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시즌 종료 2
이 느낌.
얼마 만일까.
아니-
얼마 만이라니.
처음이다.
이 정도의 성취감을 느낀 것은.
성취감은 지금의 하이로드를 있게 해 준 감정이었다.
하이로드는 자신의 커리어와 관련된 성취감에서 다른 감정으로는 느낄 수 없는 극상의 정신적 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자 더 이상의 성취도 없었고.
그렇게, 더 이상의 만족도 없었다.
때문에, 하이로드는 CSN에게 겪은 좌절이 달가웠다.
페이스가 자신이 아닌 다른 솔랭 유저를 최고로 인정함으로써 느낀 좌절이 달가웠다.
좌절은 하이로드를 정상에서 끌어내렸고.
그렇게, 다시 오를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으니까.
하이로드는 그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빼앗긴 정상을 되찾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취감을.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성취감이 '재탕'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런데 이게 웬걸.
그 페이스의 시즌 참가라니.
그 페이스에게 이길 기회라니.
하이로드는 정상에 올랐고, 존재하는 모든 성취감을 정복했다.
단 하나만 제외하고.
정상에 올랐음에도 여전히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위치.
페이스.
정상 위 정상에 존재하는-
단언컨대.
여지껏 자신이 느껴 본 성취감 중 가장 강렬할 성취감.
그러나, 계단이 존재하지 않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성취감.
그 성취감으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그 계단을 착실하게 오르고 있었다.
<승리!>
그저 가까워질 뿐으로, 형용 못할 엄청난 성취감을 느낀다.
<패배!>
반대로, 멀어질 때는 그와 비견되는 엄청난 좌절감을 느낀다.
그마저도 좋다.
좌절은 또다른 성취감의 재료였으니.
이 모든 게 기나긴 세월 동안 지속됐던 가뭄에 보상이라도 하듯 쏟아지는 굵은 빗방울처럼 느껴진다.
하이로드의 마모되었던 감정이 충만해지기 시작했다.
"오호라~ 여기에서 이런 수가 있었다고? 역시."
[아니 이 새기 ㅋㅋ 죽어서 회색 화면 보는데 왜 좋아하냐고]
[회색을 좋아하는 변태다 VS 맞는 걸 좋아하는 변태다]
[레즈야...]
[아니 근데 나 같아도 페이스랑 주거니 받거니 하면 ㅈㄴ 흥분될 것 같긴 해 ㅋㅋ]
[뭘 주고 받는다는 거누...?]
[레즈야...]
[와! 찌찌가 네 개!]
[우욱]
[네 개인 게 허락되는 건 부랄만입니다]
[아니 ㅄ들 ㅋㅋ 이 수준 게임 보면서 한다는 말이]
[ㄹㅇ ㅋㅋ]
[와 아니 근데 얘랑 페이스]
[만날 때마다 뭔가 수준 올라가는 것 같지 않냐?]
[ㄹㅇ ㅋㅋ]
사실이다.
하이로드의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좋아 보이는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누군가를 모방하는 페이스.
누군가를 공략하는 하이로드.
둘은 완벽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것은 곧,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불완전한 부분이.
정반대로 상충되기에 도리어 잘 맞는 서로와 충돌할 때마다 드러난다.
흡사 방패와 검.
누군가의 <패배>.
방패의 무게가 조금 무거웠던 탓이다.
크기는 그대로인 채 무게를 줄여야한다.
그렇게 방패의 밀도가 낮아진 만큼, 더욱 활동적이되 조심스럽게.
또 다른 누군가의 <패배>.
상대방의 방패에 비해 검이 너무 짧았던 탓이다.
밀도를 그대로인 채 길이를 더욱 길게.
결국 두께가 얇아진 만큼, 더욱 날카롭지만 신중하게.
충돌할 때마다 드러나는 문제점을 보완해 나간다.
그렇게 성장해 나간다.
자잘하지만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성취감이-
하이로드를 고무시켰다.
페이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호…."
하이로드 만큼은 아니지만.
페이스 역시, 성취감을 원동력의 일부로 삼는 이었다.
그렇기에 하이로드와 마찬가지로.
성취감을 즐겼다.
그렇기에 하이로드와 마찬가지로 이미 정상에 도달해 더 이상 느낄 성취감이 없어.
성취감에 목말라 있었다.
이번 시즌에 도전한 건 그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그렇게 자신의 위로 올라간 숨컷.
그를 넘어섬으로써, 성취감을 쟁취하기 위해.
어쩌면 '모방'또한 그에서 비롯된 행위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가짜'로 만들어, 낮춘다.
그렇게 '진짜'라는 새로운 올라갈 곳을, 성취감을 만들어-노린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로드는 숨컷 만큼이나 흥미로운 상대였다.
페이스는 평소 솔랭에 흥미가 전무하다시피 하기에.
둘이 서로 솔랭에서 맞닥뜨리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페이스가 하이로드를 처음으로 맞닥뜨리고 느낀 바.
