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천외전 2
설마, 한 수 위의 판단으로 상황이 이렇게 될 걸 예측하고 매복하고 있었던 건가?
'…아니야.'
진드라의 레벨.
그리고, 아이템 상태를 보아 하니.
페이스는 그들의 한 수 위에 있지 않았다.
한 수 그 이상.
페이스는 훨씬 높은 곳에 있었다.
만약 페이스가 그저 한 수 위에 있어서 단순히 끈기 있게 제자리에서 가만히 대기하고 있었다면 페이스의 이익은 '2킬'과 '남신의 눈물'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페이스는 그 대신에, 그 시간에.
끊임없이 움직였다.
매복하는 척, 혹은 그대로 지나쳐가는 척.
이미 그려두었던 동선에 따라 다른 장소를 들렸다 온 것이다.
그렇게 '1킬'에 또 다른 재료 아이템을 확보한 뒤 돌아와서, 그제서야 '2킬'과 '남신의 눈물'을 챙긴 것이다.
이 모든 걸 예측-
아니.
유도함으로써.
페이스를 처치하기 위해 고심 끝에 내린 판단이 결과적으로 온몸을 바쳐 헌신하는 꼴이 됐다.
적을 신실한 종으로 만들 정도의 완벽한 농락.
손바닥 위에 있는 건 페이스가 아닌 그녀들이었다.
<사망했습니다!>
<랭킹83위>
"하…."
차밍챠오가 단 한 번의 패배로 격차를 깨닫고 중얼거렸다.
"시발, 퇴물은 무슨."
포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 포그가 퇴물이라고요?"
레오레 명문팀인 TC1 출신으로서 현재, 레오필 랭킹 26위에 빛나는 'TC1 EGGE'.
그녀가 포그와 맞닥뜨렸던 게임의 리플레이를 재생시키며 울분을 토했다.
"아니, 이거 봐요. 이 거리에서 갑자기 의문사 하길래 뭔가 봤더니. 저기, 저 '점'보이죠?
저게 포그 씨더라고요? 아니, 저 거리에서 다섯 발을 전부 헤드샷으로 꽂아 넣는 게, 말이 돼요? 와, 진짜 이분은 그냥 전면전으로는 답이 없겠더라고요. 그나마 파밍으로 어찌 해 보는 게 유일한 답인 것 같은데… 그게 될 지."
전설들의 위신은 언제 추락했었냐는 듯, 곧바로 복구된다.
그렇게 생기는 의문.
그렇다면.
그런 둘을 상대로 항상 승리를 거두며, 압도적 격차를 벌리고 있는 숨컷.
그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숨컷 씨요?"
EGGE가 시청자들의 질문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으~'몸을 떨었다.
"그분의 사밀라는 진짜, 악몽 그 자체였어요. 다시 상상하기도 싫네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은 그냥…."
그녀가 잠깐의 고민 뒤 말했다.
"답이 안 보이던데요? 무슨 답이냐고요? 무슨 답이긴요. 이길 답이죠. 그냥… 머릿속에 그 사람 이기는 그림이 안 그려지더라고요. 제가 이리랑, 포그 선수 두 분 다 만나 봤는데, 두 사람 다 어찌 어찌 공략할 길이 보이긴 하거든요?"
페이스.
"이리 얘는 워낙 팀플레이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아직 배틀 로얄에 적응 못 한 게 느껴지고. 에임도, 포그 선수처럼 못 버틸 정도는 아니라서."
포그.
"포그 선수는 아까 말했다시피. 전략 전술 쪽으로 약간 빈틈이 보여 가지고, 그걸 파고들면 어찌 될 것 같긴 한데."
그 둘을 이야기 하다가-
숨컷.
그의 이름이 나오니 절로 고개가 도리질을 친다.
"숨컷 그분은, 그냥… 빈틈이 안 보여요. 아무리 해 봐도 공략 방법이, 빈틈이 안 보여. 이분은 마치 악몽… 이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하나… 아, 그래."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며 '이거다'라며 말했다.
"에임도 에임이고, 뇌지컬도 뇌지컬인데. 그냥, 이 사람은 저희랑 다른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게임 이해도 자체가. 달라. 무슨, 미래에서 온 사람 같아요. 우리는 아직 구구단 배우고 있는데, 이 사람은 혼자서 미적분을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 해야 하나? 그래서 저도 요즘 이분 플레이 연구-…."
