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하애민 3
"허허. 제가 왜 뻥을 칩니까."
"그게 아니면! 오빠가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요!"
"오호, 흥미로운 논린데. 어째서이지?"
"솔직히 오빠 주변에, 저 같이 어린 나이에 돈도 잘 벌고. 저만큼 예쁜 여자 있어요!?"
당돌한 거 보소.
어쨌거나, 물어 봤으니 최재훈은 생각해 본다.
일단-
-하위.
최재훈의 머릿속에 하애민과 같은 또래인 최재은이 나타나서 손을 흔들었다.
-어리고 예쁜 여자를 찾았는가?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허리에 손을 올렸다.
'음, 그렇지. 세상에서 우리 재은이보다 어리고 예쁜 여자는 없긴 해.'
"일단 저희 집 여동생이-"
"여동생이요!? 저 놀려요? 이거 봐, 내 말 맞잖아요, 나 무시하는 거!'
-아니 내가 어때서. 저거 웃기는 년이네, 오빠 그년 내 앞으로 데려와 봐! 내 눈 앞에서 찍 소리도 못할 자식아!
'진정해 재은아.'
"진정하세요 애민 씨."
얼떨결에 꼬꼬마들에게 포위당해 최재훈이 전전긍긍하던 그때.
"애, 애민 씨 또 무슨 일이에요!"
"일단 진정해 보세요."
하애민이 떽떽거리는 소리에, 레이지와 재미니.
그리고-
엄청난 친화력으로 그들과 친구를 먹은 차현하가 다가왔다.
그녀는 왜인지 '조종사 선글라스'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보잉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는데.
조그마한 얼굴 절반이 선굴라스에 가려졌음에도, 그녀 특유의 호쾌하고 능글스러운 표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우리 자기 가는 곳은 어떻게든 시끌벅적해지는구만. 또 무슨 일이야?"
'자기'.
그 단어에 하애민이 귀를 씰룩이더니-
"…."
다시 칼처럼 날카로워진 실눈으로.
차현하의 이마에 그려진 흉터를 잠깐 응시한 뒤, 그녀의 선글라스를 노려봤다.
"저기요."
"내가 자기 불렀다고 저기로 라임 맞추는 건가? 크~ 센스 보소. 역시 포그, 끝~장나는구만."
"우리 오빠랑 무슨 사이세요?"
"응? 우리 자기랑 무슨 사이냐고?"
차현하가 선글라스를 들어 올리며, 최재훈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부부?"
"이 와중에 미친 소리하는 거 봐."
"하하하! 농담, 농담. 평범한 커플입니다."
"아니 아줌마, 지금 장난 칠 때가 아니에요."
"장난?"
그녀가 다시 선글라스를 쓰며 멋들어진 자세로 말했다.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기한테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는데?"
"환장하겠네."
그렇게 휠 윈드를 돌며 기름을 사방팔방에 흩뿌린다.
최재훈이 기겁해서 화재 현장을 쳐다봤다.
"…."
이글이글.
차현하를 바라보는 실눈 사이에서 불꽃- 아니, 마그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시선이 다시 최재훈에게 향했다.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데. 저 아줌마의 발언은 저와는 일절 무관합니다."
"뻥! 치지 마요! 또 그렇게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이거 봐! 저는 안 된다면서, 레오레 프로랑은 사귀는 거!"
"아니, 핀트가 요상한데요. 그리고, 저랑 저 아줌마 아무런 관계도 아닙니다."
"마치 슈뢰딩거의 부부랄까?"
"부탁이니까 제발 닥쳐 봐요."
"어쨌거나! 썸 타고 있는 건 맞잖아요! 레오레 프로라서! 솔직히, 그거 아니면! 저 사람이 저에 비해 나은 게 뭔데요!"
"애, 애민 씨…."
"제발 좀 진정하세요…."
"음, 포그 씨가 멋진 사람인 건 인정하지만, 그 발언은 인정할 수가 없군."
"저는 FPS계의 페이스라고요! 언니가 페이스보다 레오레 잘해요!?"
"음, 여기서 가불기를 사용한다라. 이게 포그?"
"아 진짜!"
도저히 대미지가 박히지 않은 차현하의 유들유들함에, 하애민이 소리쳤다.
"아무튼! 아니라면, 증명해요!"
"뭘 어떻게요!"
이 점입가경의 분위기가.
