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딜 3
"제가 너무 밑지는 장사 같아서. 그러니까-돈 얘기 말고, 건설적인 얘기 합시다."
최재훈의 말은 두 플랫폼의 대변인에게-
'계약금 관심 없고~ 다른 거나 내놔 봐라.'
그렇게 해석이 되었다.
그리고, 둘은 그 해석이 자신의 피해망상이 아닌 최재훈의 의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았다.
숨컷의 조심스럽고 정중하며 모호한 태도.
그 때문에, 그를 내심 만만하게 보고 잘만하면 제 뜻대로 다룰 수 있다.
그렇게 최소한의 비용으로 그를 데려올 수 있다 생각한 두 여자의 기대가-
이번 걸로 완전히 깨졌다.
깨달았다.
그는 지금 자신의 입장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그걸 최대한으로 활용할 방법을 알고 있음을.
숨컷에게 물건을 얼마에 팔 거냐고 흥정할 상황이 아닌.
제발 물건을 팔아 달라 애원해야 할 상황.
둘은 그제야 이리 저리 재는 걸 포기하고, 가진 걸 모두 털어놓기 시작했다.
"와…."
"흠."
두 플랫폼의 대변인이 꺼내 놓은 대가에, 권지현과 삼피의 눈이 반짝였다.
상당한 조건이었다.
최재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게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이래도 안 꺼내? 독하다, 독해.'
김 팀장은 아직도 멸망전을 꺼내지 않았다.
이쯤 되면 모종의 사정이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멸망전을 꺼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 따름이었다.
"흠…."
그렇게 최대훈은 애매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말로 이게 전부냐는 듯한.
강선하와 김 팀장은 난처했다.
정말로, 이게 그녀들이 줄 수 있는, 준비해 온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 이상은 과잉 지출이 된다.
보통 같았다면 '이 조건도 마음에 안 든다고요? 그럼 어쩔 수 없죠.'라며 한 발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일 뿐더러.
방금 전, 최재훈이 '계약금'을 마다한 시점에서.
이 거래는 둘에게도 꽤 괜찮은 딜이 되었다.
다름 아닌 그 계약금이, 이번 둘이 준비해온 것 중에서 가장 큰 부담을 차지하는 요소였으니.
'아.'
그때, 강선하의 머릿속에 번뜩임이 있었다.
"-그리고, 저희 리치TV는 아메리카TV와 협력하여 이번, 레전드 필드 출시에 맞춰 이벤트성 대회인 '대항전' 개최할 예정입니다. 양 플랫폼의 대표 방송인들은 물론이며 연예인이나 업계 유명 인사를 초청하여 성대하게 진행될 초대형 이벤트에. 컷컷컷 크루 분들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과연 본부장의 직책에 걸맞게 노련한 강하선이었다.
발상의 전환.
숨컷에게 제발 대회에 참가해 달라 비용을 지불해야 할 입장이면서 오히려, 대회에 참가하는 걸 비용으로써 제시했다.
지금, 리치TV와 옐로TV가 제시한 조건은 비등하다.
강선하는 그를 마음대로 거둘 수 있다는 기대는 버렸지만.
그가 옐로TV보다 리치TV를 선호한다는 기대는 아직 버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옐로TV가 아닌 자신들을 선택해주지 않을까?
'제발….'
그때, 최재훈이 반색했다.
그에 강선하도 반색했다.
하지만, 최재훈이 반색한 건 그 조건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다.
강 본부장이 이런 조건을 제시하고 자신이 반색하면 맥락상.
김 팀장이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고 제시할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최재훈의 노골적인 유도에 김 팀장은 비로소 깨달았다.
최재훈이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멸망전.
그걸 주지 않고는 그를 데려올 수 없음을.
"잠깐, 따로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
체념의 한숨을 내쉰 김 팀장이 최재훈에게 동행을 요구했다.
그리곤 드디어, 지갑에서 멸망전을 꺼내놨다.
최재훈은 그녀가 멸망전을 왜 끝까지 안 꺼내려 했는지 깨달았다.
못 꺼낸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녀를 설득시킨 끝에-
마침내 얻어냈다.
거래- 아니.
경매는 종료됐다.
최재훈이 돌아와서 강 본부장에게 통보했다.
"강 본부장님, 감사했습니다."
판돈 올려 주셔서.
"제안해 주셔서."
"…예?"
“김 팀장님과 상의해본 바, 옐로TV로 이적하기로 결정하게 됐습니다.”
