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 외전 역전의 제나 7
제나 모녀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신소하는 분주히 움직였다.
덩달아 자신도 지각을 해 버린 것이다.
학원 시간에 말이다.
그녀는 신속하게 목욕을 하고 곧장-
치장을 시작했다.
조금 늦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관리는 포기해선 안 됐다.
학원에도 같은 학교의 친구들을 비롯한 여러 눈이 있었으니.
신소하는 항상 어디서든, 누군가에게든 최고의 모습만을 보이고 싶었다.
성실한 학생인 동시에, 인기인이려면 둘 사이에서 적절한 줄타기가 필요했다.
신소하는 그걸 훌륭히 해내는 자신에게 상당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녀는 이미 수업이 시작해 적막한 학원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미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반의 닫힌 문을 두드렸다.
이내 문이 열리자, 그녀는 애교 섞인 어조로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교사가 그녀를 위 아래로 훑더니 피식 웃었다.
"신소하. 목욕하고 곧장 왔으면 안 늦지 않았을까? 풀 메이크업 안 하고 말이야."
교실 안이 웃음으로 가득 찬다.
"뭐 그래도. 듣자 하니, 다친 반 친구들 도와주느라 늦은 거라니까. 이번만 봐 준다. 어여 가서 앉아."
"네에~"
그녀가 자리에 앉자 주변 친구들이 키득대며 그녀를 반겼다.
어른들의 존중.
또래들의 관심과 호감.
학생으로서 신소하의 삶은 풍족했다.
그녀는 그게 전적으로 자신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학교가 끝난 그녀는 군것질을 하며 부친의 마중을 기다렸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매일이 진수성찬인 저녁 식사를 만끽한다.
모친이 차려다 준 간식상.
달콤한 마카롱을 한 입 베어 물고, 두 번째 입에 털어 넣는다.
오늘 하루도 노력한 자신에게 상을 주고자 침대에 몸을 던져 핸드폰을 들어 올린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
"어, 맞다."
그런 순간에 문득 떠오른다.
오늘, '그 순간'을 촬영했던 게 말이다.
그녀가 영상을 재생했다.
조그마한 화면 안에서 오늘 있었던 그, 비현실적인 순간이 반복된다.
요즘 핸드폰 카메라들의 화질이 아무리 좋아졌다곤 하나 역시, 아직 갈 길은 먼가보다.
그때, 피부를 찌릿거리게 만들었던 무언가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학생의 추락.
그리고 구조.
시간이 흐름이 고장난 듯 슬로우 모션으로 일어났던 일들이 스쳐가듯 맥없이 지나간다.
하지만.
자신이 구해준 전학생을 안심시키듯 미소 지어 주는 '걔'의 모습만큼은 여전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신소하는 '걔'가 전학생을 구해주고 미소 지어주는 부분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재생했다.
"음…."
이내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올려다본다.
그러자, 이제는 학교 구석에서 하루 종일 퍼질러 자고 있던.
무기력하게 대충 인생을 낭비하고 있던 한심한 그 모습이 떠오른다.
아깝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 외모.
관리만 한다면 나름-
'괜찮을 것 같은데….'
키도 엄청 컸었지.
비율도 괜찮고.
부축할 때 만져 봤는데 몸도 꽤….
그러다가 중얼거린다.
"뭐,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마치 변명하듯.
그리고 공부.
"이건… 딱 봐도 힘들겠네."
아무리 봐도 공부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는 타입이고, 벌써 고2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으니까.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래도-'
지금부터 노력하면, 나름대로 사람 구실 정돈 할 수 있을지도?
아니.
재능 없는 공부에 투자해서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차라리 적성이 있는 쪽으로 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가령-
'그래, 운동.'
전학생을 구하러 달려나갔을 때 보여줬던 엄청난 반응 속도.
그리고, 그 높이에서 떨어지는 전학생을 받아 놓고 부상 하나 입지 않은 엄청난 신체 능력과 운동 신경.