사람들은 한 차원 높은 수준에 있는 숨컷의 플레이 스타일은 분석하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숨컷 동선'이라는 이름으로 일부 랭커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하던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머지않아 일반인들에게까지 퍼지고.
퍼지고 퍼져, 머지않아 세계 전체로 퍼지게 되더니-
'KR메타'라는 명칭으로 굳어져-
제목 : 야 근데 지금 아무리 해 봐도 KR메타 따라하는 애들을 못 이기겠는네
내용 : 닥치고 KR메타 따라하는 게 답인 거임?
ㄴ : 일단은 그런 것 같은데?
ㄴ : 아 ㅋㅋ 암기나 하라고
ㄴ : 한국이 레오필의 중심을 지키고 있어요 ㄷㄷ
ㄴ : 속보) 조컷 국뽕 클럽 합류 예정
레오필 '공식의 틀'의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번 멸망전.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숨컷'과 'KR메타'였다.
숨컷을, KR메타를 넘어서는 새로운 선구자가 등장할 것인가.
아니면, 이번 멸망전을 통해 KR 메타가 '공식의 틀'로 거듭날 것인가.
전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된다.
* * *
"아니 도대체 이게 뭔…."
멸망전의 총 책임자인 김 팀장은 지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멸망전의 판이 지난 며칠 사이 너무 커져 버린 것이다.
아무리 첫 공식 대회라곤 하나, 멸망전은 이벤트성이 짙은 대회로 그 성격이 이벤트 행사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
전세계적으로 '정규 리그'에 가까운 기대와 관심이 향해지고 있었다.
숨컷.
그 인간.
"예, 에! 숨컷 님 알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도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예. 예! 수고하세요!"
그 복덩어리 덕분이다.
숨컷 덕분에 최근 옐로TV는 엄청난 성장을 거뒀고 마침내, 리치TV를 앞지르기에 이르렀다.
이번 멸망전을 성황리에 마무리하면 아메리카TV마저 앞지르고 국내 최고의 플랫폼으로 당당하게 우뚝 설지도 모른다.
김 팀장을 비롯하여 옐로TV는 지금 행복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고민이 하나.
멸망전에 '정규 리그'에 가까운 관심과 기대가 향해지고 있다.
이는 즉슨, 그들이 '정규 리그'와 같은 수준의 무대를 기대하고 있음을 뜻했다.
하지만, 멸망전은 이벤트성이 짙어 사실상 대회라기보다는 행사에 가까웠다.
규칙만 봐도 그렇다.
프로 팀의 경우엔 프로 선수가 세 명으로 제한되며, 두 명의 플레이어를 방송인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규칙.
심지어 그 중 한 명은 반드시 남성 방송인이어야 한다는 규칙.
그리고 방송인 팀의 경우엔, 프로 팀에서 두 명의 프로를 데려올 수 있다는 규칙.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레오필의 '공식의 틀'이 결정되는.
레오필을 이끌어 나갈 '선구자'이자 '스타 플레이어'가 결정되는 수준 높은 경기, 비유하자면 '월드 챔피언십 결승'인데.
결국 보게 될 것은 '올스타전'따위의 이벤트 경기인 것이다.
"…아."
그에 따라 김 팀장은 한 가지 방안을 강구해 냈다.
그녀의 의견은 순조롭게 통과되고 참가자들도 흔쾌히 승낙하여 멸망전에 반영되었고.
드디어-
"자, 그러면. 멸망전. 시작하겠습니다! 선수들 입장해 주세요!"
* * *
"으…."
"응? 지현 씨, 무슨 일이에요?
최재훈이 아까부터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 못하는 권지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어제부터 너무 떨려가지고…."
"떨린다고요?"
"예… 도무지, 떨림이 멈출 생각을 안 하네용…."
"뭐? 도무지 떨림이 멈출 생각을 안 해? 뭐, 지금 '그거' 쓰고 있기라도 하냐?"
""그거?""
마치 만화 같았다.
최재훈과 권지현이 동시에 같은 말을 하며 고개를 같은 방향으로 갸웃거렸다.
"그거 있잖아. 니 집에 있는, 거, 사람 졸라게 떨리게 하는 거."
말하는 제나의 눈꼬리와 입꼬리가 음흉한 선을 그렸다.
"…!"
그에 권지현만이 반응한다.
그녀가 그림판에서 빨간색 페인트로 클릭한 듯 급격히 달아오른 얼굴로 경악했다.
"제, 제, 제, 제, 제, 제, 제나 씨!!!!!"
