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가 게임을 잘함-223화 (223/361)

223. D-44 이린

SGF가 끝난 직후.

최재훈과 일동이 인사를 나눈 뒤 헤어지려던 찰나였다.

"야."

"응?"

제나가 최재훈을 불러세웠다.

"니, 끌고 온 차 없지?"

끄덕.

그러자 만족스럽게 비웃으며, 이번엔 식은 얼굴로 권지현에게 묻는 제나.

"니는."

"아직은 없지만 조만간 살 거예요!"

최근 들어 최재훈과 같이 다른 여자의 차에 타거나.

최재훈을 다른 여자의 차를 태우는 일을 빈번하게 겪은 권지현.

그녀가 뚜껑이 열리는 고급 스포츠카(살 여유 안 됨) 조수석에 최재훈을 태우고 선글라스(무서워서 쓰고 운전 못할 것 같음)를 쓰고 노을이 지는 해변을(갈 일 없음) 달리는 상상을 하며 의욕을 불태웠다.

"아, 그래서 없다는 거 아냐. 그걸 참 길게도 말하네."

"헝…."

"어쨌거나. 니들 둘. 아니, 셋. 뭐 어떻게 돌아갈 거야."

"글쎄."

"택시 타면 되잖아. 내가 쏨."

닭꼬치를 뜯고 있던 최재은이 말했다.

"오… 동상아… 오빠는 기쁘다. 남의 지갑 터는 것 밖에 못 하던 우리 재은이가, 남을 위해 자기 지갑을 털 줄 아는 사람이 되다니. 오빠는 마음만으로도 구빱 한 백 그릇 먹은 것만큼 든든해. 그러니까, 넣어 둬라. 우리 급식충 용돈도 부족할 텐데, 오빠가 할게."

"아니야, 괜찮으니까 날 계속 자랑스러워 하렴."

"오… 오빠가 알던 그 쌉찐따같던 재은이가 맞냐? 진짜 전설이 되었구나. 그런데, 진짜 괜찮겠니, 덩상아? 급식충은 모르겠지만 사회는 매우 혹독한 세계란다.

장거리 택시비 가격, 졸라 혹독해. 니네 학교에 있는 매점 같이 천진난만한 세계가 아니야. 재은이가 까까랑 음료수세트 20번도 넘게 사 먹을 수 있는 돈을 한 번에 내야 할 수도 있어. 매점에 갈 때마다 '그 택시비면 까까가….'하면서 후회하게 될 건데. 그게 지금 너가 짊어지고자 하는 짐이란다. 어떻게, 견딜 수 있겠니?"

"하하, 걱정 마시게 틀니 딱따다닥딱딱닥딱충. 나에겐 이게 있으니까."

그녀가 손에 쥔 카드를 흔들었다.

최재훈이 '우리 재은이 오늘SGF에서 하고 싶은 거 다 해' 라며 준 카드였다.

"재은아, 우리나라 헌법이 아무리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해도 상도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남의 카드로 플랙스를 조지면서 자기가 쏜다고는 할 수 없는 법이야. 아니면 그거야? 너가 쏜다는 게 오빠의 얼탱이를 쏜다는 거였어? 그렇다면 쌉적중이다. 방금 터지는 소리가 난 것 같애."

"죄송하지만, 오빠 돈이 곧 동생 돈이에요. 당연한 상식이에요."

"미안하지만 동생아, 헌법에선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보장해준단다. 그걸 어기겠다는 건, 국가를 상대로 도전하겠다는 거야. 정말 그걸 원하니?"

"죄송한데, 이게 헌법보다 더 역사가 유구한 국룰이에요. 그 증거로 4세기 중엽에 새겨진 고구려 고분의 벽화 '수박도'에는 여동생에게 돈을 상납하는 오빠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요."

"미안한데, 재은아. 60억 권 팔린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에는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적혀 있어. 너 이거 부정하면 기독교에 전쟁을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 감당할 수 있니?"