이 '솔랭'이라는 무대에서 하이로드는 분명, 자신보다 위에 있었다.
숨컷처럼 말이다.
그런 하이로드와의 승부는 거듭할 때마다 성취감을 가져다주었다.
하이로드는 훌륭히 '숨컷'의 대체제가 되어 주었다.
페이스는 금방 심취했다.
"오…."
[ㅁㅊ 센빠이가 방금 감탄을 한 건가?]
[이 사람이 '감정'을 표현했다고...?]
[잠깐! KDA를 보면 알겠지만 지금 페이스의 킬은 5킬이다!]
[아 ㅋㅋ 오가 그 5였냐고 ㅋㅋ]
[그럼 그렇지 ㅋㅋ]
[아니 근데 뭔가 신나 보이긴 하는데?]
[ㄹㅇ 나 센빠이 이렇게 신난 거 처음 봄 ㄷㄷ]
[센빠이를 흥분시키는 사람 하이로드 ㄷㄷ]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심취했다.
부딪힐 때마다, 서로의 불완전한 부분이 부서져 파편이 되었고 흩날렸다.
서로를 부수며, 서로를 더욱 완전하게 만들어주었다.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역시 심취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과정이었다.
어느새, 레오레 커뮤니티에서 CSN에 대한 언급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고.
숨컷도, 점수상 현재 1위라는 입장 때문에 간간히 언급될 뿐.
사실상 페이스와 하이로드, 그 둘만이 언급되고 있었다.
CSN와 숨컷은 서서히 잊혀지고 있었고-
그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도대체 뭐하고 자빠진 거야."
표정에 걱정이 담긴-
그렇게 짜증스러운 얼굴이 된 제나가 중얼거렸다.
곧 시즌 종료인데, 숨컷과 CSN에 대한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고.
오직 하이로드와 페이스의 이야기뿐이다.
제나는 걱정이 되어 연락을 할까 하다가도-
"…썅, 연락은 무슨."
쑥스러워서 그만두었다.
그리고, '연락할 바에 직접 찾아가고 말지'라는 놀라운 논리에 의거해.
그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병문안….'
일단은 그런 명분이니까.
꽃다발이라고 하나 챙겨야 하는 걸까?
'….'
아니다.
그 남자는 왠지 그런 걸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병문안에 뭘 챙겨 가지?
딱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살면서 병문안이라는 걸 가 봤어야지.
결국 끝끝내 병문안 선물을 떠올리지 못해 빈손으로 방문하게 돼 버린 그녀는.
만약 그가-
-어, 우리 제나 씨 빈손으로 오셨네?
라고 말하면 어떻게 답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보통 그럴 때 어떤 말을 하더라….'
그라면, 그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할까.
제나의 머릿속에서 최재훈이 살아 움직인다.
그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선물이 왜 없어! 내가 선물인데!
왜인지, 어딘가 왜곡되어 선정적인 남의사 복장을 하고 있는 그가 말이다.
복장 때문인지, 그 웃음조차 도발적으로 보이는 와중.
그가 이어서 말한다.
-그래서. 포장 안 풀-
=빠아아아아앙!!!!!!!!!!!!!!!!
상상 속 숨컷이 흩날려 사라진다.
제나가 핸들에 머리를 박고 그렇게 됐다.
=빵!
=빵!!!!!!!!!
그렇게 제나는 수차례 더 핸들에 머리를 세게 박은 뒤에야,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미친년."
얼굴에 일어난 화재는 아직 다 진압되지 않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쨌거나.
무리다.
자신에게 그런 애교 넘쳐서 '남자'같은 대사라니.
"…."
그런데.
그런 애교 넘쳐서 '남자'같은 대사니까, 그는 좋아하지 않을까?
그녀의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시뮬레이션이 돌아간다.
-꼬, 꼽냐? 빈손이라? 뭐, 그럼. 내가 선물이다. 됐냐?
-오~ 그렇구만. 그럼 어디 한 번 포장을 뜯-
=빵!!!!!!!!
=빵!
=빵!
=빵!!!
=빵!
=빵!
=빵!
=빵!
=빵!!!
"진짜 미친년…."
결국 제나는 병문안 선물을 무난하게 사과-
같이 붉어진 자신의 얼굴로 대신했다.
"야."
최재훈의 병실에 들어선 제나가 시큰둥하게 인사했다.
"어? 오옹~ 아니, 이런 귀한 곳에 누추하신 분께서 웬 일로."
"…뭐?"
"아~ 넝담이고. 진짜 웬 일이세요?"
"웬 일이긴 병문안이겠지. 언니, 안녕하세여."
옆에서 사과를 으적으적 씹던 최재은이 말했다.
"병문안? 빈손으로?"
"그러게, 빈손이넹~?"
그리고 짓궂게 실실거리는 남매.
"꼽냐?"
제나가 그에 틱- 하고 내뱉자.
