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가 게임을 잘함-341화 (340/361)

341. 외전 역전의 제나 6

1교시 수업 시간.

그리고 쉬는 시간.

"…."

2교시 수업시간.

그리고 쉬는 시간.

"…."

3교시.

4교시.

이윽고 점심시간-

"재훈아. 최재훈."

친구라고 했던 김경식이 하루 종일 엎드려 있던 최재훈을 흔들어 깨운다.

"…어? 엉?"

"점심시간이야. 가자."

그러자 드디어 일어나는 최재훈.

"아, 오케이. 오늘 메뉴가 뭐였지?"

"보자… 미역 줄기 볶음, 미역 된장국, 오이 김치, 현미밥, 다시마 튀각, 멸치 볶음, 소야."

"…실화냐? 아니 뭔, 밥 경찰 다 모여서 소세지를 한계를 시험하려고 하네. 무슨 정상 결전이야? 포트거스 D 소세지 처형식이라도 돼?"

"그래도 어제 닭다리, 돈까스, 스파게티가 한 번에 나왔었잖아."

"왜 갑자기 이렇게 잘해주나 했더니, 최후의 만찬이었네. 그래도 경식이 닌 좋겠다?"

"갑자기 뭔."

"네가 좋아하는 미역 많이 나왔잖아."

"내가 미역을 좋아한다고? 혹시 내 머리숱 얇은 거 얘기하는 거면 넌 진짜 개쓰레기야."

"야 근데 미역은 일본어로 뭐냐?"

"말 돌리는 것도 쓰레기네."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비척비척 식당으로 향한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신소하가 중얼거렸다.

"쟤 진짜 웃기네."

"소하야 밥 머그러- 응? 뭐가?"

"최재훈 쟤 있잖아."

"최재훈? 누구지?"

"아! 아침에 만났던 그 자고 있던 애!"

"아, 맞다 맞다 재훈이."

"걔가 왜?"

아침에 그에게 잠깐 느꼈던 흥미는 진작에 다 식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신소하가 남자의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

그녀들이 눈을 빛내며 주제에 편승했다.

"아니, 쟤 내가 1교시부터 봤는데. 무슨, 죽은 것처럼 하루 죙~일 뻗어 있더니. 급식시간 되니까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벌떡! 부활하는데."

"너 그럼 1교시부터 쟤만 보고 있었다는 거야?"

"오오오올~~~"

"대박~~~"

어떻게든 이야기를 자극적인 방향으로 유도해 보려는 친구들의 개수작에 신소하는 같잖다며 "하."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기대와는 달리 조금의 풋풋함도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반응.

그를 통해 신소하가 남자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들의 관심 역시 덩달아 식는다.

"어쨌든, 우리도 밥이나 먹으러 가자~"

신소하가 반한 게 아니라면, 유명하지도 않고 별 특색 없는 남학생의 이야기는 무의미했다.

그녀들은 미련 없이 주제를 바꿔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쟤 학기 초에도 이야기 나오지 않았었나?'

하루 종일 퍼질러 자는데, 선생님이 터치를 안 하는 학생.

하지만, 수업 시간뿐만이 아니라 쉬는 시간에도 퍼질러 자서 존재감이 완전 사라지고 이내 그 누구도 관심을 안 가져서 유령이 된 학생.

그게 신소하가 다시 떠올려낸 최재훈의 정체였다.

'보니까, 딱히 노는 애도 아니고. 친한 애 보니까… 쟤도 뭐, 김경식 걔랑 같은 관가? 그 만화랑 게임 좋아하는… 범생이과. 그런데 쟤는 딱 봐도 공부랑은 거리가 멀 것 같고….'

신소하는 아직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한심하네, 저럴 거면 왜 학교를 다니는 거지?'

그녀 역시 최재훈에 대한 관심이 식었기에.

신소하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될 수 있는 최선의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성공적인 학교생활, 학생으로서의 본분.

둘 다 놓치기 싫었다.

그녀는 일찐도, 찐따도 아니었다.

불량아도, 범생이도 아니었다.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두루 사랑받는 이상적인 학생.

그렇게 매일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신소하에게 있어, 무기력에 찌든 최재훈은 빈 깡통처럼 무의미하고 보잘것없어 보였다.

그녀 안에서 최재훈은 다시금 아무래도 좋을 유령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랬다.

"어, 저거….'

신소하는 멀리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새로왔다는 전학생으로 추정되는 서양인.

