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가 게임을 잘함-169화 (166/361)

169. 구원

아라 코스프레의 복장.

먼저 하의.

끔찍했다.

기장이 무릎 위로 올라온다.

최재훈은 쌉 상남자로서, 2차 성징을 겪은 이후 기장이 무릎 위로 올라가는 바지를 빤스 외에 입어본 기억이 없었다.

저걸 입느니 차라리 빤스를 입고 '바진데?'라고 뻔뻔하게 구라를 치는 게 덜 쪽팔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하의인데.

상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걸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브라탑?

마치 여성들이 입는 브라탑처럼, 치킨 텐더 부위만 가리고 나머지는 시원하게 오픈하는 형식의 디자인이었다.

아주 신기한 옷이었다.

남성들은 동성의 나체 모습을 꺼려한다.

그리고 그건 상체보다는 덜렁거리는 하체 때문이었다.

상체 자체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최재훈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있는 복근.

탄탄해 보이는 팔뚝.

지금 저 코스어 같이 몸매가 좋은 경우엔 '새끼 운동 좀 치네'라는 감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저 아라 코스튬(상의)를 착용하자, 인상이 확 돌변한다.

닭가슴살만 수줍게 가려 놓으니 형용 못 할 역겨움이 폭발한다.

원래는 멋져야 할 걸 역겹게 역변시켰다는 점에서, 피자 위 파인애플 같은 복장이었다.

저걸 입느니, 아주 그냥 벗는 게 차라리 덜 쪽팔릴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가슴을 함부로 내놓는 건 터부시 되며.

이곳이 무수히 많은 사람과 시청자들의 시선이 향해지고 있는 축제의 현장이란 걸 감안 해도.

최재훈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심지어 고양이 귀 머리띠와, 꼬리 허리띠까지.

최재훈은 저 아라 코스프레하기와 할복 중에 고르라면 진지하게 고민할 자신이 있었다.

차라리 빨가벗고 똥꼬쇼를 하고 말지.

그렇기에,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여자친구들의 요구한 건 '코스프레'였다.

남자들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어 주었던 국밥 같은 존재에서, 파인애플 피자가 되어 버린 '아라'의 코스프레가 아니란 말이다.

인간의 적응력은 놀라웠다.

'남성' 캐릭터들이 여자였었던 시절의 모습이 더욱 익숙한 최재훈에게, 그들의 코스프레를 하는 건 무슨 캐릭터가 됐든 용납하기 힘든 굴욕적인 경험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남성'이 아닌 여성 캐릭터의 코스프레를 하는 거라 느껴졌다.

그런데, 단지 아라가 아닌 다른 캐릭터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최재훈은 위안을 느끼고 행복마저 느꼈다.

선택지 목록을 확인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흐미 십헐…."

모든 여성- 아니, '남성' 캐릭터가 아라처럼 곱창이 나 버린 복장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언더웨어 아머가 아닌, 멀쩡하게 생긴 그냥 아머를 착용하고 있는 카일, 킹을 비롯해서.

노출 없는 복장을 한 캐릭터는 다양했다.

하지만-

아라.

정크스.

아켈리.

미스터 럭키.

잔느.

소냐.

그게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 전부였다.

해당 캐릭터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레오레에서 '색기'를 담당하는 캐릭터라는 점이었으며.

두 번째는, 그런 이미지에 걸맞는 복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주 존나 어메이징하게도.

아라가 입었었던 남성용 브라탑은, 이 세계에서 남성의 매우 보편적인 복장인 건지.

카테고리 안의 모든 코스어들이 그놈의 브라탑을 입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최재훈, 그는 아주 크게 엿된 것이다.

"무슨 문제라도…?"

최재훈이 현재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반응을 보이자 담당자가 당황해서 물었다.

최재훈 팜플렛에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 전체가 눈에 들어오고,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담당자의 표정관리가 힘들어진다.

저도 모르게 헤실거릴 것만 같다.

하지만 지금 최재훈은 그런 간질거리는 상황을 연출할 여유가 없었다.

