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가 게임을 잘함-340화 (339/361)

340. 외전 역전의 제나 5

지금쯤이면 조례 시간이나 수업시간 아닌가?

그런데 주변은, 교실은 몹시 소란스럽다.

책상에 엎드려 있던 남자는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눈을 떴다.

원활한 수업을 위해서가 아닌, 원활한 숙면을 위해서.

상체를 일으킨다.

그런데 웬걸, 교탁에 장태식이 보인다.

자타공인 본교에서 가장 엄하고 무서운 교사로서 공포의 대상.

아무리 막나가는 놈들이라도 장태식 앞에선 함부로 나대지 않는다.

그런데 왜?

'아. 그 전학생. 우리 반으로 왔구나… 응?'

남자의 귀가 쫑긋거렸다.

방금 그 목소리.

뭐지?

남자가 홀린 것처럼 목소리의 출처를 거슬러 올라가, 전학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어…."

멱살을 잡혔다.

전학생의 인상은 그런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인상.

"자 그럼, 바로 수업 시작된다."

전학생을 쫓아 쉴 새 없이 옆으로 굴러가는 눈동자는, 수업이 끝나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 * *

"자 여기까지. 아, 전학생 너무 귀찮게 하지 말고. 특히 너, 김민성."

"아, 선생님! 좀!"

"좀 뭐 임마."

장태식이 책을 번쩍 들어 올리자 김민성이 움츠려든다.

반 학생들이 그걸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선생님! 제 가오 좀 살려 주세요!"

"가오? 내가 니 뭐를 살려 아주 그냥 입으로 매를, 매를!"

퍽!

퍽!

"악! 악!"

"아무튼, 내가 너 딱 주시하고 있는 거 잊지 마라."

장태식이 반을 나서자 진정한 쉬는 시간이 찾아온다.

제나의 옆자리에 앉은 내향적 분위기의 여학생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관찰하다가, 눈치 좋게 자리를 버리고 탈출했다.

"제나야~"

"언니~"

학생 떼가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은 제나 주위에 삽시간에 인간 벽을 형성했다.

달라붙어서 질문을 하는 여학생들, 한 발짝 떨어져 그걸 지켜보는 남학생들.

그들의 눈이 열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제나가 자기소개에서 보여줬던 있는 그대로의 모습.

18세답지 않은 당당하면서도 여유로운 존재감이 의도치 않게 그들을 휘어잡아버린 것이다.

'이런 썅….'

제나는 격렬한 싫증을 느끼며 충동에 몸부림쳤다.

충실한 학창시절은 지랄, 지금이라도 때려치우고 옛날처럼 다 존나 꺼지고 따돌리든 말든 니들 엿대로 하라 할까?

'후, 아냐 진정하자.'

지금은 그때완 다르다.

자신이 학교생활이 불안정하면 걱정해 줄 사람들이 있지 않던가.

가장 먼저 부모님이 그렇고.

그리고 머지않아 꼭 만나게 될 그 사람도.

자신이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 사람은-아마 여러 모로 신경 쓰며 걱정해 주겠지.

'…나쁘지 않은데?'

'-같은, 소리 하네 미친년.'

관심 좀 받자고 걱정이랑 민폐 끼칠 생각이나 하다니.

그녀는 스스로를 비판하며 생각을 바로잡았다.

지금의 상황.

그래.

팬들을 상대하는 거라 생각하자.

지난 몇 년간 질리도록 해 온 일 아니던가?

물론, 몇 년간 질리도록 해왔다 해서 능숙해지는 건 아니다.

"응."

"어."

"비슷해."

"그런가?"

"하."

"재밌네."

주변에서 캐치볼을 하자며 신나서 공을 던져 주면, 제나가 받아준답시고 홈런을 날려버리는 식이었다.

타율이 얼마나 위대한지, 과연 메이저리그의 나라 출신이라 할 만했다.

그래도 본래의 성격이 성격인지라-

'알겠으니까 닥치고 꺼져 병신들아.'

라고 말하지 않는 것 자체만으로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와, 그렇구나~"

"대~박~"

그렇게 제나가 열심히 홈런을 날려버리는데도, 여자들은 마냥 좋다며 계속해서 공을 던졌다.

지금 그들에겐 제나의 붙임성 없는 태도조차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팬이 있다면 안티 팬 역시 존재하기 마련.

제나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 반의 중심을 차지했던 여학생들이었다.

그녀들은 음침하고 음흉한 속내를 품고 있으면서 겉으론 발랄하게 말했다.

"제나야."

"?"

