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 외전 역전의 제나 3
-여보세요.
"…!"
수신음을 대신해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제나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너무 긴장해서 제대로는 못 들었지만-
맞다.
그 사람이다.
자신이 기억하던 목소리와 어조는 다소 다르지만, 알 수 있다.
심장이라는 엔진과 연동하는 악셀에 발을 올려놓은 것처럼, 그녀의 심장 박동 기세가 차츰 거세져갔다.
벅차오르는 가슴.
너무나도 많은 하고 싶은 말.
"하아… 하아…."
그러나, 열리지 않는 말문.
새하얀 머릿속.
전화가 연결되고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그 사람이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최악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동시에, 연락 수단이라는 접점을 확보한 것 자체는 좋다.
충동적의 행동은 결과론 아주 좋다.
그런데 그 뒤가 문제였다.
충동적인 행동인 만큼 뒤가 없었다.
'제나'의 기억에 의하면, 이 세계의 자신은 그 사람을 모른다.
그 사람 또한 자신을 모르다.
완벽한 초면.
고로, 서로의 핸드폰 번호 또한 모른다.
그런데 한쪽에서 대뜸 핸드폰으로 연락을 걸어온다.
세상에서 그런 첫 연락이 가능한 건 보이스 피싱과 납치범, 그리고 행운의 편지 정도였다.
고로, 제나가 대화의 운을 떼는 말로 선택할 수 있는 대사는-
1. 당신의 계좌가 노출됐습니다.
2. 니 여동생 지금 어딨는지 알아?
3. 이 전화는 영국으로부터 시작됐으며 장난이라 생각하고 무시한 사람들은 전부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 세 가지 정도인 것이다.
멀쩡한 대화의 성립이란 불가능했다.
'음….'
결국, 제나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뚝.
통화를 장난전화로 마무리짓는 것이었다.
* * *
-하이~
-왔냐~
-야 어제 걔 방송 봤냐?
-야, 야야야야야! 야 왔냐! 야 이거 봐, 나 어제 말했던 야수오로 펜타킬 한 판인데 야 씨발, 야 진짜 이거 와 씨, 개 씨--진정해 미친놈아.
하나 둘 자리가 채워져가는 등교 시간의 학급은 '웅성웅성'이라는 효과음이 딱 들어맞았다.
학생들이 자아내는 풋풋한 활기로 가득 찬 학급 안에서, 한 남학생은 구석 자리에 쥐 죽은 듯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아니, 진짜~?"
"진짜!"
그런 그와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들이 대조를 이루었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사이에는 크게 '일진'과 '찐따'로 나뉘는 일종의 카스트 제도가 존재한다.
치수를 줄여 몸에 꽉 맞는 교복.
긴 속눈썹에, 불그스름한 입술과 볼.
학생임에도 화장기 완연해 화려한 얼굴.
손질하는 데 시간이 상당히 들어갈 법한 단발 웨이브펌.
학교에서 허용하는 '선'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그 복장으로 알 수 있듯.
신소하를 비롯한 그녀들은 학교 카스트에서 '브라만'에 속하는 부류였다.
"이야, 신소하 완전 미친년이네~?"
"개~웃겨."
꺄하하핫 째지는 웃음소리.
그녀들은 옆에 누가 자고 있든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요란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그래서-"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러던 그때.
옆 남학생의 품 안에 있는 걸로 추정되는 핸드폰에서 진동소리가 울리기 시작햇다.
신소하 무리는 처음엔 신경 쓰지 않았으나, 계속해서 대화의 흐름에 끼어들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결국 신소하가 남학생을 등지고 앉은 그대로 팔만 움직여 그를 툭툭 쳤다.
-지이이잉.
미동도 없자, 신경질적으로 다시 한번 반복.
그런데도 대답을 않자-
"야, 전화 왔어."
목소리를 곁들였고, 그런데도 역시 대답을 않자-
"아, 전화 받으라고!"
신경질을 곁들였다.
신소하는 본교에서 자신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 이들을 대부분 알고 있다.
남학생는 신소하가 알지 못하는 이였다.
그를 대하는 표정과 태도의 기저엔 철저한 무관심과 무시가 깔려 있었다.
"…."
그제야 남학생이 느릿느릿 고개를 들었다.
아직 꿈속을 헤매는 듯 몽롱한 얼굴의 그가 신소하를 쳐다보려다 자신의 핸드폰이 울리고 있는 걸 확인했다.
