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가 게임을 잘함-285화 (285/361)

285. 하늘전 2

말이 되나?

자신을 그렇게 좋아했었으면서?

얼굴이나 이름을 깜빡하는 단편적인 망각이 아니라.

아예, 존재 자체를 망각한다고?

'말도 안 되지.'

서수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최재훈이 자신을 망각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그렇게 새로운 가설을 떠올린다.

'이런-'

최재훈이 자신을 일부러 모르는 척 하고 있다고.

어째서?

거리를 두려는 거다.

아무것도 아닌, 볼품없는 유령이었던 대학교 시절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자신과.

그럼으로써, 그 시절을 지우려는 거다.

지금,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어 대세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성공한 방송인인 자신에게 있어.

초라했던 그 시절은 오점일 뿐이니까.

그래서.

지금 연기하고 있는 새로운 모습인 저, '숨컷'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마치, 썩은 가지를 쳐내듯.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듯, 손절하려는 것이다.

'…시발.'

그녀의 안에 부정적인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원래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주제에.

불쌍해서 잘 챙겨줬더니만.

그땐 좋아라 하더만.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라고 생각함으로써 말이다.

허나, 그건 그녀의 착각일 뿐이다.

최재훈은.

'최재훈'은.

서수나를 그저, '좀 귀찮은 선배'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서수나 스스로가 최재훈에게 '잘 대해줬다'고 여긴 본인의 행동들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남들에게 '후배를 잘 대해 주는 선배'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호감과 존경을 사기 위해서.

그러니까, 전적으로 자기만족을 위해서였다.

자발적으로 남들과 거리를 두고 싶어서, 그 티를 팍팍 내는 '최재훈'을.

소외되지 않게 챙겨준답시고, 반 강제적으로 MT에 참여시킨다던가.

남들과 어울리게 한다던가.

거기엔 '최재훈'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겉도는 '최재훈'을 챙겨주는 자신의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지금 그녀는 배신감과 괘씸함 따위를 느낀다.

정말로 자신이 최재훈을 잘 챙겨 줬고.

때문에, 최재훈에게 있어 자신은 은인이라 믿고.

최재훈이 성공하더니, 배은망덕하게 자신을 내치는 거라 여긴다.

그녀는 이를 용납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지금의 저 여유로운 모습은 장담컨대, 무리한 연기로 만들어낸 것이다.

속에는 여전히 그, 내성적이고 소심한.

이성에 대한 면역이 없는 최재훈인 그대로일 것이다.

자신이 강하게 나가면?

아무것도 못하고 속절없이 끌려오리라.

가령-

'아니, 최재훈. 니 웃긴다. 니, 그거야? 이제 성공했으니까, 옛날 별거 아닌 년들이랑 맺었던 관계 청산하고. 새 인생 살려고? 대단하다. 너, 사람들이 그런 사람인 거 알아?'

그런 식으로 말하면?

다시금 옛날의 비굴했던 유령으로 돌아와서 말할 것이다.

'예. 예? 아, 아니… 그러려던 게 아니라….'

지금의 저 '연기'를 이어가지 못하리라.

그렇게 된 최재훈을 휘어잡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된 최재훈을, 다시 옛날처럼 끌어내리는 것 또한 말이다.

'복수'를 다짐한 서수나.

그녀가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고자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

아까부터, 최재훈에게 관심이 없다고 어필이라도 하듯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으면서.

간혈적으로 힐끔거려 최재훈의 얼굴을 훔쳐보는 김희은이 시선에 들어왔다.

'…지금은 아냐.'

단 둘이 있는 상황을 노려야한다.

그녀는 때를 기다리기로 하고, 순순히 최재훈을 안내했다.

머지않아 그들은 '체육관' 근처에 있는 건물의 일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어!?"

먼저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던 선객들이 하던 행동을 일절 중지하고, 일제히 그들을 바라봤다.