"근데 전학이라니, 도대체 전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아~ 그래~? 다행이다. 난 또, 우리 제나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서 전학 온 줄 알았지."

거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자, 제나는 아무 말도 없는데도 저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안 좋은 일?"

"전학은 보통 학교에서 안 좋은 일 일으켰을 때 가는 거잖아~"

"아, 그치 그치. 내가 알기로도 그래."

"근데 제나는 아니라는데~?"

"제나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맞아, 맞아. 제나가 아니라니까 아닌 걸로!"

"그러면, 우리 제나는 전 학교에서 어떤 사람이었어?"

"나 그 학교에 친구 있는데, 혹시 걔랑 아는 사이야? 걔 있잖아…."

"그러고 보니, 제나는 화장품 뭐 써?"

"가방은 어디 꺼야~?"

"이츠그램 아이디 뭐야~?"

그건 더 이상 질문이 아닌 떠보기였다.

그녀들은 제나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밑에 둘 수 있는 부류인지 아닌지.

어느 쪽이 됐든, 이 장소에서 자신들의 밑에 두고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화기애애했던 장소의 기류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아 그리고, 제나야. 너는 왜 그렇게- 남자 같이 말해?"

그 말에 제나는 너무 어이가 없고 기가 차서 처음으로 표정 관리에 실패해 눈썹을 튕겼다.

오히려 자신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다들 왜 하나같이 '남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는지.

다른 여자 뒤에 찰싹 붙어 앉아 어깨 위에 턱을 걸쳐놓는다던가.

갑자기 서로의 향기를 맡더니 향수 바꿨엉? 샴푸 바꿨엉? 이 지랄을 한다던가.

이야기하는 와중 갑자기 서로 손을 깍지 낀다던가.

제나는 태어나서 이렇게 '남자'처럼 행동하는 여자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희귀한 개체들이 이렇게 무더기로 모여 있다니.

제나는 자신이 무슨 성소수자 특수 학교에 온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차별적 학교가 존재할 리 만무했다.

결국, 제나는 '이년들이 나 놀리려고 이 지랄을 하는구나'생각했다.

서로 땀 냄새만 맡아도 인상을 찌푸리는 이 또래의 여자들이, 전학생 한 번 엿먹이겠답시고 이렇게 치욕적인 수고를 들인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해할 길이 없었다.

제나는 같잖아서 피식 웃었다.

"난 이러는 게 편해."

제나가 여유롭게 말하는 무난한 대답에 그녀들을 흥미를 잃으려다가도-

"아 잠깐, 제나야 혹시!"

누군가가 좋은 생각이 났다며 크게 한 번 손뼉을 쳤다.

"너 혹시, 레즈비언이야!?"

"꺄악!"

"아 맞아 맞아! 나도 그 생각했는데!"

"그래서 아까 민성이한테 그렇게 정색했던 거고."

"말 나온 김에, 제나는 민성이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평소 김민성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여학생, 한유림이 입을 열었다.

김민성이 이 전학생에게 호감을 표한 것도, 그걸 전학생이 거절한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지가 뭐가 잘났다고.

지금의 흐름을 주도한 것 또한 그녀였다.

"그니까, 그니까."

"애들 다 보는 앞에서 그렇게 쪽 주면 민성이가 뭐가 돼?"

"민성이 불쌍해~"

김민성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생글거리는 얼굴로 나섰다.

"아니, 뭔! 재밌자고 한 거 가지고!"

"오~ 쪽팔리니까 장난인 척~"

"아, 아 좀! 그냥 넘어가주면 안 되냐? 어? 아직 마음의 상처가 다 낫지도 않았는데."

곳곳에서 터지는 웃음소리.

분위기가 묘하다.

기류가 김민성을 향해 흐른다.

마치 정말로 김민성은 장난으로 집적댄 건데, 전학생이 잘못했다는 듯한 상황이 된다.

그러자, 김민성은 다시 또 생글거리며 제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제나도 딱 봐도 장난으로 그런 거구만. 얘네 진짜 이간질 하는 거 봐. 하, 진짜. 서럽다. 그치 제나야?"

"…."

제나는 이 볼수록 귀염성 희미해지는 꼬꼬마들이 뭔 개수작인가 싶어, 비죽이며 바라볼 뿐이었다.

그걸 어떤 의미로 해석한 건지, 김민성이 이어서 말했다.

"자, 봐바 짜식들아! 우리가 이렇게 사이가 좋은데, 이간질을 하려고. 화해한다 잘 봐라. 제나야?"

"응?"

"여기, 내 핸드폰."

번호를 달라는 의미였다.