그녀가 비틀거리더니 난간 밑으로 떨어지려 하는 게 아닌가.

'구해야…!'

된다는 걸 알지만, 자신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아니.

사실, 뭔가를 시도하려 한다면 그럴 수 있는 거리였다.

이대로 전학생이 등부터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다면 반드시 평생 불구로 살 큰 부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래에서 누군가 받쳐주면 둘 다 골절되는 선에서 그치겠지.

하지만 신소하는 그러지 못했다.

전학생의 바로 밑에 있으면서 도망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게 당연한 거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지는 게 이상한 거다.

신소하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고 있던 그때였다.

자신의 근처에 서 있던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최재훈.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던졌고, 전학생을 구해냈다.

주변에서 보내오는 열렬한 찬사에 그는 마치 이런 일이 익숙하기라도 하다는 양 능청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과정을 촬영하고 있던 신소하.

그녀는 그 비일상적인 그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거 영상 찍는 거 아니지…!? 119 부르는 거 맞지!?"

그때, 그 광경의 주인공인 최재훈이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어!? 어! 다, 다, 당연하지!"

신소하는 왜인지 기분이 들뜨는 걸 느끼며 곧바로 촬영을 멈추고 119에 연락하려 했다.

"하, 학생! 괜찮아요!? 저기 제 차 있으니까, 그거 타고 가요!"

그때-

'언니인가…?'

전학생과 닮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말했다.

"주변에 병원 어딨는지 아니까!"

"아, 오케이. 야, 일어날 수 있겠어!?"

"어… 가능할지도…."

최재훈이 전학생의 부축을 받고 일어서려던 그때였다.

"아, 그! 잠깐만요!"

신소하가 소리쳐 그걸 만류했다.

"그, 어떤 책에서 봤는데…."

사실 미튜브 영상에서 본 거지만-

"부상 입었을 땐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옮겨주는 게 맞다는데…."

미튜브에서 영상으로 스쳐가듯 들은 얕은 정보였기에 그 어떤 전문성도 없었지만.

다른 이들도 전문 지식이 없기엔 마찬가지.

게다가,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

결과, 그녀의 의견이 전적으로 옳다 여겨진다.

"혹시 모르니까, 그게 맞겠다."

신소하는 자신의 의견이 수용됐다는 사실에 모종의 고양감을 느끼고 들떴다.

들었지?

의욕적으로 주변의 남자들에게 눈치를 주려던 그 때-

"그럼, 내가 옮길게."

같은 여자인 전학생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섰다.

"…."

그에 신소하는 오기를 동반하는 수치심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다급하게 말했다.

"같이 들어!"

"아니, 나 버틸만한데 그냥 구급차 기다리면 안 될까…?"

수치심을 느끼는 건 신소하뿐만이 아니었다.

건장한 청년인 최재훈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끔찍한 미래, '사람들 앞에서 여자들한테 실려감'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다.

"하다 못해, 남자들이 들어 주면… 좀… 부끄러운데…."

아직 '남녀역전'이 익숙하지 않은 제나는 최재훈이 부끄러운 이유가, '이성간의 스킨십' 탓이라 여겼다.

때문에 아무런 사심 없던 그녀까지 옮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될 스킨십을 의식하게 돼 버린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낀 제나가 으르렁거렸다.

"부끄럽긴 지랄, 이런 상황에 그딴 거나 따질래!?"

"우리가 알아서 할 거니까, 좀 가만히 있어!"

"힝."

신소하까지 거들자 최재훈이 발언할 기회는 더 이상 없었다.

"일단 둘이서 드는 게 편하긴 한데, 어떻게 옮기는지는 알아?"

제나는 군필자였다.

부송자 운반법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신소하라는 여자는 풋내기 학생이 아니던가.

"…잠깐만. 검색하면…."

조속히 검색하려던 신소하를보고 제나가 피식 미소를 흘렸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그녀가 기특해서 그런 거였지만-

"됐고, 내가 알려주는 대로 해."

전학생을 자신과 동갑으로 알고 있는 신소하에겐 굴욕이었다.

그녀가 이를 악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전학생의 지시를 따랐다.

제나가 최재훈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어 그를 뒤에서 안는 형태로 일으켰다.

'으아아아….'

얇은 옷감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탄탄한 신체에 제나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주 묘한 비명을.

그때, 신소하 역시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개무거워!!!'

성장이 끝난 신장은 188에 달하고, 몸무게는 90을 넘기는 최재훈의 하반신을 낑낑거리며 옮기는 신소하.