"어~ 난 그리스로마신화 믿어~ 내가 믿는 신이 더 많고 더 쎄~"

"어~ 그럼 오빠는 신 몇 억이나 있는 힌두교 믿을 거야~"

"응~ 양보다 질이야~"

"어~ 그 논리면 유일신인 하느님이 제일 쎄~"

"응~ 너 방금 힌두교 믿는다 했어~"

"응~ 힌두교에서 오빠 소고기 먹는다고 안 받아줘서 무효야~"

"아니, 니들 뭐하냐? 초딩이야?"

보다 못한 제나가 끼어들었다.

"됐고. 택시 타는 게 그렇게 아까우면, 뭐. 나한테 한 번 빌어 보던가."

"응?"

"혹시 몰라? 못 봐줄 정도로 불쌍하면 내가 태워다 줄지."

그렇게 말한 그녀가 거만하게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셋 중 하나, 권지현이 말한다.

"오! 제나 씨! 역시 겉으론 그래도, 속으론 친절하셔!"

"빌어 보라니까 뭐라는 거야. 아니 것 보다, 겉으론 그래도? 니, 뭐, 평소에 나 재수 없다고 생각하냐?"

"헝… 그게 아니라…."

"아, 제나 씨 진정해요. 우리 제나 씨가 밥맛인 건 지구촌 90억 인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4세기 중엽에 새겨진 고구려 고분의 벽화 '수박도'에도 제나 씨가 밥맛이라고 적혀 있는데 그게 증거고."

"아, 말던가. 꺼져."

"맞아, 꺼져 버려!"

최재은이 말했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듯 어느새 제나 옆에 붙어먹고는 최재훈과 권지현을 향해서 말이다.

"언니! 저런 거한테 잘해줄 필요 없어요. 빨랑 갑시다!"

제나는 얘는 또 뭔가 싶었다.

"재은아, 오빠랑 지현 씨한테 저런 거라니. 떼찌야."

"너 말한 거야!"

"재은아, 오빠한테 저런 거라니. 떼찌야."

"유 떼찌? 암 뻐큐!"

"어허."

"헤이 시스터, 컴 윗미!"

최재은이 제나의 팔을 툭툭 쳤다.

"그래서, 어쩔래. 니 동생은 그렇다는데."

"언니! 전 니 동생이 아니라 최재은이에요! 영어 이름 지어주셔도 됨!"

제나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참고 최재훈의 답을 촉구했다.

최재훈이 각별히 이뻐한다는 점에서.

그녀가 껄끄러워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이, 머리 긴 최재훈에게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게.

"그럼 뭐, 신세 좀 지지 뭐."

"감사합니다!"

그때.

영상을 위해, 밤의 SGF 주변 풍경을 촬영하러 갔던 이린이 돌아왔다.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나는 우리 갓집자님 평생 기다릴 수도 있어."

최재훈이 헤실헤실 웃으며 이린에게 말했다.

"이린 씨. 오늘 너무 고생 많으셨고, 너무 감사했어요."

그에 이린은 표정이 요동치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무표정을 유지하며 답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숨컷 님이야 말로 오늘, 다사다난했는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 대단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요.

진심으로 덧붙이는 그녀는 어딘가 들뜬 듯했다.

이제부터 집으로 돌아가, 오늘 그가 보여준 다양한- 빛나는 모습들을 되돌아보며 편집할 예정이다.

그의 방송 인생에 있어서 엄청난 분기점이 될 오늘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편집하는 것이다.

가다듬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분기점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가 그럴 수 있도록 유일하게 허락한, 특별한.

그의 편집자로서 말이다.

그녀가 들뜬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린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고.

그저 지금 자신은 기분이 좋구나, 생각할 따름이었다.

최재훈이 마찬가지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갓집자 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거면 진짜 그렇겠네요. 이거, 어깨에 힘 좀 집어넣어야겠구만."

