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대격변 4
[배고파]
[배고파]
[105파]
재은이였다.
[(사진)]
차 트렁크를 열고 오늘 도시락이 들어 있는 아이스박스를 노려보는 재은이의 모습이 사진에 담겨 있었다.
[최재훈 : 이걸 참네 장하다 사람 다 됐구나 동생아]
[최재은 : (강아지가 으르렁거리는 이모티콘)]
[최재훈 : 아닌가]
[최재은 : (강아지가 뼈다귀 가르키는 이모티콘)]
[최재훈 : 섭취를 허가-한다]
[최재은 : ㅗ]
[최재훈 : 왜 그래]
[최재은 : 따봉임]
[최재훈 : 오빠가 아는 따봉이랑 사용하는 손가락이 좀 다른 것 같은데]
[최재은 : (강아지가 삐딱한 표정으로 뒤집은 따봉을 하는 이모티콘)]
[최재훈 : 사춘기니]
말 나온 김에.
일행들에게 먼저 식사를 하라 권하기로 했다.
공 들여 만든 도시락.
재은이가 맛있게 먹는 것도 보고, 일행들한테 생색내며 칭찬도 듣고 싶었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일정이 너무 틀어졌다.
같이 식사를 할 시간이 없었다.
"삼피 씨. 가서 먼저 점심 드세요."
내 말 뜻을 이해한 제나가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삼피네 시청자 여러분들.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오야."
아까 자기랑 무관한 일인데 선뜻 나서주는 것도 그렇고.
쿨하게 떠나는 모습.
'아니, 너무 멋진데요?'
사람이 덕이 많고 이쁜 여동생까지 있으면 인복이 꼬이는 법인가보다.
다음은-
"지현 씨도요."
"아, 넵. 아, 그리고 숨컷 씨… 그… 다시 한번 정말로… 감사해요…."
[숨 오빠 감사합니다 ㅠㅠㅠ]
[우리 찐따련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오빠바께 업다...]
아직도 다 추슬러지지가 않았는지.
지현 씨는 격한 감정이 묻어나오는 촉촉한 눈과, 어딘가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헤헤 웃으며 채팅창을 보여주더니-
"그, 숨컷 씨… 저, 그…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부터 저도 같이…."
"네?"
"아,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팬미팅이시니까. 아, 으… 이따 봬요!"
기분 탓인지 절절하게 느껴지는 인사를 남긴 뒤 떠났다.
그렇게-
[근데 얘네 왤케 오랜만에 만나는 기분이냐]
"그러게."
헤어진 지 겨우 한 시간 안팎인 두 사람을 마치 2주 만에 다시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이린 씨 옆에 앉아 있는 둘에게 다가갔다.
* * *
"아이고, 일이 이상하게 꼬여서. 오래 기다리셨죠."
"아, 괜찮아, 괜찮아요. 오히려 그래서 더 재밌었으니까. 이야~ 상황 흘러가는 게 아주 롤러코스터 마냥-"
끝장을 내놓으셨네.
본인의 최상격 감탄사를 내뱉으며, 팔을 위아래로 꿀렁여 롤러코스터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그녀는 얼핏 봐도 상당히 들뜬 상태인 듯했다.
숨컷.
그가 이 난관을 어떻게 이끌어나갈지 궁금했고, 또 기대했다.
그리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최재훈의 몸을 흘낏거렸다.
넓은 어깨.
탄탄한 몸.
중성스러웠던 그의 모습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선명한 남성적인 매력.
그런데.
또 그와는 완벽하게 상반되는, 극단적으로 여성적인 분위기.
그 양쪽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성스럽다 볼 수 있지만, 확연히 달랐다.
그가 권지현을 도와주기 위해 신도와 김경훈, 그리고 허나이를 상대했을 때 보여줬던 그 씩씩한 모습.
그 모든 게 어우러져, 그녀의 안에서 숨컷 특유의 분위기가 완성됐다.
'아주 끝장나는구만.'