"아니, 그렇게 힘들면-"

"시끄러!!!"

"넵."

오기에 받친 그녀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주변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구경꾼들은 더욱 늘어나 주변은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 모두가 최재훈이 낑낑거리는 여자 둘에게 실려가는 모습을 똑똑히 바라봤다.

'아… 인셍….'

최재훈이 입가의 체념의 미소가 그려졌다.

노라의 차가 공간이 널널한 SUV라 다행이었다.

그들은 낑낑거리며 뒷좌석에 최재훈을 눕히는데 성공했다.

"엄마, 얘 혹시 모르니까 제가 뒤에서 붙잡고 있을게요."

"뭐?"

'엄마? 저 사람이 언니가 아니라 어머니였다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유전자란 말인가.

신소하는 새삼 전학생 모녀를 바라보며 세상의 부조리를 느꼈다.

"그리고…."

전학생이 신소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생했어. 도와줘서 고맙다."

신소하는 저 얼굴에 무뚝뚝하게 감사를 표하니까 저도 모르게 '멋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갈 거야."

외부자를 대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오기가 들어 반항적인 어조로 말했다.

"뭐?"

너도?

왜?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제나의 시선에 신소하는 변명처럼 답했다.

"얘랑 같은 반이야. 그리고 너도, 몸 상태 안 좋잖아. 앞좌석에 앉아서 쉬어. 얜 내가 케어할게."

"그래, 제나야. 그렇게 해."

제나는 못마땅했지만 그들의 말은 정론이었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앞 좌석에 모녀가 나란히 앉고.

뒷좌석을 차지한 최재훈을, 신소하가 좌석 밑에 웅크려 앉아 붙드는 형태가 됐다.

"이거, 사고 나면 위험한 거 아닌가…?"

"사고 나면 원래 위험하거든?"

최재훈의 중얼거림에 신소하가 틱틱댔다.

"현문 우답이 따로 없구만."

"하 진짜. 아까부터 꿍시렁 꿍시렁. 다치지만 않았어도 얠 진짜."

"근데… 같은 반 친구야…?"

"또 뭐."

"아니, 고맙다고 옮겨줘서. 그, 앞에 두 분도 감사하고요."

"감사하긴!"

평소보다 더욱 긴장해서 운전하던 노라가 깜짝 놀라며 말을 이어갔다.

감사하긴 우리가 더 감사하다.

당신은 우리 딸 생명의 은인이다.

책임지고 보답하겠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푹 쉬어라.

모든 게 잘 될 거다.

흥분했기 때문일까, 다소 어눌한 한국말 대신 능숙한 영어가 튀어나왔다.

'와 원어민… 뭐라는지 하나도 못 들었어….'

"유왤컴."

신소하가 새삼 신기해 하다가 흐뭇하게 웃으며 답하는 최재훈을 보곤 가소롭다며 비웃었다.

"유왤컴은 무슨. 뭐라 하신 건지는 알아?"

"오브콜스지."

"허세부리긴, 귀엽네."

"…."

최재훈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신소하를 쳐다봤다.

"뭐. 뭘 봐."

"아니, 이름이 뭐였나 해서."

정확히는 그녀의 명찰을.

"아니, 너는 어떻게 된 게 같은 반 친구 이름도 몰라?!"

"너도 오늘 아침까진 내 이름 몰랐잖아."

"아닌데? 원래 알고 있었는데?"

정곡을 찔린 신소하가 뻔뻔하게 답했다.

"그래?"

명찰에 있던 최재훈의 시선이 신소하의 눈을 직시했다.

가깝다.

신소하는 괜시리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노려봤다.

"그래."

"그럼 말고."

최재훈이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되돌려 기싸움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대화 역시 마찬가지.

갑작스럽게 끊기는 흐름.

최재훈이 자신에게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도 너한테 관심 없거든?'

이런 애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든 없든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일까, 그녀는 아주- 못마땅했다.

'지가 뭐라고 날 무시해?'

그리고, 내 이름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돼?

학교에서 얼마나 유명한데.

내가 지 같은 줄 알아?

내가 지 이름은 몰라도-

'너는 내 이름을 알아야지.'

어느새 뾰루퉁한 얼굴이 된 신소하가 툭 내뱉었다.

"사과 안 해?"

"응? 갑자기 뭔 사과."

"너 알아보고 도와준 반 친구 이름도 기억 못한 거. 지금 학기 시작된 지 몇 달이 지났는데. 아니면 뭐 그거야? 나 같은 앤 기억할 필요도 없다?"

