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가 게임을 잘함-283화 (283/361)

283. 김희은

이번 멸망전에 참가하는 LKL팀들은 거기에 꽤 큰 의의를 두고 있었다.

슬슬, 레오레가 오랜 세월 동안 차지하고 있었던 게임계 왕좌의 자리가 교체될 기미가 보였고.

이는, 레오레가 차지하고 있는 E스포츠계 왕좌의 자리 또한 교체될 순간이 다가왔음을 의미했으니.

프로 리그의 인기는 자연히 게임의 인기를 따라간다.

고로, 게임사에서 미래를 도모하여 레오레를 대신할 후속작을 강구했듯.

프로 게임단에서도 미래를 도모하여 레오레를 대신할 종목을 강구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번에 새로 발표된 레전드 오브 레전드의 프렌차이즈.

레전도 오브 필드가 발탁되었다.

현재 레오레를 제외하면 전멸하다시피 한, 지고 있는 해인 AOS 장르와 달리.

뜨고 있는 해인 배틀 로얄 장르.

그런 장르에, 세계 최고 인기 프렌차이즈인 레오레의 IP를 접목시킨다.

구조상 더는 없을 정도로 이상적이었고.

내부 테스트, 클로즈 베타, 발표 반응 또한 긍정적이었다.

이건 뜰 수밖에 없다.

업계에서는 그런 결과가 나와 이미 적극적인 투자가 유치되고 있었다.

벌써부터 레전드 오브 필드, 레오필의 리그 창설과.

팀 창단 논의 단계가 끝난 단계였다.

아이엇과 같은 브랜드인 것도 있고.

팀들에게 더욱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도 있고.

LKL 대부분이 레오필 새 리그 참가 우선 자격을 부여받았고, 전부가 참가했다.

멸망전은 그런 레오필의 첫 공식 대회였던 것이다.

하위팀은 레오필에서는 다르다는 것을 어필할 기회였고.

상위팀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팀들은 레오필에서도 역시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할 기회였다.

다들 상당히 무게를 두고 임하는 분위기에서.

더더욱 크게 무게를 두는 두 팀이 있었다.

바로 TC1과 TEAM BAY다.

TC1의 경우에는 이번 시즌 렐드컵 챔피언 사수 실패로 추락한 위신을 조금이라고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TEAM BAY는 LKL리그에서 이번에도 TC1에게서 챔피언 타이틀을 탈환해내지 못한 것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비록 이벤트성이 짙다 하더라도, 최초 공식 대회라는 이름이 갖는 상징성은 분명 유의미했으니.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숨컷.

그는, '남성 플레이어들의 관심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룰.

각 팀마다 최소 한 명 이상의 남성 플레이어를 포함해야 한다는 룰이 만들어낸 최중요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현재 밝혀진바 남성은 물론이며.

여성을 통틀어서도, 한정된 분야 안에서 정점을 다투는 재능의 소유자였다.

레오필은, 레오레와 상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레오필에는 역할상, 그런 숨컷의 '한정된 분야'를 극대화로 활용할 역할군이 존재했다.

하여.

TC1과 TEAM BAY는 그런 판단을 내린다.

상대쪽에 숨컷이 있을 경우, 높은 확률로 아주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리라고.

숨컷을 팀으로 얻진 못할지언정, 다른 팀으로 넘어가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했다.

그를 위해 부단히도 노력과 자원을 쏟았다.

각 팀의 간판선수라고 할 수도 있는 사이트와 머그컵을 직접 접촉하게 하여 최대한의 조건을 제시했다.

그런데도 안 넘어오자, 서로에게 숨컷을 빼앗겼다는 위기감을 느껴.

다른 방면으로도 환심을 살 길을 모색했다.

그렇게 팀의 이름으로 기부도 동참하였으나-

반응은 시원찮았다.

그렇게 불안에 떨던 와중, 발표되는 숨컷의 인터뷰 기사.

숨컷은 밝힌다.

멸망전에 다른 팀의 일원이 아닌, 자신의 팀으로 참가하겠다고.

이런 노력에도 자신의 팀을 선택해주지 않았다 아쉬워해야 할까, 아니면 어쨌든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안도해야할까.

어쨌거나 두 팀은 한시름 놓았다.

그렇게, 두 팀은 숨컷에 대한 관심을 일단락 시킬 수 있었다.