"나랑 사귀라고요!"
"아니, 아가씨 내 취향 아니라고!"
"뻥! 치지 말라고요!!!"
"뻥! 아니라고!!!"
그리고 유치함마저 옮아 버린 걸까.
이 꼬꼬마가 상처받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배려하던 최재훈은 더 이상 없었다.
사실, 애당초 포그는 이런 일로 상처 받을 위인도 아니었다.
"그러면, 이렇게 해요!"
하애민이 뭔가 대단한 걸 떠올린 양 말했다.
"이번 멸망전에서 제가 우승하면, 저랑 사귀는 걸로!"
그 말을 들은 차현하가 옆에서 "오~" 감탄을 흘렸다.
"이거 완전 초 끓어오르는 전개인 걸? 좋았어! 나도 참가!"
"아니,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상황이야."
"봐! 또 내 말 무시한다!"
"진짜 무시하는 게 뭔지 함 보여 줘!?"
"아니면 오빠 뭐, 쫄았어요!?"
"우리 자기 쫄았나~?"
"응~ 안 돼~ 도발해도 소용없어~ 안 걸려 줄 거야~ 돌아가~"
"…."
최재훈을 노려보던 하애민.
"만약에 이거 안 받아 주시면… 저…."
그녀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안 할 거예요."
"응? 뭘요?"
"이번 멸망전, 안 나갈 거예요!"
꼬꼬마는 바닥이 드러눕기를 시전 했다!
"세상에."
"오, 아주 끝장을 내버리는구만!"
효과는 굉장했다!
"아, 아니, 애민 씨 그게 도대체 뭔…!"
"애민 씨! 주변에 다른 사람들 다 듣고 계시는데…!"
그 말대로.
주변엔 아직 다 해산하지 못한 스태프 몇몇이 남아 있었는데.
"…."
그 들은, 이번 옐로TV와 아이엇에서 공동으로 진행하는 멸망전의 관계자이기도 했다.
커피를 마시며 흥미진진하게 강 건너 불구경을 하던 그들의 얼굴에, 불똥이 튀어 불이 붙었다.
이모티콘 [ㅇㅁㅇ]같이 돼 버린 표정이 가관이었다.
"아, 아니. 포그 선수 무슨 일이세요?"
강 건너에서 흐뭇한 얼굴로 청춘의 한 장면을 구경하던 중년 여성.
현장에서 가장 직책이 높은 그녀가 다급히 다가와 포그를 달랬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나 그럼 멸망전 안 나감!'이라 했다면, 사람들은 이토록 기겁하진 않았을 것이다.
말 뿐이란 걸 알았을 테니.
하지만 포그.
그녀는 다르다.
그녀라면 정말로- 홧김에 질러 버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름 아닌 그 페이스를 상대로 하고 싶었던 말을 질러 버린 위인이 아니시던가!
게다가!
아이엇은 이번 멸망전에서 차세대 스타 플레이어 후보 두 명 중 한 명은 반드시 개화하길 바랐고.
그 후보 중 하나가 다름 아닌 포그였다.
뿐만이 아니다.
이번 레오필에서 하나가 될.
레오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두 팬 층.
레오레 팬과 FPS팬.
포그는 그 중 FPS팬들의 대표로서, 그들에게 어필할 핵심 요소가 되어 줄 예정이었다.
그런 그녀가 불참하게 될 경우, 아이엇이 그리고 있는 멸망전의 미래.
레오필의 미래에는 커다란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애민의 동료와 스태프들이 애걸복걸하며 꼬꼬마를 달랬다.
그러는 와중, 이 꼬꼬마는 또 우위를 잡은 것 같아서 신나는지.
"훗."
기고만장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걸 본 최재훈.
특유의 도발적인 미소를 짓는다.
"애민 씨, 후회할 짓 하지 마요."
이 꼬꼬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줘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나한테 발리고 전 국민 앞에서 질질 짜고 싶은 거 아니면."
"뭐라고요!?"
"그렇게 자신 있으면, 뭐. 한 번 덤벼 보던가. 등수 더 낮은 쪽이, 상대방이 하는 명령에 무조건 따르는 걸로."
최재훈의 도발에, 하애민이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더니-
"오케이."
응한다.
"콜."
차현하 또한.
"아니 댁은 또- 하, 됐다."
최재훈이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길 잠깐.
곧바로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내가 다 바를 거니까."
