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가 게임을 잘함-185화 (185/361)

185. X신의 한 수

"미안해요. 기분 나쁘셨죠!?"

호들갑스러운 사과가 불쾌함을 더했다.

언제든지 '불쌍한 피해자'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던 신도의 표정과 감정선에 금이 갔다.

그는 아주 가까스로 싱긋 웃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아하하~ 그렇죠~ 그리고 저분은, 김경훈 씨!"

"어어? 김경훈 참가자는 아시네요?"

"숨컷 형처럼 게임 잘하시는 분이잖아요!"

숨컷'처럼'.

몇 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자신을, 막 한 달 된 숨컷의 하위호환인 양 지껄이는 말에.

김경훈은 이를 악물고 싱긋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여기까지! 철저하게 숨컷 바라기인 1번 방심, 함당 님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다음, 2번 방심인, 겜볼 님입니다!"

2번 방심, 겜볼.

3번 방심, 하뷸라.

스트리머인 두 여성 스트리머에게도 똑같은 질문이 오갔다.

참가자 중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느냐.

하뷸라는 빅가이즈 일원으로서 김경훈과 친분이 있다 했고.

겜볼은 아무런 친분도 없다 했다.

그에, 최재훈은 위화감을 느꼈다.

아까 분명.

겜볼과 신도 사이에 묘한 눈빛이 오간 걸 본 탓이다.

그래서인지 겜볼이 '크루'를 밝히는 것도 그렇게 느껴졌다.

'이것 봐라, 나는 신도랑 크루도 다른 철저히 무관한 사이다. 절대로 의심하지 마라.'

최재훈은 관객석 안에 있는 이린을 쳐다봤다.

노트북과 패드를 바쁘게 조작하고 있던 그녀와 최재훈의 시선이 마주쳤다.

최재훈이 무언으로 말했다.

신도.

겜볼.

알아듣기엔 다소 애로가 많은 메시지였으나.

이린 역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최재훈이 뭘 걱정하고, 견제하는지.

맥락 파악이 가능했고, 그의 메시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자 그러면! 세 방심 여러분. 지금부터 채팅창에서 질문과 요청을 골라서, 참가자 여러분께 전달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럼, 김경훈 참가자 님부터 차례대로 진행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먼저 김경훈 참가자에게 질문해 주세요."

해당 캐릭터의 코스프레를 한 이유는 무엇이냐.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무엇이냐.

그런 무난하고 정석적인 질문이 이어지고-

"자 그러면 다음, 신도 참가자!"

드디어.

신도가 고대하고 고대하던 시간이 왔다.

그런데도 신도의 기분은 영 석연찮았다.

그의 예상에 따르면 원래는 이 시점에서 이미 방송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형성되어 있었어야 했다.

사람들이 '그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진위여부를 둘러싼 논쟁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어야 했다.

그래서, 자신이 기름 한 방울만 보태면 폭발해, 숨컷과 권지현을 덮칠 상황이 되어 있어야 했다.

'저, 개놈….'

그런데 지금 분위기는 어떤가.

미적지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제가, 먼저 질문하겠습니다."

겜볼.

대외적으로는 철저한 '남'인 그녀가, 질문 혹은 요청을 선별하기 위해 채팅창을 살폈다.

살피는 척했다.

애당초 질문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기에.

"신도 님?"

"네?"

신도가 감정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 몇몇 시청자 분들이. 신도 님께서 왜 갑작스럽게 방송을 종료하신 건지 궁금해 하시더던데. 도대체 무슨 일이시죠?"

"아…."

신도가 당장이라도 스러질 것처럼 힘없이 미소 지었다.

잠깐의 뜸을 들인 뒤, 가까스로 입을 연다.

"그냥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때.

신도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흑…."

그렇게, 흐느끼는 소리가 되었다.

그의 표정이 찌푸려지고,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게 방울져서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어?

-뭐야?

-우는 거야?

[뭐야]

[얘 움?]

[갑자기 왜 이럼?]

[캐러비안베이 오픈하기엔 아직 날이 좀 추운데]

[하태하태]

[ㄷㅊ봐 ㅁㅊ년들아]

그에 동요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 죄송합니다. 이야기하기 곤란한 일이면 안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해 주세요. 저희가 같은 동료로서, 시청자로서 도와드릴 수도 있잖아요?"

그에 신도의 흐느끼는 소리가 더더욱 커졌다.

"흐윽흑, 흑…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해 주셔서…."

"…."

옆에서 그걸 꼴값 떤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최재훈이 신도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동물원의 입장료가 얼마 게?"

"…?"

"4820원."

"…크흑!"

