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 하애민 2
하애민의 나이 열여덟.
고2에 해당하는 나이다.
그녀의 또래 다른 이들은 한창 공부를 할 나이였다.
그 중에서, 보편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 이들의 미래는 어떠할까.
일단.
그들의 공부는 고3에서 끝나지 않고, 대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도 4년 동안 계속되겠지.
그 중간에 2년 동안의 군대 생활이 있을 테고.
그렇게, 휴학을 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25살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직업 활동을 하며 커리어를 쌓고 재산을 모아 나가겠지.
아주 능력이 좋아 초봉 5천을 받으며, 나이 30대에 이르렀을 때 연봉 억대에 진입.
제테크에도 재능이 있어, 간간히 투자로 성과를 내고.
그런 성공한 삶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이가.
포그가 지난 1년 동안 번 돈을 벌어들이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릴까.
필시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최소한 40대.
그렇다면, 포그가 지난 1년 동안 쌓아 온 수준의 커리어에 도달하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릴까.
아마도, 평생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특정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는 것은, 보편적인 기준에서의 '우수함' 정도로는 택도 없는 일이었다.
전국의 18살-
아니지.
전 세계의 청년들을 통틀어 보아도.
스스로 '포그'수준의 입지를 구축할 수 있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하애민은 그런 '포그'를 나이 열여덟에 이미 만들어낸 것이다.
그녀가 오만하다 느껴질 정도로 넘치는 혈기와 높은 자존감을 뽐내는 건, 그게 당연하다 생각해서였다.
심지어, 객관적인 기준에서 '미인'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외모의 소유자이기까지.
언더워치의 영향으로 E스포츠 판을 통틀어 가장 높은 비율의 '남성' 팬을 보유한 FPS 리그였다.
포그는 E스포츠 판을 통틀어 남성 팬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었다.
뭇 남성 게임 팬들은 이, 흔히 '미역 머리'라 불리는 단발 물결 펌 헤어스타일에 특유의 실눈을 가진 연하의 미녀에게 아낌없는 호감을 표했다.
때문에.
하애민은 플레이어로서 높은 자존감을 같은 것과 동일한 논리로.
여성으로서 높은 자존감을 갖고 있었다.
남성 팬들.
그러니까, 평범한 남자들이 자신에게 빠져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평범하지 않은 이 남자.
숨컷이 자신에게 빠져드는 것 또한, 그렇게 이상하지 않은 일이리라.
근거는?
태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게 아니라면.
자신이 그렇게 재수 없게 굴었는데도, 마치 가까운 사람-그래.
연인 대하듯 살갑게 대해올 리가 없잖은가.
하애민은 확신했다.
최재훈은 그저 여동생과 같은 또래인 그녀가 마냥 귀여워 그렇게 대했을 뿐이지만 말이다.
사실, 하애민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러한 판단에는 기대가 적잖게 작용했다.
하애민은 남자에게 관심이 없다.
남성 팬들이 아우성을 치며 선물은 건네는 상황에서도 아무런 미동도 않는 목격담들에서 비롯된 정보였다.
[포그 레즈야...]
[레즈 게이야...]
[우리 포그 게이 레즈였누?]
[갑자기 호감이누 ㅋㅋ]
[ㄹㅇ ㅋㅋ]
[뭐라는 거야 그냥 연애 할 여력이 없는 거지]
[그니까 우리 애민이 처럼 일에 미쳐야 최고가 될 수 있지]
[근데 애민이가 솔직히 동성애자여도 괜찮을듯?]
[그러게 ㅋㅋ]
하여 일견에서는 그런 가설들이 나돌고 있었다.
하애민이 동성애자라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거다.
하애민은 게임성애자라 인간 자체에 관심이 없는 거다.
모두 틀렸다.
하애민은 그저 성격에 걸맞은 까다롭기 그지없는 기준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은
자신이 어른인 줄 알지만 아직 머릿속에 파릇파릇한 꽃밭이 남아 있는 소녀의 환상에 맞춰져 있었다.
어떤 환상이냐 하면-
'포그가 아니라 하애민을 좋아해 줄 사람'.
하애민은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남성들 대부분이 '포그'인 자신에게 반한 거라 여겼다.
그러니까, '하애민'인 자신이 아니라.
아주 성공한 인생을 사는 미녀인 '포그'를 말이다.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야.'
하애민은 자신을 하애민으로서 사랑해 줄 사람을 원했다.
조건은 일절 보지 않고, 자신의 내면 만을 보고 사랑해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라고, 스스로는 생각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그런 사람이 나타난다 해도.
외모가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면 마음이 동하지 않을 것이다.
