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 외전 역전의 제나 8
최재훈은 확신했다.
'꿈이네.'
하지만 머리를 쥐어짜는 피로감이 자신이 현실에 있음을 확실하게 자각시켰다.
고로, 그녀 역시 환상이 아닌 진짜였다.
예의 전학생 제나.
그녀가-
누군가의 표현에 따르면 태풍이라도 몰아치려는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갠 여름 하늘처럼 청량한 눈으로, 교실을 물들인 남빛 어둠을 한껏 머금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표현에 따르면 마치 추수철의 풍요로운 석양 한가득 머금고 무르익은 벼처럼 황금빛 자태를 뽐내는 금발은 어둠을 밀어냈고.
누군가의 표현에 따르면 때 묻은 세상에 순백을 되찾아주는 첫눈 같이 새하얀 피부는 금발이 밀어낸 어둠을 받아들여 달처럼 희면서 푸르게 빛났다.
누군가의 표현에 따라, 마지막으로 자신의 마음에 봄이 찾아- 오진 않았다.
그저.
지금의 비현실적인 상황에 어울리는, 비현실적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렇듯, 제나라는 인물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그녀의 특이한 행동을 납득시키는 힘이 있었다.
최재훈이 다소 당황은 하면서도 상황을 받아들일 수는 있었던 이유다.
그가 침착하게 물었다.
"어디서 들었어 그건?"
최재훈이 프로를 준비하고 있다.
딱히 숨기는 비밀인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도 아니었다.
어제 막 전학 온 제나가 이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분명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 최재훈의 옆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최재훈은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학생이 등교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제나는 그런 시간에 학교에 등교했다.
그리곤 최재훈을 찾아왔다.
우연이라 보긴 힘들었다.
최재훈이 이 시간에 교실에서 자고 있는 걸 알고 만남을 의도했다 보는 게 타당했다.
그와 단 둘이 있을 때 방금 전 그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 말이다.
객관적으로 상당히 묘한 상황이었다.
오해를 사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행.
평범한 사람이라면 본론을 꺼내기에 앞서.
어떤 경위로 상대방에 대해서 알게 됐는지 설명하거나, 변명했을 것이다.
하기사.
애초에,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만남을 주도하지도 않았겠지.
"그게 중요해?"
그 이치를 증명이라도 하듯 제나는 한쪽 입꼬릴 끌어올려 특유의 비웃음을 그렸다.
자신의 행동을 상대방에게 이해 받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녀는 어제 최재훈과의 첫 만남에서 의사소통 문제로 차질을 겪고 그와 헤어진 뒤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어떻게 그 사람을 대해야 할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 되어야, 그 사람이 나를 봐 줄까.
이번에야말로 아주 오랫동안 매달려온 문제에 종지부를 찍겠노라 다짐했다.
그렇게 고심하고 또 고심하다가, 전부 내팽개치듯 결론에 도달했다.
'썅, 때려쳐.'
진절머리 나는 싫증을 느끼고 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춰 형성한 관계는, 정말로 자신인가?
그 관계는, 정말로 자신의 것인가?
어제 그녀는 그 사람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 사람이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의미가 되었던 이유를 상기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느끼던 거리감이 그 사람에게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있는 그대로 행동할란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라면 이번에도 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테니.
즉, 그녀의 결론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이번에도 내 꼴리는 대로 행동할 테니, 알아서 좋아해 줘라.
"이런 분위기에서. 나 같은 여자가. 니 소원을 들어주겠다는데. 겨우 그딴 게 궁금하다고, 알 유 시리어스? 졸리긴 한가봐?"
머리 한 개는 더 높은 위치에서 교만하게 내려다보는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안하무인하기 짝이 없는 태도.
그게 제나 웨스트라는 여자였다.
"…."
최재훈은 그런 그녀를 벙찐 얼굴이 되어 바라보기를 잠시.
"하."
이내, 특유의 능청스러우면서도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거, 지금 내 소원이 마음껏 자는 거인 건 알고 하는 소리야?"
제나는 등골이 오싹거리는 걸 느꼈다.
첫 만남.
차에서 내려 자신과 시덥잖은 기선 제압을 나누던 그의 모습이, 지금 그 위로 겹쳐진 것이다.
