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화. 가능?
"무슨 일 생기면 제가 다 책임질 테니까, 그냥 확인하죠."
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 참나."
석훈이는 그게 못마땅한가보다.
그래.
자기가 이 병신 같은 상황의 주인공이 아닌 싸구려 악역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 그때는 더 존나 못마땅할 텐데.
미리 그 못마땅함이라는 감정에 조금이라도 익숙해지는 게 석훈이한테도 좋을 것이다. 일종의 예방접종 같은 거지.
"어… 아, 여기다."
화면 속, 라면을 든 내가 자리에 앉아 있는 석훈이 옆에 섰다.
"크, 안전 거리 확보 기가 맥히다. 그쵸 여러분?"
"아, 네."
"네네."
"지랄."
"아니 석훈아, 말 좀… 하, 됐다."
화면속 최재훈의 입이 움직였다.
"지금 보면 입 움직이면서 석훈 씨 불렀는데, 소리 너무 크게 해 놔서 대답 없으신 거, 보셨죠?"
"시끄러우니까 아가리 좀 닥치지?"
"청각이 그렇게 예민하신 분이 저땐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뭐 이런 씨-"
"여기!"
화면 속 석훈이가 몸을 여자 쪽으로 확 돌렸다.
그러자 의자가 따라서 돌아갔다.
그리고 석훈이가 몸을 벌떡 일으키자?
의자가 있는 힘껏 밀려났다.
뒤에서 안전 거리를 확보한 채 그대로 서 있던 내게.
그 뒤론 모두가 아는 전개였다.
뺌!
라면이 그냥 무대를 뒤집어 놓으신 거다.
겸사겸사 우리 석훈이 속도 뒤집어 놓고.
"하, 씨…."
석훈이 여친 되시는 분의 속도 뒤집혔나보네.
라면, 이런 죄 많은 면 같으니.
"뭐, 이렇게 된 겁니다."
의도한 건 아닌데, 내 목소리는 대놓고 우쭐거리고 있었다.
표정까지.
석훈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 기대되고 설레서.
'석훈아?'
나를 쳐다본다.
꼭지가 돌아도 상당히 돌아 버린 얼굴이다.
또 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
"쪼개?"
내가 웃었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나 무시해?"
내가 무시했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시발!"
그냥 내 표정이 문젠가보네.
석훈이가 악셀을 밟았다.
오른손을 최대한 젖히더니, 내 뺨을 향해 휘두른다.
'오소이.'
나는 의식할 것도 없이 몸을 가볍게 뒤로 젖혀 피했다.
오~~~~~
또 다시 감탄사가 들려왔다.
이번 걸로, [얘가 진짜 진짜 '남자'긴 '남자'구나]하고 확실히 느꼈다.
주먹이 아닌 손바닥을 날리는 것도 그렇고.
힘이 너무 약해서, 그리고 허리를 전혀 안 써서 속도가 너무 느린 것도 그렇고.
살면서 누군가를 제대로 때려 보긴 커녕, 몸 한 번 제대로 써 본 적 없어 보였다.
"피해?!!?"
석훈이가 한껏 격앙된 얼굴로 따졌다.
아니, 그럼 맞아?!!?
당연히 피해야지.
이걸 괘씸하게 느끼는 거면, 그건 너무 공감 능력 결여된 이기적 사고방식이 아닐까 싶다, 석훈아.
그리고-
"제가 피했기에 망정이지, 석훈 씨 폭행범 될 뻔한 거예요."
말 그대로, 석훈이는 자신이 이성을 잃은 결과에 내가 피해를 입지 않은 걸 존나 고마워 해야 한다. 사람 이렇게 많은데 내 뺨을 풀 파워로 날려 버리면, 진짜 그건 국물도 없는 거다.
견찰서 가고 시퍼?
"내 이름 부르지 마 X같은 새끼야!"
말 하는 기세 때문에 또 한 번 싸닥션이 날아오는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흐어어엉!!!"
갑자기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하는 우리의 석훈씨.
시발세상에나.
저 경이로운 행동 체계는 또 뭔가.
라면 엎고, 난장판 만들고, 깽판 치고, 욕하고, 때리고.
그렇게 과정을 쌓고 결국 한다는 게 존나 울기라니.
나는 시발 저 행동 체계를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석훈이랑은 더이상 대화가 안 될 것 같아서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심정, 존나 이해합니다.
"그, 손님?"
"아, 에. 그. 죄송하게 됐습니다."
내가 부르자 우리 알바단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리곤 앉아 있는 석훈이의 팔을 흔든다.