신소하 무리는 무관심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모든 행동을 멈추고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왜인지 그 분위기가 빌어먹게도 관심을 끄는 그가 통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
그리고-
"…."
끝냈다.
그가 귀에서 떼어낸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리곤 여전히 멍한 얼굴을 갸웃거리더니 중얼거린다.
"뭐지, 이건. 스토커? 변태?"
'스토커? 변태?'
역시나 빌어먹게도 관심이 가는 말을 남긴 그는, 그걸 마지막으로 다시 또 팔로 만든 울타리에 얼굴을 박았다.
친구들과 눈길을 교환한 신소하가 그의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다시 일어나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다시 또 전화가 와서 깨운 줄 알았는데 아니다.
그제야 몽롱한 얼굴을 신소하에게 향한다.
신소하가 운을 뗐다.
"야."
"엉?"
"방금 그거, 뭐냐?"
"방금 그거?"
"전화 왔었잖아."
"왔었지."
"뭔 전화였냐고."
"이상한 전화."
"아 쫌!"
신소하가 답답함에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렀다.
"일부러 나 빡치게 하려고 그래? 답답해 죽겠네!"
신소하는 학교에서 상당한 유명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신경질을 내면, 어지간한 학생들을 대부분 주눅이 들기 마련이었다.
남학생들 역시 마찬가지, 아니 오히려 더하다.
그가 어떤 무리와 어울리는지 아니까.
하지만, 그에게선 그런 기미가 조금도 보이질 않았다.
얼굴에서 차츰 잠기운이 걷히고 본래의 인상이 드러난다.
남자치곤 긴 속눈썹의 그림자가 진 듯 짙게 드리운 다크서클이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반면에 그 눈가가 받치고 있는 눈동자는 힘으로 가득 차 밝은 느낌을 준다.
그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가 묘하게 어우러지며, 그들의 또래에선 보기 힘든 도발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 얘 좀….'
남자를 보는 그녀들의 인상이 다소 변햇다.
"내가 널 일부러 빡치게 하려고 이런다고? 아니, 이건 또 무슨 발상의 전환이지. 지금 내가, 잘 자던 날 억지로 깨운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있는 게 맞나?"
"뭐?"
신소하를 제외하고.
그녀는 남자의 능청스러운 태도가 반항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서열이라도 다지려는 듯 더욱 억센 태도로 말햇다.
"허, 어이가 없어서. 넌 뭐, 학교에서 퍼질러 자는 게 자랑이냐? 왜 그리 당당해?"
누가 봐도 신소하의 태도는 적반하장이었으나, 그녀는 만전의 태도로 당당하게 쏘아붙였다.
"…그렇긴 하네."
그러나 남자가 또 순수히 수긍하자 맥이 빠진다.
"하, 뭐야 얘?"
신소하가 어이없다며 헛웃음을 흘렸다.
어느새 그녀의 자세는 완전히 돌아가 엎드린 채 얼굴만 들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남자를 위아래로 스캔했다.
'꾸미면 좀….'
괜찮겠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요즘 대한민국 전국 각지 그녀들의 또래엔 조숙하게도 '명품 치장'이라는 문화가 유행하고 있었다.
얕게는 티셔츠, 신발, 가방 에서부터.
깊게는 시계를 비롯한 악세사리까지.
그 명품으로 표현되는 경제력과 패션 감각은 학교 계급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끔찍한 수준이었다.
그의 악세사리 없이 깨끗한 팔과 손.
셔츠 안으로 보이는 목 늘어난 티셔츠.
듣도 보도 못한 낡은 브랜드의 가방.
근처 이발소에서 대충 손질된 듯한 헤어스타일.
다듬어지지 않은 눈썹과, 로션조차 안하는 듯한 피부.
마음에 안 들어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내려는 신소하 안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점점 낮아졌다.
"그래서 뭐. 도대체 어떻게 이상한 전화길래, 스토커나 변태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냐고."
"…그거 궁금하다고 나 깨운 거야?"
"그래. 불만 있냐?"
"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불만, 드럽게 많았지만 이 경우엔 원만하게 떨쳐내는 게 답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 왔는데, 아무말 없이 이상한 소리만 내곤 끊더라고."
"이상한 소리? 뭐 어떤 소리?"
"엄청 자그맣게… …"
"뭐? 안 들리는데?"