기분이 한 층 고조된 제나의 입가에 그려진 비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그래? 그러면 뭐, 그러던가. 자. 거기서, 푹~자. 마음껏. 그게, 니 소원이면."
잘못 만든 미숫가루 라떼 같은 말이었다.
마시는데 중간중간 풀리지 않은 미숫가루 덩어리가 목구멍에 턱턱 걸린다.
최재훈은 원해서 이런 생활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입장에선 홧김에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내뱉는다 해도.
심지어는, 감정적으로 손찌검을 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자극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최재훈은 이번에도 역시 능청스럽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는 제나의 언동에 분노 대신 오기를 느꼈고, 흥미를 느꼈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제나의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니가 깨운 시점에서, 마음껏 자는 건 물 건너간 것 같은데?"
"이런, 미안해서 어떡해. 보상이라고 해 줘야겠네?"
"보상?"
최재훈은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 자세를 바꿨다.
책상에 엎드려 있던 몸을 왼쪽으로 돌려 제나를 향한 뒤 다리를 꼰다.
책상에 팔꿈치를 걸쳐 턱을 괸다.
제나는 근처 의자의 등받이를 잡았다.
의자를 질질 끌어 던지듯 가져왔는데, 등받이 부분이 무게중심에 따라 최재훈에게 향했다.
제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기에 앉았다.
등받이에 두 팔을 올려놓고, 그 위에 얼굴을 얹는 자세가 되었다.
더불어, 두 다리는 구조상- 소위 쩍벌이라 불리는 자세가 되었다.
더불어, 그녀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
제나의 눈을 날카롭게 노려보던 최재훈의 눈이 흐물거렸다.
혈기 왕성한 한창때 소년의 눈은 결국 중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추락했다.
제나가 그걸 놓치지 않고 샐쭉 웃었다.
"흐음~? 방금, 어디 본 거야?"
"땅에 500원 떨어져 있었음, 진짜임."
최재훈은 한 치의 사심도 느껴지지 않는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눈동자가 흘리는 등 그 동요를 완벽하게 숨기진 못한다.
치마 아래에 속바지를 입고 있던 군필 여고생이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그녀의 관점에서 보면, 성인 '여자'가 '남고생'을 성희롱하는 큰일날 상황이었지만-
'뭐, 어쩔 건데. 난 지금 18살 여고생인데.'
많은 부분이 만족스러워 그런 걸까.
워낙에 안하무인한 성격 덕분에 그런 걸까.
적응하고 익숙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최재훈과 달리.
아주 의외로, 제나는 이 남녀역전 세계에 엄청난 속도로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이 세계를 즐기는 경지에 도달했다.
덕분에 '여성'인 그녀가 방금과 같이, 여학생이 남학생을 놀리는 구도의 장난도 가능했던 것이다.
어쩌면, 남녀역전을 겪어 남성성과 '남성성'을 두루 가진 최재훈의 곁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아직 어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남녀역전 세계라 그런 건지.
최재훈의 반응이 몹시 신선했다.
상상도 못했다.
평소 능청스럽게 여자들 혼을 쏙 빼놓으면서, 정작 본인은 그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던 목석같던 최재훈이 저렇게 풋풋한 반응을 보이다니.
'재밌네 이거.'
제나가 최재훈을 상대로 주도권을 가져왔다는 사실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정작 그 얼굴은 터질 듯 붉어져 있었다.
본인은 괜찮은 척 하며 애써 부정하고 있엇지만.
사실은 놀린 당사자인 그녀가 최재훈보다 훨씬 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분명 치마 밑에 두꺼운 속바지를 입고 있었는데도 휑한 느낌이 들어 다리를 머뭇거린다.
살면서 이렇게 짧은 치마를 입어 봤어야지.
'아, 썅!'
결국 제나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섬주섬 의자를 돌려 정자세로 앉는다.
이걸, 어떻게 놨었더라….
그녀의 다리가 어색하게 자세를 찾는다.
두 다리를 꼭 모을까 하다가도, 그러면 왠지 지는 것 같아서 최재훈처럼 다리를 꼬았다.
"어째액- 크흠!"
그리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려는 거 목소리가 갈라져, 급히 헛기침을 한 번 한다.
"…."
최재훈이 그런 그녀를 꿈뻑꿈뻑 바라보고 있었다.
