
-ㅋㅋㅋㅋㅋㅋㅋㅋ전학생보다 낯선 새끼 ㅋㅋㅋ
-사실 걔도 새로 전학온 애가 아닐까?
방과 후.
덕성 고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크고 작은 여러 채팅방에선 제나, 그리고- 전학생보다 낯선 남학생에 대한 이야기로 한창 불타올랐다.
그 열기는 시간이 지나자 차츰 사그라들었지만.
다음날 등교시간이 되자 다시 거세진다.
이미 전학생의 반이라고 소문이 쫙 퍼진 2학년 5반.
등교시간의 정문보다 많은 사람이 그 반 앞에 모여 있었다.
"으아아악!!"
"밀지 마!!!"
"누가 28주 후 브금 2분 30분부터 좀 틀어봐!"
"틀었어!"
"이거지!"
전학생을 구경하려고 창문과 문에 달려드는 그 묵시록적 모습은 좀비떼가 따로 없었다.
그때, 몇몇 남학생이 금기를 깨트리고 반 안으로 난입한다.
바쁘게 눈을 굴려 반 안을 훑는다.
"어!"
워낙에 눈에 띄는 머리색, 곧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삐딱한 자세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시큰둥한 얼굴로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주변은 바깥의 소란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텅텅 비어 있었다.
2학년 전 학급에서 구경꾼이 몰려올 정도로 그녀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와중, 정작 2학년 5반 학생들은 그녀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어찌 됐건, 반에 난입한 학생들에겐 희소식이었다.
그들이 히죽거리며 전학생에게 접근하려던 찰나였다.
"응?"
바깥의 소란이 갑작스럽게 멎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난입한 남학생들이 쳐다본 그 곳엔-
"니 뭐냐?"
"아."
김태한이 서 있었다.
전학생이랑 그 남학생 생각으로 가득 차 그만 깜빡했다.
이곳이 김태한의 반이라는 사실을.
허나 괜찮다.
난입한 남학생들은 그 행동력으로 미루어 알 수 있듯, 2학년 내에서 입지가 어느 정도 있는 이들이었다.
김태한과도 얼굴이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그렇기에 그들은 이번에도 살갑게 김태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니들 뭔데 여깄냐."
하지만 김태한은 무표정하게 인사를 무시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다.
"아, 그… 미안. 갈게."
그렇게 2학년 5반을 둘러싼 좀비들은 단번에 해산시킨 김태한이 곧장 제나에게 향했다.
"헤이, 제나~ 하와유~?"
방금 전 남학생들을 대할 때의 태도를 그대로 뒤집어 놓은 듯 살가운 표정과 인사.
그의 눈치를 보느라 굳어 있던 주변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제나는 그런 상황이 괜히 웃겨서 피식, 실소를 흘리며 그의 인사를 받아줬다.
덕분에, 나쁘진 않네.
제나의 예상과는 달리 김대한은 그녀의 유창한 영어를 알아들었다.
자신의 인사를 제대로 받아줬다는 걸 알고, 한층 들떠서 말을 이어갔다.
"뭐, 귀찮게 한 놈 없었어? 특히 김민성 그 새끼."
"아니 왜 또 나야~"
근처에 있던 김민성이 투덜대자 웃음이 BGM으로 깔린다.
제나도 피식 웃자, 김태한도 그제서야 웃는다.
"…."
하지만 곧바로 애매하게 굳는 표정.
지금 그의 생각은 아주 복잡했다.
'얘가… 레즈비언이라고?'
일단, 어제 접하게 된-
전학생이 레즈비언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분위기 좀 독특하고 잘생긴 애한테 관심 없다고 레즈비언이라니?
제나가 레즈비언이라 믿기 싫은 김태한은 그 소문을 전면에서 부정했다.
하지만 그런 김태한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증거물이 발견되었다.
누군가가 제나 웨스트를 알아보고, 그녀의 잇츠그램 계정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말이다.
그녀의 마지막 게시글.
모두의 뒤통수를 탁 치게 만든 게시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요즘 들어 너무 혼란스럽다.
이 나라엔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걸까?
미국에 계속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답답하다.
나는 도대체 어디 쪽 사람인 걸까.]
당시, 학교생활과 교우 관계가 잘 풀리지 않고.
그 이유가, 자신이 미국 사람이기 때문이라 여겨 국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던 '제나'의 푸념글이었는데.
SNS의 풍조에 충실하여 워낙에 감성적이고 애매하게 쓰여졌기 때문인지.