언젠가부터 그가 옐로TV에 갈까봐서가 아니라.
그에게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까봐 걱정하고 있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가 갑작스럽게 옐로TV 이적을 결정하자 그녀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예? 아, 아니. 왜. 왜 갑자기. 뭐, 뭐가 문젠데요? 저쪽에서 도대체 뭐라 했길래-"
강 본부장이 당황하며 흥분하려 하자-
"허나이."
숨컷은 그 말로 단번에 그녀를 식혔다.
강 본부장이 잠깐 몸을 흠칫 떨었지만, 곧바로 냉정을 되찾고 말을 이어갔다.
"말씀드렸다시피. 허나이 전 팀장과 관련해서 일어났었던 것 같은 일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확실하게 조치했으니."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재훈이 말한다.
"강 본부장 님은요."
"예?"
그렇게 말한 최재훈이 잠깐 동안 뜸을 들이더니,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인간이 그런 짓 하고 다니는 거. 모르셨나요? 허나이 윗사람들. 그러니까, 회사에서는 그 사람이 그러고 다니는 거 모르고 있었어요? 아니면-
알면서도 묵인했나.
답은 뻔했다.
일개 팀장인 허나이가 윗선에게 안 들키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강 본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에 대해 알고, 묵인할 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두둔했었다.
"아, 아니~ 당연히 몰랐죠!"
그런 그녀를 보고 최재훈이 피식 웃을 뿐이었다.
허나이는 썩은 뿌리를 가진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에 불과했다.
그걸 하나 쳐낸다 해서 본질이 변할 리는 없었다.
그렇기에 최재훈은 애당초, 리치TV에서 방송 생활을 이어나갈 생각이 없었다.
본질이 그대로인 이상, 제2의 허나이는 언제든지 나올 수 있었으니.
그렇다면 옐로TV는 어떤가.
이미 한 번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방송인을 내버렸던 판단을 한 플랫폼이 아닌가.
리치TV와 본질적으로 같다.
하지만, 옐로TV는 단순히 가지를 쳐낸 게 아니었다.
대표가 바뀌었다.
그러니까, 뿌리 자체를 갈아 엎은 것이다.
그 뿌리도, 여전히 썩은 뿌리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보다 더 끔찍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보다 나을 가능성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숨컷 씨, 보니까 이번 일로 저희한테 유감이 크신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중대사를 사적인 감정으로 결정합니까? 굳이 저희 리치TV 버리고 저런 미래도 없는 옐로TV에 가시다니요."
"글쎄요."
"예?"
"들어 보니까, 있던데요."
미래.
숨컷이 김 팀장에게 전해들은 바.
이번 멸망전으로, 옐로TV는 최소한 리치TV와 동등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
숨컷이 애초부터 리치TV에 남을 생각이 없으며, 그 생각을 바꿀 의사도 없다는 사실과.
옐로TV에게 더 좋은 조건을 받아내기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 강선하는 최재훈에게 거무칙칙한 감정
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감정적이게 되면 사태가 더욱 악화될 뿐이다.
그녀는 감정 낭비를 하는 대신에, 생산적인 사고를 했다.
그가 옐로TV에 이적을 결정한 시점에서, 어떻게 해야 리치TV에 올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나.
지금 당장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저희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만. 숨컷 님, 가능하다면 나중에 다시 또 업무와 관련해서 연락을 드려도 될는지요?"
'오.'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정석적으로 이성적인 대처라니.
당연히 감정적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최재훈은 눈앞의 여자가 괜히 본부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고갤 끄덕였다.
"귀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러면 이만-"
그녀는 도리어 처음보다 정중해진 자세로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떴다.
그렇게 자리엔 컷컷컷 크루와, 옐로TV 팀만이 남게 되었다.
짝짝짝짝짝.
"숨컷 선생님, 역시!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젠장~ 믿고 있었다고~"
페카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삼피 씨, 아니, 삼피 선생님. 저희 이제 식구네요?"
"뭐, 어쩌라고 그래서."
"어쩌긴요~ 좋다고요~ 포옹이나 한 번 할까요?"
"아, 제발. 꺼져."
"핰핰핰! 쑥스러워하신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지현 선생님!"
"예? 네?"
"셸 위 허그?"
"어… 어…."
페카가 미쳐 날뛰고 있는 와중.
김 팀장이 최재훈에게 말했다.
"숨컷 님."