그녀가 태도를 돌변하여 시무룩한 모습으로 훌쩍거리는 시늉을 한다.

"훌쩍, 재훈이 너무행…."

최재훈 같은 애들은 이러면 어쩔 줄 몰라서 당황하겠지.

그런 신소하의 예상은 반만 적중했다.

최재훈은 당황한 건 맞지만, 그녀가 예상한 것과는 다른 의미의 당황이었다.

'얘 뭐하냐?'

그런 소리가 들리는 시선으로 신소하가 우는 시늉을 하는 걸 멀뚱멀뚱 쳐다봤다.

"…."

자괴감을 느낀 신소하도 역시 정색을 하고 멀뚱멀뚱 그를 쳐다봤다.

"뭐."

"아니, 지금부턴 확실히 기억해 둔다고."

그가 그녀의 명찰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그녀를 직시했다.

"신소하, 응. 이쁘네."

그렇게 말하며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얘 뭐야? 개뜬금없네?'

대뜸 이쁘다고?

최재훈은 어디까지나 이름을 이야기 한 거였지만 신소하는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표해온다 느꼈다.

'어이가 없어서.'

원래 같았으면 신소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불쾌함을 표하며-

'뭐야 갑자기? 짜증나게.'

그렇게 면박을 줬을 것이다.

좀 잘 대해줬더니, 자신이랑 같은 급인 줄 아는 그 건방진 생각을 단단히 부숴 줬을 것이다.

지금도 그러려 했다.

그런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인상 가득 주고 노려볼 생각인데 먼저 눈을 깔고 시선을 피해 버린다.

침을 뱉을 기세로 열려는 입은 우물쭈물 열리지가 않는다.

"뭐래… 어이가 없어서."

결국 그녀의 경고는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는데서 그쳤다.

앞좌석에 앉은 제나는 뚱한 얼굴로 백미러를 통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랄 났네.'

드디어 만나 회포를 풀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이게 웬.

'그 여자들'도 아니고 웬 듣도 보도 못한 꼬맹이가 저 사람 옆에서 저러고 있으니 흡사 남자친구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 기분이랄까.

아니면 남자친구한테 웬 잡것이 집적대는 현장을 목격한 기분이랄까.

혹시 둘이 뭐,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아니.'

듣자 하니, 최재훈은 저 꼬맹이의 이름을 기억도 못한다 했다.

더군다나, 저 경이로울 정도로 눈치가 없는 녀석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이해조차 못한 것 같고.

'하.'

그렇게 생각하니 또 기분이 좋아진다.

눈치 밥 말아 처먹은 것까지 판박이.

의심할 여지가 없이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이다.

자신이 아주 잘 아는 그 사람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자신보다 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그의 가족 정도일 것이다.

제나는 넘치는 자신감을 느꼈다.

그걸 넘어선 전능감마저 느꼈다.

지금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그려낼 수 있다.

제나는 그 시작으로서 최재훈과 관계를 트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야, 최재훈."

"네?"

마침 딱 좋은 상황이었다.

서로 아주 인상적인 첫 만남을 가진 직후가 아니던가.

"몸은 좀 괜찮냐?"

"아, 응. 너는…요?"

"너도 네 덕분에."

"아, 다행이네…요."

"그렇지."

…?

'응?'

제나의 의도와는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흐름이 맥없이 끊기는 게 아닌가.

원래 같았다면 최재훈이 신나서 흐름을 이어가야 정상인데.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내가….'

제나는 흐름을 주도하는 데 참고하기 위해, 첫 번째 첫 만남을 되짚었다.

그때도 인상적인 첫 만남을 갖고는 곧바로 관계를 텄던 걸로 기억한다.

'…어?'

그렇게 기억을 되짚던 제나가 당황했다.

합방을 위해 자신의 스튜디오에 매니저의 차를 타고 찾아온 최재훈.

차에서 내리는 그에게 자신이 처음으로 한 행동은-

'….'

시비를 걸며 기선 제압을 한 것이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시비를 걸 뿐이었다.

그러는 와중 어쩌다 최재훈이 크루 회식 동행을 권했고.

그걸 따라가 관계를 트게 되었다.

사실상, 최재훈이 야생의 제나를 주워다 기른 거나 다름없었다.

'어….'

첫 만남 때에 국한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기까지 그 과정은 반복됐다.