고개를 갸웃거린 신소하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입 가까이에 귀를 갖다 댔다.
남자 역시 무의식적으로 신소하의 제스쳐에 응해, 그 귀에 예의 소릴 냈다.
"하아, 하아."
전화에서 들었던 작지만 가쁜 숨소리를.
"꺄악!"
신소하는 고막으로 느껴지는 열기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터뜨리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뒤에서 들려오는 친구들의 웃음소리에 귀가 붉어지는 걸 느꼈다.
"뭐, 뭐해!? 미친 거 아냐!?"
친구들 앞에서 이런 놈 때문에 당황한 게 부끄러운 신소하가 노발대발 소리치며 그를 노려봤다.
"아니… 니가 갖다 대셨잖아요…."
자기 딴에는 가장 위협적인 태도로 대하는데도 남자는 시종일관 여유롭게 능글거릴 따름이었다.
굴욕적이기 그지 없는 상황.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까불지?'
'나를 모르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자식의 태도를 굽힐 수 있을까?
신소하가 오기마저 느끼려던 찰나였다.
"어쨌든, 이제 됐지? 나 자도 되지? 아니, 잘 거야. 잘 거니까, 거, 좀. 수다 좀 다른 곳에서 해 주면 고마울 것 같아. 솔직히, 여기보다 좋은 데 많잖아. 안 그래? 야, 경식아!"
"어, 응!?"
그의 부름에, 두 칸 떨어진 앞 좌석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 대답했다.
다소 왜소한 체구에 안경을 쓴, 모범생상의 남학생이었다.
"내 친구 경식인데, 얘가 남의 말을 그렇게 잘 들어주거든? 경식아~ 니가 추천 해 준 만-"
"아, 아아!!!"
경식이가 기겁을 하며 말을 끊었다.
"응?"
"그, 그…! 그건 나중에 우리 둘 끼리만 얘기하지 않을…래?"
"아, 뭐 그러던가. 아무튼 보시다시피, 우리 경식이가 아주 샤이해도 그 사람들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다방면으로 해박해요."
"보다시피? 뭘 보고?"
"그렇지, 우리 경식이의 매력은 멀리서 본다고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야. 진주처럼 세심하고 앙증맞아서. 가까이 가서 봐야 돼. 그러니까, 얼른. 어여 가서들 경식이 구경하시면서 해피 수다 타임들 가지시기 바랍니다."
"큭큭큭, 뭐라는 거야 얘~"
"개웃겨~"
"니가 안 그래도 우리 다른데 가려 했거등~"
"우리도 너 좋아서 여기 있던 거 아니거등~"
"혹시 우리가 말 걸어 줬다고, 막 우리랑 뭐 있다고 생각해서 나중에 고백하면 안 돼~? 상처 받을 수도 있으니까? 어디 보자-"
신소하의 친구 중 한 명이 그의 가슴팍의 명찰을 확인하곤 말했다.
"재훈아, 알겠지~?"
"아유,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아하학~ 개웃경~"
"재훈아 우리 갈게 바이바잉~"
"소하야 가자~"
"어, 어? 어, 응…."
결국 그녀는 친구들에게 이끌려 불완전해소인 상태로-
'최재훈….'
그와 헤어져야만했다.
그녀는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해 두었다.
"어휴~ 드디어 갔네."
최재훈, 그가 진이 다 빠졌다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인싸놈들 진짜, 숨 막힌다 숨 막혀. 경식아, 이제 숨 쉬어도 된다. 엉님이 인싸들 다 내쫓았다."
그 말에, 김경식은 방금 전 그 신소하 무리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던 최재훈의 모습을 떠올리곤 그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봤다.
'지는 무슨 인싸 아닌 것처럼….'
김경식은 학기가 시작되고 수 개월이 흐른 지금 아직도 이 별종이 자기 같은 놈에게 관심을 갖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 씨, 근데 잠 다 잤네. 근데 경식아."
"어, 엉?"
"아까 왜 그런 거야?"
"아까? 뭐가?"
"엉님이 눈치 좋게 임마, 어? 만화 얘기 꺼내려 했는데 니가 말렸잖아."
"눈치 좋게라니… 도대체 뭔…."
경식은 경악했다.
그 일찐들 앞에서 오타쿠 같이 생긴 자신이 실제로도 오타쿠라는 사실을 강제 커밍아웃시키려 해 놓고, 뭐? 눈치가 좋아?
