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 미드빵 남왕 2
"안돼~~~!"
간발의 차이로 화면이 회색으로 물들자, 차현하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있는 힘껏 의자로 실었다.
그리곤 망연히 화면을 바라봤다.
'미드빵'은 일반적으로 피지컬과 라인전의 척도로 인지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미드빵에서.
세계 최고 팀인 TC1의 주전이자.
국내 3대 원딜러 중 한 명으로서, 프로 중 프로인 차현하가.
남들이 보기엔 간발의 차지만, 스스로 느끼기엔 '엄청난' 차이로.
레오레 전체가 바라본다 할 수 있는 무대에서 패배해 버렸다.
그것도.
아무리 현재 레오레 판에서 가장 뜨거운 플레이어라곤 하나.
결국엔 아마추어에 불과한 숨컷에게.
자존심에 큰 금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야, 괜찮냐?"
모와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차현하는-
"괜찮냐고?"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연히 안 괜찮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져 버렸는데. 지금 내 심정이. 입장이 어떨 것 같아? 내가 이 상태에서 계속 프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야, 겨우-"
"당연히 못하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우리 자기가 나 책임져 줄 수밖에 없을 것 같아. 현지야, 그동안 고마웠다. 나, 시집간다."
"-어, 어… 그래. 널 걱정한 내가 병신이지."
잠깐 잊고 있었다.
그녀의 성격을.
"하하핫 나, 이거 원 참."
차현하가 호쾌하고 털털하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걸, 이렇게 완전히 끝장이 나 버린다고? 아, 이 무력감! 이게 그, 주인님 플레이인가 뭔간가?"
"숨컷이 주인님이면, 닌 개냐? 지능 수준이 딱 그 정도 같긴 한데."
"우리 자기가 주인님이면, 까짓 거! 못 할 거 있나! 개! 하지 뭐!"
"숨컷은 아무런 얘기도 안 했는데, 왜 몇 년 전부터 벌써 개가 돼서는 개소리를 해 오고 있는 거니 현하야…."
"어, 뭐야!? 현하 졌냐!?"
"미친! 이 TC1의 수치! 당장 TC1에서 꺼져, 이 괴물!"
뒤늦게 탑과 서포터가 다가와서 한마디씩 보탰다.
그러자 모와이가 잠깐 페이스 쪽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뭐야, 어찌 어찌 다시 입혀 놨네. 어떻게 했냐?"
"…묻지 마라."
"아무 일도 없었다…."
"븅신들…."
"아니 그런데."
그렇게 운을 뗀 TC1의 정글러, EGGE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야 차현하. 니 봐준 거 아니지?"
"우리 자기가 날 봐 줬으면 하긴 해."
"하, 이 새끼가 진짜로 졌다고?"
"그러게…."
TC1안에서 미드빵으로 차현하를 이토록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건 페이스 정도뿐이었다.
'전열'이자 '암살러'인 이신을 다루는 데 상대적으로 능숙한 탑과 정글러도, 차현하와 비등한 수준이었다.
사실.
프로쯤 되면 '미드빵'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다.
미드빵 실력이랑, 피지컬과 라인전 능력 둘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시하지 않아도 미드빵 안에 분명 그 안에서 활용되는 '요소'가 있다는 것 또한 안다.
실력에 있어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가 말이다.
그 요소에서, 숨컷은 이 네 명을 앞서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팀인 TC1의 주전인 이 넷을 말이다.
해당 경기를 지켜봤던 관객들의 입에서도 무수히 나왔던 그 말이.
그들의 입에서도 나온다.
"이 정도였을 줄이야…."
그리고, 그 말 또한 나온다.
"도대체 왜, 솔랭에서 썩는 거지?"
"아무래도 챔프 폭이 문제 같던데…."
"그건 노력하면 늘릴 수 있는 거 아닌가?"
TC1의.
프로팀들의 숨컷을 향한 관심은, 욕심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 * *
찰랑!
-자기, 나 졌다고 TC1에서 쫓겨나게 생겼어 책임져 줘
흡족하게 폭발적인 반응을 만끽하고 있던 숨컷이, 사이트의 후원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 뭐, 일자리 필요하시면 지원서라도 보내 보시던가. 채팅창 매니저 정도론 써 드릴 의향 있으니까."
찰랑!
-진짜?!
최재훈은 이 인간이면 정말로 당장 지원서가 날아올 것 같아서 황급히 정정했다.
"아, 당연히 농담이고요. 사이트 선수. TC1 주전으로서 앞으로도 훌륭히 한국을 빛내주시길 바랍니다~ 자, 다들~ 사이트 선수에게 박수 부탁드립니다~"
[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
[놀라서 허겁지겁 벽 치는 거 보소 ㅋㅋ]
[ㄹㅇ ㅋㅋ 저런 새기들한텐 여지 주는 거 아냐 ㅋㅋ]
-찰랑!