"뭘 꼬나보냐? 구경났어?"
제나가 수치심을 분노로 치환시키며 으르렁거렸다.
최재훈이 황급히 눈을 깔았다.
"어쨌거나,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보상 말인데-"
그녀가 간신히 진정하고 다시 특유의 비웃음을 그렸다.
"아까 말했던 대로야."
"아까 말했던 대로?"
"니가 프로 되는 거 도와줄게. 정확히는, 지금 니가 처한 상황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그게 내 보상이야."
"내가 처한 상황이면…."
최재훈이 그 말이 함포한 의미를 깨닫더니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아까부터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응?"
"너 혹시, 내 스토커냐?"
"뭐!?!"
비슷하다.
그렇기에 정곡이 찔린 그녀가 과하게 당황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뭐, 뭔 개소리야!? 니 뭐, 자의식 과잉 있냐? 알 유 뻐킹 나르시스트!?"
"아니, 나름대로 가장 합당한 결론이 아닐까 싶은데. 니가 입장 바꿔 생각해 봐."
"뭐라 씨불이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니까 니 말은, 나 같은 여자가 니 같은 남자한테 빠져서 스토킹이라도 했다, 뭐 이거야!? 시리어슬리? 내가 뭐가 아쉬워서!? 뭔 자신감이야!?"
거의 정신이 반 쯤 나가서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이었지만, 의외의 효과를 본다.
"뭐, 그렇긴 해."
최재훈이 하긴 그렇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생각하는 자신은 겜창 아싸였다.
외모도 뭐-
'내 눈엔 누구보다 멋진 새끼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평범한 수준이겠지.'
키와 몸매는 객관적으로 봐도 좋지만-
제나는 궤를 달리한다.
당장 어깨에 걸린 옆머리를 뒤로 넘기는 그녀의 모습은, 당장 런웨이 위나 스크린 안에 있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였으니.
그런 제나가 자신에게 빠질 가능성.
'구해줘서 반했다는 전개는… 있을 리 없겠지, 이게 뭐 경식이가 추천해 준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경식아, 니가 실망할까봐 말하진 못했는데. 현실의 여자들은 위기에서 구해준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반하진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유도 안 배워도 된다.'
아직 침대에 누워 평화롭게 코코낸내 하고 있는 김경식이 재채기를 했다.
'아, 맞다. 그리고 얘 레즈비언이었지 참.'
제나가 남녀역전에 적응하고, '제나'의 기억을 참고해 '여성'이 아닌 여성을 표방하여 그 '여성성'이 어느 정도 중화되었다곤 하나.
평생 동안 몸에 둘러 물이 든 분위기는 쉽게 빠지지 않는다.
'이 참에 물어볼까…? 아, 아냐. 실례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 거 아니면 도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건데?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날 도와주려 하고."
"아, 말했잖아! 니가 나 도와준 거 보답하는 거라고!"
"왜 화를 내고 그래…."
"답답하게 계속 물어보잖아!"
얼마나 '답답한'지, 제나의 얼굴이 다시 붉게 물들려 하고 있었다.
"뭐, 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러면-"
최재훈이 팔을 괴었던 팔을 회수해 팔짱을 꼈다.
다리를 꼰 걸 풀었다가 반대 방향으로 풀었다.
도발하는 듯한 미소를 짓는다.
"네가 진짜로 날 도와준다 쳐. 내가 프로 되는 거- 아니지, 지금 내가 처한 문제 해결하는 거랬나? 뭐, 어떻게 도와줄 건데?"
별 기대는 안 한다.
그렇다고, 아예 기대를 안 한다는 건 아니다.
지금 최재훈은 한계에 몰려 절박한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제나의 얼토당토않지만 확신에 들어찬 제안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그 지푸라기처럼 느껴졌다.
그런 최재훈의 처지는 지금 제나의 행동을 부추긴 계기이기도 했다.
어제, 노라는 최재훈에게 상당한 감명을 받았는지.
제나 구조 사건을 빌미로 하여금 교사들에게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공주님, 왕자님한테 관심이 가나 보네~?~ 아까 번호도 따더니~?~-아, 하지 마요.
그에 대한 이야기는 노라를 통해 제나에게도 전해졌다.