"뻐킹 에부리띵…."

"…예?"

"이 뻐킹할 것들 에부리띵이 문제입니다… 왜 이런… 캐릭터들 밖에 없는 것입니까…?"

"예? 이런 캐릭터들이라뇨…?"

담당자는 뭔가 잘못됐나 싶어, 카테고리를 돌려 확인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갈 뻔했다.

카테고리 안에 첨부되어 있는 코스어들의 모습이 참으로 젖절했다.

코스튬의 모델 되는 캐릭터의 베이스 디자인이 바람직한 덕이었다.

그렇듯 최재훈이 문제라 생각하는 요소는, 이 세계의 일반적인 관점에선 바람직한 요소였다. 그러니, 담당자로선 최재훈에게 공감해 주고 싶어도, 공감해 줄 수가 없었다.

"그, 문제가 뭔지 말씀해 주시면 도움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뭐시냐. 그런 건 없나요?"

"그런 거라 하심은?"

"그, 킹이라던가 카일이라라던가…."

최재훈은 노출도가 없다시피한 복장을 한 캐릭터들을 열거했다.

그러자 면목 없다는 얼굴을 하는 담당자.

"죄송하게도, 여기에 있는 게 준비된 코스튬 전부입니다."

"아니, 우째서? 왜 하필 이런 거시기한 애들만…?"

"어… 그… 유저 여러분의 인기도와 선호도를 바탕으로…."

"아니! 유저 여러분의 인기도와 선호도를 기준으로 한 거면, 그건 그거지. 어? 뭐냐. 여자들의 초이스. 레오레 유저 90%정도가 여자일 거 아니에요. 남자들의 코스튬을 그런 거로 정해도 되는 겁니까?"

"통계에 의하면 90%은 아니고-"

"담당자 님!"

"예?"

"티어가 어떻게 되세요?"

"어… 저 일단은 플래티넘입니다만. 그건 왜…."

"전 챌린저입니다."

"예?"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롤에 관해서 제 말에 반박하시려면, 저보다 티어 높아야 합니다."

그 모습으로 내뱉은 말은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이, 뭔….'

담당자는 다른 의미로 말문이 막혔다.

[아니ㅋㅋㅋ미친놈아]

[여기서 그님티를 시전하네]

[레오레 운영진은 현실에서도 또라이들 상대해야 하네 ㄷㄷ]

[극한직업 ㅠㅠ]

[선생님... 티어는 몰라도 아이큐는 이 분이 더 높은 것 같으니 제발 쪽팔린지 좀 아십쇼...]

최재훈은 쪽팔리지 않았다.

이러기 위해 올린 게임 점수가 아니던가?

게이머들 사이에서의 계급!

그게 바로 게임 점수의 의의였다.

옥황상제라도 레오레 점수가 자신보다 낮다면 게임 얘기를 할 때 눈을 깔고, 까라면 까야 했다.

그는 당당히 말을 이었다.

"챌린저인 제가 보기에 이 캐릭터들은, 여자가- 아니, 남자가 아니라 여자들이 선호하는 캐릭터입니다. 반박하시겠습니까, 플래티넘?"

잘생긴 외모와 개소리의 콤비네이션에 담당자는 정신이 아득해져서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캐릭터의 코스튬은 누굴 위한 걸까요? 단순히 남자가 입을 수 있다고, 남자를 위한 거다?"

최재훈이 여자친구들을 보며 말했다.

"에블바리 쎄이, 헬 뻐킹 노!"

[노? 신고합니다]

ㄴ강제퇴장 당했습니다.

[데베충새끼 신고정신 투철한거봐 ㄷㄷ 바로 신고하러 튀어나가는거보소 ㄷㄷ]

[헬 뻐킹 예스!]

[뻐큐!]

"…."

여자친구들은 말없이 그를 꼬라봤다.

그러자, 그는 다시 담당자를 쳐다보며 말한다.

"보셨죠?"

"…."

도대체 뭐 어쩌라는 걸까.

