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 기념
권지현이 두드린 문 너머에서 머지않아 발소리가 다가온다.
짐을 들고 오느라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있던 권지현.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워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모습은 마치, 집에 누워 있던 강아지가 문 너머에서 가족들이 귀가하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서는 것 같았다.
"흠, 흠! 아레베보보붸. 아, 아."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아 혹여 목소리가 잠기거나 갈라졌을까, 입을 푼 뒤 발성을 확인했다.
문이 열린 건 그 다음이었다.
"어, 권하!"
오빠를 쏙 빼 닮아 외견만 보면 신비스러운 미녀지만, 입을 여는 순간 철없는 아가씨가 돼 버리는 여동생.
최재은이 그녀를 반겼다.
"재은 학생! 안녕하세요! 권하, 권하~"
"권하~ 응? 그게 다 뭐래요?"
최재은의 시선이 뒤늦게 권지현의 내려가 있는 양팔, 거기에 들린 짐들을 향했다.
"아! 이번에 재훈 씨, 100만 구독자 달성하신 거 축하해드리려고요!"
"저는여?"
"어? 재은 학생도 뭐 기념할 만한 일 있어요?"
"100만 구독자의 동생이 됐음."
"오, 그렇게 되네요!!! 축하해요!"
"이걸 축하해 주네."
"앗! 그런데, 재은 학생 말 대로면 저도 100만 미튜버인 재훈 씨의 크루원이 된 거네요?"
"나만큼은 아니지만 대단한 업적이군, 동지."
"아유~ 감사합니다~"
"그런데 동지. 내가 축하 받아 마땅하다면, 그 안에 물론 내 선물도 있는 거겠지?"
"당연하죠!"
"아니, 이게 당연하다고라. 어쨌든, 편하게 들어 오세여. 그거, 주시고."
"아, 괜찮은데- 고마워요~"
최재훈의 집에 들어가는데 이렇게 당연한 듯, 그의 가족이 반겨주다니.
마치 가족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그래.
최재훈의 부인이.
"헤헤헤."
그녀가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방실거리며 집 안에 들어섰다.
"어, 지현 씨?"
그렇게 막 화장실에서 나온 최재훈과 눈이 마주친다.
"앗! 안녕하세요! 재훈 씨!"
"안녕하세요? 언제 오셨대."
"앗. 죄, 죄송해요. 그러고 보니 집 주인이신 재훈 씨 허락도 안 맡고…."
"내가 이 집 주인인데?"
"재은아, 니가 이 집 주인하려면 월에 60만 원씩 내야 돼."
"내가 이 집 주인의 주인인데?"
"재은아, 니가 집 주인의 주인 하려면 오빠한테 엄마라 불려야 돼."
"우욱. 난 죽음을 택하겠다."
"어쨌든, 지현 씨. 죄송하시라고 한 말이 아니라, 그냥 반가워서 한 말이었어요. 화장실 들어갈 때만 해도 없었던 지현 씨가 딱! 크, 이게 서프라이즈고 이게 생일선물이지. 응? 안 그래요?"
최재훈이 싱긋 웃었다.
권지현은 방금 자신이 이 집의 가족 같다.
부인 같다 했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지금 그녀는 가족은 맞지만, 굳이 따지자면 부인보다는 강아지에 가까웠다.
웬 골든리트리버가 아까부터 헤벌레, 가족이 엉덩이를 두드려주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현 씨. 웬 일이세요? 물론, 아무런 볼일 없어도 언제든지 와도 되는데. 그렇게 뭔가 잔뜩 들고 계시니까 궁금해지네?"
"아, 이거요! 잠깐만요-"
일단~
하고 그녀가 가장 먼저 꺼낸 것은-
"짠~"
깔끔한 상자.
케이크가 들어 있는 상자였다.
"재훈 씨는 무슨 케이크 좋아하세요?"
"저요? 글쎄요."
"난 초코."
"재은아, 니가 재훈 할래?"
"동생은 뭐가 좋아?"