제나는 최재훈이 이따금 해 주던 학창시절 이야기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금의 최재훈에 더욱 자세히 알게 된 제나는 이른 시간 학교에 찾아왔다.
그가 어둠 속에서 고독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았고, 지금 이렇게 그의 앞에 앉아 있다.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기 위해.
"일단-"
게임으로 성공하겠다는 꿈을 가진 최재훈.
단언컨대, 지금 이 세계에서 그가 원하는 목표로 도달할 수 있도록 가장 잘 이끌어줄 수 있는 안내자는 다름 아닌 제나였다.
그녀는 최재훈이 무수한 난관에 부딪혀가며 어떻게 그가 바라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는지, 그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으니.
"-지금 니가 하고 있는 알바부터 그만둬."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최재훈이 알바 말고도 그만둬야 될 건 몇 가지 더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변화에는 마음이 준비가 필요한 법이고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제나는 차근차근 그를 바꿔 나갈 생각이었다.
강아지 길들이듯 말이다.
"…뭐?"
제나의 판단은 옳았다.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데 그는 엄청난 당황을 표했다.
이내, 가당찮다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뭐. 알바 그만두고 게임에 집중해라! 성실하게! 같은, 에디슨도 놀랄 참신한 충고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의 표정이 따로 말을 하는 듯했다.
'그럼 그렇지.'
'기대한 내가 바보지.'
제나는 그런 최재훈의 속내를 읽어내곤 귀엽다며 비웃었다.
"에디슨한테 전구로 얻어맞을 소리 하네."
"그러면?"
"내가 좀 더 효율 좋은 알바 소개시켜줄게."
"효율 좋은 알바? 뭔데."
"일단, 시급은- 어… 3만원? 아니, 너무 많은가. 그래, 2만 원정도 되나?"
흠칫.
"2만…원? 시급이?"
그 액수에 실망감에 반쯤 풀려 있던 최재훈의 눈이 커다래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 아이고 이…."
"?"
그가 피곤에 절은 얼굴로 제나를 쳐다봤다.
"세상물정 모르는 친구야…."
"뭐?"
"어디서 뭐 이상한 구직 글이라도 본 것 같은데… 정신 차려. 시급 2만 원짜리 알바라니…."
말하면서 그녀를 바라보던 최재훈의 눈이 점점 따듯해졌다.
저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가, 어제의 은혜에 보답하겠답시고 열심히 구직 사이트를 뒤졌을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뭐냐, 그 표정. 뒤질래?"
"아니, 기특해서- 아니, 고마워서 그래. 시급 2만 원짜리 알바. 응. 나도 진짜 하고 싶고, 그거 알려준 너한테 진짜 고마운데.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그거 아마 사기일 거야. 아니면 이상한 알바거나.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확인하겠답시고 전화하거나 알바 장소 가면 안 된다?"
"뭐라는 거야. 이상한 알바라고?"
"그럼 멀쩡한 알바겠어? 만수르도 편의점 알바 시급으로 2만 원은 못 줘 임마. 아, 잠깐!"
최재훈이 손가락을 튕기며 그녀를 가르켰다.
"어허 어허, 이 녀석~? 딱 걸렸어~ 너, 그거지. 나한테 그거 시키려고 하지."
"그거?"
"그거 있잖아."
최재훈이 '머리'를 자르는 시늉을 했다.
'대리 게임'을 암시하는 제스쳐였다.
"대리?"
"그래! 인정해! 사실 나도 몇 번 혹하긴 했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더라고. 프로 준비하는 사람이 대리라니."
이번엔 제나가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최재훈을 장기 자랑하는 아들 보듯 쳐다봤다.
"뭐냐, 그 표정. 뒤질래?"
"걱정 마. 이상한 알바 아니고, 대리도 아니고, 사기도 아니고, 검증된 알바니까."
"…도대체 뭔 알반데?"
최재훈이 무심하게 물었다.
관심 없다고 열심히 표를 냈지만, 새침한 그 눈에선 숨길 수 없는 기대가 느껴졌다.
"방송 도우미라고 해야 하나?"
"방송 도우미? 뭐, 방송국 알바 같은 거?"
"아니, 개인 방송. 인터넷 방송."
"오호라…."
상상도 못한 답변이라 오히려 현실성이 느껴졌다.
"주로 무슨 일 하는데?"