시간차를 두고 터져 버린 신도.

그는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으흐흐흑, 큭, 크흐흐흑…."

더욱 거세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최재훈이 혀를 쯧쯧 차며 속삭였다.

"애쓴다, 애 써."

신도는 아랑곳 않고 연기를 이어갔다.

"사실, 가,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져 가지고…."

"왜 기분이 이상해졌나요"

"그… 권지현 씨가 숨컷 씨랑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봤더니…."

"그 모습이… 어땠길래요?""

신도와 그의 팬들을 비웃던 시청자들이, 그와 겜볼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겜볼의 더는 없을 정도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는 모습과, 눈물로 호소하는 신도의 모습에서 진실성이 느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흥미진진했기 때문이다.

공식성상에서 울며 다른 스트리머를 고발하려는 남성 스트리머.

이보다 더 재밌으려면 유명인들끼리 머리채 잡고 싸우는 정돈 돼야 했다.

신도는 잠깐의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사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예전에, 지현 씨랑 저랑 이성 관계로 문제가 좀 있었어요.

저는 이걸 단순히 지현 씨가 술에 취해서 저한테 실수를 했다고만 말씀드렸는데. 오늘, 자세하게 이야기를 드려볼까해요."

그가 심호흡을 하곤 말을 이어나간다.

"당시, 저는 막 신입이면 지현 씨를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에 크루에 영입해서 여러 가지로 도와드렸어요. 그런데, 지현 씨가 그거 때문에 착각을 한 것 같더라고요… 제가 지현 씨를 좋아하는 줄 알고… 그래서 어느 날, 저한테 고백을 하더라고요.

저는 깜짝 놀라서 대답을 보류했는데. 지현 씨가 먼저 마음 있는 것처럼 굴어 놓고 갖고 노는 거냐고… 자기 가지고 장난치면 크루를 나가서 소문을 내겠다 하더라고요."

신도가 사건을 뒤집어서 서술했다.

권지현으로선 복장이 뒤집어질 일이었지만, 그녀는 의외로 태연했다.

그저 딱하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저는 지현 씨가 걱정돼서 잘 타이르고 설득해 보려고 그날, 저녁 식사를 권했죠. 그렇게 같이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지현 씨가 점점 취해서는 저한테…."

그가 말을 잇다 말고 감정과 호흡을 추슬렀다.

"괜찮으세요?"

겜볼이 묻자 그는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한테 계속 스킨십을 하려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취한 것 같다고 보내드릴려 했는데, 가는 길에 거길… 들렸다 가자 하시더라고요. 이번에도 저는 당황해서 거절했고, 그랬더니 지현 씨가… 반쯤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해서… 도망치듯 겨우 빠져 나왔어요… 그리고 무서워서 저도 모르게 집에 돌아와서 방송을 켜고 시청자 분들한테 말했고요…."

-우!!!!!

슬슬 객석과 채팅창에서 야유와 비난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일단, 관객과 시청자 대부분이 여성인 이상, 남자인 신도가 즙을 짜며 감정에 호소하는 시점에서 반은 먹혀 들어갔고.

시청자들 전부가 숨컷에게 빠져 있던 거지.

권지현에게 빠져 있던 건 아니었기에.

성추행이라는 민감한 문제에서 여성인 권지현이 아닌 남성인 신도의 손을 들어 줄 이유는 충분했다.

[와 ㄹㅇ 사람 그렇게 안 보였는데]

[저런 새기들이 실제론 더하잖아 ㅋㅋ]

[근데 저런 새끼가 어떻게 아직까지 매장 안 당하고 방송하고 있는 거임?]

권지현이 자신의 시청자들만을 데리고 쥐죽은 듯 조용한 방송생활을 이어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권지현도 신도도 사건을 키우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도는 켕기는 게 너무 많았고.

권지현은 맞서기엔 너무 약했고, 이미 많이 지치고 다쳐서 용기가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

신도는 눈에 뵈는 게 없고, 권지현에겐 용기가 생겼다.

"저는 그 이후로 여성분들 대하기가 힘들어졌는데… 저분은 저렇게 잘 하는 거 보니까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져 가지고…."

일장연기를 끝낸 그가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에, 겜볼은 마치 고해성사라도 듣는 목사라도 되는 양 경건하게 고갤 끄덕였다.

"남에게 털어놓기 힘드셨을 텐데, 그걸 저희에게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내요!!!

-신도 화이팅!!!

[이제 그만 뚝]

[딱]

[뚝]

[아니 병신들아 좀]

[분위기좀 읽어;]

현장에도, 방송에도.

신도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적잖은 이들이 신도의 편으로 돌아선 것도 있지만.