그는 최근에 크툴루라 신화라는 고상한 장르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인간의 사고론 이해 불가한 초월적인 존재들을 맞닥뜨린 인간들이 범우주적인 공포를 느끼는 모습을 묘사하는 게 이야기의 중심을 이르는 장르인데.
그 범우주적 공포라는 게 이런게 아닐까 싶었다.
가끔 최재훈의 이런 면을 보면 SAN치라는 게 깎여 나가는 기분이었다.
"아니 임마. 너 그때 그랬잖아. 그 캬루? 가루? 어, 그래 가루. 그 여자 인싸 캐릭터. 그런 캐릭터가 니 취향이라며? 방금 걔네들이 딱 그런 타입 아냐?"
'가루가 아니라 갸루.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건 어디까지나 2D라고!!! 3D는 쓰레기야!!! 게다가, 갸루랑 일찐은 하늘과 땅 만큼 달라!!! 일찐도 쓰레기잖아!!!'
일본에 가 본 경험이 전무해, 일본의 여자 일찐 격 되는 존재인 '갸루'를 실제로 접해본 경험 또한 전무한 김경식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이 별종을 상대로 그런 이야기를 하면 밑도 끝도 없다.
결국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만 묻는다.
"방금 걔네들이 내 취향이라고 쳐. 그런데 그거랑, 걔네 앞에서 내가 오타쿠라는 거 까발리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너랑 취향 비슷하면 좋을 것 같다며. 그래서, 너랑 취향 비슷한 애 있나 한 번 넌지시 주제 꺼내 본 거지."
"…재훈아."
"응?"
"…아냐, 됐어."
김경식은 '백치미'라는 속성이 절로 떠올랐다.
준수한 외모에 인싸면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백치미 캐릭터라니.
'얘가 여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3D는 쓰레기니 뭐니 설파했던 그가 3D 망상에 잠겼다.
"아, 그런데 재훈아."
"오냐."
"방금 그거, 전화. 무슨 전화였던 거야?"
"뭐야, 듣고 있었어? 폰으로 뭐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의 말대로 폰으로 뭘 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아닌 척 훔쳐듣고 있었다. 김경식이 정곡을 찔리곤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뭐, 뭐! 들으면 안 돼!?"
"아니 뭐. 별 건 아니고."
최재훈은 방금 전 신소하와 했던 일련의 일을 김경식과 반복했다.
"히익-"
김경식이 질색을 하며 뒤로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학학거리더니 끊더라고."
"모르는 번호였다고?"
"응."
"목소리는?"
"학학 소리만 듣고 목소리를 판별하는 것도 가능하구나. 대단하다 경식아. 이제부터 널 신음소리 소믈리에라 부르마."
"아, 쫌! 어쨌거나 음… 모르는 번호로 대뜸 전화가 오더니 학학거리곤 끊는다라… 그거 진짜 무슨 변태 스토커 같은 거 아닐까?"
"에이~ 스토커는 무슨 임마. 그냥 장난전화겠지. 잘못 건 거거나."
"그, 그런가? 아무튼, 진짜 기분 나쁘긴 하다."
"…아니야, 잠깐!"
"어, 어!?"
"발상의 전환!"
"발상의 전환…?"
"만약 그 학학이!"
"학학이…?"
"사실, 여자라면!?"
"어…."
최재훈이 따봉을 시전하며 말했다.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좋아."
"어, 아, 하하하, 그, 그런가…?"
"그러니까 혹시 모르니 번호 차단은 안 하는 걸로."
"그거 참… 도전적인 모험인데…?"
"모름지기 인생을 도전적인 모험으로 가득 채워야 스스로를 사나이라 칭할 수 있는 법이다 경식아."
"와… 그것 참…."
"그리고 임마, 어? 이렇게 적극적이어야지 여자랑 접점이 생기는 거야. 방금 너처럼 그렇게 내빼기만 하면-"
"아, 아! 알겠으니까! 다신 그러지 마 제발! 나 진짜 저기 창문 달려가서 뛰어내리는 거 보기 싫으면."
"허허, 고녀석 참. 응?"
그때- 최재훈은 밖이 묘하게 소란스러운 걸 느꼈다.
"뭐야? 누가 게임이라도 접나? 템이라도 뿌려? 뭔 애들이 저리 떼로 몰려 다녀?"