아무런 관심도, 생각도 없이 그저 흐름을 타서 이 자리에 참가하게 됐었던 차현하는.
어느새 그를 보며 눈을 다양한 의미로 반짝이고 있었다.
엄청난 경쟁률을 자랑했던 숨컷의 팬미팅 참가자에 알맞는 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김희은.
안 그래도 동경하는 방송인으로서 숨컷을 바라볼 때 눈에 열기가 담기던 그녀의 눈은.
훨씬 더 뜨거워져 있었다.
단순히 동경하는 방송인에게 향하기엔 과할 정도로.
"잘 해결돼서 진짜 다행임-니다!"
말할 때의 활기찬 정도 역시 과했다.
둘이 이번 팬미팅에서 차현하와 김희은이 아닌, TC1 SIGHT와 BAY MUGCUP으로서 맡은 바 임무.
팀을 대표해서 숨컷을에게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둘은 해당 일에 관하여 '받아들이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정도의 가벼운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를 보면, '받아들이면 좋고, 아니면 말고'하는 수준으로 끝날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자, 그럼 이동합시다."
"오우, 예~ 다음은 또 뭘로 끝장을 내놓으실까? 우린 또 기다리면서 뭘 구경하면 되나?"
"…흑흑, 난 쓰레기야."
"낄낄낄."
"전 뭘 해도 좋슴-니다!"
"역시, 우리 데스베이더 님밖에 없다."
최재훈이 '데스베이더'로 변장하고 있는 '페이스'의 지지에 신나서 다가가 하이파이브를 쳤다.
"예이~"
'그런데, 원래 이렇게 활기찬 사람이었나?'
최재훈은 데스베이더를 페이스라 여기고 있었고.
그가 아는 페이스는 좀 더 묵직하고 묵묵한 사람이었다.
'하긴, 뭐.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뭘 안다고.'
하지만 안다고 해 봐야, 결국 공식성상에서 보여주는 공적인 모습을 보았을 뿐.
이게 페이스의 평소 모습일지도 몰랐다.
최재훈은 새삼 또 흥분됐다.
그 페이스가 자신의 팬이라니.
"데스베이더 씨! 어서 갑시다!"
"알겠습-니다!"
"아니, 나는? 이거 진짜 편애하는 것 같은데?"
데스베이더를 대할 때 명백히 살가워지는 그의 반응에 차현하가 탈 안에서 입을 삐죽였다.
[아 ㅋㅋ 데스베이더가 급이 있지 포니쉑이 어딜 ㅋㅋ]
[ㄹㅇㅋㅋ 꼬우면 요다 가면 정돈 쓰고 오라고]
[데스베이더는 뭐고 요다는 뭐임?]
[아니 ㅋㅋ 아무리 마빡에 피가 안 말랐어도 그렇지 갤럭시 워즈를 모른다고?]
[네다틀]
[어디서 계속 딱딱 거리는 소리 안 들리냐?]
[딱 따다닥 딱딱 딱 딱딱딱 (틀딱어로 틀딱쉑이란 소리)]
[그래서 우디가는건데~]
"아 그래서, 저희가 지금부터 우디를 가느냐~ 저희가 또 레오레 상위 0.0000000000000000000-"
[적당히 해 ^^ㅣ발아]
"-000, 아니, 적당히 안 되지. 지금 우리 셋 실력이 어느 정돈데. 솔직히. 이대로 렐드컵 진출해서 우승도 가능할걸?"
"오, 좋지. 진짜 렐드컵 한 번 먹어볼까?"
"오… 저까지 자신감이 흘러넘친는 기분임다…."
"그러니까 다 같이 외칩시다. 상위 0.0000-"
"0000-"
"0000-"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정신나갈것같네]
[뇌절이 몸에 밴 사람]
"-0001! 퍼센트로서! 당연히, 그곳부터 들려야겠죠?"
그들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해명해!!!
-허나이 어딨어!!!
난리가 난 '리치TV' 부스를 지나쳐-
'그곳'에 도착했다.