* * *
해산 이후, 하애민은 곧바로 판을 키웠다.
"그렇게 됐으니까, 오늘부터 멸망전 끝날 때까지 숨컷 오빠 건들 생각하지도 마세요."
방송을 키고, 시청자들 앞에서 까발린 것이다.
멸망전에서 경쟁하여, 지는 쪽이 이기는 쪽의 명령 하나를 무조건적으로 듣기로 했으며.
그렇게 자신이 이길 경우, 숨컷이 자신과 사귀게 될 거라고.
굳이 어째서?
자랑하고 싶어서!
숨컷이랑 자신이랑 사귀게 될 거라고!
참으로-
이린 : 뭐 그런 유치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제나 : 이거 완전 어이 없는 년이네
제나 : 아니, 너는 또 무슨 생각으로 그딴 제안을 받아들인 건데?
최재훈은 하애민이 방송에서 말하지 않은 뒷사정을 설명했다.
그녀가 드러눕고 '응애 나 아기 애민 까까사조'를 시전한 뒷사정을 말이다.
제나 : 뭐 그런 어이없는 년이 다 있어?
재은 : ㄹㅇ ㅋㅋㅋ
재은 : 많이 어린 친군가 보네
방민아 : 오빠 내가 따로 만나서 얘기해 볼까?
권지현 : 민아야... 사람 때리고 그러면 안 돼
방민아 : 뭐라는 거야 뒤질래?
방민아 : 아니 뒤졌다
방민아 : 지금 찾아간다 권지현
권지현 : 헝
그걸 마지막으로, 채팅방에 어색한 침묵이 찾아온다.
지금, 채팅방에 참여하고 있는 여성들의 표정은 실로 복잡했다.
갑작스럽게 등장해서 남의 눈치를 신경 쓰지 않고 적극적으로 최재훈에게 달려드는 포그가, 그녀들에게 위기감을 일깨운 것이다.
그녀들의 심경에, 태도에.
그들의 정체되어 있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 * *
제목 : 엌ㅋㅋㅋㅋㅋ
내용 : 니들 레오필 프로모션 영상 봤냐? ㅋㅋ
ㅈㄴ 웃기네
ㄴ : 조컷쉑 연기 ㅈㄴ 못하누 ㅋㅋ
ㄴ : 포그 새기는 또 왜 저래 ㅋㅋ
ㄴ : 아니 저걸 그대로 내보낼 생각을 했네
ㄴ : 촬영 감독이 조컷이랑 포그 안티누 ㅋㅋ
제목 : 오 ㅅㅂ 이거 뭐냐 신캐 떡밥이라는데
내용 : 남자 텔론?
ㅅㅂ 뭔지 몰라도 개쩌네
아 미칠 것 같애 레오필 언제 나와!!!!!!
ㄴ : 점신나가서머글것가태!!!!!!
ㄴ : 너도 좀 방에서 나와!!!
ㄴ 글쓴이 : 뭐 이 십새야?
프로모션 영상 촬영일로부터 머지않아.
<레전드 오브 필드 오픈!>
드디어 레오필이 정식 오픈이 다가왔다.
* * *
레오필 오픈 전날.
'그 날' 이후, 생각이 많아져 안 그래도 언짢은 표정이 더욱 언짢아진 제나.
그녀가, 침대에 누워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던 그때였다.
-라톡!
벌떡!
곧장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한 그녀의 표정에-
최재훈 : 제나 씨
최재훈 : 저 배로그좀 가르쳐 주세여
미소가 그려졌다.
잠시 뒤.
그녀는 무언가 결심한 듯 문자 작성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고민.
어떻게 해야 자연스러울까.
"…."
제나 : 정성 보고
최재훈 : 정성이요?
제나 : ㅇ
최재훈 : 뭐 조공이라도 바치라는 건가?
최재훈 : ㅇㅋ
최재훈 : 그러면 뭐 내일 조공 들고
최재훈 : 제나 씨 집으로 가면 되나?
제나 : 그러던가
시큰둥한 얼굴로 대화를 끝낸 그녀가 무심하게 핸드폰을 침대 위로 툭 집어 던지곤,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러더니 몸을 뒤집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더니-
쾅!
쾅!
쾅!
수영을 하듯 발을 움직여 침대킥을 날렸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
드디어, '모두'가 고대하던 그 순간이 찾아왔다.
<레전드 오브 필드 오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