'그걸 왜 썩히고 있는 걸까, 아깝게.'
"맨날 퍼질러자지 말고 뭐라도 해보지 좀."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성격도 뭐 그 정도면… 나름 인싸 과 아닌가? 애가 좀 띠껍긴 해도….'
그녀는 마치 캐릭터 육성 게임을 하듯, 머릿속에서 최재훈을 캐릭터로 이런 저런 상황을 시뮬레이션을 해 보았다.
시간이 갈수록 '아깝다', '답답하다'그 두 생각은 강해졌고 이내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이거 내가 한 번…."
선심 써서, 불쌍한 반 친구 사람 만들어 줘 봐야겠다고.
* * *
"재훈아, 형님 왔다."
"아, 한률이 형 오셨어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 9시 30분이었다.
야간 시간 근무인 김한률과의 교대 시간까진 아직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오늘도 빨리 오셨네요?"
"그래 임마. 우리 재훈이 빨리 집에 가게 해 주려고 빨리 오셨지."
"아이고… 왜 그러실까. 진짜 괜찮은데."
"쓰읍! 임마!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너 같은 꼬꼬마가 10시에 싸돌아 댕기면-"
편의점 유니폼을 걸치고 온 김한율이 최재훈 앞에 서서 말했다.
그를 올려다보며 말이다.
키 178의 김한율이 작은 게 아니라, 최재훈이 너무 컸다.
"…너 같은 놈이 10시에 싸돌아 댕기면… 어!? 사람들 무서워 해 임마! 위화감 조성으로 잡혀가는 수가 있어! 그리고 이 이, 싹퉁머리 없는 새끼. 형이 말하는데 내려다보고 말이야. 위아래도 없는 놈 다리를 아주 그냥. 확 마!"
김한률이 로킥을 하는 시늉을 하자 둘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저녁은 먹었고?"
김한률이 1+1 커피를 두 개 집어와 계산한 뒤 그 중 하나를 최재훈에게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집에 돌아가서 먹어야죠."
최재훈이 양손으로 그걸 받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알바하면서 아무것도 안 먹은 거야? 폐기는?"
"아, 몇 개 남은 폐기 따로 챙겨놨어요. 이따 형 드세요."
"아니 임마, 남겨 놓지 말고 먹으라니까 그냥."
"전 집 가서 먹으면 되는데, 형은 아침까지 일하시잖아요."
"아니, 하. 괜찮다니까. 아, 그러면 그거는. 사장님이 니 폐기 없으면 6천원 안에서 먹고 싶은 거 먹으라 했다며. 하, 진짜. 다시 생각해도 서럽네. 8시간 일하는 나한텐 그런 이야기 꺼내지도 않더만."
"에이, 그걸 제가 어떻게 먹어요. 거의 제 한 시간 시급인데."
"아, 거 새끼. 진짜 말 드럽게 안 처듣네."
"하하, 부모님 말도 안 듣는데 뭐? 어림도 없지."
"아휴, 자랑이다 새꺄. 알겠으니까. 어여 인수인계하고 꺼져."
"하려던 것만 마저 하고요."
"아, 또! 형 말에 따박따박 말대꾸! 뭐! 뭐 하려 했는데!?"
"화장실 청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형님."
"오냐."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한률이 쓰게 웃으며 고갤 가로저었다.
10시 20분이 되어서야 아직 교복을 입은 최재훈이 귀가했다.
보통 학생이었으면 하루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시간이었지만, 그의 하루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
"어, 왔냐?"
누워서 핸드폰을 보던 여동생이 그를 반겼다.
"엄니랑 아부지는?"
"오늘도 늦으신대."
"저녁은 먹었고?"
"이응, 아침에 남은 국이랑 반찬 머겄음."
"그래? 그럼 책상에 앉아."