"난 치즈나 당근이 좋아, 오빠."
"아, 역겨워!"
"왜 상대도 안 되면서 계속 깝치니, 재은아."
"어, 치즈랑 당근이요? 다, 다음으로 좋아하시는 건요?"
"다음으로 좋아하는 거?"
권지현이 기대에 차서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봤다.
최재훈의 시선이 힐끔, 케이크 상자를 훑었다.
포장 윗부분 일부가 투명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로 순백색 단면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한 건 뭐든지 좋아해요. 치즈~당근~ 생크림~"
"오!"
최재훈의 새하얀 꼼수에, 권지현이 만면에 화색을 띠며 포장을 열고 케이크를 꺼낸 뒤 호들갑스럽게 양손으로 번갈아 케이크를 가리켰다.
"오~ 지현 씨! 이야~ 제 취향 어떻게 아시고!"
"헤헤, 그리고. 그리고, 이것도 한 번 보세요!"
"응?"
"이번에 재훈 씨 백만 기념으로 특별히 부탁해서- 엉?"
"오."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에는, 권지현의 말에 따르면 최재훈의 100만 구독자를 축하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이게 뭐더라."
"백?"
여동생의 물음에 오빠가 답했다.
"아, 맞다. 백."
그건 '백'이었다.
"어…?"
권지현이 당황해서 그 '백'을 쳐다봤다.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와 아주 잘 어울리는 그, '白'을.
"뭐, 뭐징…?"
그녀는 어찌 된 영문인지 파악하기 위해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어제, 케익 주문제작을 하기 위한 통화.
-저기, 그 혹시….
-네?
친절한 남자 직원에게 위축된 권지현은 겨우 말을 꺼낸다.
-케이크에, 글자 같은 것도 새길 수 있을…까요?
-네? 글자요? 아, 후후.
-아, 예. 가능합니다. 뭐라고 써 드릴까요?
-크게 '하얀 100'을…
-하얀 백이요? 흰 白,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네네.
종업원은 뭔가 뜬금없지만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와 묘하게 잘 어울린다 생각하여, 숫자 100인지. 아니면 정말로 흰 白인지 묻지 않았고.
권지현은 남자 직원이 의미심장하게 '후후'하고 웃었을 때부터, 부끄러워서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정확히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게, '백'만 구독자를 축하하는 순백의 '白' 케이크는 탄생했다.
권지현의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최재훈의 중요한 일을 축하하는 선물을 망쳐 버리다니.
그녀가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이 되었다.
최재훈과 최재은은 당황하며 눈을 깜빡이며 케이크를 바라봤다.
금방에라도 두 사람의 입에서 실망의 말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요.
축하를 받아야 하는 둘이, 오히려 자신을 위로해줄 것 같았다.
"헝…."
그게 비참해서 잔뜩 권지현의 귓가에 들려오는, 남매의 목소리.
"와… 어썸하네…."
"리얼루다가…."
"…응?"
"이 무슨 해학적이고도 유머러스하며 쉬리얼한 고차원적 행위예술…."
거기엔 위로가 아닌 진심 어린 감탄이 담겨 있었다.
"구독자 백만을 축하하는, 순백의 '白'케이크라니…."
부득이하게 케이크에 담겨 버린 그 다소 뒤틀린 유머는, 뒤틀린 유머 감각을 가진 남매의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역시 지현 씨, 센스가 아주 그냥."
"막 그냥."
"고마워요, 여러 의미로 감동 그 자체였어요."
반응을 보니, 자신을 놀리거나 격려해 주기 위해서는 아닌 것 같다.
둘은 진심으로 저 '백'케이크에 감탄하고 또 감동 받은 것이다.
"아, 두 분 다 마음에 드신다니. 저야 말로 감동이네요. 하히헹!"
권지현은 마치 처음부터 이 모든 걸 의도했다는 듯 에헴, 마음껏 우쭐거렸다.
권지현의 선물은 그 외에도.
샴페인.