이린이 함박웃음을 지을 만한 감정을 다만 싱긋 웃음으로써 표출했다.

"어쨌거나, 이린 씨. 다시 한번, 오늘 정말로 고생 많으셨어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이린 또한 분위기를 타고 그에게 인사를 돌려-

"예?"

주려다가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그녀는 올 때 최재훈 일동을 태워다 주었다.

그러니 갈 때도 그를 태워다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최재훈의 말은 자신을 태워다 줄 이에게 하는 말로써는 부적합했다.

그녀는 혹시나 싶어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아, 예. 가시죠."

"네?"

"올 때도 태워드렸으니, 갈 때도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두 분도, 지현 님도 차를 안 가져 오셨으니까요."

"아~ 그거, 괜찮아요. 제나 씨가 갑자기 외로움 병이 도져가지고, 자기 혼자 놔두면 죽어버리겠다길래. 같이 가 주기로 했거든요."

"뭔 개 헛소리야? 미쳤어?"

그런 최재훈에 말에 이린은-

"아, 잘 됐네요. 크루원 분들끼리 친목 다지는 거. 바람직하네요."

그렇게 답했을 것이다.

원래의, 최재훈이 아닌 방송인들을 매니지먼트 했을 때의 이린이었다면 말이다.

그런데-

"아, 삼피 님께서 친절하게도 신경 써서 권해주셨군요."

제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이린의 말은 지금부터 본론이었다.

"하지만, 오늘 삼피 님도 여러 일로 상당히 바쁘실 텐데요. 그러니, 삼피 님. 세 분은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삼피가 미간을 구기며 답한다.

"댁이 쟤 매니저지. 내 매니저야? 난 신경 쓰지 말고, 댁 볼일이나 보지?"

"이전에 방문해본 바. 삼피 님의 댁은 숨컷 님의 댁과 방향이 다른 걸로 압니다만?"

"그렇게 멀지도 않아. 그리고, 그건 댁도 마찬가지 아닌가?"

최재훈을 대할 때와는 달리 확연히 무표정한 이린.

그리고 최재훈을 대할 때와는 달리 마냥 언짢아 보이는 제나.

둘의 시선이 충돌하며 불꽃이 튀는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린은 생각했다.

왜 이러지.

내가 왜 숨컷 님이 크루원들과 친목을 다질 기회를 방해하는 거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아.

아니, 알 것 같다.

"전 괜찮습니다. 그게 제 일이니까요."

그래.

자신은 매니저고.

그의 매니저고.

그게 그의 매니저로서 해야 할 일이니까.

그의 매니저로서, 그를 위해 해야 할 일이니까.

하지만.

정말로 그의 매니저로서 그를 위한다면.

그가 방송인으로서 크루원들끼리 친목을 다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또한.

매니저로서 최대한 방송인에게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철저하게 그림자가 되어야 한다는 네 나름의 철학에도 어긋나는 행위가 아닌가?

그렇기에 이린은 말했다.

"하지만, 삼피 님께서 정 '숨컷 님을 태워다 드리길 원한다면'야."

그렇기에 이린은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인지하지 못하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알고 있었다.

제나 웨스트의 성격상 이렇게 말하면 필시-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뭐? 참나."

제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는 그녀의 귀는 미세하게 빨개져 있었다.

마치 숨기고 싶은 무언가를 들키기라고 한듯.

"별, 말 같잖은 소릴. 뭐, 그럼 니들 알아서 하던가. 난 간다."

그렇게 곧바로 자리를 뜬다.

"아, 제나 씨 조심해서 들어가요~"

"오늘 수고하셨어여!"

"언니 바이~"

그녀의 등을 향해 세 사람이 인사를 하자, 그녀는 등 돌린 채 무심하게 팔을 툭, 들 뿐이었다.

"오오, 쌉간지…."