"급발진 몬디. 오라버니, 바쁘게 일하고 오셨으니 좀 쉬시지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저녁부터 좀 드시고."
"오빠는 너 공부하는 것만 봐도 배불러."
"굶겨 죽이고 싶네."
최재훈의 주도에 따라 최재은이 책상이 앉아 책을 펼쳤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최재훈 역시 책상에 합류.
"야, 그래서 이거 말인데-
"아, 이건-"
최재은이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 그녀가 오늘 하루 공부를 진행하면서 생긴 궁금점들을 해소해 주는 시간이었다.
최재훈은 최재은의 공부를 봐 주는 동시에, 틈틈이 자신의 공부를 병행한다.
사뭇 진지한 집중이 12시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최재은은 하루를 마무리 할 준비를 한다.
반면에 최재훈은, 역시나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는 그제서야 식사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보다, 공부를 할 때보다 더욱 진지한 얼굴이 되어-게임에 접속했다.
그에겐 사활과 미래를 건 일이었다.
누군가는 그걸 우습게 여길지 몰라도, 적어도 그의 주변 사람들은 아니었다.
최재훈은 하루에서 숙면을 취할 때(그때가 학교에 있을 때라 문제지만)를 제외한 모든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듯 임했다.
마치, 혹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몸을 움직여 체온을 유지하는 것처럼.
은연 중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는 순간 모든 게 잘못될 것 같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러한 태도는 겉으로도 드러나, 부모와 교사를 비롯한 주변 어른들은 감히 그의 생활 방식에 왈가왈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빈둥거리던 최재은이 옆에 조용히 와서 구경하기 시작한다.
"나 그 캐릭터 보여줘. 그, 잘생긴 캐릭터 뭐였지."
"최재훈?"
"개똥캐일 듯. 아 맞다! 너, 오늘 그거 어떻게 됐어! 전학생 받은 거? 병원 실려 갔다며, 어디 안 부러짐!?"
"참 빨리도 물어본다 가시내야."
"아니, 어이없네? 지가 문자 씹어 놓고는."
"아."
최재훈이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최재은에게 보여줬다.
박살이 난 핸드폰을 보고 푸핫! 웃음을 터뜨리는 여동생.
"그 뭔가 박살났다는 듯한 소리가 핸드폰 박살나는 소리였네? 까비~아, 맞다. 야."
"응?"
"그, 전학생. 선배랑 어떻게 됐어?"
"뭐가 어떻게 돼."
"이야기 들어 보니까, 너가 그 선배 거의 뭐 목숨을 구해 줬다며. 그 뒤로 그 사람 언니? 인가 차타고 같이 병원 갔다던데. 뭐 없었음?"
"어… 걔 어머니 되는 분이 핸드폰 보상해주신다고 아이플 매장 가자 했었음."
"아이플!? 대-박! 그럼 나도 이제 아이플폰 오너임?"
"개소리지?"
"중고폰 여고생 에디션 줄 테니까 바꾸자. 내가 손해임."
"개소리지?"
"아, 제발~"
"이번 중간고사 올 1등급 맞으면 생각해 봄."
"고려장 해 버리고 싶네. 아, 맞다. 맞다! 야, 야! 너 그거 알아!? 그 선배, 레즈비언인 거?"
"…레즈비언이 그 뭐냐, 저시기끼리 저시기 하는 거?"
"응."
"니가 어떻게 알아?"
"못 들었어? 벌써 소문 쫙 났는데 학교에."
"아니, 걔 뭐 커밍아웃이라도 했어?"
"그건 아닌데, 이거 봐봐."
현재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행인 SNS 잇츠 그램.
최재은이 핸드폰을 들이밀어 보여준 건 누군가의 잇츠 그램 계정이었는데, 몇몇 게시글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응?"
예의 전학생 제나, 그녀가 계정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걔네? 오… 팔로우 이 정도면 많은 거 아냐?"
"꽤?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이거 봐봐."
