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개판 일보 직전
어깨에 느껴지는 최재훈의 손바닥.
남자의 손들은 원래 이랬었나 싶었을 정도로 듬직해서, 크게 느껴졌다.
다른 남자들에 비해 샴푸 향기가 희미한 특유의 체취가 오늘따라 강렬하게 느껴져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제나는 지금 마치 그에게 잡아먹히고 있는 듯한-
아래에 깔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남자'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
'여성'으로서 꽤나 굴욕적인 기분이었다.
하지만-
"…."
자신을 내리까는 게 눈앞의 남자라면-
'아니, 뭔-'
그녀는 거기에서 사고를 끊어냈다.
그에게서 뒷걸음질 침으로써.
최재훈은 그런 그녀를 보며 다만 씨익 웃을 뿐이었다.
제나의 굴욕감이 더욱 커졌다.
"아무튼, 어때? 코스프레."
"…뭔 말이 듣고 싶은 건데."
"뭔 말이 듣고 싶긴, 당연히 솔직한 의견이지."
"…."
제나는 다시 한번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방금 전에는 곧바로 '별로'라는 평가가 나왔었다.
상상 속 아란의 복장을 한 그와, 그러니까 남성적인 모습을 한 그와 비교하고.
그런데 지금.
저것도, 저런 분위기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 생각하는 그녀가 있었다.
"가발이랑 속눈썹은 빼고."
"어?"
"없는 게 차라리 나아."
제나가 툭 내뱉곤 고개를 돌렸다.
그녀 스스로는 모르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은 꽤 상기되어 있었다.
수치심, 아니면 별개의 감정.
뭐가 원인인지는 그녀만이 알 뿐이었다.
"가발이랑 속눈썹이 없는 게 차라리 낫다고?"
처음으로 상세한 충고다운 충고가 나왔다.
"오케이, 참고해둘게. 땡큐. 아, 맞다. 제나 씨."
"뭐."
그가 시큰둥하게 흘겨보는 제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애즈리얼.
자유로운 성향을 가진 모험가 캐릭터였다.
제나와 잘 안 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잘 어울렸다.
특히 외양적인 부분이.
애즈리얼은 금발 벽안 캐릭터였다.
한국인은 소화하기 힘든 그 특징을, 제나는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애즈리얼은 바지를 입지만, '애즈리얼'은 치마를 입는다.
처음 보는 제나의 치마 차림.
최재훈이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야, 잘 어울리네. 귀여운데?'
"…."
귀엽다니.
여자에게 칭찬으로 하기엔 과연 어떨까 싶은 말이었다.
특히 제나 같은 여자에겐 더더욱.
제나가 팍 인상을 썼다.
하지만 내심으론, 뭔가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그녀였다.
"아, 맞다. 그런데 그, 개발자 분들은 어쩌고?"
최재훈은 그녀에게 영세 게임 개발자들을 맡겼었다.
"생각보다 홍보가 잘 됐는지, 하다 보니까 애들 몰려오기 시작하더라고. 그래서 쫑하고 각자 부스 챙기러 가라고 했지."
"오~ 크~ 보셨습니까? 이 몸의 영향력."
"참나. 어쨌든, 야-"
제나가 그에게 명함 다발을 건넸다.
"필요한 일 있거나 원할 때 언제든지 연락하랜다. 그리고, 상의할 게 좀 있다던데."
"하의는 없대?"
"켄유플리즈쎳더뻑업?"
"그 얼굴로 하기엔 너무 근본 없는 영어 아니냐."
"당연히 컨셉이지, 왓어 덤브."
"골 때리네."
"어쨌거나. 오늘 니가 했었던 그, 개발자들끼리 게임 리뷰하는 컨텐츠. 그거 저작권 사고 싶다던데, 한 번 연락해 봐."
"아니, 뭔 저작권이고 그걸 또 산대. 별것도 아닌데. 그냥 마음대로 하지."
"꼬라지 보면 간이고 쓸개고 다 니한테 내주고 싶어하는 것 같더만. 고맙다고."
"크… 니 친구가 이런 사람이야. 게임 업계를 막 좌지우지하고. 자랑스럽지 않니?"
"친구?"
"아니, 뭐지 그 반응은. 학창시절의 PTSD가 떠오르려 하는데. 미안해. 아는 애라고 할까 그냥?"
"아니, 뭐…."
친구.
당연히 좋다.
그런데, 최재훈과 자신의 관계를 그렇게 정의 짓자니.
왠지 모를 짜증이 느껴졌다.
"아, 내 정신 좀 봐. 대기표도 안 받고 이러고 있었네."
"하, 나랑 있으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겠냐?"
"그러게."
"…."
"뭐야, 지가 이야기 꺼내놓고 쪽팔려 하냐, 얘는."
"됐고, 빨랑 꺼져. 슬슬 방송해야 하니까."
"아, 오케이. 이따 씨유어게인 합니다."
최재훈이 주먹을 내밀었다.
"…."
제나가 질색하며 표정을 와락 구렸다.
그러면서도 결국 주먹을 맞추곤-
"됐지, 빨리 꺼져!"