선수들의 경우엔 어떨까.

"아, 이렇게 돼 버리는 건가? 아~ 아쉽구만?"

사이트를 비롯하여 비슷한 생각이었다.

아쉽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곤 말이다.

김희은.

그녀는 현 상황을 '아쉽다'정도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분하다.

억울하다.

'TC1이 훼방을 놓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TC1이 관여하여 입장 상 둘 중 한 팀을 고르기가 복잡해진 탓에.

숨컷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팀을 꾸리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한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TEAM BAY에게.

자신에게 왔을 거라 생각한다.

이런 편향된 사고는, 김희은의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는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옛날부터 운동부를 비롯한, 활동적인 집단생활을 유지해옴으로써 형성된 그녀의 성격은.

품성은.

인격은.

아주 성실하고 성숙한 걸로 유명했다.

주변인들.

그러니까, 팀원들에게도.

자주 놀림을 받을지언정, 분명 의지와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아닙니다. 잘하고 있어요. 우리, 이길 수 있으니까. 조금 더 힘내보는 겁니다."

슬럼프에 빠졌던 TEAM BAY을, 팀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 이후로 줄곧.

그런 그녀가-

"어이, 김희은. 왜 그렇게 죽상이야? 누가 꼴 받게 하기라도 했어?"

"그거 있잖아. 숨컷이 우리팀에 안 온 거."

"아, 그거 가지고 아직도 저러는 거야? 어우 쒯~"

"아니 평소엔 남자한테 관심도 없던 년이 왜 저렇게 된 거야?"

"원래 아무런 관심도 없던 애들이 한 번 꽂히면 무섭다는 거라잖아."

"하긴."

"너네 모쏠 아니었냐? 연애를 하토미로 배운 새끼들이 뭘 그리 잘 안다는 듯, 껄껄껄~"

"정신나갈것같애죽일까?"

"붙잡아."

"끼야호우!"

"아아악!!! 꺼져!!!"

"아으, TC1!!!!!! 잊지 않을 검다!!!"

"개판이고."

이렇게 망가져 버린 건.

그동안 운동이니, 커리어니.

몰두하고 있는 일에 모든 걸 쏟아 부으며 이성에 할애할 여력 따위는 없이 살아왔던 그녀가.

운명의 잔인한 장난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상호간 오해로 인해.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이성, 숨컷이 자신의 열렬한 팬이라 여기게 된 탓이었다.

겸허, 견실을 모토로 살아가고 있어서.

과시욕이나 인정 욕구 따윈 없다시피 했던 그녀가.

마치 성에 처음 눈을 뜬 여자아이처럼.

이성에게, 숨컷에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인정받길 원하고 있었다.

그를 실현할 수 있는 아주 큰 기회였던, 멸망전 공동 참가.

그 기회를 놓쳐 버렸다.

멸망전이라는 접점이 사라진 탓에.

그와 개인적으로 접점을 가질 명분까지 사라져 버렸다.

덕분에 그 인터뷰 기사 이후 김희은은.

불만족감.

무기력함.

허탈함.

따위의 감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평생, 부정적 감정이라곤 느껴본 적 없었던.

긍정과 생명력의 화신과도 같았던 그녀가 말이다.

"그럼 얘들아, 나는 희은이 데려다주고 올게."

"아, 넵! 다녀오세요!"

"야 김희은, 잘 갖다 와라~"

"올 때 메론 아이스크림~"

"알겠슴다~~~"

"무슨 바람 빠진 풍선 같네."

"창고에 튜브에 바람 넣는 거 있긴 한데."

"펌프 병신아 펌프. 그걸 몰라서 바람 넣는 기계라 하냐? 책 좀 읽어라."

"뭔 개소리야 내가 니보다 책 많이 읽는데."

"너 설마 웹소설이랑 만화를 책이라 하는 건 아니겠지?"

"너 같은 새끼도 사람이라 하는데 안 될 거 있냐?"

"싸우지 말고 야스해!!!"

"진짜 희은이 없으면 쓰레기통이 따로 없네."

"희은아… 거기선 잘 지내니…?"

"저 아직 여깄슴다~~~"

"아, 시발! 그만 흐느적대라고 김희은!!!"

때문에.

LKL 시즌 진행 당시, TEAM BAY를 견인했던.

생명력 넘치던 김희은을 실물로 보게 될 거라 기대했던 세연대 학생들은.