야생의 제나가 으르렁거리면, 최재훈이 '아이고 그래쪄요 우쭈쭈'를 반복한다.

'뭐야 이게…?'

그렇기에, 제나는 최재훈과 관계를 트는 방법은커녕.

그와 가까워지는 방법조차 몰랐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엔 말할 것도 없고.

"…."

거기다가 문제점 또 하나.

느끼건데 최재훈은 왜인지 자신을-

껄끄러워 하는 듯했다.

'왜…?'

자신의 태도는 그때와 비교하면 오히려 훨씬 대하기 편해졌을 건데?

제나가 최재훈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 때문이었다.

그때의 최재훈은 이미 제나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해 본 경험, 그리고 남녀역전을 겪은 경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제나의 날카로운 분위기를 여유롭게 받아들이는 게 가능했다.

그녀의 '남성'스러운 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렇기에 날카로운 분위기를 여유롭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힘들다.

여자인데 '남성'스러운 그녀의 태도가 위압적으로 느껴진다.

신소하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재훈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단지 그녀가 껄끄러운 것뿐이었다.

최재훈에게 두 여잔,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류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자 인싸' 말이다.

"…."

"…."

"…."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 흐르는 어색한 기류는 환기되지 않았다.

* * *

"하늘에서 저 여학생이 떨어지는 걸 받았다고? 뻥 치시네~"

"의사 선생님 경박한 거 보소."

"그게 진짜면 내가 진료비-"

"어, 저 그거 촬영한 영상 있는데."

"-결제는 들어오면서 봤던 카운터로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우와."

진료실에서 나온 웨스트 모녀와 최재훈을 일시에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뭐야! 어떻게 됐대!? 괜찮대!?"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신소하가 곧장 달려와 물었다.

최재훈은 대답 대신 미소 지으며 따봉을 시전했다.

"대-박! 와… 다행이네…."

진단 결과, 두 사람 모두 별 다른 문제나 부상은 없었다.

-와락!

다시 또 그 아찔한 장면이 떠오른 노라가 저도 모르게 제나를 껴안았다.

"다행이야, 정말로… 기적이야…."

제나는 부담스럽고 또 부끄러웠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 잠자코 있었다.

머지않아 그녀에게서 떨어진 뒤엔 양손으로 최재훈의 손을 감싸 쥐고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당신은 우리 가족의 기적이에요… 이 은혜는 정말로 잊지 않을게요…."

워낙에 낭랑한 목소리.

게다가 '존댓말'의 개념이 어려워 상대를 불문하고 극존칭으로 일관하여 다소 어눌하지만 듣기엔 좋은 노라의 한국말에, 최재훈은 대답 대신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울상이던 노라의 표정이 그제서야 부드럽게 펴졌다.

"아…!"

그때 흠칫하고 깜짝 놀라는 최재훈.

"응!? 무슨 일이에요!? 어디 아파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가 주섬주섬 품을 뒤적이다가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설마…?"

가방에 집어넣은 그의 손에서 스마트폰이 들려 나왔다.

"오… 갈릴레오…."

그의 뇌리에 구출 순간 들었던 '콰직!'소리가 재생됐다.

최재훈이 슬라이딩 할 때 한 번.

제나가 떨어질 때 한 번.

돌바닥과 총 두 번의 농밀한 스킨십을 나눈 핸드폰은 더 이상 핸드폰이 아닌 고철 덩어리였다.

혹시나 싶어 버튼을 조작하던 최재훈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노라가 다시 한 번 최재훈의 양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학생, 지금 저희랑 같이 바로 아이플 매장 가요."

"오오올~ 대박. 최재훈, 땡 잡았네~?"

신소하가 분위기를 띄우려고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최재훈은 사양할까 싶었으나 자신의 지갑 사정이 떠올랐다.

'그래도 사람 목숨 구했으니 이 정도는 받아도 되겠지….'

"아,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잠깐,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죠?"

"시간이요!? 잠깐만요!"

노라가 최재훈의 손을 감싸쥐었던 양손 중, 한 손만 풀어서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5시 40분인데 무슨 일 있나요?"

"아이고야…."

되는 일이 없었다.

"그게… 지금 제가 시간이 좀 빠듯해서, 일단 급하게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약속이라도 있으신가요?"

"알바, 아르바이트를 가야 돼서요."

"엥, 너 알바해?"

의외라며 묻는 신소하에게 최재훈이 고갤 끄덕여줬다.

"고딩도 알바가 가능한가?"

"가능하더라고."