가장 마지막으로 게시된 몇 개월 전 글의 내용.
그리고, 오늘 봤던 전학생의 이미지.
둘이 연결되더니-
"호옹이…."
"그치? 그치? 백 프로지? 어쨌든, 그렇게 됐으니까 꿈 깨쇼."
"뭔 꿈이요."
최재은은 그 이후로도-
"그러고 보니 그 레즈비언 선배, 아무래도 나한테 반한 듯?"
등, 이야기 주머니를 털어낸 뒤에야 하품을 하더니 자신의 방침대로 어기적어기적 향했다.
* * *
'걔가 레즈비언이라고라….'
재은이는 그게 나한테 나쁜 소식이라도 된다는 양 이야기했지만-
'레즈비언이면… 그거지? 몸은 여자지만, 정신은 남자인.'
그런 분야에 대해 문외한이기에 명확하게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 걔한테 직접 받은 인상을 생각해 보자면-
'맞을지도…?'
귀신 영화를 본 날 새벽 1시에 공포감을 느끼지 않고 천천히 머리를 감을 수 있는 나, 바위 같이 묵직한 사나이 최재훈이었지만.
그런 최재훈 씨도 무서워하는 게 있었다.
하나는 입대요.
둘은 파스타치오 맛 달라 했는데 민트 초코 맛 주는 여자 알바생이오.
셋은 기 쎄 보이는 여자 인싸였다.
내 살면서-
'제나랬지?'
걔 같이 기 쎄 보이는 여자 인싸는 처음 본다.
거기에 나 같은 아싸는 경멸스러워서 불쾌하기까지 하다는 듯한 그 눈빛과 말투!
사나이기에 수라의 길, 아싸의 길을 걷는 나 최재훈으로선 극도의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그런 상대에게 번호를 뜯겨 앞으로 접점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내일 당장 반에 찾아와서 그 얼굴이랑 목소리로 나를 불러내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알맹이가 남자다?'
그러면 경우가 달라지지.
정확히 어떻게 달라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 본 바, 대할 때의 난이도가 확 낮아진다.
순도 100% 여자인싸인 걔가 날 부르면-
'어…어? 오, 왜? 도, 돈 필요해…?'
그렇게 안절부절 못할 것 같지만.
알맹이가 남자인 걸 알게 된 걔가 날 부르면 경식이 대하듯-
'요 와썹맨-'
이라고 대답하며 엉덩이를 찰싹-
'아, 그건 아냐 미친놈아. 전자 발찌 차려고.'
어쨌든, 적당히 잘 대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후~"
오늘 하루 종일 마음을 뒤숭숭하게 했던 걱정거리가 해결돼서 그나마 생각이 가벼워졌다.
그런데도-
"…."
여전히 무거웠다.
시간을 확인한다.
어느새 새벽 3시.
그럼에도 오늘 학교에서 내내 꿀잠을 잔 덕에 아직 피곤하진 않다.
나도 안다.
학생의 생활 패턴이라고 보기엔 문제가 아주 많다.
너무나도 기형적이다.
발단은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시기, 아르바이트를 염두에 두고 입학 전에 미리 공부의 진도를 빼서 여유를 챙긴 것이었다.
심화만 남기고 미리 진도를 다 빼 놓으니 학교 수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소홀하게 됐다.
처음 선생님들은 따로 불러내 개인 면담을 하는 등 그런 내 행실에 문제를 제기하고 염려를 표했지만.
내 개인적 사정과 성적을 알게 되더니 자연스럽게 간섭을 안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내 안에서 학교의 비중은 갈수록 낮아졌고 그 결과가 지금의 기형적 생활패턴인 것이다.
나름대로 최적화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
요즘 들어 이 시간만 되면 머리가 무거워지고, 그보다 더 무거운 한숨이 새어나오곤 한다.