"마, 니도 빨리 일어나서 사과해라!"
"아허어헝헝!! 내가 왜 사과해야하는데에에!!!!"
"아 씨, 진짜. 석훈아. 누나 좀 살려 줘라 진짜. 누나 지금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으니까 얼릉! 일어나서 제대로 사과드려라!"
"어허헝… 미안… 훌쩍, 합니다… 크흥."
진짜 존나 서럽게도 우는구나, 석훈아.
네가 나에게 한 그 못된 행동을 모두 까먹고 심지어 미안하다고 느낄 정도야.
그래. 이 정도면 교훈을 얻었겠지.
나는 이 쯤에서 석훈이를 용서해 주기로 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석훈이와 눈높이를 맞춘 뒤 휴지를 건넸다.
휴지와 날 번갈아 쳐다보더 석훈이는 결국 그걸 받아 눈물을 닦았다.
다음은 일어나서 석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순수히 내 손을 잡고 일어서는 석훈이.
아이고 착해.
우리 석훈이 이것봐, 얼마나 착해.
우리 착한 석훈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크흥, 미, 미안합니당, 훌쩍."
멀쩡하게 잘 생긴 사내 새끼가 여성스럽게 우는 모습은 역시 징그러웠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혐오감을 느낄 정돈 아니었다. 이렇게 서서히 익숙해져 가는구나. 시발.
나는 인자하게 웃으며 석훈이의 팔뚝을 두드렸다.
"저는 괜찮으니까, 갑시다."
"크흥, 가다니… 어, 어, 어, 어딜요?"
"저기-"
나는 저기- 를 가르켰다.
석훈이의 시선이 내 손가락을 따라왔다.
저기-는 다름 아닌, 라면 개지랄판이 난 석훈이의 자리였다.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우리 같이 힘내죠."
"어어허어어엉!!!!"
어허 석훈아.
이 십새끼.
울면서 어물쩡 넘어갈 생각일랑 말아라.
디지는 수가 있어 진짜
"아, 맞다. 그 라면 국물 들어간 키보드는 어떡하죠?"
내가 묻자 고개를 가로젓는 하은 씨.
아.
삼가 키보드의 명복을 빕니다.
다음 생엔 FACE의 키보드로 태어나시길.
"하으, 씨…."
그때, 여자가 영혼이 담긴 한숨을 내쉬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지갑이었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는가 싶더니, 결국 노란색 지폐 네 장을 꺼낸다.
"이걸로 좀, 안 되겠습니까?"
그걸 그대로 나한테 건넨다.
세상에, 갑자기 뭐 하나 싶더니.
진짜 나 같으면 석훈이 존나 버리고 그냥 런했을 텐데, 이 여성 분은 의외로 로맨틱 가이- 아니, 로맨틱 걸이었던 것이다.
'남자'가 아닌 남자로서 반했습니다, 행님. 그렇게 불러도 되죠?
나는 하은 씨를 쳐다봤다.
"어 키보드 기종이… 잠시만요-"
좌석으로 간 하은씨가 핸드폰과 키보드를 번갈아 보는 일련의 과정을 수차례 반복한 뒤, 다시 우리 쪽을 쳐다봤다.
끄덕끄덕.
오케이 싸인이 나왔다.
"훌쩍, 훌쩍. 크흥."
"마, 그만 좀 뚝 해라. 하, 진짜. 이 머스마야. 내가 니를 어떻게 하냐 도대체."
그렇게 우리 석훈 커플은 피시방 문 너머로 사라졌다.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둘이 가 버리니까, 꽉 찬 피씨방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반대로, 내 손은 가득 차 있었다.
찬란한 황금빛 지폐 네 장으로.
최재훈2가 거의 27년을 저축해야 모을 수 있는, 존나 엄청난 거금이었다.
* * *
내 손에 들린, 보기만 해도 사람 기분 좋게 만드는 종이 네 장.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키보드값 빼고… 잠깐.'
생각해 보니까 방금 사건이 일어나고 지금까지, 사실상 PC방 업무가 마비됐던 거 아닌가?
일주일 중에서 가장 바쁜 날의, 가장 바쁜 시간대에?
'세상에.'
이번에야말로 사장님을 울리고 40대 중년의 눈물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중년 가장의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
손실을 메꿀 수 있을까.
'아.'
정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내 손에.
애초에 이건 내 돈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 손에 있어서 그렇게 느꼈을 뿐.
나는 머릿속에 그려 두었던 꽁돈과의 신혼여행 계획을 무산시켰다.