바로 레오레 부스.
과연 국민 게임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SGF 최대 규모 부스임에도 발 디딜 곳 없이 사람으로 꽉꽉 들어 차 있었다.
바로 뒤에서 누가 빨개벗고 팝핀을 춰도 눈길 하나 안 줄 것 같은 북새통.
그런데 누군가가 ‘어? 숨컷?’이라 중얼거린 말이, 도미노처럼 그들 사이를 휩쓸기 시작하더니-
"어!"
"숨컷이다!!!"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 최재훈 일동을 에워싸려던 찰나였다.
"갈!"
최재훈이 일갈과 손짓으로 그들을 저지하곤 말한다.
"여러분! 저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은 익히 이해하는 바이지만? 전 지금 이 두 분이랑 오붓하게 팬미팅 중이니까, 좀, 어? 배려 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도 팬이에요!"
"아, 예~ 감사하고요~ 그러면 더 팬 초센 바이 마스터 숨컷 미팅이라 하겠습니다. 저한테 선택 받은 사람만 참가 가능함."
"아~~~"
"우~~~"
[조컷쉑 월클 다 됐누 ㄷㄷ]
[내 찬란한 커리어에 숨컷 원년 시청자라는 커리어가 한 줄 더 추가되는구나]
[출생까지 해서 총 두 줄인가요 그러면?]
어느새 레오레 부스는 숨컷 부스가 되어 있었다.
최재훈은 그 난리통을 능숙하게 제어하며 말했다.
"여러분, 지금 이 부스에서 저희 셋이 하기에 적당한 거 뭐 좀 있나요?"
"""네!!!"
""
"""저거요!!!"
""
신 캐릭터나, 특별 한정 게임 모드를 플레이 할 수 있는 체험관.
코스어와 같이 촬영을 하거나 그 동안 레오레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
그리고, 다양한 굿즈를 구매할 수 있는 스토어.
거의 테마파크를 방불케 하는 규모의 레오레 부스엔 다양한 '거리'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중에서도-
'도전! 챌린지'라는 이벤트를 추천했다.
어둠의 다크, 운명의 데스티니 같은 얼빠진 작명 센스에 안 어울리게, 레오레가 이번 부스에서 메인으로 미는 핵심 컨텐츠 같았다.
리치TV 부스에 들어서면 곧바로 나타나는 이벤트 진행 구역의 위치 선정이 그걸 방증했다.
이 무수한 인파는 그 이벤트를 구경하거나 참가하기 위해 모여 있는 이들이었다.
"이건 또 좋은 기회네요."
이린이 중얼거렸다.
확인한 바, 해당 이벤트는 레오레 공식 채널로 중계되는 중이었다.
SGF 때처럼, 많은 시청자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벤트의 개요는 간단했다.
1스테이지부터 3스테이지까지.
난이도 별로 준비되어 있는 팀들을 격파하는 것.
"아!!!"
그때.
3스테이지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한 도전자들이 좌절하자, 참가자들이 일제히 탄식을 흘렸다.
우승자가 탄생했을 경우.
우승자에게 개인적으로 상품이 지급되는 것과는 별개로, '레오레 유저 전원'에게 특별 상품이 지급되는데.
아직까지 성공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애초에 이벤트 자체가 우승자가 나올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어.
아직까지 도전 성공자가 나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단다.
그에.
게임, 특히 레오레와 관련해선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승부사인 최재훈 일동은 승부욕을 자극받았고.
해당 도전에 성공하면, 레오레 모든 유저에게 '특별 상품'을 자신의 이름으로 지급하는.
엄청난 홍보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
방송인 최재훈은 또 한 번 자극받았다.
셋은 주저 없이 참가를 결정했다.
이벤트는 총 세 가지 종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1:1 미드빵.
3:3 전설의 숲.
5:5 전설의 협곡.
"숨컷 씨! 저 아메리카TV에서 레오레 방송하는-"
"저 리치TV 마오과이 장인인데 저 모르시나요!? 저 잘할 자신 있는데!"