다행히도 白이 아닌 100과 관련된 굿즈 등 다양했다.
특히 진국은-
종이학이 100마리씩 담긴, 유리병 세 개였다.
하나는 길쭉하며, 나머지 두 개는 도넛 모양이다.
1, 0, 0을 형상화한 것이다.
"와… 대박…."
최재은은 다양한 의미로 중얼거렸다.
그 안에 담긴 순수함의 농도가 너무나도 짙어서 저도 모르게 '찌, 찐….' 소리가 나올 것만 같았다.
최재은은 저 언니가, 저런 선물을 준 대상이 자신의 오빠라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오빠가 아니었다면-
"이거 뭐야! 이거, 1, 0, 0이렇게 해서 100이었구나! 와, 큭큭큭. 진짜 미치겠다. 아니, 너무 좋은데? 진짜 권지현, 백 케이크도 그렇고. 정말로 센스의 신이 되어 버린 것인가?"
"헤헤헤헤."
저런, 선물에 들어간 노력에 비례하는 진심 어린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기도 힘들었을 뿐더러.
권지현이 돌아가면 그제서야 저 애물단지를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종이학들을 바라보며 푹, 한숨을 내쉬는.
그런 끔찍한 상황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대대적인 선물 수여식이 끝나고.
"다시 한번, 재훈 씨. 정말로 100만 구독자 축하드려요! 성공하실 줄 알았다니까요!"
짜짜자자작.
물개 박수를 치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권지현.
그녀를 바라보던 최재훈은 문득, 그녀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쾅!쾅!쾅!
'내 딜-'
아, 이거 말고.
처음 인터넷 방송의 세계를 보여줬던 때가.
그날, 권지현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자신은 어디에 있었을까.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을까.
처음 만난 자신에게, 인터넷 방송의 좋은 면만을 보여준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말이다.
모른다.
그저 막연히 추측할 뿐.
확실한 게 하나 있다면.
그녀와의 인연이야 말로, 최재훈에게 있어 둘도 없을 선물이었다.
"지현 씨 덕분인 거 알죠?"
최재훈이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권지현 또한 그와 비슷한 표정이 되었다.
"뭐지 이 거시기한 분위기. 내가 자리라도 비워 줘야 하는 것인가?"
"…아!"
최재은이 능글거리며 한 말에, 권지현이 당황해서는 멋쩍어한다.
"아무튼, 재훈 씨. 재은 학생. 그거, 지금 드셔 보시지 않을래요? 제가 잘라 드릴까요?"
그녀가 케이크를 가르키며 말했다.
그에, 눈동자가 잠깐 우측 상단을 들렀던 최재훈이 답하길.
"뭔가, 저희끼리만 먹기 좀 아까운데. 지현 씨. 오늘 바쁘세요?"
"넹? 아뇨?"
"그럼 같이 좀 가시죠."
권지현은 최 남매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
머지 않아, 익숙한 차가 도착했다.
제나의 차였다.
"아, 제나 씨랑 만나기로 하셨구나!"
"응? 쟤가 웬 일이지?"
"엥?"
제나는 최재훈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차에 내렸다.
"뭐야, 어떻게 알고 나 기다리고 있었냐?"
그녀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 알긴.
몰라서 기다리고 있지도 않았는데?
최재훈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며 물었다.
"아니, 제나 씨. 웬 일이세요?"
"뭐. 별 일 아니면 꺼지라 하게?"
그녀가 초장부터 틱틱댔다.
초장부터 부끄러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최재훈 취향의 복장을 입고, 그를 깜짝 놀래켜기 위해 갑작스럽게 찾아와다는 이유로 말이다.
"됐고. 이거나 받아."
제나가 무심하게 무언가를 툭 내밀었다.
쇼핑백, 안에는 묵직하고 조그마한 상자가 들어 있었다.
딱 봐도 귀중품이 들어 있을 법한 거기엔- 아니나 다를까.
"하, 이게 뭐래."
이니셜 M 모양의 장식의, 아주 세련된 펜던트가 들어 있었다.