이제는 그녀를 보내줄 시간이다.
시발.
사랑했다.
"은아 씨."
"네?"
"그, 키보드값이 어떻게 됐죠?"
"아, 4만…."
핸드폰을 힐끗.
"9천 원이요. 4만 9천 원."
키보드값을 제해도 한참이나 남는다.
15만 원 정도면 방금까지 발생한 매출 손실은 충분히 메꿀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 생각을 두 사람에게 말했다.
"예, 아무래도… 그게 맞을 것 같아요."
"저도요."
오케이.
이쪽 문제는 해결됐고-
'이제 저거만 정리하면 하면 되네.'
"하."
기억에 남아 있는 16번 좌석의 참상을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 벌여놓고 빤스런하는 병신들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청소 도구를 챙기려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아까부터 따갑도록 느껴지는 시선에 좌석 쪽을 쳐다봤다.
"…."
손님들이 죄다 두더지처럼 칸막이 위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여길 보는 중이었다.
'뾰, 뿅망치 으딨어.'
두더지 잡기가 존나 마려운 광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소란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그 욕구를 간신히 억제하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바로 밀린 주문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하은 씨와 슬아 씨가 같이 고개를 숙이며 거들어주었다.
그제서야 다시 굴로 들어가는 두더지들.
청소 도구를 들고 석훈이가 떠난 빈자리로 향했다.
"하…."
기억에 남아 있는 16번 좌석의 참상을 실제로 생생하게 목격하자, 한숨도 존나 생생하게 나왔다. 너무 생생해서, 이 한숨을 들은 사람들은 내 마음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고무장갑을 끼고,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는 면발들을 집어 들었다.
툭.
불대로 불었는지, 면발이 탄력 없이 끊어져 떨어졌다.
그걸 다시 집어 들었다.
툭.
툭.
면발이고 시발이고 다 그냥 무참히 파괴하고 싶은 충동과 진정하라는 이성이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도와드릴까요?"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뒤돌아 확인해 보니, 딱 봐도 인싸 같아 보이는 여자가 의자를 내 쪽으로 돌려 날 쳐다보고 있었다.
"존나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지만-
'나는 알바고, 너는 손님이야.'
내가 이 여자를 도와주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그 반대는 있을 수 없다.
내 고결한 의무감이 나를 몰아세울 것이다.
물론 석훈이 십새끼가 돌아와서 도와준다고 하면 기꺼이 받아들일 의향이 있었다.
오히려 머리끄덩이 잡고 다시 데려와서 이 시발 것들을 치우라고 시키고 싶을 정도다.
20만 원이 주는 달콤함이 사라지자, 석훈이 십새끼가 준 쓴맛만이 남았다.
"괜찮습니다."
"아, 넵."
-크크큭, 병신. 니 안 된다니까.
-아, X까.
순수히 의자를 돌린 여자가 옆의 친구와 작게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
묘한 기분을 느끼며 청소를 재개했다.
그리고 잠시 뒤.
"저기요?"
테이블 청소를 끝내고 대걸레질을 하는데, 또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또 상당히 인싸 같아 보이는 여자였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이거 드시고 힘내세요."
여자가 건넨 '이거'는 캔 커피였다.
우리의 익숙한 친구, 레츠비가 아닌 프리미엄 캔 커피.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어… 그… 화이팅!"
어색하게 웃은 여자가 잰걸음으로 피씨방을 나섰다.
"응?"
지금 보니, 캔커피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열 한 자리의 숫자가 적혀 있는 포스트잇이.
그게 핸드폰 번호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고민해 볼 것도 없이, 정황상 바로 핸드폰 번호라고 알아보는 게 정상이지만 아무래도 이런 상황이 처음이다 보니까.
포스트잇을 보며 세 가지 생각이 들었다.
1. 우리 PC방 카운터에 포스트잇이랑 펜이 구비돼 있던가?
2. 아니면 저런 인싸는 이런 상황을 상정해서 그 두 가지를 상비해서 다니는 건가?
3. 와 시발, 끝에 네 자리가 1892네
"…."
또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포스트잇을 후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걸레질을 재개했다.
그리고 또 잠시 뒤.
청소를 끝내고 다시 복귀해서 서빙을 하는 중이었다.
"아, 한 잔만 주시면 돼요."
"네?"
"나머지 하난 그쪽 드세요."
"제가요?"
주문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서빙했는데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역시 또 미인이었다.
"아까 그 진상 손님이요. 힘드셨을 텐데, 그거 드시고 힘내시라고요."