"어? 아. 아까 애들 이야기하는 거 들어 보니까 무슨, 전학생이 왔다던데?"
"겨우 전학생 한 명 왔다고 저리들 호들갑이라고? 뭐지? 우리 학교 학우들이 그렇게 새로운 만남에 목이 말라 있던가?
그러면서 왜 우리한테는 말을 안 걸어 주는 것이지? 아니면 혹시 저것도 인싸들의 유희중 하난가? 누가 먼저 전학생과 친구가 되나, 상금으로 인싸 포인트를 걸기라도 한 건가? 우리에게도 인싸 포인트를 따내고 인싸가 될 기회가 드디어 찾아온 건가? 경식, 가 볼까?"
"도대체 뭐라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재훈아. 가끔 보면 너가 나보다 오타쿠 같아."
"과분한 말이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애니메이션을 본 것 같다는 너의 경지에 닿기에 나는 한참 먼 것 같다 경식아."
"…."
김경식은 안경을 벗고 질끈 감은 두 눈 사이를 문질렀다.
최재훈과 막 만났던 그 시절.
안 물어본 것까지 나불거렸던 과거의 자신을 목매달고 싶었다.
"어쨌든, 쟤네들이 왜 그 전학생 한 명 갖고 호들갑이냐면. 그, 서양인이라더라."
"서양인?"
"응. 피부가 엄청 하얗고, 눈은 엄청 파랗고, 머리는 황금색에. 엄청 예쁘대."
"그게 유명한 라이트 노벨도 대부분 섭렵했다는 너의 최선이냐, 경식아? 엄청나게 엄청 엄청나다는 게, 이국적 미모의 미녀를 묘사하는 너의 최선이야?"
"…아니, 그럼 뭐 어떡하라고. 얼굴도 모르는 여자애 얼굴 묘사하는데 그럼 시라도 한 편 쓸까? 그건 오그라들고 뭔가, 기분 나쁘잖아."
"경식아, 나는 오그라든다는 그 말이 원망스럽다. 그 말이 우리나라 대한민국 사람들의 예술혼과 감성을 탄압하고 있어.
내 생각에는 그 오그라든다는 말을 일본인들이 만든 게 아닐까 싶어. 일본인들의 조선 문화 말살 정책의 일환이 아닐까 싶어. 비열한 일본인들 같으니, 우리들이 원나블 게 섯거라를 외치게 될 미래가 두려운 거지. 아, 미안. 일본을 너무 안 좋게만 얘기한 것 같아. 사과할게."
"그걸 왜 나한테 사과하는데."
"어쨌든 경식아. 내 앞에서는 괜찮으니까 유명한 라이트 노벨에 애니메이션에 만화에, 한국 드라마는 관심 없으면서 일본 드라마까지 대부분을 섭렵하고 얻은 너의 풍부한 감성을 아낌없이 뽐내 봐라."
"나 놀리는 거지?"
"하야끄! 경식 쿤!"
"…."
멋쩍은 기색으로 생각에 잠긴 그는 이내 크흠 헛기침을 하며 운을 뗐다.
"처음은 여름이었다. 그 푸른 눈은 태풍이라도 몰아치려는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갠 여름 하늘의 청량감을 주었다."
"다음은 가을이었다. 그 금발은 마치 추수철의 풍요로운 석양 한가득 머금고 무르익은 벼처럼 황금빛 자태를 뽐냈다."
"그리고 겨울이었다. 때 묻은 세상에 순백을 되찾아주는 첫 눈이 그녀의 피부에도 내린 듯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내게, 마지막으로 봄이 찾아왔다."
"오오올~~~"
스스로도 만족스러웠는지, 최재훈의 진심 섞인 호들갑스러운 찬사에 양쪽 광대를 씰룩이며 마음껏 우쭐거리는 김경식.
"이야, 경식아. 니 시를 듣고 내 마음에도 봄이 찾아왔다. 진짜, 널 보고 대한민국 교육계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걸 새삼 뼈저리게 느낀다. 이렇게 문학적 감각이 풍부한 경식이가, 국어 3등급이라니? 셰익스피어한테 영어 3등급 주는 꼴 아니냐? 이렇게 된 거, 일본으로 귀화해서 그쪽 국어 1등급 받아 버리자."
"아니, 놀리는 거 맞잖아!"
"어쨌든, 한마디로 엄청 예쁜 서양인이라는 거지?"