평범한 학생은 물론이며, 인생 좀 화끈하게 말아먹는다 싶은 불량배들조차도 잠에 들 시각.
이런 시각에 두 눈 부릅뜨고 게임에 집중하곤, 해가 뜨면 학교에 가서 잠이 드는 학생.
그게 바로 나다.
최근 들어 엄습해 오는 주기가 부쩍 짧아진 불안감을 달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우리 집의 형편.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뒤론 그나마 나아졌지만, 여전히 그 전망이 어둡다.
겨우 겨우 적자만 면하고 있으면서도 계약과 비롯한 여러 문제로 인해 폐점은 꿈도 못 꾸는, 그야 말로 숨만 붙어 있을 뿐인 치킨집이.
우리 집의 유일한 희망인 이상 말이다.
줄어들 생각을 안 하는 빚 원금을 상환하기 위해선 동생과 자신이 도와야 한다.
하지만 자신이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회 진출을 해서 고정 수입을 얻으려면?
고등학교 졸업까지 2년.
대학 졸업까지 4년.
군대 제대까지 2년.
대학교와 직장에 곧바로 합격한다 해도 최소 8년.
동생의 경우엔 7년.
늦는다.
너무 늦는다.
장래희망으로 프로게이머를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 계기였다.
재능만 있다면 만 18세에 곧바로 시작하여, 억대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게 프로게이머였으니.
고등학교 입학 당시.
나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포스트 페이스가 될 줄 알았다.
만 18세가 되는 순간, 프로게이머가 되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만 18세를 앞두고 있는 지금.
'하, 새끼들 진짜… 게임 잘하는 새끼들이 왜 이렇게 많아….'
게임을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 여기는 순간 깨달았다.
프로의 벽이란 것을 내가 너무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단 사실을.
깊숙히 들어갈수록 목표는 오히려려 더 멀어진다.
갈수록 성적을 유지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아르바이트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끽 해 봐야 한 달에 100만 원이 채 안 되어, 현 상황에서는 임시방편밖에 안 된다.
모든 게 애매하다.
엿 같은 불안감은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다 놓쳐 버리는 건 아닐까?'
'정말로….'
이 길이 맞을까?
내가 노력해서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노력이 사실, 헛수고가 아닐까?
-라톡!
그때 도착하는 문자.
최재은 : 오빠
최재은 : 무슨 일 있어?
최재훈 : 뭐야
최재훈 : 왜 깼어
"아."
나도 모르게 또 한숨 푹푹 내쉬었나보다.
최재훈 : 아 연패함;;
최재훈 : 팀운 개조졌내 --
잠깐의 뜸을 두고 답장이 도착한다.
최재은 : ㅋㅋ
최재은 : ㅄ ㅋㅋ
"하."
어쨌거나, 징징대는 건 여기까지.
'세수하고….'
정신 바짝 차리자.
-라톡!
최재은 : 힘내셈 ㅋㅋ
세면대에 기대 거울을 쳐다봤다.
"…새끼, 잘 생겼네."
아, 이게 아니지.
찬물로 머리를 식히면서 생각해 봤다.
아무래도, 선택과 집중의 순간이 찾아온 것 같았다.
생각은 해 봤지만 결국 실행하지 못했던 계획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때였다.
가족들의 생계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아르바이트 비중을 대폭 늘린다.
지금 이 기세로 다른 프로, 프로 지망생들과 경쟁하기엔 역부족이니 게임의 비중 역시 대폭 늘린다.
딱 2년- 아니, 1년만 모든 걸 걸고 미친 듯이 해 보는 거다.
"1년 안에 솔랭 1위, 2년 안에 프로 데뷔…."
그걸 위한-
"자퇴라…."
* * *
생각이 많아서일까, 그날 최재훈은 결국 밤을 샜다.
오전 5시.
어제 새벽 2시에 귀가한 부모와 여동생은 아직 자고 있는 시간.
최재훈은 도둑처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조용히 집을 나섰다.