-자기는 안 쳐 줘~?
"아~ 예. 저는 안 쳐 드립니다. 왜냐!?"
그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한껏 우쭐댔다.
"내가 더 박수 받아 마땅한 사람이니까. 자, 다들. TC1 SIGHT를 이긴. 랭킹 1위를 찍은 내가 누구!? 쎄 마 넴!"
-찰랑!
-자기! 자기! 자기! 자기!
[조컷! 조컷! 조컷! 조컷! 조컷! 조컷! 조컷! 조컷! 조컷! 조컷! 조컷! 조컷! 조컷! 조컷!]
"갓 뎀 뻐킹 라이트! 그런 미가!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 해 둡니다. 우리 지현 씨, 서포터로 챌린저 찍을 건데. 다들, 불만 없제!?"
-찰랑!
-넵!
[네 행님]
[불만 있으면 미드로 나오라고 아 ㅋㅋㅋ]
[이불만씨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몰라도 당장 방송에서 나가주시길 바랍니다]
[배개만씨도 손 잡고 꺼지세요]
[아니 근데 ㅋㅋ 그게 포변한다고 ㄹㅇ 찍어지는 거임?]
[어쨌든 기대되긴 하네 ㅋㅋ]
그렇게.
숨컷의 계획은.
컨텐츠는.
훌륭히 당초 목적을 이루어냈다.
아니지.
그 이상이었다.
"아참, 그리고 여러분!"
최재훈이 스코어의 마지막을 갱신했다.
컷컷컷 1 : 1 TC1
컷컷컷 2 : 1 TC1
"TC1 이긴 크루, 누구?"
[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컷]
[삼컷! 삼컷! 삼컷! 삼컷! 삼컷! 삼컷!]
"모와이 선수 이긴 컷컷컷 크루원 누구!?"
[뇌없페! 뇌없페! 뇌없페! 뇌없페! 뇌없페!]
[뇌없페! 뇌없페! 뇌없페! 뇌없페! 뇌없페! 뇌없페! 뇌없페!]
[근데 뇌없페 님은 닉을 왜 그렇게 지으셨나요?]
"아니, 머저리들아. 처음 보는 사람들 착각하잖아. 뇌없페라고 그만 쳐 불러."
"맞습니다! 우리 뇌없페!"
"아니-"
"그리고, 우리! 데라를 상대로 졌지만 잘 싸운 크루원 누구!?"
[권지현! 권지현! 권지현! 권지현! 권지현! 권지현! 권지현!]
[내가 알던 그 권찐따가 맞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아니, 내가 왜 찐따야! 이상한 프레임 씌우지 마요!"
[찐따! 찐따! 찐따! 찐따! 찐따! 찐따! 찐따! 찐따! 찐따! 찐따! 찐따! 찐따! 찐따! 찐따! 찐따! 찐따!]
[우리 찐따가 부끄러워!!?!?!?]
[대한민국 찐따 베스트 일동은 권지현 씨를 지지합니다]
[그럼 니가 인싸야? ㅋㅋ]
[그래서 라톡 친추 몇 명 돼 있는데 ㅋㅋ]
그 말에 권지현은 즉각 라톡 친추창을 확인하곤-
"헝…."
지금.
레오레 판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이곳에서.
숨컷 뿐만이 아니라, 권지현과 삼피에게도.
컷컷컷 크루에게도 관심이 향해졌다.
TC1을 이긴 컷컷컷 크루.
물론, 이벤트전에 불과하다.
정식으로 상대하면 세 명이 상대도 안 되고 무참히 짓밟힐 거란 걸, 큰 의미 없는 승리라는 사실을 누가 말 하지 않아도 모두가 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얼마나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두었냐가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건, 이 레오레 판의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무대에서.
세계 최고의 팀인 'TC1'과 엮여서 공동 컨텐츠를 진행했다는 사실이었다.
집단 대 집단, 동등한 입장으로서 말이다.
이 일로.
최재훈, 권지현, 삼피.
그들이 속한 팀이자 브랜드인 컷컷컷 크루의 위상과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그 구성원들과 함께.
TC1 듀오의 난입 덕분에 얻게 된 상상도 못한 부수입이었다.
"자, 어쨌거나. 우리 사이트 선수. 모와이 선수. 그리고, 데라 선생님."
그가 데라를 향해 한 번. 그리고 모니터를 향해 두 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아, 저도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저도요!
-찰랑!
클립 영상 안에서, 이전보다 더 뜨거워진 눈빛의 차현하가 윙크를 하며 말했다.
"하, 참나."
최재훈이 그에 헛 웃으면서도.
