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스타 플레이어 1
며칠 전.
최재훈은 아이엇 본사의 타니아 리로부터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다름이 아니라, 일전에 나눴던 얘기의 연장선인데요."
SGF 이벤트 대회 우승과 관련된 것이었다.
당시, 우승 직후 최재훈은 타니아 리와 개인적인 면담을 가졌고.
"동의하실 경우 여기, 싸인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아이엇 본사의 게임을 비롯한 저작물에서 '숨컷'과 '최재훈'이라는 인물을 출연시킬 수 있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끽 해 봐야 새로운 캐릭터 트레일러 영상 엑스트라 정도로 나오겠지 뭐.'
라고 생각하는 최재훈은-
'쌉오진다….'
크나큰 기대를 가졌다.
레오레와 관련하여-
'으 디스거스팅 뻐킹 인디 좆망겜'와 같은 발언을 입에 달고 사는 최재훈이었으나.
이는 겉으로만 애증이지.
최재훈이 청춘을 비롯하여 모든 걸 바쳤다고도 할 수 있는 레오레는.
그의 인생 그 자체였으며.
의심의 여지없이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게임이었다.
그런 게임을 만든 아이엇은 가장 선호하는 게임사였고.
그런 아이엇의 저작물에 '잡몹'으로나마 출연하여 보잘것없을지언정 '일부'가 될 수 있다니.
이는 겜창이자 레창인 최재훈에게 있어서 일생의 자랑이 될 만한 일이었다.
SGF이후 바쁘기 그지없는 나날을 보냈기에 깜빡 잊고 있었는데.
타니아 리의 연락 한 번으로 순식간에 불이 붙는다.
"해당 프로젝트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서, 보고 차 연락드렸습니다. 일단, 숨컷 님께서는 이번 본사에서 새로 출시하는 게임인 '레전드 오브 필드'에 출연하시게 될 예정입니다."
겜창인 최재훈에게 있어서, 게임 출연은 그 자체만으로도 짜릿한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레창이었기에.
레오레 출연은 그에게 있어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가졌다.
만약 그가 출연하는 게임이 레오레라는 걸 몰랐다면 이토록 기대하고 또 흥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레오레가 아니라니.
그럼에도 실망하지 않는다.
레오필은 레오레와 IP를 공유하는, 사실상 레오레의 정신적 후속작이었으니.
실망하긴 커녕 더욱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런 레오필의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는 초창기의 일부가 될 수 있다니!
비록 엑스트라라도 말이다!
"후욱, 후욱."
"숨컷… 님?"
최재훈이 3자가 보기에 기분 나쁠 정도로 설레여하기 시작했다.
"레오필, 좋습니다. 좋고요. 그래서, 제 역할은 뭐죠? 제가 뭘 하면 되는 거죠?"
"아, 일단 적극적으로 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숨컷 님, 혹시 가능하시다면 지금 문자로 보내 드릴- 음, 뭐라고 해야 할까요. 대본? 대사? 를 한 번 리딩해 주실 수 있을까요?"
"대사!? 지금 대사라고 하셨나요?"
오우.
야.
최재훈이 흥분 단계 5에 돌입했다.
참고로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마음껏 치킨을 먹지 못하던 어린 시절, 부모님이 서프라이즈로 저녁에 치킨을 들고 올 때가 흥분 단계 4 정도였다.
"안될 거 있겠습니까, 지금 바로 라이브로다가 말론 브란도 접신시키겠습니다."
"하, 하하…."
최재훈이 금일의 급식 메뉴를 확인하는 중학생 1학년처럼 흥분하여 곧장 문자를 확인했다.
'누구냐!'
'저놈 잡아라!!!'
'해치웠나!?'
'크흠, 흠.'
'(환호 소리)'
최재훈은 예상하길 그 정도 대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전형적인 엑스트라들의 대사 말이다.
그런데-
"응?"
그것은 엑스트라의 대사라기엔 너무나 길고-
'이건 뭐야, (감정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이기 위해 냉철하게)? 무슨 수능 국어 지문이신가요.'