"그러게요."

그에 두 여자가 그 시크한 모습에 영향을 받고 언젠간 따라해 봐야겠다 생각했고.

이린은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내가 왜 그랬지?

그녀는 끝까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왜 그랬는지.

끝까지 인지하지 못했다.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최재훈에 대한 집착욕과 소유욕을.

"그런데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예, 말씀드렸다시피 제 일이니까요. 신경 쓰지 마시길."

"이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되는데. 어쨌거나, 감사합니다. 그러면, 가실까요?"

운전하는 이린은 복잡한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은 최재훈이 말을 걸 때마다 밝아졌다.

* * *

최재은이 권지현과 먼저 올라가고.

인사를 위해 마지막까지 남은 최재훈이 이린에게 말했다.

"오늘 정말, 마지막까지 감사했어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

이린은 냅자 마주잡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고.

차분하게 가죽 장갑을 벗은 뒤, 천천히 맞잡는다.

그리곤 뒤늦게 깨닫는다.

장갑을 끼고 있던 손에 습기가 차 있었음을.

"앗, 죄송합니다…."

"덕분에 집에 들어가서 손 안 씻어도 되겠네요."

그러자 최재훈이 특유의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짓궂게 말했다.

그 모습에, 이린의 귀가 다소 붉어졌다.

아마도 수치심으로.

마찬가지로 장갑을 낀 덕분에, 그녀의 손은 따뜻해진 상태였다.

반대로 장갑을 끼지 않은 최재훈의 손은 겨울 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온도 차이.

서늘하다.

그 만큼 그의 손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맞잡은 손바닥은 남자의 등처럼 넓고 단단했다.

그의 손가락은 또 남자의 팔처럼 너무 굵지도, 가늘지도 않고 울퉁불퉁했다.

그녀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건 마치 포옹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그게 아주 이상한 생각임을 알고 있는 그녀의 귀가 더욱 붉어졌다.

그런 그녀는 눈치 채지 못한다.

최재훈은 어느새 악수를 마치기 위해 손을 놓았는데도.

그녀는 계속해서 그의 손바닥을 붙잡고 있음을.

최재훈은 그저 가만히 기다렸고.

이내-

"아, 죄, 죄송합니다!"

그녀가 황급히 손을 뗐다.

"아니 우리 편집자님. 이렇게 멋지신 분이 죄송한 게 왜 이리 많으실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저런 얼굴로, 저런 목소리로, 저런 말 좀 안 했으면 좋겠다.

표정 관리가 힘들다.

마주 보기가 힘들다.

그녀는 도망치듯 말했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숨컷님 오늘도 재차 고생 많으셨어요.

그렇게 말하려던 그녀가,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말한다.

"재훈 씨."

그 뒤의 말은 생각나지 않는다.

매니저는 방송인에게 사심을 느껴선 안 된다.

그 순간 매니저라는 직책은 방송인에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게 그녀 나름의 직업관이고, 직업 철학이었다.

그걸 지키기 위해 그녀는 방송인을 대할 때 항상 거리를 두었다.

딱딱한 태도와 분위기.

반드시 방송인들을 닉네임만으로 부르는,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는 말투는 모두 그걸 위함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걸 깨 버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갑자기 호칭을 숨컷 님에서 재훈 씨로 바꾼다.

뻔하디 뻔한 의도였다.

이린은 마치 엄청난 죄악이라도 저지른 듯한.

최재훈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기에, 최재훈 또한 그렇게 느낄 거라 생각한다.

자신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추잡한 짓을 저지른 거라 느끼고, 경멸할 거라고.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기분.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이린에게-

"이린 씨도요."

최재훈은 답했다.

아주 담담하게.

방금 이린이 저지른 실수가 전혀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아니지.

애초에 실수 자체가 아니라는 듯.

매니저가 방송인에게 사심을 느끼는 건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듯.

"…."

그에 이린은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가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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