능력이랑 성격도 어느 정도 보겠지.
그러니까, 그녀의 이상형은 간단하게 한 마디로 추리자면-
'꼬꼬마의 망상'이라 할 수 있겠다.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나이가 들면 현실을 깨닫고 사라지고 말 그런 망상.
그런데.
그런 망상을, 방금 숨컷이 충족시켜 버리고 만 것이다.
숨컷, 그는 말했었다.
'배로그에 대해서 포그'를 몰랐다고.
그런데도 자신에게, '하애민'에게 호감을 표해온다.
그렇게 재수 없게 대했는데도 말이다.
그 재수 없는 태도 속에 숨겨진 '진정한 자신'을 알아 보고!
'포그'가 아닌 '하애민'에게!
그런데!
현실에서 마주친 순간, '포그'의 외모를 접하게 되니 그 시점에서 탈락이 아닌가!?
아니다!
근거는?!
감!
숨컷은 왠지 자신의 외모를 신경 쓰지 않고, 진정한 자신을 알아보고 호감을 표해왔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누군가가 알았다면-
[와 존나 제멋대로!]
라고 말했을 논리에 의해.
지금 이 상황은.
하애민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상형이 자신에게 반한 상황.
그녀가 그토록 고대하던 '운명의 만남'이 성사되는 순간이 된 것이다!
하애민의 눈동자가 최근 들어 가장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물론, 특유의 실눈 때문에 최재훈은 그건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이러는 이유 또한!
"제가, 그, 포그 씨를 좋아하신- 아니, 좋아한다고요…?"
그렇기에 최재훈은 당황했고.
이 쬐끄마한 것은 그걸 쑥스러워 한다고, 귀엽다고 느꼈다!
끄덕.
그녀가 아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어, 음…."
최재훈은 머릿속에서 이 환장할 상황을 가까스로 납득이 되도록 재조립했다.
"그러니까, 포그 씨 말씀은-"
"하애민!"
"네?"
"애민이라 부르세요, 오빠."
선심 쓰듯,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한다.
"아, 예 그러면- 하애민 씨."
"애민이."
"네 그러니까 하애민 씨."
"아니, 하애민 말고 애민이요!"
"어, 예, 그럼… 애민 씨…?"
"애민 씨 말고 애민이!"
"…."
최재훈은 난처해 하길 잠깐.
다년 간 최재은을 키워 본 경험에 의해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애민이라 불러주면 안 된다!
이런 상태에 있는 꼬꼬마들에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여지를 주면 안 됐다!
자칫 그랬다간, 치킨 사 주려 했다가 20만 원짜리 운동화를 사 주는 수가 있었고.
그런 상황에 이르렀다가 다시 치킨만 사주면 또 '줬다 뺐네? 억울하네? 복수해야지'라는 생각을 갖게 할 수가 있었다!
최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이게 편해요, 포그 씨."
다시 하애민 씨에서 포그 씨로 돌아온 이유!
최재은을 다룰 때 습득했던 조삼모사의 묘리를 이용한 것이다.
치킨으로 모자라 20만 원짜리 운동화까지 사 달라고 응석을 부리던 여동생에게서 치킨마저 뺐어온다면-
-아, 알겠어. 알겠어! 치킨으로 만족해 줄게! 하, 쓰레기 같은 세상.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구만. 쇼펜하우어 말이 다 맞았어.
"아니, 애민이라 부르라니까요! 아, 알겠어요. 그러면 애민 씨로 봐 드릴게요."
중2 시절 최재은의 모습이 하애민 위로 겹쳤다.
최재훈은 그게 마냥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고2인 그녀 중2시절 여동생과 닮았다는 건 과연 어떨까 싶었다.
"아, 예 그래서. 애민 씨."
"응?"
"방금 애민 씨 질문이 이거죠. 제가 애민 씨 팬이냐."
"아닌데요?"
"아. 아니구나~ 그렇구나~ 궁금증이 해소됐네요. 유익한 대화였어요, 그러면 전 이만-"
최재훈은 알싸한 향기를 맡고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빠져나오려 했지만-
"아니, 어디 가요 오빠!"
제지 당하고 만다.
최재훈이 등을 돌리자 하애민이 다급히 미역 머리를 찰랑이며 달려와 그 앞에 마주섰다.
화내는 건지, 웃는 건지 분간이 안 되는 실눈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질문인가요? 아니라면, 집에 갑니다."
"네!? 아직 저랑 대화중이잖아요! 아!"
하애민이 뭔가를 깨달은 듯.
키득키득.
그녀의 실눈이 기분 좋게 휘었다.
"오빠, 귀여우시네."