"아유 꼽긴요~"
"그럼요~ 선물은 우리 제나 씨가 선물이지~"
"오올~ 선물을 안 가져온 벌로 아주 그냥 통째로 압수해 버리시겠다~"
예상했던 대사.
그러나, 전혀 다른 분위기.
제나는 이 상황을 두고 전정긍긍했던 자신이-
'병신….'
같아서.
안면을 찹- 하고 손으로 덮었다.
"어쨌거나, 제나 씨.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와서 앉아요."
병상에 걸터앉아 있는 최재훈이 자신의 옆 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옆에 빈 의자가 있는데도 말이다.
"…."
뚱하니 있는 제나는-
'미친…?'
속으로는 극도로 당황한 상태였다.
의자를 놔두고 자신의 옆에 앉으라니.
무슨 의도지?
어쨌거나, 무슨 의도인지는 몰라도-
'쟤가 그러라니까….'
'어쩔 수 없이'지시에 따랐다.
그렇게, 제나가 최재훈의 바로 옆에 앉자.
"응?"
"엉?"
남매가 동시에 그렇게 반응하며 제나를 쳐다봤다.
"…뭐? 니가 앉으라며."
제나는 그렇게 말한 뒤, 비로소 깨달았다.
저 '툭툭'이.
진짜로 자신의 옆에 앉으라는 의미의 '툭툭'이 아니라.
아무데나 와서 앉으라는 의미의 '툭툭'이었음을.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를 말이다.
여동생이 '오올~'소리가 들리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펑!
만화였으면 그런 효과음이 제나의 얼굴 옆에 떠올랐을 터다.
제나가 급히 자리에서 튀어 오르려던 찰나-
"어쨌든, 이거나 드셔 보세여."
옆에서 들려오는 최재훈의 목소리.
둔감하기 그지없는 그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고.
사과가 꽂힌 포크를 내밀고 있었다.
"…."
제나가 그걸 손으로-
"?"
잡으려니까 그가 그걸 회수했다가, 다시 내민다.
그리고 다시 또 잡으려니까-
이하 반복.
"아니, 뭐 어쩌라고."
"아~"
"???"
"아~"
"아, 아니. 아는 무슨, 미친. 내가 알아서 먹을 거니까 내놓으라고-"
"아~"
결국 제나는.
마지못해- 라는 태도로.
"…아."
사과가 사과를 먹었다.
"어때요?"
"…어떠긴, 사과가 사과지."
우물우물.
"…니가 깎은 거야?"
"하, 당연하죠."
"하, 당연하죠?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지? 이 나를 도발하는 것인가? 이 최재은 님이 사과 껍질 하나 못 깎을 것 가태!? 칼 어딨어! 메스!"
"아휴, 우리 동생. 당연히 잘 깎지. 너무 잘 깎아서 지 손까지 깎아 먹어서 문제지."
"선지국도 먹는 마당에, 선지 사과는 안 돼!?"
"입 다물고 아~ 나 해라."
"입을 다물고 어떻게 아를 하지? 이거 완전 바보! 아- 냠냠."
"여기, 제나 씨도 한 개 더."
"…아."
병실의 분위기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제나는 뒤늦게 근처에 쌓여 있는 선물 바구니들을 발견했다.
"저게 다 뭐야?"
"지현 언니가 매일마다 출석하셔서 주고 갔어요! 이린 언니도 몇 번 왔다 가셨고."
"…."
매일마다, 그러니까 매일 왔다 갔다고?
제나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제부터 나도-'
는 무슨.
오늘이 마지막인데.
제나가 뒤늦게 이 평화에 절은 분위기에서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야. 니 이러고 있을 때 아니잖아."
"음?"
"니 뭐, 포기한 거야?"
"포기요? 뭘요?"
"아니, 지금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도 모자를 판에 한가하게 앉아서 과일이나 깎아먹고. 뭐 하고 자빠진 거야?"
최재훈이 눈을 꿈뻑이다가-
시계를 가리켰다.
"…아."
아직, 랭크50IN들이 솔랭을 돌리는 시간이 아니었다.
"아니, 그래서 뭐!"
제나가 무안함에 버럭, 더욱 성을 냈다.
"니 뭐, 상태 괜찮아졌냐?"
"아, 네 물론이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걱정이 아니라! 상태 괜찮아졌으면 뭐, 적극적으로 뭔가 했어야지. 니 알아? 시즌은 오늘 끝나는데, 니 이야기는 하나도 안 나오는 거. 죄다, 하이로드 그년이랑 페이스 얘기 밖에 없는 거. 아냐고. 니 뭐, 대책이라도 있는 거야?"
"대책이요?"
"니, 페이스 만나서 개 발렸잖아. 첫날에. 첫날에도 그 정돈데, 걔 지금 실력 얼마나 는 지 알아? 하이로드, 그년은 또 니 바른 페이스랑 막상막하고. 걔네 둘, 니 따라잡기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그거, 어떻게 막을 거냐고."
"아~"
경청하던 최재훈이 이내, 여유롭게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치타는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