"M… 무슨 의미지. 레오레 유저니까 이 M은 설마…!"
"뭐라는 거야, 멍청아."
"아, 멍청이의 이니셜이었군."
"아니, 밀리언 등신아!"
"아하."
제나가 고갤 돌리며, 이번에도 무심한 듯 툭하고 내뱉었다.
"축하한다고."
말하는 그녀의 귀는 조금 붉었다.
최재훈이 피식 웃으며,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그리곤 그녀에게 말한다.
"어째, 잘 어울려요? 이런 건 처음이라 잘 모르겠네."
제나가 고개를 그대로 둔 채, 시선을 흘겨 확인한다.
"…뭐, 못 봐 줄 정돈 아니네."
웃고 있는 최재훈을 보고, 그녀 또한 씨익 웃었다.
"그러면 난, 볼일 끝났으니까."
제나가 권지현과 최재은에게 각기 까닥, 턱을 들어올리며 목례를 한 뒤.
다시 차에 올라타려다가-
"아, 제나 씨."
"?"
최재훈이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돌아본다.
"오늘, 바쁘세요?"
결국.
그렇게 또 다시 자연스럽게 모이게 된 컷컷컷 크루.
"응? 다들 모여 계셨군요."
머잖아 도착한 이린의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시내의 백화점.
백화점 내에 위치한, 쥬얼리 샵이었다.
"주문했던 거 받으려고요."
"아, 최재훈 고객님이시군요. 잠시만요~"
머지않아, 쇼핑백을 들고 오는 종업원.
그녀는 쇼핑백에서 주먹 만한 상자를 하나 꺼내 연 뒤, 내용물을 최재훈에게 보여줬다.
"어떻게, 마음에 드시나요?"
"예. 나이스하네요."
최재훈은 그 상자를 컷컷컷 크루원들에게 하나씩 나눠 줬다.
상자를 연 그녀들의 눈에 들어온 건, 브로치였다.
크루의 이름을 따서, C 세 개를 포개어 놓은 모양의 세련된 브로치.
이게 다 뭐냐는 듯한 그녀들의 시선에, 최재훈이 답했다.
"딱히 대단한 건 아니고. 이번에, 구독자 100만 찍은 거 감사하다는 의미로. 나름, 상징적인 선물을 드리고 싶었거든요."
"왜 숨컷 님께서 저희한테 선물을…."
그가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말했다.
"여러분 덕분이기도 하니까요."
세 여자는 그런 그를, 브로치를 잠시 동안 가만히 바라보더니.
순수히 그걸 착용했다.
"오빠, 나는?"
최재은하고, 최재훈 또한 마찬가지.
그렇게 일제히 브로치를 착용한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픽.
하고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거. 좋네요. 뭔가, 뭐라고 해야 하나… 유치해서. 응? 감성이 있네. 파워레인저 놀이 하던 그 시절 그 감성. 아주 그냥, 유니폼도 맞춰 버릴까요?"
이후, 최재훈은 쥬얼리 샵 말고도.
백화점 내의 매장을 몇 군데 더 들려서, 미리 주문해 놓은 것들을 차례대로 수령해 나갔다.
"와, 재훈 씨…."
"아니 뭐 이런 걸 다…."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그렇게, 동료들의 양손을 가득 채운 뒤에야 다시 차로 돌아왔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복잡미묘했지만.
확실한 건, 그 복잡미묘한 표정에선 분명 기쁨이 묻어 나왔다.
"자, 그러면 여러분. 다들, 슬슬 출출하시죠?"
그가 웃으며 말했다.
"치킨들, 좋아하세요?"
다음 목적지.
아주 오랜만의, '우리 가게'였다.
목적지를 전해들은.
지금부터 그의 부모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자들의 들뜬 듯 풀려 있던 표정이, 긴장으로 굳었다.
상견례.
정말로 뜬금없고 느닷없게도 그런 개념을 떠올리면서, 김칫국을 한 냄비 들이켜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