이번 하늘전에 참가할 각 학교의 학생들과, 용병들이었다.

그 중 학생들은-

"와…."

숨컷의 실물을 보고 넋이 나가감탄하는 동시에-

'이게 연예인의 아우라, 뭐 그런 건가?'

위축되어.

감히 그에게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반인으로서 유명인에게 '거리' 따위를 느낀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는 다른 유명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구려대와 인세대의 용병.

하늘전에 참가할 정도의 유명인인 그녀들이었으나.

그녀들 역시, 최재훈의 실물을 접하곤 감히 먼저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흰 피부에 다크서클이 드리워, 안 그래도 깊어 보이는 눈동자가 더욱 깊어 보이는 최재훈의 인상에는.

분위기에는.

이성으로 하여금 감히 접근하는 걸 주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오빡!"

"아니, 왜 아줌마가 거기서 나와."

"왜긴. 잘.나.가.니.까. 왜 이렇게 늦었어~ 기다렸잖아!"

"아, 죄송. 죄송합니다. 욕하실 거면. 저희 늦게 마중 나와 주신 이, 서수나 선배님 욕해 주시면 됩니다- 어? 아니네? 아직 안 늦었구나. 아이고, 왜 이렇게들 부지런해요. 응? 적당히 부지런한 사람 무안하게."

하지만 입을 여는 순간?

와장창-

결계가 깨지는 듯 다가가기가 쉬워진다.

그제서야 그녀들이 호들갑스럽게 최재훈에게 다가왔다.

"숨컷 씨, 안녕하세요. 저, 아시죠? 그때, 미드빵 했었던…."

"아, 그… 아! TC1 정글러!"

"TC1 정글러? 혹시… 제 닉네임 모르시는…."

"에이~ 당연히 알죠. MoY잖아요."

"헐…."

"농담이고, EGGE님. 반가워요?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아, 깜짝 놀랐잖아요! 헤헤헤."

"숨컷 씨, 저는요?"

"어… BULLS팀 정글, 잡초님 맞으시죠?"

"크… 와, 저 진짜. 숨컷 님 진짜 팬인데. 이렇게 만나서 진짜, 와… 실례가 안 된다면 사진 한 장…."

"앗, 저도요!"

"앗, 나도 나도!"

"단체샷 한 방 갑시다!"

곧바로 장소의 중심이 된 숨컷.

"…쯧."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서수나와, '넥슬라이스'크루의 수장인 한화영을 비롯한 몇몇이었다.

"자 그러면."

그렇게 통성명의 시간을 가진 뒤.

진행자가 입을 열었다.

"다들 모이셨으니, 바로. 팀원 경매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전에서는 프로 한 명, 유명 플레이어 한 명.

각 팀마다 총 두 명의 용병이 섭외되며.

본격적으로 팀을 구성하기 이전에.

용병들을 대상으로 '팀원 경매'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자, 먼저. 고구려대 용병이신 BULLS JOBCHO님 대상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현재, 그들이 위치한 'E스포츠부' 동아리실에선 세 가지 방송이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각 학교의 공식 채널 방송이었다.

비밀번호가 설정된 해당 방송들은.

현재, 최소 1만 명 이상의 시청자들이 시청하고 있었다.

모교의 '팀원 경매'에 참가하기 위해서 모인 학생들이었다.

"다들, 방식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혹시 모르니, 시작하기에 앞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팀원 경매는 말이 경매지, 사실상 방어전에 가까웠고.

하나의 경쟁에 가까웠다.

각 학교의 용병을 대상으로 한 '경매'가 시작되면.

각 학교의 방송에선 제한 시간동안 '모금'이 시작된다.

해당 모금엔 각 학교마다 최대 '1만 명'이 참가할 수 있으며.

개인이 기부 가능한 금액은 최대 10, 000원이다.

그렇게 제한된 조건으로 진행된 모금액에 따라, 해당 용병에 대한 결정권이 주어진다.