지금의 그녀를 본다면 적잖게 놀라게 될 예정이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돼 버린 그녀를 보게 된다면 말이다.

미팅 당일 날.

그녀는 숙소를 나서고, 세연대에 도착할 때까지.

시종일관 흐느적거렸다.

그런데-

"어?!"

흐느적대던 그녀의 몸이 펌프로 바람이 불어넣은 것처럼 됐다.

정문 앞에 막 도착한 숨컷을 보고 그렇게 됐다.

"재훈- 아니, 숨컷 님!"

사이트와 달리, 그녀는 여전히 대외적인 이미지에 민감하다.

반가움에 저도 모르게 재훈 씨라고 부르려던 걸 가까스로 참고, 신나서 그에게 달려갔다.

"응?"

김희은을 확인한 최재훈이-

"어?"

당황과 반가움이 반씩 느껴지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귀하신 분이 왜 이런 귀하신 곳에."

"숨컷 님이야 말로, 여기엔 무슨 일이심까!? 어, 설마!?"

설마.

세연대 생이신검까!?

그런 말이 나올 거라 생각한 최재훈이 벌써부터 우쭐거릴 준비에 들어갔다.

"아, 예 뭐… 그렇게 됐네요…."

어김없이 짐짓 비굴할 정도로 겸손하게 웃는 최재훈을, 이린은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와, 이런 우연이! 숨컷 님도 이번 하늘전에 참가하시는 거였슴까!?"

"예… 어? 아, 그거. 쳇. 네, 뭐. 그렇게 됐네요."

"와! 이런 우연이! 저도, 이번 하늘전에 참가함다!"

"오, 그렇슴까!?"

"그렇슴다! 세연대, 맞으심까!?"

"그렇슴다!"

"오, 이런 우연이…."

숨컷의 인터뷰 기사에는 그가 세연대 소속으로 하늘전에 참가한다는 내용의 질답이 있었고.

김희은은 그 기사를 읽었다.

그런데도, 그는 최재훈이 자신과 같은 학교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멸망전의 건의 충격으로 다른 이야기가 관심에 들어오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기에.

지금 상황이 더욱 반갑게 다가왔다.

그 두 번의 펌프질로.

그녀는 어느새 그 사건이 있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온 상태였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느적거렸던 그녀에게서, 다시금 운동부 특유의 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 잠깐! 혹시, 숨컷 씨 세연대 소속으로 참가하신 이유가!?"

김희은이 화들짝 놀라며 그 말을 하자.

최재훈은 이번에야 말로 '혹시 세연대생이라서!?'라는 말이 나올 거라 생각하고.

또 짐짓 그놈의 비굴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예… 그렇게 됐네요."

이린의 경멸 어린 시선을 꾸역꾸역 무시하며 말이다.

* * *

그러자 김희은은-

"오오오!!!"

숨컷의 예상대로 아주 깜짝-

놀라는 게 아니라.

달가워했다.

그러더니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응, 응.'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저를 따라서 세연대로 오신 거군요. 이야, 이러면 제 어깨가 무거워지는데요!? 알겠슴다! 제가 책임지고, 숨컷 씨를 우승시켜 드리겠슴다!"

"오잉."

그게 뭔 소리당가?

최재훈이 예상 노선을 이탈해 버린 김희은의 반응에, 그런 말이 들리는 표정으로 김희은을 바라봤지만.

오랜만의 가동이라 세차게도 행복회로가 돌아가고 있는 그녀에겐 닿지 않았다.

그렇다고 또 굳이 짚어서 정정하기엔.

그녀의 우쭐거리는 표정이 너무나도 뿌듯하고 행복해 보여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최재훈은 저 표정을 현실이라는 진흙 속에 처박느니.

차라리 자신의 기억을 개변시키기로 했다.

'내가 세연대 소속으로 참가한 건 머그컵 선수가 존경스러워서다…내가 세연대 소속으로 참가한 건 머그컵 선수가 존경스러워서다….'

"아!"

그때 김희은이 뭔가를 깜박했다는 듯 크게 박수를 쳤다.

"이렇게 숨컷 씨 만날 줄 알았으면, 그것들 좀 가져오는 건데!"

"그것들이요?"

"그때, 제 굿즈를 무진장 갖고 싶다 하셨잖슴까!"