"오, 풀파워인가?"
"이 오타크들 또 자기들끼리만 아는 얘기 하네. '그거'가 뭔데요. 저도 알려 주세요."
"재, 재훈 씨!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나 씨!!! 재훈 씨 앞에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왜 이렇게 당황해? 정곡이라도 찔렸어? 큭큭큭, 아 알겠어. 모른 척 해줄게. 됐지?"
"모른 척이라니… 헝…."
제나의 짓궂은 비소.
권지현은 할 말이 많았으나-
"그거? 무엇이지?"
최재훈의 눈치를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자 그러면, 마지막 팀!
밖의 무대에서 그런 얘기가 들려온다.
마지막 팀.
지금 그들, '컷컷컷' 크루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슬슬 나갈 준비 해야겠는데, 지현 씨. 이제 떨리는 것 좀 괜찮아 지셨어요?"
"전원 끄랜다."
"제나 씨 진짜!!! 아, 그, 재훈 씨. 괜찮아요. 그, 저 이렇게 큰 대회 나가 보는 게 처음이라 떨린다는 소리였어요!"
"아~"
"아아~"
의미심장하게 최재훈을 흉내내는 제나를 권지현은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그때, 최재훈이 말했다.
"뭐, 떨릴 거 있어요?"
"네?"
그렇게 다시 권지현이 시선을 향하자, 특유의 자신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어차피 우리가 우승할 건데. 안 그래요?"
그가 권지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럽게 입가를 끌어올렸다.
"아, 네! 맞습니당!"
드디어 긴장이 풀렸는지, 얼굴이 풀리며 특유의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된 권지현.
제나는 마찬가지로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진짜, 떨릴 거 없는 거 맞지?"
"으아아앙!!!"
참다못한 권지현이 제나에게 달라붙어 전신을 달달달 떨었다.
"으~어~어~미친~~안~꺼~어~져~?~!"
"허허, 사이좋은 거 보소. 팀플 뒤졌다."
-자 그럼, 입장해 주세요!
"자, 갑시다, 여러분."
최재훈이 달라붙었던 둘 사이에 끼어들어-
"앗!?"
"어!?"
양팔로 그녀들을 얼싸안듯 어깨동무를 하고 대기실에서 무대 위로 향했다.
* * *
멸망전이 진행되는 서울 E스타디움.
축구 경기장을 방불케 하는 규모의 객석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필드의 중심엔 경기에 참가할 백 명의 플레이어를 수용할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플레이를 관중들에게 조화로우면서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구조물.
크고 작은 스크린으로 구성된 기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둥의 정상을 장식하는 거대한 네 개의 스크린 아래엔 위치한 무대.
그 무대의 앞에 참가자들을 위해 준비된 좌석.
일찍이 무대에서 소개된 참가자들이 좌석에 앉아 무대 위를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올려다본다.
수만 명의 관중들.
그리고 전세계 수백만 명의 시청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마지막 남은 세 석의 주인공이자, 이번 대회의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들이 등장할 차례였다.
"후…."
무대를 올려다보는 포그의 얼굴은 실로 결연했다.
지난 며칠, 그녀는 오늘을 위해 정말이지 광기에 사무쳐 몰두했다.
도전을 위해.
이전 FPS계의 정점이었던 FRO.G의 자리를 탈환할 때조차도, 그것을 응당 당연히 여겼었던 포그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현 FPS의 정점이자 절대적 재능을 지닌 천재가 도전자의 입장에서 누군가에게 도전하는 일은.
-자, 그럼 입장해 주세요!!! 팀 '컷컷컷'!
지금 무대에 오르게 될 이에겐 충분히 그녀를.
그녀를 비롯한 모든 플레이어들을 도전자로.
'아래'로 여길 자격이 있었다.
레오필이라는 새로운 무대의, 시대의 독보적인 존재.
경기장의 공기가 진동했다.
관중석에서 일제히 터져 나온 거센 환호와 함성으로.
그들이 가장 먼저 무대에 오른 권지현의 이름을.
그 다음으로 오른 삼피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현재, 미튜브 어워드 종합 부문 3위에 자리하고 있는 그 이름을.
<미튜브 어워드 종합 부문>
1…
2…
3. 숨컷
거대한 스크린에 비춰진 그는 도취된 듯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가 엄지 세운 주먹을 하늘로 치켜 올리며 말했다.
"굿."
전보다 더욱 큰 함성이 경기장을 울리며 멸망전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