"""오오오~"""

"제나 좋겠다~ 민성이 번호 땄네~"

"그러니까~"

"솔직히, 레즈비언 아니면 민성이 같은 남자한테 번호 따이고 안 좋아할 리가 없지~"

"맞아 맞아~"

"근데 제나는 별로 안 아쉬울지도? 딱 봐도, 남자'들'한테 인기 많아 보이잖아~"

"그러게~ 전학 온 것도 그거 때문일지도~?"

"꺅~"

툭.

제나는 안에서 인내심이라는 이름의 고무줄이 끊어지는 걸 느꼈다.

한계였다.

제나는 노골적인 따돌림을 당하면 당했지, 이 따위 음습한 개지랄에 휘둘려 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제나가-

"아, 씨~ 진짜 개시끄럽네…!"

행동을 취하려던 그때였다.

반 구석에서 잠꼬대 같은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태한.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려나는 소리를 기점으로, 반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그가 제나를 둘러싼 인파로 다가왔다.

학생들은 그가 다가오기도 전에,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길을 텄다.

그렇게 제나와 마주앉은 김민성 바로 옆에 다가왔다.

"어, 어. 태한아. 미안해. 시끄러웠지? 조용히 할게."

"하, 김민성 임마 또 여자들한테 집적대고 있네."

김태한이 누군가를 의식한 듯, 평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유한 어조로 말하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김민성 역시 억지로라도 웃었다.

김태한이 원하면 언제든 그들을 울릴 수도, 웃길 수도 있었다.

"에이, 태한아 '또'라니. 제나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오해는."

김민성이 움츠러드는 모습에 주변에서 또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김태한이 손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

평소에 버릇에서 기인한 무의식적 행동이었다.

김태한이 저도 모르게 전학생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그녀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김태한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임마, 애 그만 좀 귀찮게 해. 안 그래도 막 전학 와서 정신없을 건데."

"아, 어, 응… 미안. 이번엔 내가 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

"이번은, 항상 그랬으면서."

다시 한번 김태한의 의도대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현장을, 전학생을 짓누르던 음습한 기운은 어느새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넌 임마, 이미 신뢰를 잃었어. 야, 그 뭐냐. 이름이 제나라 했던가?"

김태한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학생에게 관심을 돌렸다.

"핸드폰 줘 봐."

그러나 어딘가 넋이 나간 듯, 답이 없는 전학생.

"…."

여기서 제동이 걸릴 거라 예상 못한 김태한이 당황했다.

김태한이 당황하자 반 전체가 당황했다.

"제나야…!"

그때, 근처에 있던 제나의 짝궁이 기겁하며 제나의 팔뚝을 콕콕 찔렀다.

"어, 어!? 아, 핸드폰. 여기."

그러자 잠이 덜 깬 듯, 이유도 묻지 않고 어영부영 핸드폰을 건네는 제나.

김태한은 영 찝찝했지만 어쨌든 그 핸드폰을 받고는 잠시 뒤 돌려주며 말했다.

"자 여기. 내 번호 찍어 놨으니까, 김민성 저 놈 또 발정 나서 앵기면 문자해. 얘 사고치기 전에 중성화라도 시키던가 해야지."

"와, 진짜 억울하고 서러워서…."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던 김민성과 여자들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열심히 웃었다.

부자연스럽기까지 한 급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이었지만, 모두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일단은 [ㄹㅇㅋㅋ]나 하면 되는 거고.

앞으로는, 제나를 건드리면 안 된다.

김태한이 그걸 원하는 듯했으니 말이다.

-♪

종이 울리자 학생들은 곧바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쨌든, 귀찮게 해서 미안했고. 앞으로 잘 부탁해…?"

"앞으로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제나를 몰아세우던 여자들은 눈치를 보며 한마디 한 뒤에야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전학생을 둘러싼 서열 정리 헤프닝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간단히 마무리되었다.

김태한은 전학생의 얼굴을 스치듯 확인했다.

아직 얼떨떨한 그녀의 표정에 서린 감정을 '감동'이라 받아들인 김태한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에 되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그녀의 번호가 찍힌 핸드폰을 쳐다본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곧이어 교사가 도착하고 수업이 시작됐다.

"…."

그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제나의 표정은 얼떨떨한 그대로인 채 굳어 있었다.

김태한이 전해준 감동의 여운이 참으로 깊어서-

-는 아니었다.

김태한의 생각, 혹은 바람과 달리.

그녀가 느낀 감정은 감동이 아니었다.

극심한 혼란.

방금 전, 김태한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할 때였다.