근처에 있던 몇몇 방송인들이 현재 가장 핫한 방송인인 숨컷에게 빨대를 꽂겠다는 일념 하에, 눈을 까뒤집으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최재훈은 지금 이 상황에서 굳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여가면서까지 5:5를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처연하게 빨대를 들고 굳어 버린 이들을 뒤로하고 일행과 함께 1스테이지가 진행되는 구역으로 향했다.
1스테이지는 도전이 간단한 만큼 많은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또, 그만큼 많은 수문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오늘 행사를 위해 모집된 플레이어, 혹은 방송인이었고.
평균 티어는 마스터~ 그랜드마스터에 해당했다.
최재훈은 일행과 함께 자리에 착석하곤, 컴퓨터에 방송을 연결시킨 뒤-
"저희, 3:3으로 도전할게요!"
3:3은, 레오레의 통상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맵인 전설의 협곡이 아닌.
3:3 전용 소규모 맵인 전설의 숲에서 진행된다.
전설의 숲은 일자 형태로, 상단 공격로와 하단 공격로가 사이에 정글을 끼고 있는 구조였다.
정글은 협소하고, 라인은 짧았다.
때문에 끊임없이 교전이 일어났으며.
전설의 협곡에 비해 게임의 호흡이 아주 짧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건 짧아도 너무 짧았다.
"아니…."
"뭔…."
숨컷에게 빨대를 꽂으려던 이들은 참가자에만 있지 않았다.
수문장들 대부분은, 레오레 방송인이었다.
이름을 알리기 위해 행사 참가에 지원한 방송인들.
그 중 몇몇은 숨컷이 참가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찾아가 그의 상대를 자처했다.
그녀들은 숨컷을 자세히는 몰랐지만.
그가 몇 안 되는 '챌린저' 남성 유저라는 걸 알았고.
그가 남성답지 않은 엄청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남자 아냐?'
"시청자 언니들, 숨컷 떴다는데. 제가 한 번 가서 참교육시켜 보겠습니다."
동행한 팀원이 이상한 탈을 쓰고 있어 더더욱 만만해 보였다.
그녀들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에게 승리를 거둬,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찬란한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남자 유저 원탑 숨컷? 그래도 결국엔 저 XX에겐 안 됩니다.'
그것도 꽤 구체적으로.
그녀들은 게임 시작도 전에 기대에 차 있었고.
그렇기에, 지금 반쯤 영혼이 나가서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단언컨대, 그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레오레를 하며 겪어 본 가장 철저한 패배이자.
가장 빠른 패배였으며-
솔로 랭크 1위 출신 숨컷.
세계에서 1위를 다투는 TC1의 주전 원딜러.
국내 3대 정글러 중 가장 높게 평가받는 정글러.
-가장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너무 잔인한데 ㄷㄷㄷ]
[조컷아 19금 마크 붙이자 정지당할라]
[매드무비가 아니라 호러 무비네 ㄷㄷ]
[점마 방송에서 숨컷 참교육 시킨다니 뭐니 지껄이더만 ㅋㅋ]
[주제도 모르는 마딱이 컷]
[마딱이? 도대체 점수가 어디길래?]
[어~ 나 숨컷 시청자야]
[ㄷㄷ 숨룡인]
평균 티어가 챌린저 상위권에 해당하는 2스테이지의 수문장들도.
1스테이지의 수문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숨컷을 무의식적으로 얕보았고.
그를 이용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자 했지만-
"3스테이지 도전할게요~"
오히려 그의 이름을 드높여 줄 뿐이었다.
[이건 뭐 고렙들이 쪼렙존가서 칼춤추는 것 같누]
파죽지세.
챌린저 상위권으로 구성된 2스테이지의 수문장마저 탱크로 밀듯 간단하게 뭉개버리는 비상식적인 전력에.
오늘 일로 그를 단순히 좀 잘생긴 스트리머로 알고 있었던 유입들이, 관객들이.
본격적으로 동요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