'나는 머그컵 선수의 굿즈가 무진장 갖고 싶다…나는 머그컵 선수의 굿즈가 무진장 갖고 싶다….'

"아, 그러게요!"

"아이구!!! 다 준비해놨는데! 어떡하죠? 지금이라도 가서 가져 올까요!?"

"아유, 그러실 것까지야."

"아니, 그래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실 텐데!"

'나는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나는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

"아이고, 괜찮슴다. 어차피, 조만간 또 만나게 될 텐데 안 그래요?"

하늘전에 같은 소속으로 참가하게 된 이상.

하늘전이 끝나기까지 직, 간접적으로 접촉할 상황이 잦아질 것이다.

"그러네요!"

그 기대감에, 안 그래도 반짝이는 눈에 총기를 더한 김희은이 헤실헤실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숨컷 씨! 이번에, 제 기부. 어떻게, 좀, 도움이 되셨슴까?"

"아~ 물론이죠. 팀 베이 여러분들 기부,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몰라요."

"아, 팀 베이… 예… 그렇죠…."

시무룩.

"아, 그리고 팀 베이도 팀 베이지만! 머그컵 선수께서 기부해 주신 그 거액 기부! 그것도 엄청났죠? 개인 기부로만 따지면 최고액이거든요."

"아, 그렇슴까!? 숨컷 씨한테는 제가 최고임까!? 아~ 이거 참~ 쑥스럽네요~"

"아니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뭐, 아무튼. 그거, 그렇게 무리 안 해 주셔도 됐는데. 괜찮아요?"

"아, 예! 물론임다! 저한테 600만 원은 아무것도 아님다!"

그렇게 말한 뒤, 어떠냐며 반짝이는 눈으로 묻는 김희은에게-

"와~ 무려 600만 원이~"

최재훈은 의무적으로 박수를 쳐 줬고-

"에헴."

김희은은 만족스럽게 우쭐거린다.

"그리고-"

"응?"

"좋은 일에 쓰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를 내도 안 아깝습니다!"

이는 숨컷에게 잘 우쭐대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실제로, 물질적 욕심이 없다시피 한 그녀는 프로게이머로써 엄청난 성공을 거둬 그에 걸맞은 수익을 올리게 된 이후로.

곧잘 기부를 하곤 했다.

덕분에, 그녀는 주변 동료들로부터 존경과 원망을 한 몸에 받았다.

그녀가 하도 기부를 하는 탓에, 눈칫밥이 튀어 왔기에.

"이야~ 멋지시네요."

그런 김희은의 태도에, 최재훈은 이번에야 말로 진심으로 감탄했다.

"히히~"

그런 자신의 감탄에 또 진심으로 만족스러워하며 우쭐거리는 김희은을 보며.

뒤늦게 오해를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김희은.

최재훈이 알기에 상당히 겸허하고 겸손한 품성을 가진 그녀가 자신을 대할 때 이러한 태도가 되는 건.

십중팔구, 초면에 그녀를 페이스인 줄 알고 착각하고 대하여 자신의 열렬한 팬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 탓이었다.

여지껏 김희은이 그에 대해 너무나도 만족스러워 하는 반응을 보이기에 차마 정정하지 못했으나.

이렇게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도 계속 관계를 지속해 나갈 거라 생각하니.

그녀를 기만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렇게 최재훈은 각오를 다지고, 입을 열었다.

"그, 머그컵 선수?"

"아, 그때 말했잖슴까! 편하게 부르셔도 됨다!"

"아, 예 그러면. 희은 씨."

"넵!"

"그, 드릴 말씀이 있는데…."

그때였다.

"아, 죄송합니다. 여러분. 많이 기다리셨죠!"

오랜만에 만날 최재훈을 확실히 휘어잡기 위해 스타일링이니 메이크업이니.

몸에서 신경 쓴 태만큼이나 자신감이 물씬 느껴지는 서수나가 다가왔다.

그녀가 최재훈을 보더니 눈썹을 들썩였다.

아직도 실감이 안 됐다.

이 숨컷이, 정말로 그 유령이라니.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결국, 알맹이는 그대로겠지.'

자신에게 휘어 잡혔던 그때의 알맹이 그대로.

저 숨컷을 자신의 뜻대로 휘어잡는다.

서수나는 자칫 '후배들을 잘 챙겨주는 친절한 선배'의 모습을 깨 버리고, 음흉하게 미소 지을 뻔한 걸 가까스로 참고.