최재훈은 괜히 신경질을 내는 제나를 뒤로하고 접수대로 향했다.
거기에서 대기표와 대회의 팜플렛을 받은 뒤, 마이크를 켜고 말햇다.
"자, 대기표 받았습니다. 이제 구석에 짱박혀서 엠바고 걸린 월클의 기분을 만끽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이크ON]
[왜이리 늦었어 십련아]
[아니 이 집 방솜 좀 막하네 ㅇㅇ;]
[야이~ㅎㅎㅎ 그래서 방송 안볼거야?]
[대기 몇 분이냐?]
"3번 팀이라네요."
말이 팀이지.
실상은 동시에 한 무대에서 심사를 받을 뿐인 개개인의 묶음에 불과했다.
최재훈은 대기하며 코스프레 대회의 룰을 재확인했다.
사실, 룰이랄 것도 없었다.
무대에 오르고, 차례에 따라 코스프레 한 모습을 어필한다.
다음은 심사가 진행되는데.
일단, 시청자들의 투표로 한 번 진행된다.
점수는 투표 수가 아닌, 투표 순위에 따라 차등으로 부여된다.
그 다음은, 도대체 왜 있는 건지 모를 스트리머들의 심사가 있다.
아마도 대회의 볼륨을 살리기 위한 요소겠지.
마지막으로, 가장 비중이 높은 심사위원들의 심사.
그렇게 점수를 집계해서, 점수가 가장 높은 세 명을 가려내는 식이다.
심사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이해도'와 '재해석'이라는 부분이 특히 신경 쓰였다.
“하, 근데 이거 또 막상 하려니까 뭐라 해야 하나- 쪽팔리네. 이거 뭐, 자기 어필 시간에 나 뭐 하지? 노래라도 부르나?”
[일단 주둥이 닫고 있으면 반은 먹히고 들어갈 것 같아 숨씨]
[캐릭터가 뭔데]
[일단 제일 화려한 궁부터 써 ㅇㅇ]
[궁은 ㅇㅈ이지;]
[은신 캐릭터면 심사 못하잖어 엌ㅋㅋ]
[노래면 혹시 카투스 코스프레인가요]
[궁으로 몇킬을 하려고 노래를 ㄷㄷ]
"그렇지. 내 노래 들으면 아주 그냥 다 뒤지는 거야. 프레디 머큐리가 무대 뒤집어 놨던 것처럼."
[고막이랑 복장을 뒤집어 놓으실 텐데요]
짤랑!
-스피드 웨건 님이 1, 000원을 후원했습니다.
=여기서 레오레를 안 하시는 분들을 위해 스피드 웨건! 참고로 카투스의 궁극기는 장송곡이라는 스킬로, 노래를 불러서 적들에게 피해를 주는 스킬입니다! 위에 '궁으로 몇킬을 하려고 노래를 ㄷㄷㄷ' 채팅은 그런 점을 이용한 언어유희인 거죠!
"아니, 시발. 이건 또 뭐야. 천 원 후원으로 무슨 대서사시를 적어 놨네."
[아니 ^^ㅣ발 근첩새끼 미쳣나 진짜]
[저게 몇줄이야 정신 나갈 것 같네 ㄹㅇ]
[천원을 ^^ㅣ발 스크루지보다 알뜰살뜰하게 쓰네]
[자기어필 그거 사람들 보니까 보통 무난하게 캐릭터 대사치고 포즈 취하더라]
"아, 맞다. 아까 보니까 캐릭터 대사랑 포즈 연습하고 그러던데, 나도 그거나 연습해야겠다."
[아니 캐릭터 대사 연습이면 또 마이크 끄는 거임?]
[아니 개답답하네 ^^ㅣ발]
[안 그래도 지금 방송을 보고 있는 건지 라디오를 듣고 있는 건지 햇갈리는데 여기서 마이크까지 끄겠다고?]
[듀라한은 봤어도 듀라한 + 인어왕자는 첨 보네]
[얼굴 없는 가수에 이어서 얼굴이랑 목소리 없는 방송인 ㄷㄷ]
[얘는 양심이랑 개념이랑 인간성도 없잖아]
[세계 최초 결손형 방송인 ㄷㄷ]
[솔직히 선 넘는 거지 ㅇㅇ;]
[아 ㅋㅋ 마이크 끄기만 해봐 이번엔 ㄹㅇ 주저 없이 다른 방송으로 빤스런한다]
"아니, 이게 그렇게 된다고? 하, 이거 귀찮네."
최재훈은 시청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자연스럽게 시청자를 확인했다.
(14, 741명)
"아니, 여러분. 진짜, 궁금한데. 지금 SGF라 볼 거 엄청 많은데,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벽보고 이야기 하는 놈 방송 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이러시는 거, 솔직히 좀 부담스럽네요."
[뭐 이 씨ㅃ련아?]
[정신 혼미해지네]
[숨씨 생각해 보니 마이크 꺼도 될 것 같아]
[ㄹㅇ;; 방송할 때 주둥이좀 덜 쓰라고 누누히 말하잖아 우리가]
[ㅋㅋㅋ 아 이 방 왤케 웃기냐]
[야 근데 진짜 암것도 준비 안 해도 괜찮음?]