조깅을 하며 새벽 공기를 한 가득 섭취하는 동시에 땀을 최대한 빼낸다.
그 뒤, 맨몸 운동으로 몸을 타이트하게 조인다.
집으로 돌아와 목욕을 한 뒤 다음 목적지는 부엌.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확인했다.
"아이고 어제 장 못봤다고… 재은이 머릿속마냥 텅텅 비어 버렸네…."
그는 남아 있는 자투리 채소들과 계란 네 알을 모두 꺼냈다.
갑자기 계란찜이 땡겨 요리를 할까 하다가도, 요리한 즉시 먹지 않으면 맛이 크게 섭섭해지는 특성 때문에 결국 계란 국으로 타협을 본다.
몇 시간 뒤면 일어날 가족들 입도 입이니까.
무를 채 썰어 밥과 함께 앉힌다.
파를 다져서 간장, 맛술, 고추가루와 함께 섞는다.
거기에 남아 있는 마늘과 함께 멸치도 좀 볶아 주면-
"오…."
무밥, 계란국, 멸치 볶음과 나물 무침들.
냉장고를 열며 했던 걱정이 무색해지는, 밸런스 탄탄하게 잡힌 식단이 완성됐다.
'최재훈, 이 볼수록 어메이징한 새끼….'
"이거 그냥, 어? 치킨 파는 아줌마랑 아저씨 내쫓고 내가 장사 시작해 봐?"
최재훈이 큭큭거리며 아직은 동이 다 트지 않아 어두컴컴한 거실의 식탁에서 홀로 숟가락을 움직였다.
식사를 하는 그는 중간중간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밥그릇이 비자 잠깐 동안 멍을 때린다.
"갈까."
그리곤 설거지를 한 뒤 집을 나섰다.
오전 6시 30분.
교문만 열려 있지, 사람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학교는 사실상 닫혀 있는 거나 다름 없다.
그런 학교를 자유롭게 거니는 순간은 언제나 묘한 설렘을 자아낸다.
"웃차."
최재훈은 아직 교사들이 출근하지 않았기에 열 방도가 없는 교실 문 대신, 창문 위 창문.
어지간한 운동신경을 가진 게 아니라면 엄두도 못 낼 높이에 위치한 창문을 통해 반으로 들어섰다.
이미 수도 없이 해 본 일이었기에 그 동작에서는 요령마저 느껴졌다.
그의 사정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그 모습을 본다면-
'프로는 개뿔, 그냥 가게 하나 털지?' 라는 생각을 갖게 될 정도였다.
-착.
신발을 먼저 반으로 던져 넣은 그는 맨발로 책상 위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리고 주섬주섬 다시 신발을 주워 신은 뒤, 자신의 자리에 가서 엎어졌다.
그는 즉시 수마와 손을 잡고 어둠속으로 다이빙했다.
깊이.
깊이.
더 깊이-
"…."
빠져들려던 그때였다.
"야. 야."
'뭐지.'
그가 자신을 조심스럽게 콕콕 찌르는 감각, 그리고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주변이 어둡고 또 조용한 걸 보니, 아직 애들 올 시간은 안 된 것 같은데.
'누구지…?'
그가 몸을 일으켜 자신을 깨운 누군가를 바라봤다.
"너, 프로 준비하지."
"…?"
말주변이 드럽게도 없는지.
어쩌면 그 반대인지.
과감하며 뜬금없이 본론부터 꺼내고 보는 누군가.
결이 고운 비단처럼 어깨를 부드럽게 타고 흘러내리는 생머리는 어둠 속에서도 그 선명한 황금빛을 잃지 않았다.
"내가 도와줄까?"
교실은 커튼을 비집고 들어온 동틀 녘의 남빛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안에서 청금석 같은 눈동자가 더욱 푸르게 존재감을 발했다.
너무나 충만해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과 여유를 흩뿌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