서글서글한 태도로 최재훈에게 말했다.

"아~ 재훈아. 진짜 오랜만이다. 나야, 나. 기억하지?"

그렇게, 3자의 난입으로 최재훈의 고해성사는 뒤로 미루어지는가 싶더니-

"아, 잠깐만요."

"응?"

"둘이서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잠깐 자리 좀 비워주실 수 있으실까요?"

"어, 어?"

최재훈은 아주 정중하게 말했으나.

서수나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최재훈이 자신이 휘어잡기 쉬울 만큼 소심해 보이지도 않고.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건조하기 그지없자.

당황과 함께, 억하심정을.

그러니까, 불쾌함을 느낀다.

"아니, 재훈아. 오랜만에 봤는데 대뜸 하는 말이 그거야? 누나 섭섭하다?"

피식 웃는 그녀의 태도에는 은근한 가시가 돋쳐 있었다.

원래, 최재훈 같은 부류의 이들은 버티지 못할 분위기였다.

그렇게 서수나가 최재훈의 정중한 부탁에도 아랑곳 않고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섰다.

"아, 그러면 잠시만요. 희은 씨? 잠시만 이리로-"

"예? 아, 넵! 아 그,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중이 떠날 생각이 없다면, 절이 떠나면 되는 노릇이었다.

최재훈이 김희은과 같이 자리에서 멀어졌다.

"…."

최근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첫 만남에, 서수나는 멀어지는 둘을 아연히 쳐다봤다.

그렇게 다시 둘만 남게 되자, 최재훈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넵!"

"희은 씨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그걸 풀어야 할 것 같아서요."

"오해요?"

"사실, 그때 SGF에서…."

그렇게 최재훈은 자초지종을 말한다.

데스베이더 가면을 쓴 당신을 그렇게 대했던 건, 페이스로 착각해서 그랬던 거였다고.

"사실, 전 희은 씨의 열혈 팬이라고 할 만큼. 머그컵 선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지 못해요."

"어…."

김희은은 당황해서 이야기를 듣다가도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니까, 지금- 재훈 씨 말씀은. 이게 다, 저 혼자서 착각에 빠져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했다는 말씀이었다는 검까?"

"아니죠. 제가 오해의 소지를 제공한 건 분명 맞으니까. 희은 씨 잘못이 아니라, 전적으로 제 잘못이죠. 그러니까-"

최재훈이 면목 없다는 듯 쓰게 웃었다.

"착각하게 해서 정말로 미안해요."

"너, 너무함다 그런 거… 그러면, 저를 존경하는 선수라 했던 것도 거짓말이셨슴까?"

"희은 씨."

"…."

그녀가 대답 없이 뚱하니 최재훈을 바라봤다.

"제가 누구예요? 겜창. 응? 레오레에 인생 꼴아박은 겜창, 맞죠?"

최재훈이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희은 씨 같은 선수를 존경 안 하겠어요. 안 그래요?"

그리곤,

김희은은 그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멍하니, 한동안 바라보았다.

"알겠슴다."

"네?"

"사과해 주셔서 감사함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말에 담긴 온도는 아까에 비해 훨씬 차가워져 있었다.

김희은이 매몰차게 최재훈에게서 등을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

그런 그녀의 얼굴은, 다소 붉어져 있었다.

'내가 왜 그랬지?'

그녀는 즉시 후회했다.

최재훈에게 그리 매정하게 대한 것을.

그러면서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평생을 '무언가'에 몰두해오며 살아온 김희은이었다.

그녀는 이성에 대한 관심도, 경험도 없었다.

고로, 이성을 대할 때의 감정에 대해서 그리 잘 알지 못한다.

최재훈이 자신의 열혈팬이란 걸 알았을 때는, 그를 자신의 팬으로 대하면 됐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열혈팬이 아니란 걸 알게 된 지금.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혼란스러웠고.

그 감정으로, 최재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또 혼란스러웠다.

"흐…."

어찌, 잘 해결된 건가?

최재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자, 갑시다."

"…."

그렇게.

"무슨 얘기 했어?"

"아, 사적인 얘기입니다."

"아, 응. 그렇…구나?"

어딘가 상당히 언짢아 보이는 듯한 서수나의 안내를 받으며.

'야' 안으로.

세연대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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