그때,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최재훈(22세/악마/초4때 여자애 먼저 괴롭히다가 싸움 났는데 발리기까지 함)이 말했다.
[왜 다 커피로 주는 거지? 돈으로 주면 더 존나 힘날 텐데.]
"아… 네, 감사합니다."
불순한 생각을 밀어두고 감사한 마음으로 커피를 받았는데, 여자의 용무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나 보다.
"아까, 대처 엄청 잘 하시던데. 그런 상황에 익숙하신가 봐요?"
"요즘 PC방 알바는 거의 뭐 극한직업이라던데, 진짜 그래요?"
"힘드시진 않아요?"
"학생이세요?"
"아, 뭐 전공하시나요?"
명확히 대화를 이어나갈 의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여자.
'하, 씨. 서빙 아직 많이 밀렸는데.'
"아, 바쁘실 텐데 제가 붙잡아 뒀네요. 죄송해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다 보니 설렁설렁 대답해 버렸는데, 다행히도 눈치껏 마침표를 찍어준다.
"그, 이거-"
여자가 명함을 건넸다.
이름과 핸드폰 번호만 적혀 있는 게 허술해 보였지만, 고급스러운 디자인이 그 허술함마저도 고급스럽게 느껴지게 만드는 명함이었다.
"좋은 식당 아는데-"
여자가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었다.
눈에 성적인 어필이 담겨 있었다.
노골적으로 날 유혹하는 눈치다.
"…."
그런데도 놀라우리만큼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부터 그렇다.
초면인 여자들이, 그것도 상당히 매력적인 여자들이 노골적으로 호감을 표해 왔지만, 나는 놀라울 정도로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같은 경우에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분이 이상할 정도였다.
'이상해?'
어떻게 이상하지?
눈앞의 여자를 쳐다봤다.
강렬한 색채의 입술과 진한 아이라인.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한 화장을 무난하게 소화하는 엄청난 자신감.
노출이 없는 복장인데도 자극적이게 느껴지는 육감적 몸매.
그 누가 봐도 논란의 여지가 없을, 막말로, 남자 눈 돌아가게 하는 섹시한 미녀였다.
원래 같았으면 나랑 접점도 없었을 그런 여자가 내게 노골적으로 섹스 어필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느꼈다.
기분이….
그래.
나쁘다고.
그러니까, 불쾌하다고.
어째서?
내가 여자한테 익숙하지 않은 찐따 새끼라서?
그렇다면 불쾌함이 아니라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뭘까?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여자가 쐐기를 박듯 그윽한 눈길을 향해 왔다.
"관심 있으면 연락 주세요."
'아.'
이번 걸로 감을 잡았다.
아니, 확실히 깨달았다.
사람은 이성을 유혹할 때 필연적으로 자신의 성적인 정체성을 드러낸다.
눈빛.
말투.
표정.
분위기로.
나는 그것들로 여자들의 안에 있던 '여자'를, 그러니까 남자를 느껴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저 안에 남자가 들어 있다 생각하니 이도 저도 아니게 보이고,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 것이고.
이 여자가 기분 나쁜 이유는?
노골적으로 섹스 어필을 하는 분위기가 너무 남성스러워서, 그 이도 저도 아니게 보이는 정도를 넘어 도달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남자로 보이는 수준에.
자연스레 여자의 남자 버전 모습이 머리에 그려졌다.
그 모습이 고장 난 티비의 화면처럼, 간혈적으로 여자의 모습 위에 겹쳐졌다.
'관심 있으면 연락 주세요.'
어느새 눈에는 남자의 끈적거리는 시선이.
귀에는 남자의 달뜬 목소리가 엉겨 붙어 있었다.
'으으으으….'
아랫마을 거주자이신 Mr. 존슨(22세/남성/아침에 강함)께서 단호하게 선언하셨다.
[Impossible]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걸 더 이상은 막지 못할 것 같아서, 나는 마지막 힘을 짜 내 싱긋하고 웃어준 뒤 다급히 몸을 돌렸다.
"어, 그게 뭐예요?"
카운터로 돌아가자 슬아 씨가 내 손에 들린 명함을 보고 말했다.
"아, 이거."
명함을 뒷주머니에 꾸기듯이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아무렇게나 처박아 둔 폰 번호가 두 자릿수를 넘기 직전.
교대가 도착했다.
오후 5시.
인수인계를 마치고, 내가 왔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붐비는 피씨방을 뒤로 하고 건물을 나섰다.
겨울이라 그런지, 밖은 벌써 어스름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불러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