"오호~ 야, 그러면 좀."

위아래로 스캔하는 신소하.

"응?"

"알바까지 하면 돈 꽤 있을 텐데 그걸로, 응? 너한테 투자도 하고 좀 그래. 화장품도 좀 사고. 신발이랑 가방이 그게 뭐냐? 티셔츠도, 목 늘어난 티셔츠 밖에서 입는 건 좀 그렇지 않아?"

그 말에, 옆에서 최재훈과 어떻게 관계를 터야 하나 고민하던 제나가 발끈했다.

최재훈의 집안 사정을 떠올린 것이다.

이 시기의 그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는 필시 힘든 집안 사정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일 텐데, 아무것도 모르고 저딴 말을 지껄이다니.

"하, 오케이. 참고할게."

당사자인 최재훈이 저러니 별다른 말은 않겠지만-

'아까부터….'

참, 여러 모로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었다.

"아, 아르바이트 하시는구나! 미안해요! 고마워요! 바쁜데 이렇게! 아! 지금 바로, 데려가 줄까요!? 그렇게 해요!"

"아, 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최재훈은 지각을 면치 못했다.

근무 시작 시간이 오후 6시인 최재훈이 직장 근처로 도착한 시간, 오후 6시 3분이었다.

"제가 같이 가서 사장님께 사정 설명 드릴게요!"

노라의 말에 신속하게 차에서 내린 최재훈은 씨익 웃어줬다.

"아유, 괜찮습니다. 이 정도 지각은 뭐."

그간 모범적으로 성실했던 최재훈의 행실을 고려하면 이 정도 지각은 문제로 거론되지도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어…."

"??"

최재훈이 노라의 얼굴을 멀뚱 바라보다가, 그 옆에 앉아 있던 제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명찰을 확인하곤 말을 잇는다.

"제나네 어머니!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맞다, 신소하. 오늘 도와줘서 고마웠다! 정말로!"

"아! 재훈 학생!"

"네!?"

"가기 전에, 나중에 연락 가능한 번호 좀 부탁드릴게요!"

"예? 아, 예."

최재훈의 손으로 이동한 노라의 핸드폰 액정 위에서 다급한 손가락이 춤췄다.

"일단 제가 폰이 고장 나서, 저희 집 전화번호 드렸어요!"

"아, 고마워요! 재훈 학생! 안녕히 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최재훈이 차에서 멀어지려는 그때.

"어?"

제나가 당장 내 눈 앞에서 꺼지라며 욕설을 내뱉을 것 같은 얼굴로 되려 그를 붙잡았다.

대뜸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어서 말이다.

"번호."

"어… 너희 어머니한테 찍어 드렸는데…요?"

"그거 말고."

"그럼…요?"

"네 번호."

"어… 왜…요?"

"싫어?"

"싫은 건 아니고…."

최재훈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핸드폰을 받아서 지시에 따랐다.

제나가 돌려받은 핸드폰을 한 번 쳐다본 뒤 말했다.

"됐어, 잘 가."

그 목소리와 표정 때문에 최재훈의 귀엔 일시적이나마 '뒤질래?'라고 들렸다.

"아, 넵."

최재훈은 부리나케 자동차에서 멀어지며 울상을 지었다.

'뭐지…? 나, 찍힌 건가? 왜? 내가 자기 구해줬는데? 하, 씨… 어떡하지… 성깔 개 드러워 보이는데….'

제나는 멀어지는 최재훈의 뒷모습을 보며-

"후…."

'됐다.'

긴장을 풀었다.

제나의 딱딱하게 굳은 살벌한 분위기.

최재훈은 상상도 못했지만, 그녀는 단지 과도하게 긴장한 것뿐이었다.

너무나도 떨려서.

그의 번호를 따는 게.

그와 관계를 트는 게!

'과감하게 질러 보길 잘했네.

그녀는 이미 최재훈의 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일반적인 절차를 거쳐야 그의 번호로 연락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그녀가 아직도 떨리고 있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뒤.

핸드폰에 찍힌 최재훈의 번호를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성공적'으로 관계를 트는 데 성공했다고.

"응?"

그 일련의 과정을 어딘가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신소하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새로 도착한 문자에는-

"…엥?"

믿기 힘든, 그러나 납득이 가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녀가 얼떨떨한 얼굴로 제나를 힐끔 훔쳐보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학교 커뮤니티 중심에 있는 신소하에게 새로운 가십이 도착했다.

'레즈비언이었구나.'

신소하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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