그 과정에서 제나는 언젠가부터 느끼고 있었던 위화감의 정체를 자각하게 되었다.

위화감의 정체는 괴리감이었다.

그 괴리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져, 하교 시간이 되었을 무렵 극에 달했다.

이 학교의 남학생들과, 자신이 갖고 있는 '남성상'사이의 괴리.

이 학교의 여학생들과, 자신이 갖고 있는 '여성상'사이의 괴리.

그 괴리가 야기하는 자극은, 제나의 머릿속에 구겨 넣어져 아직 채 정리되지 않은 방대한 정보의 일부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 정보에 따르면.

지금 이 세계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래.

'남녀역전 세계…?'

자신이 살아온 세계와 '성'적인 부분이 완전히 반전되어 있는 세계였다.

'여자'들이 '남자'처럼 행동하는 게 당연한 세상.

'남자'들이 '여자'처럼 행동하는 게 당연한 세상.

아니.

그 남자가… 여자 같은 게 아니라….

그 여자가…?

복잡하다. 어지럽다.

머릿속이, 뇌가 뒤죽박죽 뒤섞이는 느낌.

"헤이, 제나."

그런 와중, 김태한이 다가와 제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쪽 동네, 아직 잘 모르지? 우리 지금 놀러갈 건데, 따라올래? 애들 놀거나 모이는 곳 대충 알려줄… 뭐야, 너 왜 그래?"

그러다 제나의 상태가 어딘가 심상찮은 걸 눈치챈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오늘은… 패스… 지금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아, 어… 오케이… 그럼 내일…?"

김태한의 목소리는 거부반응에 의한 염증으로 가득 찬 제나의 머릿속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는 김태한을 뒤로하고 교실을 나섰다.

속이 매스껍다. 이대로 게워내면 뭔가 나와선 안 될 무언가가 나와 버릴 것만 같다.

참아.

견뎌.

발걸음을 재촉한다.

정문 앞에만 가면 차를 끌고 마중 나온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의 얼굴을 본 뒤, 차에 누워 정신을 추스르면 괜찮아질 거다.

'진정해….'

부모님이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처럼.

이 세계가 과거라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처럼.

이 세계가 '남녀역전 세계'라는 사실 역시,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과거로 돌아온 마당에, 새삼 놀랄 게 있을까?

'그래.'

그렇지.

드디어 머릿속의 염증이 가라앉고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 봐, 간단하잖아.'

이 세계가 과거든, 원래 세계와 다르든.

중요한 건 정해져 있다.

이 세계에는 부모님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람 역시 존재한다는 사실.

그 사실만 변하지 않는다면-

"…잠깐."

차츰 안정되어가던 그녀의 발걸음, 자세가 불량 보도를 밟은 듯 덜그럭 흔들렸다.

진정된 줄 알았던 머릿속의 염증 반응이 다시금 격렬해진다.

'이 세계는….'

원래 자신이 있었던 세계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정말로 내가 아는 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은, 최재훈은 '남자'가 '남자'고, '여자'가 '여자'인 평범한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하지만, 이 세계의 최재훈은 '남자'가 '여자'고, '여자'가 '남자'인 이질적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 둘은 근본적으로 '정반대'에 준하는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아는 최재훈과는 '정반대'인 '최재훈'을 정말로, 자신이 아는 최재훈이라 볼 수 있을까?

그 사람을 마주했을 때, 남학생과 여학생들을 보며 느꼈던, 마치 다른 종족을 보는 듯한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그를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신이 알던 최재훈과 일치시킬 수 있을까?

'당연-'

'당연히-'

안 된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미래를 가득 채웠던 기대가 두려움으로 변질되고 만다.

아늑하게만 느껴졌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아침과 같았다.

강제로 주입되는 압도적 정보에 인한 과부하.

그녀는 뇌와 정신에 가해지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엄청난 고열을 겪고 있었다.

백옥 같던 피부는 달군 쇠처럼 달아 오른 상태.

"하아… 하아…."

그 때문인지 호흡도 열풍처럼 뜨겁다.

-주륵.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시스템이 다운되었다는 신호였다.

덕성고의 정문 아래로 펼쳐진 가파른 언덕과 계단.

비척거리던 제나는 그 계단의 난간에 기대어 몸을 추스르려고 했다.

제나가 있는 곳에서 바닥까지의 높이는 족히 3M는 되어 보였다.

지금부터 그녀의 몸이 추락할 높이였다.

"제나야~~~ 제나야? 어, 어!!! 안돼!!!"