워낙 기분이 들뜬 나머지, 저도 모르게 그에 화답했다.
똑같이 윙크를 함으로써 말이다.
[숨컷님 많이 피곤하신가봐요 눈에 경련 일어나고 계세요]
[현직 의대생입니다 마그네슘 부족 현상 같네요]
[마그마를 섭취하시면 됩니다]
[마그마 VS 뚜르마]
[미친노마]
그러자, 채팅창에서 짓궂은 반응이 되돌아온다.
-어~ 숨컷 님.
반면에 TC1.
모와이가 말했다.
-현하 얘 지금, 얼굴 개 빨개졌어요, 큭큭큭. 한 방 먹은 표정인데요?
"하, 사이트 선수가요?"
최재훈이 짓궂게 피식 웃더니 중얼거렸다.
"귀엽네."
최재훈이 무의식적으로 행동에 채팅창에.
TC1에.
제나의 스튜디오에.
뜨겁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행동이 갖는 파괴력을 자각하지 못한 건 최재훈 뿐이었다.
그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짝!
"슬슬, 헤어져야 할 시간이네요."
[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시러]
[가지마!!!!!!!!!!!!!!]
[아니 방송 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ㅋㅋ]
"아니, 그렇게 말씀하셔도. 여기서 더 할 게 없어요."
[할게 왜 없어 ㅅㅂ]
[미드빵 계속 하면 되잖아]
"네? 미드빵이요?"
[데라를 이겨라 > 숨컷을 이겨라 ㄱㄱㄱㄱㄱㄱㄱㄱ]
"아니, 어… 그거 솔직히 뇌절 아니야?"
[나 카카시인데 이번 뇌절은 인정해 준다]
[ㄹㅇ; 이번만큼은 뇌절 > 나선환 ㅇㅈ합니다]
[뇌절 가즈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그러던 그때.
-찰랑!
-TC1 EGGE님이 100, 000원을 후원했습니다.
=숨컷 님, TC1의 명예를 만회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찰랑!
-BAY LIONHEART 님이 100, 000원을 후원했습니다.
=그럼 저도 한 번 도전해 봐도 되겠습니까?
아주 화제성 있는 도전자들의 도전이 빗발쳤다.
"쓰… 아, 모르겠다. 뇌절 가자!"
최재훈이 기분 좋게 외쳤다.
[가즈아 ㅋㅋㅋㅋㅋㅋㅋ]
[와 근데 오늘 후원 개 많이 터지네 ㅋㅋㅋ]
[ㄹㅇ ㅋㅋ]
[오늘 수익만 해도 차 한 대 뽑겠누 ㅋㅋ]
그의 행복에는 방송의 흥행도 흥행이지만.
아까부터 쉴 새 없이 터지는 후원도 한몫했다.
"아유, 뭐 후원 수익 뭐. 이런 거 다 필요 없는데. 응? 여러분들의 마음이라 생각하고, 감사히 받고! 좋은 데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겸손하게 웃었다.
그 겸손한 웃음은, 숨길 수 없는 우쭐거림과 합쳐져 '띠꺼움 참기 LV100'정도에 해당하는 표정이 되었다.
[으아악 ^^ㅣ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필요 없으면 환불해 ^^ㅣ발아!!!!!!!!!!!!!]
[도로 내놔!!!!!!!!!]
그런 시청자들의 아우성을 여유롭게 바라보던 최재훈.
[근데 이거 권지현 방송이고 권지현 아직 챌 못 갔으니까, 이 돈도 다 기부해야 하는 거 아님?]
"어?"
그 표정이 한순간에 굳었다.
[ㄹㅇ 좋은 데에 쓰도록 하겠네 ㅋㅋㅋㅋ]
결국.
그는 지하를 뚫을 기세의 낮은 텐션으로, 방송을.
뇌절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의 반응은 몹시 뜨거웠다.
그의 고통이 즐거워서이기도 했고.
그가, 프로들을 상대로 연승 행진을 이어가며.
새로운 전설을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TC1 선생님들 그런데 페이스는 안 온답니까?]
-찰랑!
-지금 이리가 좀 바빠서 ㅎㅎ;
[아 까비]
그렇게.
그날 숨컷에겐 새로운 별명이 하나 더 생겼다.
바로 '미드빵 남왕'이었다.
* * *
숨컷의 권지현 서포터 적응 서포팅이 시작됐다.
최재훈의 지도에 따라, 그녀의 실력은 갈수록 일취월장 상승해갔다.
그렇게 최재훈이 CSN와 권지현을 키워가던 나날.
키워야 할 게 한 가지 더 추가됐다.
세연대에서 연락이 왔다.
하늘전 최약팀과의 첫 미팅 날짜가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