"지금 아 자리에서! 제가! 남자로서! 남자들을 대표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남자들은 어? 그 뭐냐. 카일, 킹, 일라로이. 그런 캐릭터들 코스프레하고 싶었습니다. 이건 남자들을 위한 코스튬이 아니야!"

그가 근엄하게 외쳤다.

그때, 때마침 분장용 부스 안에서 아라 코스프레를 한 일반인이 나오더니 여자친구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어때?"

"오, 자기~"

"그치? 그치?"

그런 대화를 남기곤 멀어진다.

최재훈이 말하길 남자들을 위한 게 아닌 코스튬을 쌉 마음에 들어하면서 말이다.

그 대화를 들은 여자들의 시선이 최재훈에게 일제히 향해졌다.

역시나 그 대화를 들은 최재훈이 한동안 가만히 시선을 받아들이더니 이내 말한다.

"저 사람이 이상한 거임."

그때-

"누나, 이거 어때?"

"오~ 김하윤~ 아니, 아라~"

"됐거든~"

"아니 왜, 잘 어울리구만~"

"나도 알거든~ 이거 혹시 파는 건가? 있나?"

다시 또 나타난, 최재훈이 말하길 남자들을 위한 게 아닌 코스튬을 쌉 마음에 들어하는 남자.

"아니, 시발! 남자가 돼서 자존심도 없나!"

"엥?"

"그쪽 거시기가 통곡하는 소리가 안 들리시냐고!"

그에 최재훈이 발작을 일으켰다.

"아, 신경 쓰지 마세요, 평범한 미친놈입니다."

"방송 벌칙이에요~ 죄송합니다~"

"광견병 걸려서 오늘내일하는 아이입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선천적으로 뇌 반쪽이 결여된 불쌍한 사람이에요."

"아이고, 잘 어울리세요. 들어가세요~"

다급히 그걸 수습하는 건 여자친구들이었다.

"뭐야…."

"아, 여기 방송인 많잖아. 신경 쓰지 마."

"누나 저 사람 알아?"

커플이 당황스러워하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아니 ㅋㅋ 미쳤나 진짜]

[급발진 뭐고 ㅋㅋ]

[코스프레 하기 싫어서 또라이 코스프레 하네 아 ㅋㅋ]

[나 또라이인데 시비거는 거냐?]

[또라이들한테 실례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저 ㅈ컷]

[정보) 평소 잘 안 쓰는 근육은 쥐가 나기 쉽다. 방금 숨컷은 뇌에 쥐가 난 거다]

[숨씨 개수작 그만 부리고 슬슬 시작하지 그래 ㅋㅋ]

통하지 않은 개수작.

그렇게 최재훈에게 코스프레를 회피할 길이 원천봉쇄되었다.

"방금, 보셨다시피… 남성분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꽤 좋습니다. 유명한 디자이너분들 모셔다 고급 원단으로 직접 제작한 거기 때문에. 숨컷 님도 해 보시면 마음에 드실 거예요."

그 지랄을 했는데도 담당자는 한없이 친절했다.

잘생기고 볼 일이었다.

그녀는 숨컷의 팬이기도 했다.

팬으로서, 숨컷의 코스프레한 모습이 궁금했다.

그렇기에 친절하고 또 끈질기게 추천한다.

최재훈의 등을 떠민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그가 무력감과 절망감에 고개 숙였다.

그러자, 자연스레 접수대 위의 팜플렛이 눈에 들어온다.

다양한 캐릭터.

다양한 선택지.

다양한 미래.

다양한 지옥.

최재훈이 '남성미' 넘치는 코스튬을 입고 '남성적인' 매력을 뽐내는 코스어 위로, 자신의 얼굴을 겹쳐보았다.

(상남자의 최재훈 : 끼아아아아아아앙!!!!!!!!!)

즉시, 상남자 세포가 빠르게 소멸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상상할 뿐으로 이 정돈데, 직접 하게 되는 날엔 도대체 어떨지.

'상남자의 신이시여… 부디 저를 굽어보소서….'

(상남자의 신 : 아는척, 곤란.)

'시발아.'