기존 용병 소속 학교가 최대 모금액을 달성하여 방어에 성공했을 경우.

"시간 종료됐습니다. 고구려대, 최종 모금액 2568만 3천 원으로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고구려대는 불스 잡초 님의 희망 챔피언을 지정해 주세요."

"카젝스 지정하겠습니다."

한 가지 챔피언을 지정할 수 있고.

그렇게 지정된 챔피언은, '밴'이 불가능해진다.

즉.

용병의 전력을 두고, 각 학교의 단결력을 경쟁하는 일종의 응원전이라 볼 수 있겠다.

"자 그러면 다음은, 인세대의 TC1 EGGE님 대상 경매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경매에서 패배하게 될 경우.

경매에서 승리한 학교에겐, 해당 용병에 한하여 한 가지 챔피언을 지정해서 '밴'할 권리.

혹은,

"시간 종료됐습니다. 세연대, 최종 모금액 3, 593만 5천 원으로. 공격에 성공했습니다. 세연대는 용병 교환 의사를 말씀해 주세요."

해당 용병과, 자신들의 용병을 교환할 권리가 주어진다.

"여러분, 어떻게 할까요."

세연대 팀의 대표인 서수나가 입을 열었다.

그 질문 대상은, 팀원들이 아닌.

현재, 세연대 공식 채널의 시청자인 학생들이었다.

[TC1 정글러면 당연히 교환 아님? ㅋ]

[근데 우리 학교 프로가 누구였지?]

[그 걔 있잖아]

[무슨... 컵이었는데]

[머임 지금 왜 갑자기 가슴 얘기하는 거임?]

[남자 학우 분들도 있으니 자중해주세요]

[맞아;; 누나들 자제해 줬으면 좋겠어(출렁출렁)]

[레오레 경매하는데 남자가 왜 있누 ㅋㅋ]

[머그컵 ㅄ들아]

[아 맞다]

[ㅇㅇ 팀 베이 정글러]

[ㅁㅊ?]

[아니 그러면 좀 애매해지는데?]

[TC1 VS BAY ㄷㄷㄷ]

[아니 우리 학교는 왜 이렇게 섭외력이 좋아서 사람 고민되게 만드냐 ㅋㅋ]

[ㄹㅇ ㅋㅋ]

[세풍당당...]

[아니 그래도 역시 TC1 VS BAY 하면 TC1 아니야?]

[TC1이 BAY보다 잘하는 팀이잖아]

[그건 맞는데 솔직히 정글 역량만 두고 보면 머그컵이 위일걸?]

[나도 그렇게 봄]

[그렇다고 보기엔, 둘이 할 때마다 항상 머그컵이 밀리지 않나?]

[페이스 때문이지 그건 ㅇㅇ]

[ㅇㅇ 미드 주도권 차이가 크니까 머그컵까지 밀리는거]

[오히려 상대 미드가 페이스인데도 TC1 상대로 그렇게 안 밀리는 게 대단한 거]

[팀 베이는 머그컵이 에이스인 걸로 알고 있는데?]

[아 ㅅㅂ 햇갈려 이거 대화명 앞에 티어 붙이죠?]

[ㄹㅇ ㅋㅋ 플래 이상만 발언권 주죠]

[골)저새기 플래다 ㅋㅋ]

[브)아니 최소 다이아 이상만 줘야지 ㅋㅋ]

[아니 골이랑 브는 도대체 뭐냐?]

[ㄹㅇ; 세연대의 수치네]

[플)세연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자퇴해주세요]

[솔직히 플도;;]

[아니 이거 이렇게 해선 결론이 안 나올듯]

[ㄹㅇ 너무 갈리네]

[차라리 우리 학교 선수들 의견 묻죠?]

[아 숨컷 의견 묻죠?]