디테일했다.
최재훈은 도대체 무슨 엑스트라길래 이런 장황한 대사를 부여 받았는가 고민에 빠졌다.
사실 자신이 부여 받은 역할이 엑스트라 이상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누가, 게임 축제 대회에서 우승했다고.
대형 게임사의 저작물에서 조연급 이상으로 출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겠는가.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혹시, 불편한 대사라던가."
"아뇨, 불편하기보다는… 생각보다 좀 복잡해서요."
"아아~ 그, 아무래도 입체적인 캐릭터다 보니. 이렇게 단편적인 설명만 보면 복잡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오…."
입체적인 엑스트라라.
'뭔가 거시기…하게 거시기하구만.'
잘 와닿지가 않았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접근해 보죠. 숨컷 님, '레오레'의 스토리 설정에 관해서, 어느 정도로 숙지하고 계실까요?"
진성 겜창인 최재훈의 게임에 대한 애정은, 비단 게임 플레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레오레라는 '게임'을 완벽에 가깝게 이해하고 있는 만큼.
레오레라는 '작품'에 대해서도 완벽에 가깝게 이해하고 있었다.
"제가 우리나라 역사는 몰라도, 레오레 역사는 빠삭합니다."
"와, 그것 참…."
겜창이 당당하게 내뱉은 말에 타니아 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곤란했다.
어쨌거나, 좋은 신호였다.
숨컷이 레오레의 스토리 설정에 빠삭하다는 것은 말이다.
"그렇다면, 텔론의 스토리 설정에 관해서도 전반적으로 숙지하고 계시겠군요?"
"예, 그렇죠."
전쟁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거대 가문인 '카히오르'는.
다양한 경로와 수단을 통해 고아들을 모은 뒤 특수한 훈련에 투입시킨다.
100명 투입하며 한 명 살아남으면 운이 좋다고 할 수 없는 혹독하기 그지없는 훈련인 '세탁'은.
카히오르를 위해 주로 '암살'과 '특수 공작'으로써 헌신하는 특수 요원을 양성하는 게 목적이다.
'충견'이라는 뜻을 가진 카히오르의 특수 부대, '라크헤'.
'가장 뛰어난'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인 '텔론'을 부여받은 남자- 아니, 여자는 라크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충견이었다.
출신을 비롯하여 모든 정보가 불분명한 텔론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려진 유일한 정보는.
'카히오르'와 척을 진 자가 절명하는 그 순간, 그 자리에는 반드시 텔론이 있다는 것이었다.
겜창 최재훈은 관심 분야의 이야기가 나오자 신나서 열변을 토했다.
보통 같았으면-
'으, 오타크….'
같은 경멸 어린 시선을 받기 딱 좋은 반응이었으나.
그는 이성이라면 누구라도 호감을 느낄 미남이었고.
또한, 타니아 리는 그가 신나서 이야기하는 창작물의 창작자 중 한 명이었다.
타니아가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레오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시군요. 저희 팀들을 대신해서 이렇게 감사드립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숨컷 님. 여기서 한 번 가정해 볼까요? '텔론'에게 암살당한 양친의 자식이, '카히오르'에 복수하기 위해서 정체를 숨기고 자진하여 '세탁'에 참여하여 '라크헤'의 암살자가 된 거죠. 그 암살자는, 어떤 식으로 행동할까요?"
'세탁'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라크헤가 되기 위한 그 훈련에서는 암살자들을 충실한 살인 기계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요소를 거세시킨다.
거기에는 대표적으로 '과거', '자아', '감정'.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복수를 위해서 자진해 '라크헤'가 됐다면.
'세탁'과정에서 그 세 가지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지.
그리고, 그 세 가지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기고자 할 것이다.
사실 감정이 존재하나,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척 행동하는 살인 기계인 동시에.
자신의 양친을 죽인 가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들의 수족이 된 복수자.