"방송인이 시키는 거면 뭐든지."
"그 뭐, 간장 샤워나 콜라 원샷. 그런 거?"
"그렇게 과격한 건 안 시켜."
"방송에 나가거나 하나?"
"어쩌면?"
"음… 방송에 나간다라… 얼굴도 나가?"
"메이비?"
"혹시 얼굴 나갈 때 뭐, 추가 수당 같은 거 주나?"
"그러지 뭐."
"얼마 정도?"
"한 20? 30?"
"세상에. 그러면, 근무 시간은?"
"오후 5시에서 10시 정도?"
"미친."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최재훈의 눈빛이 달라졌다.
"사대 보험은?"
"사대 보험 같은 소리 하네."
"주 며칠 근무?"
"가능하면 7일. 월화수목금토일 에브리데이."
"세상에, 하느님 맙소사. 그러면 얼마야."
최재훈이 손가락을 구부리며 머릿속 계산기를 두들겼다.
시급 2만 원에 하루 다섯 시간이니, 기본적으로 일주일에 70만 원.
거기에, 일주일에 한 번은 방송에 출연한다는 가정 하에 20만원을 더해서 총 90만 원.
일주일에 90만 원.
한 달에-
'사, 삼백육십만 원…!?'
너무 흥분해서 손발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그… 저기요…? 그, 알바 소개시켜주신다는 거… 정말인가요?"
"당연히 농담인데."
쿠궁!
"뻥이고, 진짜 맞아. 재밌네 반응."
"아니, 진짜! 장난치지 말고! 진짜!?"
"진짜."
"후… 그, 제가 몇 개월 정도 일할 수 있을까요?"
"글쎄. 니 하기에 따라 달렸는데, 아마 최소 3개월?"
3개월.
천만 원.
편의점에서 임금을 제외하고 똑같은 조건으로 일할 경우, 모으기까지 최소 8개월은 걸리는 액수였다.
풀썩!
최재훈이 즉시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무릎 꿇었다.
"제, 제나 님!"
"오냐."
"정말로 그런 개 꿀 알바를, 저 같이 미천한 놈한테 넘겨줘도 되겠습니까?"
"오냐."
"아아…! 이 얼마나 자비로운…! 제나 님! 그러면 감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알바를 제게 주십쇼!"
"오냐."
"감! 사합니다!!!!"
최재훈이 그녀를 향해 부복했다.
호들갑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3개월 일하고 천만 원이면 가족이 최소 3달은 여유롭게 지내는 게 가능하다.
그는 그렇게 한창을 감격에 몸부림치다가 뒤늦게 자신이 어떤 방송인 밑에서 일할지 궁금해졌다.
"아 그런데, 제나 님."
"오냐."
"그, 방송인이… 어떤 방송인인가요?"
"어떤 방송인이냐니?"
"어, 일단 남잔가요, 여잔가요."
"여자."
"주로 무슨 컨텐츠를…."
"글쎄, 기본적으로 게임이긴 한데 아무래도 기회 나면 다양하게 하지 않을까 싶은데."
"오… 게임이라면, 정확히 어떤 게임을…!?"
"상황 봐서 뭐든 하게 될 건데, 3대장 중심으로 하겠지."
3대장.
배로그, 언더워치, 레오레를 일컫는 말이었다.
3대장 위주로 플레이하는 여자 게임 방송인이라.
최재훈의 호기심은 갈수록 커졌다.
제나가 그런 그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기대해. 엄청 예쁘고, 능력 좋은 사람이니까."
"오호… 그 혹시, 방송인 분 성함이…?"
"성함? 아니면 방송 닉네임."
"아, 그럼 방송 닉네임으로."
최재훈은 제나가 알려준 이름으로 미튜브에 검색해 보았다.
하지만-
"어…."
검색 결과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한번 검색해 봤지만 역시 마찬가지.
최재훈은 설마 이 모든 게 또 농담이었나 싶어, 불안에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 말씀하신 방송인이… 나오지가 않는데요…?"
"그렇겠지."
"그렇겠지, 라뇨…?"
"오늘부터 시작할 거거든."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최재훈.
제나가 그를 보며 힐쭉 웃었다.
"그런 줄 알고, 오늘 학교 끝나고 남아. 언더 스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