"…."
김경식의 차게 식은 눈이 그를 응시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하긴 하네. 도대체 얼마나 예쁘길래."
"어, 그러면 같이 보러 갈래?"
어딘가 들뜬 기색의 김경식.
'금발 벽안의 서양인 전학생'.
이 또한 경식쿤의 판타지를 건드리는 캐릭터였던 것이다.
그의 눈은 지금 태풍이라도 몰아치려는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갠 여름 하늘처럼 청량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에이~ 그렇다고 뭐 구경까지야. 그 전학생도, 전학 온 첫날이라 긴장될 텐데 그렇게 연예인 구경하듯 구경 오면 부담스러울걸?"
"그런…가?"
"뭐 이건 내 생각이고. 어쨌든, 난 구경 갈 정도로 궁금하지도 않고-"
하암~
말하던 그가 하품을 했다.
"경식이랑 이야기하다 보니, 다시 졸리기 시작해서."
"무슨 의미지?"
"나 잔다~"
김경식은 잠에 드려는 최재훈을 보고 말했다.
"어제도 그, 밤늦게까지 그거 하느라 피곤한 거야?"
"겜창이, 겜창 한 거지."
그거.
게임을 말하는 거였다.
최재훈이 마치 지금 비웃으시면 됩니다 라고 말하는 양 자조 기색으로 말했다.
"…."
김경식은 본분을 아는 학생이었다.
학생이라면 무엇보다도 학업을 최우선해야 한다 여겼다.
그는 학교의, 학원의, 과외의 모든 수업에 충실했다.
전날 게임을 하다 늦게 잠들어 다음날 학교에서 조는 최재훈의 행태는, 그에게 있어선 상상도 못 할 무책임한 행태였다.
하지만 김경식은 최재훈을 한심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가 친구라서가 아니다.
과거, 김경식이 최재훈에게 마음을 터놓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건.
최재훈 역시 김경식에게 마음을 터놓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김경식은 최재훈의 처한 사정을 안다.
몇 년 전 갑작스럽게 찾아온 부친의 권고사직.
그를 극복하기 위한 창업.
그리고 사업의 부진.
현재 최재훈의 집은 큰 생계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듣자 하니, 부모가 휴일과 밤낮 없이 일하면서 검소하게 생활해도 빚을 야금야금 줄여가는 게 고작이라던가.
최재훈은 그런 가정에 보탬이 되고자,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프로게이머를 목표로 한다.
그게 지금 가족이 처한 상황을 가장 빠르게 호전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계획이라나.
다소 허황된 계획이라 할 수 있지만, 그에겐 그 허황된 계획을 실현시킬 능력이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아르바이트 직장으로 향한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가사를 한다.
가사가 끝나면 동생의 공부를 봐 주고, 그제서야 프로게이머 준비를 위한 게임 연습을 시작한다.
부족한 숙면은 학교에서 보충한다.
그런 위태로운 생활을 지속하면서도 그는 서울의 이름 있는 대학에 진학할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게임의 경우에도-
'챌린저라고 했었지?'
국내 아마추어 최상위 300명 안에 든다.
나이를 감안하면, 열 손가락 안엔 들겠지.
프로를 목표로 할 자격이 충분하다.
처음 최재훈을 알게 된 김경훈을 그를 보며 때때로 거무칙칙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그의 존재는 마치, 부모의 지원 아래 풍족한 환경에서 학업에 집중하는데도 그 결과가 항상 아쉬운 수준에 미치는 자신을 전면으로 비웃고 비판하는 듯했다.
거무칙칙한 열등감을 유발한다.
하지만, 어느새 깨닫게 된다.
자신이 모자란 게 아니라, 단지 그가 과한 것뿐이라고.
그리고 그런 그가 원하는 결과를 이루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래. 자라 자. 푹 자라."
"일본어로 잘자를 뭐라고 해?"
"오야스미… 미친놈아…."
"오야스미… 미친노마…."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되고.
김경식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수업 시작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고, 복도는 여전히 떠들썩했다.
그는 결국 인파를 따라 전학생을 구경하러 나섰다.
* * *
"하…."
-한숨 쉬었다!
-우리 따라다니는 거 짜증나서 그런 건가?
-혹시, 우리한테서 마늘 냄새 나나!?
아쉽다.
그 사람과의 전화를 그렇게 마무리해야만 했던 게.