"예?"
"그. 먼저, 본사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서로 이해가 일치한 건데, 감사까지야."
최재훈이 실실 웃었다.
여심을 뒤흔드는 미소였지만.
마찬가지로 이 모든 상황이 그가 의도한 결과라는 사실을 깨달은 김 팀장으로선, 그 미소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상황이 해결되자 그녀는 다시금 멸망전에 의식이 간다.
그녀가 담당하게 된 멸망전은.
무너트리고 처음부터 다시 쌓게 될 옐로TV라는 돌탑의 첫 돌이었다.
아주 사소한 문제가, 나중에 가서 어떻게 돌아올지 몰랐다.
아무리 완벽해도 부족했다.
옐로TV는 기존의 문제점들을 개선하고자 했다.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
다름 아닌 폐쇄적인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옐로TV안의 특이한 풍조 때문이었는데.
바로, 방송인들이 미튜브 채널을 개설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기묘하고 또 기묘한 풍조는, 옐로TV 개국 공신들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초창기 대표 PD들의 성향으로부터 비롯된다.
대표 PD들이 미튜브 채널을 개설하지 않으니.
'대표PD들도 개설을 안하는데 감히 니 따위가?'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그 누구도 미튜브 채널을 형성할 수 없었고.
어쩌다 보니 그게 암묵적인 규칙으로 굳어진 것이다.
미튜브는 인터넷 방송을 관통하는 가장 큰 물줄기였다.
그게 막혀 버리니, 고이고 썩을 수밖에.
옐로TV는 막힌 물줄기를 개통하는 게 최우선이라 판단했다.
하여.
이번 멸망전 참가 방송인 구성은 방송인으로서의 영향력도 영향력이지만.
미튜버로서의 영향력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현재 멸망전 참가 방송인 10명 중, 8명이 확정되었으며.
이들은 전부 최소 100만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대형 방송인이기 이전에 대형 미튜버였다.
그런데 이 사이에, 숨컷.
그를 필두로 한 컷컷컷 크루가 낀다면?
지금 그가 가진 파급력은 분명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착실하 쌓아 올린 게 아닌.
갑작스럽게 끓어오른 거품에 가까웠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러 멸망전이 개최될 때,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모른다.
충분할 정도로 커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미달될 정도로 작아져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미달될 정도로 작아져 있다면?
그는 참가자들 사이에서 붕 뜨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옐로TV의 일관성에 의문을 갖게 될 수도 있다.
리치TV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말이다.
이는 옐로TV도 옐로TV지만, 숨컷에게도 좋지 못했다.
그렇기에 김 팀장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를 멸망전에 참가시키는 것을 주저했다.
그를 설득했다.
위와 같은 이유로, 당신에게도 좋지 못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고.
그에 숨컷은 답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쩌냐고.
약 한 달 뒤 레오레 시즌이 종료되는 동시에 레전드 필드가 출시되고.
그로부터 이 주 뒤에 멸망전이 개최된다.
옐로TV는 그동안 주기적으로 참가 방송인들을 발표하여 관심을 집중시킬 생각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참가 방송인은, 대회 개최 직전에 발표하게 되는데-
"제 참가 발표를 마지막 차례까지 미뤄 두죠."
그리고 그때.
내가 참가 자격에 미달될 것 같으면, 박탈해도 좋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선언하는 그 모습에, 김 팀장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
그를 응원하고 싶었다.
그러니 이 일은 그에게 일임하기로 하고-
"숨컷 님?"
"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이적 발표를 언제 할 수 있을지 알 수 있을까요. 숨컷 님께서 해 주셔야 다음 계획으로 이행이 가능해서."
"아, 그럼 지금 이 참에 바로 발표할까요?"
"그래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여러분, 괜찮으시겠어요?"
"네! 준비됐어요!"
"맘대로 해."
"저도 준비 됐습니다~"
"…니는 왜요."
"핰핰핰, 그냥 그렇다고요~"
최재훈은 괜스레 그녀에게서 약간 떨어진 뒤-
"…후."
옛날 생각이 났다.
아니, 옛날도 아니다.
고작 며칠 전.
며칠 전에 그 난리를 피우며 옐로TV를 떠났는데, 다시 돌아가게 될 줄이야.
역시 사람 앞일 아무도 모른다.
'뭐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잘 될 것이라고.
최재훈은 새로운 스케치를 꺼내며,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나가야 할 지 정리한 뒤-방송을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