[아 맞다 숨컷 ㅋㅋ]

[옐로TV의 자랑 숨컷! 옐로TV의 자랑 숨컷! 옐로TV의 자랑 숨컷! 옐로TV의 자랑 숨컷! 옐로TV의 자랑 숨컷! 옐로TV의 자랑 숨컷! 옐로TV의 자랑 숨컷! 옐로TV의 자랑 숨컷!]

[아니 저 옐수 새기는 어떻게 기어들어왔어]

[단지 옐로TV를 보는 세연대생일 거라는 생각은 못하누?]

[저게 세연대의 수치지 ㄹㅇ;]

[아니 근데 숨컷도 옐로TV에서 방송하는데?]

[ㄹㅇㅋㅋ 솔직히 요즘은 리치TV 보는 새기들이 세연대의 수치지]

[숨컷이 누군데? 그렇게 잘해?]

[현 랭킹 1위잖아]

[아니 저 남자가? ㅁㅊ]

[솔직히 단순하게 실력만 볼 게 아니라 미드랑 상성이 어떤지도 봐야 돼서, 미드한테 고르게 하는 게 맞긴 함 ㅇㅇ]

[숨컷 의견 들어보죠 ㄱㄱ]

그렇게 결정권이 주어진 숨컷에게 장소의 이목이 집중됐다.

"어, 글쎄요."

팀원 경매는 얼핏, 매우 민감한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만약 용병을 교체하게 될 경우, 기존 용병에게 상당히 무례한 처사가 될 수 있기에.

하지만.

모금액 전액은 기부로 이어지는 팀원 경매의 그 자선 성격이 상당히 강한 탓에.

참가 용병들 모두가 그 과정을 순수하게 즐기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숨컷 님!!! 바꿔 주세요!!! 나 숨컷 님이랑 팀할래!"

"아니, 저런 변절자 자식을 봤나!!!"

"고구려에 저런 인재는 필요 없어! 저거 당장 내쫓아!!!"

"아니, 그러면 오히려 저 인간한테 좋은 일이야!!!"

"숨컷 님!!! 저 인간 버려요!!!"

"하."

쓰게 웃은 최재훈이 고민에 잠겼다.

둘 중, 어느 용병이 자신에게.

세연대 팀에게 더 좋은 선택일까.

솔직히 말해.

TC1 EGGE와 BAY MUGCUP.

최정상 급인 둘쯤이 되면, 세세한 실력 차이보다는.

미드와의 궁합이 더욱 중요해진다.

최재훈은 EGGE를 보며, 그녀의 플레이 스타일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다음.

김희은을 바라보며-

"…!"

최재훈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김희은이, 다급히 고개를 돌려 그와의 시선을 회피했다.

'아….'

그리곤 속으로 탄식을 내뱉는다.

자신도 EGGE처럼, 장난스럽게 바꾸지 말라고 얘기해야 하는데.

입술이 본드로 붙은 듯.

차마 입이 열리질 않았다.

아까부터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만약, 최재훈이 자신의 이런 태도를 언짢게 여겨서 그와 떨어지게 된다면….

그녀가 복잡한 감정으로 가슴이 꽉 틀어 막힐 듯한 답답함을 느끼고 있던 와중이었다.

"제 생각은-"

최재훈이 입을 열었다.

김희은이 저도 모르게 호흡을 모르고 그의 대답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그대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네요."

그 순간.

"이예~~~~~!"

오늘.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시종일관 복잡한 표정으로 뚱하니 앉아 있어 주변인들의 걱정과 의문을 자아내던 김희은.

그녀가, 알려진 이미지와 같이 명랑하게 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른 뒤 양팔을 펼치며 기쁨을 표시했다.

"…."

"…."

"…."

그녀의 급격한 감정 기복에, 사람들이 당황해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에 김희은은 평소처럼 해맑은 웃음을 보여주려다가도-

"…."

시선에 최재훈이 들어오자-

"크흠."

평소답지 않게, 무뚝뚝하게 헛기침을 내뱉은 뒤.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곤-

"흥!"

최재훈에게서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