'뭐, 그래도….'
유익한 장난전화였다.
그 사람의 전화번호가 자신이 아는 바와 일치한다는 건 곧, 그 외의 요소 또한 일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시사였으니.
당장 그의 가족이 오랫동안 주거한 집과, 오랫동안 운영한 치킨집의 가게까지 알고 있지 않던가.
게다가 마침, 지금 자신이 주거하고 있는 지역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18세 감성에 맞춰 속된 표현을 사용하자면 아다리가 개 오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요점은 이거다.
그 사람과 어떻게 자연스러운 만남을 가져 인연을 만드는가.
그리고-
"…어?"
그녀는 문득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원래 세계에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던 모습.
그 사람과 자신, 단 둘이 서 있는 모습이 막연히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그 여자'가 없으니 말이다.
"하…."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주 만족스러운 특유의 비소를 머금고 있는 제나.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막대한 부와 명예.
그녀가 세계 최고의 프로게이머이자 방송인인 'PPP'로서 쌓아 온 모든 게 사라졌음에도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녀는 막대한 부와 명예를 가졌음에도 만성적인 허무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곤 했다.
그 사람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너무 겁내서, 혹은 너무 망설여서, 혹은 너무 늦어서.
그 사람과 바라는 관계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늦지 않았다.
더 이상 겁내지도, 망설이지도 않을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을 후퇴했지만 그녀가 바라는 미래는 더욱 가까워졌다.
그 미래를 거머쥐기 위한 계획을 세워 나가다 보니 어느새 교무실 앞이었다.
-전학온 거 맞는 것 같은데?
-대박.
-몇 반이야?
더불어 그녀를 둘러싼 인파의 크기가 극에 달해 있었다.
제나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위화감은 외모에 특히나 민감한 시기인 학생들의 주목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하멜론의 사나이가 피리를 불듯 사람들이 꼬였고, 결국 이 모양이었다.
"하…."
옛날 제나는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진절머리를 치곤 했다.
단지 자신이 아름다운(자각이 있다)서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관심을 갖다니.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런 상관도, 관심도 없다 이거지.
사랑하는 부모님을 잃고 가짜 가족들에게 핍박 받아, '진실된 인연'이라는 추상적인 이상에 집착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이상으로 여기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불특정 다수에게 기댈 필요가 없었다.
부모님이 있었고, 그 사람이 있었으니.
더군다나, 유명인 생활을 보내며 사람들의 얕은 관심에도 이젠 익숙해졌다.
지금은 저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팬서비스를 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물론,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린 뒤 몇 초의 뜸을 들이곤 교무실 문을 두드렸다.
-문 두드린다!
-아니, 다 아는 거 중계 그만 해!
-우리 뒤에는 안 보여!
-그냥 차라리 방송을 키지 그러냐?
-어 근데, 잠깐. 쟤 걔 아냐?
-걔?
-잘못 봤나?
머지않아 문이 열리고, 제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새로운 담임이 마중을 나왔다.
"다들 구경났어!? 시간 널널한가 봐!? 얼굴 다 기억해 뒀다가, 숙제 더 많이 낼 줄 알아!"
딱 봐도 엄해 보이는 남자 교사의 관록 있는 일갈에, 학생들은 소스라치며 즉시 해산했다.
'와, '남자' 선생이 무슨….'
그녀가 기억하는 '남자'선생 중에서도 학생들에게 무섭다 평가 받는 부류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부류는 처음 본다.
마치, 무섭다 평가 받는 '여'교사 중에서도 으뜸에 해당하는 학생 부장에 준하는 위압감.
'대단하구만.'
제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새로운 담임을 따라 교무실에 들어서-
"응?"
려던 그 때.
그녀의 시선이 흩어지는 인파 사이에 박혔다.
"미친…."
'쟤가 이 학교였어?'
그녀가 기억하는 지금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지만,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제나와, 한 여학생의 눈이 마주쳤다.
제나에게 지지 않을 수려한 외모.
그리고 제나에게 지지 않을 시큰둥한 얼굴을 한 그녀의 가슴팍에는 자수로 적혀 있길-
[최재은]
제나가 만면에 화색을 띄웠다.
그렇게, 시종일관 똥 씹은 표정이다가 자신을 보더니 만면에 화색을 띠는 전학생을 본 최재은은 생각했다.
'뭐지? 레즈비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