'(감정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이기 위해 냉철하게)가 이런 뜻이었구만.'
"감이 잡히네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거기 대사 중에서. '용서하지 말지니.'를 한 번 리딩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 리딩에 참고하시라고 그게 어떤 대산지 전후 상황을 설명 드리자면."
"'라크헤'로서 자신의 원수인 '카히오르'를 위해 대상을 살해할 때 말하는 대사인데. 거기에는, 복수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원수들과 똑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신에 대한 '경멸'의 의미로, 암살 대상에게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고'말하는 것과 동시에."
"자괴감을 느끼고 마음이 약해지는 자신의 복수심을 확고히 하는'각오'의 의미로 자신에게 말하는-…."
자신의 관심사-를 넘어서.
자신이 혼신을 기울여 만든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타니아가 흥분하여 침을 튀겼다.
그 모습을 제 3자가 봤다면 저도 모르게 '와… 오타크….'라고 감탄을 흘렸을 것이다.
"오…."
하지만 동류인 최재훈은.
레오레의 새로운 설정에 귀를 기울이며 감탄할 따름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최재훈이 타니아 리의 말을 참고하여 감정을 잡-
"…하."
으려다가 멋쩍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 죄송해요. 이런 게 처음이라 어색해서."
"아, 괜찮습니다! 편하게,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캐릭터의 성대모사를 하신다는 느낌으로! 숨컷 님의 목소리가 원체 좋으시니까, 괜찮을 거예요!"
"아, 예. 그러면…."
최재훈이 다시 한번 더 감정을 잡은 뒤-
"오…."
최재훈의 대사를 들은 타니아 리가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어땠나요?"
연기로써 게임의 일부가 될 생각에 신났기 때문일까.
그 높은 텐션에 영향을 받아 자신감이 덩달아 높아진 최재훈이 어딘가 기대 담긴 어조로 말했다.
"그, 이 대사는 됐으니. 이번엔, '추악한 쓰레기를 경멸해라'를 한 번."
그걸 '긍정적인 반응'으로 해석한 최재훈이 더욱 열성적으로 연기했다.
(강수진의 최재훈 : 도대체 정체가 뭐지 최재훈? 도대체 못하는 게 뭐지?)
'못하는 걸, 못한달까? (웃음)'
스스로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말이다.
그렇게 지금 그는 아이엇 본사에 위치한 녹음 스튜디오에서 한창 녹음 준비-
"…."
중인 성우를, 대기실에서 통유리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제 연기를 그렇게 칭찬해주셨으면서…."
최재훈이 눈으로 타니아를 향해 실망감을 푝푝푝 발사했다.
"사람의 순정을 가시고 노시다니… 도대체, 뭐가 문젠가요 선생님. 어제 제 연기, 쌉 오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요리 보고 저리 봐도 흐음 알 수 없는 부분, 부분이네요."
실망감에 피격당한 타니아의 얼굴에서 죄책감이 줄줄 흘렀다.
엄밀히 따지자면, 칭찬한 기억은 없지만.
최재훈 같은 남자가 저렇게 대놓고 실망하면-
이성인 타니아 리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일단 사과하고 볼 수밖에.
"아니 뭐, 죄송하실 것까지야."
그는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꽤 비중 있는 캐릭터 같았는데.
그 캐릭터에.
그 작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기회를 놓친 게 말이다.
그때.
"그러면, 시작할게요?"
대기실 안에 있던 성우가 연기를 시작했다.
"응? 오…."
목소리를 들은 최재훈이 감탄했다.
외견으로는 몰랐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알겠다.
저 성우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대표 성우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강수진의 최재훈 : 크윽, 이번만이다.)
'저 사람이 경쟁 상대면 인정이지. 어? 그런데-'
최재훈은 자신이 맡은, 아니, 맡을 예정이었던 캐릭터가 조연급 정도 되는 줄 알았더랬다.
그런데, 조연급 인물에 저런 대형 성우를 쓴다고?
최재훈은 그제서야 위화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