그의 크루원들이 지원사격에 나선 게 컸다.

그새 시청자가 수만 명이나 늘어나 있었다.

대부분, 김경훈의 크루에 속한 다른 방송인이 보낸 시청자였다.

-우리는 항상 신도 씨 편이에요!!!!!!!!!!

주변에서 방송을 진행 중이던 크루원들이 찾아와 신도를 응원했다.

[그럼 권지현이랑 어울리는 숨컷은 뭐임?]

[숨컷은 신입이라 모르는 거 아냐?]

그렇게, 슬슬 숨컷에게 불똥이 튀기 시작하자, 권지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젠 제가 발언하겠습니다."

이젠 모든 걸 끝내야 할 때였다.

그때-

"아, 차례 기다리세요!"

겜볼이 강압적으로 권지현의 발언을 막아섰다.

"…차례요?"

"아직, 신도 씨에게 질문 두 개 남았습니다. 하뷸라 님? 함당 님?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두 분 대신 질문권을 행사해도 될까요?"

하뷸라가 마치 미리 합이라도 맞춘 듯 곧바로 고갤 끄덕였다.

그에, 함당 또한 분위기에 이끌려 고갤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 여러분. 신도 씨에게 뭐가 궁금하신가요?"

이미 코스프레 대회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된 상황.

"시발, 이게 당최 무슨…."

최 팀장이 얼이 빠져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누가 남자가 울면서 감정에 호소하는 상황을 이성으로 막아설 수 있을까.

겜볼의 독주가 이어졌다.

"신도 씨, 어떤 시청자가 질문하길, 숨컷 님과 권지현 씨가 각자 어떻게 해 주셨으면 하는지 궁금하다네요."

"권지현 씨는 인정하고 사과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신도가 분위기를 살피더니-

"그리고 숨컷 씨도 마찬가지로, 인정하고 사과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네? 권지현 씨는 그렇다 치고, 숨컷 님은 뭐에 대한 인정과 사과죠?"

"…사실, 방금 전 숨컷 씨와 만나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그래서 숨컷 씨에게 옛날 권지현이 한 일에 대해 알고 있냐 물어봤죠."

"숨컷 씨는 뭐라고 대답하셨죠?"

"안다, 고 답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알면서도 그분과 같이 행동하는 거냐고 여쭤봤더니…."

한숨을 내신 뒤, 힘겹게 입을 연다.

"갑자기 협박을 하시더라고요. 한 시간 내로 지현 씨랑 있었던 일 거짓말이었다고 정정하라고. 안 하면… 제 방송을 망치신다고…."

-...?

-뭐라고?

[오반데]

[숨컷이 그랬다고?]

하지만.

숨컷의 입지는 신도의 판단- 아니, 바람보다 두터웠다.

권지현을 상대로는 도저히 꺾이지 않을 것만 같은 그의 기세가 덜렁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신도의 노림수는 자충수가 되어 그의 목을 옥죄었다.

-숨컷이 뭐하러…?

-그니까, 뭐가 아쉬워서

[님들 저 말 진짜임 저도 거기에 있었음 참고로 피카츄랑 워그레이몬도 있었음]

[야 이거 설마 ㅋㅋ 숨컷 견제한다는 스트리머 얘 아님?]

[어? ㅋㅋㅋㅋ]

[야리적 코심ON]

'…안돼.'

신도는 초조해졌다.

앞으로 한 발짝.

한 발짝이면, 저 꼴같잖은 연놈들 자신의 손으로 다 끝장을 낼 수 있는데.

신도는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날, 술에 취한 상태에서 권지현에게 차였을 때처럼.

그렇기에, 그때처럼 또다시 충동에 몸을 맡긴다.

"경훈 씨!"

"…?"

"그 자리에 경훈 씨도 같이 있었어요!"

심각한 표정.

허나, 내심 아주 흡족해하며 상황을 지켜보던 김경훈의 입이 떡하고 벌어진다.

눈이 먼 신도.

그가 기어코, 당장 폭탄이 떨어져 초토화가 돼도 이상하지 않을 최전방에 후방에서 안전하게 버티고 있던 김경훈을 끌고 온 것이다.

'이런, 병신 같은 놈이….'

자신의 적을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신의 미래와 김경훈을 기꺼이 바친 것이다.

"…오."

도대체 '저걸' 어떻게 전방으로 끌어내나 골머리를 앓고 있던 그가, 김경훈과 눈이 마주쳤다.

신도의 패악질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져, 입꼬리가 올라갔다.

김경훈이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본성을.

아주 깊은 빡침을 드러냈다.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림으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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