차에서 나와 기다리다 제나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풀나풀 손을 흔들던 노라 웨스트.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미끄러지듯 난간 밑으로 떨어지려는 자신의 딸을 아래에서 받아주기 위해.

가능할까, 자신의 힘으로?

사치스러운 걱정이었다.

그녀에겐 딸을 받아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예정이었다.

너무 멀다.

모친은 스무 발자국은 더 가야 하는데 딸의 몸은 이미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희망은 있다.

그 밑으로 지나가는 학생들이 있었다.

저 학생들이라면-

"제발…!!!"

그 절박함 외침이 닿기도 전에- 이미 그 밑의 학생들은 이변을 눈치 챘다.

이변을 눈치 채고-

"어, 어!! 뭐야!!!"

이미 황급히 달아나는 중이었다.

그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불시 상황에 처했을 경우 인간은 가장 먼저 본능에 지배되어 움직인다.

갑자기 머리 위, 3M 높이에서 예고도 없이 최소 50KG은 될 '물체'가 떨어진다.

휘말리면 자칫 생명에 지장이 될 만한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주어진 시간은 2초 남짓.

그런 상황에서 누가 본능이 지시하는'도망친다'외의 선택지를 떠올리고, 검토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남자의 반응 속도, 판단 속도, 신체 능력은 실로 특출나다 할 수 있었다.

제나의 금색 비단과도 같은 금발 생머리가 허공에서 흩날리는 순간이었다.

"내 머리 받쳐!"

"어, 어!?"

바로 밑도 아니고 몇 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옆에 있던 친구를 끌고 달려오더니- 바닥에 슬라이딩하듯 드러눕는다.

약간 든 상체를.

위로 들어 올린 팔을.

몸뚱이가 떨어지는 순간에 맞춰 아래로 끌어당긴다.

혹자들에게 '공주님 안기'라 불리우는 자세였다.

-콰직!

가장 먼저, 깔고 누운 가방에 들어 있던 필통과 그 안에 들 필기구들이 산산조각 났다.

다음으로 필통 밑에 있던 실내화가 한계까지 짓눌린다.

"끅!"

팔과 복근이 짓눌려 박살나- 기에는 너무나 단단했다.

남자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몸짱이라는 사실에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마지막으로, 남자의 고개가 반동으로 크게 젖혀진다.

돌바닥에 뒤통수가 처박히려던 찰나-

-탁!

남자가 끌고 온 친구가 다급히 발을 내밀어, 발등으로 그의 뒤통수를 받쳤다.

기분은 나빠도 돌바닥에 비하면 5성급 침대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제나의 구조는 상황을 감안해 보았을 때 사실상 완전 무탈하게 이루어졌다.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기적에 가까운 남자의 대처 덕분이었다.

"와!!!!!!"

"대박!!!!!!!"

"미친!!!!!"

주변에서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그거 영상 찍는 거 아니지…!? 119 부르는 거 맞지!?"

복근에 힘이 왕창 들어간 남자의 입에서 힘 가득 들어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가 자신에게 핸드폰을 겨누고 있는 학생에게 말했다.

'응?'

기분 탓인가, 어딘가 익숙한 얼굴.

진한 화장기에, 미역 같은 웨이브 펌.

치수 줄인 교복 위로 니트를 입은-

아 맞다.

'오늘 만난 그, 신소하 걔.'

가 당황해서 허둥지둥 손을 흔들었다.

"어!? 어! 다, 다, 당연하지!"

그리고-

"제나야, 제나야!!!"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던 노라가 뒤늦게 기어오듯 다가왔다.

제나처럼 커다랗고 파란 눈망울에서 눈물방울이 주르륵 쏟아져 흐른다.

"…?"

그에, 제나는 다시 정신이 들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엄…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친의 눈에서 나온 눈물이었다.

그리고-

"학상…."

고개를 돌리자, 자신의 아래에 누워 있는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얼굴 근육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런 곳에서 자면 입 돌아가… 그 전에 내가 먼저 돌아가실 것 같지만… 어쨌든…."

그리곤, 한쪽 입꼬릴 끌어올리며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이스 캐치…."

"…."

그에 제나는 생각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온 건가?'

지금 자신의 바로 눈앞에 절대로 몰라볼 수 없는 그 사람이 있었기에.

그 미소.

그 분위기.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어떻게 보아도 자신이 아는 최재훈이었다.

긴장이 눈처럼 녹아내렸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불안과 함께.

"하…."

경직되어 있던 제나의 입술이 풀리며 자연스러운 실소가 새어나왔다.

"엄청… 쾌적해 보이시네요…."

"덕분에."

"그럼 좀… 내려와 주실 수…."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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