"허허."
본인이 아무리 한 귀여움 한다 해도 이런 쬐깐한 것한테 그런 소릴 들을 줄이야.
최재훈은 새삼 깨달은 본인의 큐트력에 전율했다.
"오케이, 이해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전 이만-"
"아, 그거 말고요! 쑥스러워하시는 거요."
"이것도 이해해 주시면 안 될까요? 보내 주세요.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도 마음대로 나갈래."
"…오빠, 계속 그렇게 튕기면…."
"튕기면…?"
160중반쯤 될 법한 키.
머리 한 개 쯤 낮은 높이에서 올려다보는 실눈은 어딘가 의기양양해 보였다.
"버스 놓칠 수도 있어요?"
"…저 차 타고 왔는데요."
"아,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오빠, 저도 오빠 나쁘지 않다니까요?"
"나쁘지 않아요?"
"예! 아, 표현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러면, 뭐. 저도 오빠 마음에 들어요. 됐어요!?"
시그널 정도만 보내면 간단하게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밀당을 잘한다.
그렇게 느끼고, 예정과는 다르게 자기 쪽에서 먼저 고백을 한 게 돼 버린 하애민의 볼이 아주 약간 상기됐다.
그리고 최재훈.
'이게 시방 도대체 뭔 상황이래.'
갑작스럽운 상황에 혼란스러워진 머리로, 가까스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친구가 날 좋아하는 건가?
이성으로서?
'아니지.'
이야기를 듣자 하니, 상황은 그보다 더욱 복잡한 것 같았다.
'정리해 보자면….'
1. 하애민은 모종의 이유로 최재훈이 자신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이 있다 생각했다.
2. 그래서 생각해 봤더니, 자신도 최재훈을 나쁘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3. 그래서 이어지려고 냅다 고백했다.
'아이고야….'
최재훈은 속으로 탄식했다.
'도대체 내가 뭘 했다고…?'
그런 착각을 해 버린 걸까.
좌우지간에, 그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는 실눈의-
꼬꼬마.
아무리 봐도 이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꼬꼬마의 라이프 포인트에 타격을 입히는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게 영 불편했다.
하지만.
이런 건 질질 끌수록 복잡해질 뿐.
"그, 애민 씨?"
"네? 오빠."
최재훈은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기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꼬꼬마에게 말했다.
"제 어떤 행동이 그런 착각을 하게 했는지 몰라도, 미안해요."
"네?"
유노왓암생?
그런 의미가 전해지도록, 최재훈은 아주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잠시 뒤.
실눈이 아래로 약간 휘었다.
화난 듯.
"제가 뭐 잘못했어요?"
"네?"
"아까 제가 그, 재수 없게 군 거 때문에 그래요? 그거 때문이면…."
아니.
다시 보니 화났다기보단-
"사과할게요…."
어딘가 힘없이 쳐진 것 같았다.
"아니면 그거. 인터뷰 때문에 그래요? 저 알아요, 오빠 페이스 팬인 거. 그거! 오해예요! 페이스 선수 욕하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억울해서 그랬던 거예요. 우승은 제가 했는데, 칭찬은 페이스 선수가 받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울컥해 가지고. 저도 사실 페이스 선수 좋아해요!
아까 오빠한테 재수없게 굴었던 것도 그렇고, 페이스 선수한테 재수 없게 굴었던 것도 그렇고. 저 원래, 평소엔 안 그래요! 저희 선배님들한테 물어보세요! 그러니 어쨌든, 사과할게요 그것도. 그러면, 된 거죠?"
최재훈은 꼬꼬마가 상처받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꼬꼬마 풀이 죽었나 싶더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데요!"
"옴마야."
다시 또 급발진을 했다.
정말이지, 저 시기에 있는 꼬꼬마들의 감정 기복은 따라갈래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오빠 솔직히, 저 무시하는 거죠? 2군 게임 프로나 하는 듣보잡이라고."
"그럴 리가요."
"아니면 뭔데요! 저 이래 봬도! FPS계의 페이스라 소리 듣던 사람인데-"
'그 별명 불쾌하시다면서요.'
"솔직히 오빠, 방금 그 말을 제가 아니라 페이스 그 사람이 했어도 똑같이 답할 수 있어요?"
"어… 네."
최재훈은 아주 잠깐의 고민 뒤 단호하게 답했다.
이성적으로 보면 그에 하애민의 불만은 완전히 해소돼야 했으나.
그녀는 지금 몹시 감정적인 상태였다.
"뻥! 치지 마세요."
전문용어로 '땡깡'을 부리고 있다 할 수 있었다.
2페이즈 돌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