어제 제나의 '여성'스러운 분위기와 태도를 접한 이들에게-
[요즘 내가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동성애가 보편적인 미국이라면 이런 날 이해해 주는 사람이 많았을 텐데, 이 보수적인 대한민국에선 날 이해해줄 사람이 없다.
답답하다.]
-그렇게 왜곡되어 전달된 것이다.
벌써 일견에서는 '레나 제즈'라는 별명까지 떠돌고 있을 정도였다.
김태한은 제나가 정말로 레즈비언일까 사무치게 불안했다.
그 불안감은 제나와 인상적인 대화를 나눈 지금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김태한이 자리로 돌아와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김태한 : 헤이 제나
제나 : ?
김태한 :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김태한 : 너...
김태한 : 여자 좋아함?
보수적 성가치관을 가진 대한민국에서 남자에게 '야, 너 게이냐?' 라고 말하는 건, 결투신청에 가까웠다.
'여자'에게 '야, 너 레즈비언이냐?'라고 말하는 것 또한 같다.
"??????"
제나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김태한을 노려봤다.
제나 : 그게 뭔 소리야?
제나의 반응을 확인한 김태한은 그녀가 레즈비언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시키듯 확신했다.
그렇게 표정이 밝아졌다가-
다시 굳는다.
스크롤을 올리자 어제의 대화내역이 눈에 들어온다.
김태한 : 야
김태한 : 미친 괜찮냐?
김태한 : 큰일날뻔했다며
어제 사고 직후의 대화였다.
제나 : 어 괜찮아
제나 : 다행히 어떤 애가 구해줘서
김태한 : 아 그러냐? ㅋㅋ 다행이네
당시 문자 속 김태한은 쿨했지만, 현실의 김태한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사실, 어제 그 현장엔 김태한도 있었다.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였던 제나가 걱정되어 뒤늦게 그녀를 따라간 것이다.
그렇게,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그녀가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봤다.
'내가 아래에 있었으면, 내가 구해주는 건데….'
분하고 억울했다.
왜 그런 극적인 이벤트가 자신이 아닌 다른 놈에게 가는가.
어제, 이름도 모르는 '그놈'이 제나를 구한 뒤,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게 멀리에서도 보였다.
그놈은 그런 분위기에서 제나가 실려, 그녀의 모친이 끌고 온 차에 타고 사라졌다.
그 이후로 어떻게 됐는지 신경 쓰여 죽을 것 같았다.
방금 전, 어제부터 느끼던 불안감이 극에 달했던 것처럼.
어제부터 느끼던 조바심 또한 지금 극에 달했다.
4교시가 끝나고 김태한은 즉시 그녀의 자리로 향했다.
-헤이 제나, 오늘은 어때. 몸 상태 좀 괜찮아?
활동적인 구릿빛 피부에 금발 머리.
딱 봐도 공부를 좋아할 것 같은 인상으로 능숙한 영어를 구사하자 제나가 눈썹을 튕겼다.
-나쁘지 않아.
-영어 잘하네.
평소, 주변 여자들의 그 어떤 말에도 시큰둥하게 반응할 뿐인 김태한.
그가 제나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 됐다.
이렇게 영어로 대화를 나누니, 마치 서로만 아는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 두근거렸다.
-그러면 오늘은 학교 끝나고, 시간 낼 수 있는 거 맞지?
-뭐?
-내가 어제, 우리 동네 소개시켜준다고 약속했잖아.
그때-
"뭐야 뭐야~ 둘이만 영어로 무슨 얘기하는 거야~"
김태한 패거리에 속하는 남자와 여자들이 다가와 이야기에 끼었다.
"아, 오늘 학교 끝나고. 전학생한테 우리 동네 안내해 주려고. 다른 곳에서 전학 와서 잘 모르니까."
"오오오~~~"
"나도, 나도 갈래~"
"재밌겠다~"
자연스럽게 제나가 김태한 패거리와 함께 시내로 놀러나가는 게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빼면 분위기가 자살을 할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원래의 제나 같았으면 일말의 주저도 없이 관심 없다며 내뺐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 방과 후 그 사람과 만나기로 하지 않았던가.
'썅?'
하지만 제나는 난처하다며 속으로 욕을 내뱉을 따름이었다.
상황이 너무 복잡했다.
제나가 느낀 바, 김태한을 중심으로 한 이 패거리는 2학년에서 가장 높은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태한을 제외하면 그들이 자신에게 갖고 있는 인상은 어제 자기소개 때의 일로 인해 부정적인 쪽에 가깝다.