최재훈은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에 다시 한번 절망하고-체념했다.

그의 힘 없이 축 쳐진 손가락이 플랫폼 위를 떠돈다.

[아라 가즈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제발 소냐]

[잔느 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

"아라! 아라!"

"아켈리!!!!!!!!!!"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거-"

그 순간-

"김진하, 어때?"

"오~~~ 채윤희~"

"어?"

방금 전과 똑같은 대화.

하지만, 달랐다.

이번엔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그 말은 즉슨-

최재훈은 즉시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거기에-

구원이 있었다.

"아니."

최재훈이 담당자를 쳐다보며 운을 뗐다.

"선생님."

"예?"

"이게 준비된 코스튬 전부시라면서요."

"예…? 맞습…니다만…?"

"그러면, 방금 그건 뭡니까."

방금 그거.

여자.

그녀 또한 레오레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

'가붕아….'

가덴.

육중한 갑주와 대검이 인상적인 선봉대장 캐릭터인 그녀의 디자인은.

노출을 비롯한 '남성적인' 어필이 느껴지지 않는 점에서, 최재훈에게 아주 바람직했다.

(상남자의 신 : 저거면 ㅇㅈ이지)

그가 애타게 찾던 종류의 코스튬인 것이다.

"어… 방금 그 가덴 코스프레는…."

"가덴 코스프레는?"

"여성 분들을 위해 준비된 거라…."

"뭐, 옵션에 [착용 가능 성별 : (여성)] 이라도 붙어 있나요?"

"예?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러면 문제없는 거죠?"

"네?"

"제가 입어도요."

"어… 예, 일단은 그렇습니다."

대답하는 담당자의 표정은 탐탁잖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남성'캐릭터의 코스프레를 한 모습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평소 병적으로 후드+청바지의 밋밋한 조합을 고려하는 그의 색다른 모습을 말이다.

[머지 님들 저 지금 환청 들림 이 사람이 코스프레를 가덴으로 한다는 말도 안 되는 환청 들음]

[ㅁㅊ;; 나도]

[ㄹㅇ;; 당연히 환청이지 말이 되냐고 ㅋㅋ]

[자기야아니지? 자기야아니지? 자기야아니지? 자기야아니지? 자기야아니지? 자기야아니지? 자기야아니지? 자기야아니지? 자기야아니지? 자기야아니지? 자기야아니지? 자기야아니지?]

"아니!!!"

"우우우!!!"

"뭔 가덴이야!!! 아라!!!"

"정신나갈것같애!!!"

최재훈의 색다른 모습을 보고 싶은 건 당연히 여자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난과 야유가 쏟아졌다.

최재훈은 그걸 승리의 환호라도 듣는 표정으로 감상했다.

"크~ 여러분이 이렇게 좋아해 주시니까, 저까지 기분이 좋아지네요~"

"뒤져!!!"

"죽어!!!!!!!!!!!!!!"

"아라!!! 제발 아라해!!!!!!!!"

"잔느!!!!!!!!!!!!!!!!!!"

"안 해 주면 나 빨가벗고 뒹굴 거야!!!"

그 난장판에 차현하는 마냥 재밌다며 낄낄댔고.

김희은은 실망했다.

'아라, 보고 싶었는데….'

침착하게 상황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이린 또한, 속으로 마찬가지였다.

아쉬웠다.

'이렇게 되면 이번 대회에서 끌리는 관심이 상대적으로-'

제 딴에는 그런 견실한 이유 때문이라 생각했으나.

실상은, 그녀 또한 그저 그의 색다른 모습이 궁금했으며.

지금이 아니면 그런 모습을 평생 못 볼거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코스튬은 최재훈이 역겨워하는 것만큼, 특별한 복장은 아니었다.

최재훈의 원래 세계에서의 미니스커트나 레깅스처럼.

여름이 되면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복장이었다.

입고 남들 앞에 선다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렇기에 이린은-

"숨컷 님?"

그에게 제안한다.

어디까지나 방송을 위해, 그를 위해서라고 여기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