"이렇게 된 이상, 내 얼굴이 다 알아서 해 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와 ㄹㅇ;; 저 얼굴이 어쩌다 이런 새기한테 들어가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아닐까요?]
[그 얼굴 낭비하는거 솔직히 아깝지 않니?]
[고시원에서 방송보면서 인생 낭비하는 새끼도 있는데 뭘]
[왜갑자기시비야? 왜갑자기시비야? 왜갑자기시비야? 왜갑자기시비야? 왜갑자기시비야? 왜갑자기시비야? 왜갑자기시비야? 왜갑자기시비야? 왜갑자기시비야? 왜갑자기시비야?]
[진정해시발아내얘기야진정해시발아내얘기야진정해시발아내얘기야진정해시발아내얘기야진정해시발아내얘기야진정해시발아내얘기야진정해시발아내얘기야진정해시발아내얘]
[애들 방송에서까지 벽보고 있으니까 슬슬 정신 이상해지네]
사실.
생각해 보니, 대사고 포징이고 딱히 연습할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코스프레 캐릭터.
다름 아닌 '텔론'이 아니던가.
플레이한 판의 수가 수만 수천, 어쩌면 수만이었다.
그 정도면 이미 한 몸, 물아일체의 경지에 있다 봐도 무방했다.
연습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텔론의 대사와 자세가 나오고.
텔론의 특징과, 포인트들을 알 수 있었다.
라는, 기적의 논리를 시전하는 최재훈이었다.
시전하면서도, 일단은 착실하게 시청자들이 못 보는 곳에서 포징을 연습하기도 했고.
잠깐 막간을 이용해 마이크를 끄고 대사, 발성 연습을 하기도 했다.
즉석으로 참가를 결정한 그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볼 수 있었다.
"3번 팀 여러분~ 스탠바이 해 주세요~"
그렇게, 때가 왔다.
놀랍게도 무대 위에서 방송이 허락되기에, 최재훈은 방송을 켠 채로 대기 장소로 향했다.
그러자-
"어?"
또 반가운 선객이 보였다.
다른 의미로 반가운 선객이.
신도와 김경훈.
먼저 도착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들이 숨컷을 보더니-
'어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대회에서 이길 자신이 있는 건지.
아니면, 또 무슨 개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지.
상관 없다.
대회는 물론이며, 최후의 승자는 결국 자신일 테니.
최재훈은 그들과 약간 떨어져 다른 참가자들을 기다렸다.
다음 참가자.
"어?"
"오?"
제나였다.
쪽수 기세 싸움에서 안 밀리게 되었다는 사실에 특히나 반가워, 최재훈은 양팔을 벌려 그녀를 맞이했다.
와서 안기라고.
"아, 씨 좀."
제나는 질색을 하며 그와 먼 곳에 섰다.
만약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녀만 알 일이었다.
이어서 다음 참가자가 도착했다.
"어!?"
그 참가자는 최재훈과 삼피를 발견하자마자, 마치 주인을 발견한 골든리트리버 같은 얼굴을 했다.
"지현 씨!"
"재- 아니, 숨컷 씨! 삼피 씨도. 여기서 저 빼고 뭐 하고 계셨어요!"
"지현 씨 왕따 시키고 있었지!"
"헝."
"어, 왔냐."
"아, 옙!"
"아니, 이런 우연이 다 있네."
"그러게요! 이런 게 운명일까요!?"
"야, 야. 방송 켜져 있으니까 오바하지 마."
"헤헤…."
[여기서 정모를 하네 ㄷㄷ]
[뭔 정모?]
[얘네 셋 크루잖아]
[아 ㄹㅇ?]
[삼피는 알겟는데 저 포니테일은 누구임?]
[그러게 첨보네]
그리곤-
"…."
옆의 신도를 발견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신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 지현아~ 웬일이니. 너가 이런 델 다 참가하고~"
권지현은 '그 사건' 이후로 '이런 델'일절 참가하지 않았다.
못했다.
그 사건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음에도.
신도에게 안 좋은 여론이 형성되었음에도.
의지와 용기가 꺾이고, 그렇게 열정마저 사라졌기에.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권지현이 용기를 쥐어짜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신도 씨."
최재훈이 먼저 나서서 신도를 쳐다보곤 씨익 웃었다.
"지현 씨가 왜 참가하셨겠어요."
"어?"
"당연히 '크루' 때문이지."
"…."
그 의미심장한 강조에 표정을 와락 구긴 신도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
숨컷이 말없이 응시하자, 서열정리를 당했을 때의 눈빛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자, 그럼 3번 팀 여러분. 준비 되셨으면-"
숨컷, 권지현, 제나.
김경훈 신도.
그리고.
그들의 시청자들.
수만 명과 다섯 명이 무대 위로 올라갈 시간이 왔다.
그들 중 누군가가 예감했다.
개판이 될 것 같다고.
그들 중 또 다른 누군가가 예감했다.
개판이 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