김태한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서 부득이하게 맞춰주고 있을 뿐.
그런 상황에서 김태한의 제안을 거절하고, 혹여 그걸 계기로 김태한과 반목하게 된다?
학교생활은 거기에서 끝난다고 볼 수 있었다.
음울한 따돌림에 당하게 될 공산이 높았다.
물론,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전에도 그러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은 이전과 달리 혼자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자신의 학창시절을 걱정했고-
그 사람도 있었다.
오늘 아침에 그와 접촉했고, 접점을 만들었다.
이후로 더욱 많은 접촉과 접점을 갖게 되겠지.
고로, 자신이 왕따를 당하게 될 경우.
그 또한 높은 확률로 말려들 것이다.
제나가 희망하는 학교생활과 관련된 바람 중 하나.
누군가와의 공감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학창시절이라는 특별한 순간에 만들어져, 평생 동안 간직하게 될 추억을.
그걸 위해 제나는 기꺼이 감수하기로 한다.
제나가 수락하자, 김태한은 한껏 들떠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야, 우준이한테도 갈 건가 물어봐 봐."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지만 막연한 불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도대체 언제까지 휘둘려 다녀야 하는 걸까.
제나가 답답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려던 그때였다.
"야!! 태한아! 우유잔, 이 새끼 지금 누구랑 싸우려는 것 같은데?"
"뭐?"
옆 반에 유우준이라는 애의 의사를 물으러 갔다 돌아온 김민성이 말했다.
가뭄과도 같이 퍽퍽한 학교생활에 단비와도 같은 일, 싸움 구경!"
모두가 일말의 주저도 없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왜 싸우는 거래?"
"우준이가 어떤 애한테 심부름 시켰더니, 그 어떤 애 친구가 우준이한테 시비 털었다는데?"
"누군지 몰라도 미친 새끼네, 그 인간전차한테 싸움을 거냐."
그 인파 안엔 제나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어?'
그렇게 도착한 곳은 익숙한 장소였다.
그 사람의 반.
제나는 설마설마 하며 반 안을 들여다봤다.
마침, 유우준으로 추정되는 덩치가 비대한 남학생이 누구와 대치한 상태로 크게 팔을 휘둘렀는데-빗나갔는지 곧바로 앞으로 달려들듯이 더욱 크게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또한 빗나가 버렸다.
아니, 상대방이 가볍게 피해 버렸다.
그 비대한 몸이 무게 중심을 잃고 앞으로 날아가듯 넘어졌다.
넘어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근처의 책상과 의자를 잡았지만-
-끼이익!
그 엄청난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다 같이 넘어질 따름이었다.
그 모습은 꽤 요란하고, 꼴사나웠다.
주변에서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씨발!!!"
하지만 유우준의 포효와 같은 일갈에 반 안은 곧바로 심각한 분위기가 된다.
그가 씩씩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후우…."
심호흡을 하며 화를 삭였다.
그리곤, 안간힘을 쓰며 억지로 여유로운 척을 하고 말했다.
"친구야, 끝나고 남아라. 나랑 같이 어디 좀 놀러가자."
그에, 상대방은 유우준과 달리 조금의 노력도 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만들어 낸 여유로운 태도로 답했다.
"내가 오늘 좀 바쁘긴 한데."
"에이, 그러지 말고… 응?"
"뭐, 어디로 놀러 갈 건데?"
"근처에, 한상 체육관이라고 있거든? 거기 가서 나랑, 스파링 놀이 하자. 서로 부담 없이. 각서 쓰고."
살기마저 느껴지는 유우준의 태도에도 상대방은 마냥 여유롭고 능청스럽게 답했다.
"그래? 그렇게 부탁하면 어쩔 수 없지."
그 특유의 어조를 들은 순간 제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 최재훈이 서 있었다.
"끝나고 밥은 니가 쏘는 거 맞지? 거 새끼, 동네 맛집들 존나 잘 알게 생겼네."
최재훈이 제나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특유의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어른이 된 최재훈에겐 없는 혈기와 야수성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문득, 그와 나눴던 대화의 한 갈래가 떠올랐다.
-제가 어떤 학생이었냐고요? 어디 보자… 소심하고 얌전하지만 모두의 귀감이 되는 모범적인 학생?
제나가 저도 모르게 최재훈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니가 그럼 그렇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얼굴을 가득 채웠던 따분함과 답답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엿한 성인이었던 군필 여고생이, 쌈박질하려는 새로 사귄 고등학생 친구를 흐뭇하게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