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멋진 계획
"저희와 같이 일하시죠."
"네?"
"별거 아닙니다. 지금부터 SGF 공식 개장 전까지만 저희, M HIGHER의 라티안 전기 부스를 홍보해 주시면 됩니다."
"아…."
"게임 방송인이라 이미 아시겠지만, 저희 M HIGHER는 수차례의 성공적인 게임 개발, 출시로 업계에서 인정 받고 있는 중견기업으로써. 부스도 이런 구석진 곳이 아니라 회장 중심에-"
한유리는 자기네 회사가 얼마나 대단한지, 굳이 SMART CHOI와 비교해가며 설명했다.
자기네 게임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굳이 제로제로와 비교해가며 설명했다.
같잖았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최태이는 갈수록 주눅이 들었다.
"솔직히. 그런 아무도 모르게 생기고 사라질 회사에서 내놓은 게임 같지도 않은 포르노 홍보하시는 거, 불안하시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절대로 이미지에 좋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
최태이는 짐짓 찔려서 저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그쪽 게임도 일러스트 수위 선정적인 건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아무리 선정적이라 봐야, 그쪽 게임만 해?"
"…."
"정도라는 게 있잖아요, 최 대표. 응? 솔직히, 민폐야. 그런 게임 홍보 남성 방송인 분한테 맡기는 거."
최태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팩트 폭행에 화가 나서이기도 했고, 민망해서이기도 했다.
지당한 말이었다.
궁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최재훈에게 강력하게 홍보를 부탁하긴 했지만.
원래 같았으면 못할 짓이었다.
이런 여성향의 선정적인 게임 홍보를 남성 스트리머에게 맡기다니.
하물며, 게임 캐릭터로 출연시키다니.
수락한 최재훈이 대단한 거였다.
그래서 그를 향한 최태이의 감사함은 커졌고, 그 만큼 미안함도 커졌다.
어떻게 해서든 최재훈을 붙잡고 싶었지만,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발라드 감성처럼.
최재훈을 위한다면, 그를 보내줘야했다.
사실, 이미 홍보는 충분히 되었다.
최재훈의 홍보가 여기서 끝나도 큰 상관은 없었다.
다만.
최재훈이 라티안 전기를 홍보해 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제로제로와 장르를, 그러니까 플레이어층을 공유하는 라티안 전기는 장르 1위 게임이었다.
최 자매의 퇴사 이후 꾸준히 하락세를 걷고 있다곤 하나 구관이 명관.
아직 제로제로가 비빌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운영하며 쌓아온 컨텐츠, 인지도, 마니아 층.
지금 최재훈이 한유리에게 넘어간다면, 제로제로에게 향해졌었던 관심을 그대로 빼앗기게 될 터였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허나, 무슨 명분으로?
최재훈은 이미 할당 홍보량을 충족시켰다.
정말로 고맙게도, 순수하게 게임이 재밌다며 계속 플레이해 주고 있는 것뿐이었다.
최재훈의 M HIGHER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때, 최재훈의 입이 열린다.
최태이의 숨통은 닫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론 라티안 전기가 제로제로와 같은 장르의 게임이라 알고 있는데-"
"맞습니다."
"음, 그러면 좀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 아닌가요?"
"예?"
"사실상, 헵시 콜라랑 꼬카콜라 동시에 홍보하는 격이잖아요."
이런 와중에도 자신들을 챙겨준다.
최태이는 당장이라도 감동의 눈물로 SGF를 수영장으로 만들 것만 같은 표정으로 최재훈을 바라봤다.
하지만, 사실 최재훈은 한유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 정도는 혹한 상태였다.
이미 제로제로의 홍보 할당량을 채웠고, 첫 홍보를 끝내자마자 두 번째 홍보가 온 건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으니.
최재훈이 그런 말을 한 건 제로제로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자신의 방송인으로서의 신용이 걱정되어서였다.
한유리가 그런 걱정을 해결해주기만 한다면, 그는 기꺼이 M HIGHER의 홍보를 맡을 의향이 있었다.
그에 대한 한유리의 답.
"자신의 가치를 더 잘 알아주는 쪽을 위해 일하는 건데. 그거 가지고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방송 일이 평생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들 이해해 줄 겁니다."
"오호."
'아몰랑~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해석이 가능한, 명확한 해답이 없는 무책임한 답.
그것과는 별개로,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자신의 가치를 더 잘 알아주는 쪽에서 일하라, 이 말씀이시죠?"
"바로 그겁니다."
자신만만하게 웃는 한유리에게, 최재훈은 말했다.
"그렇다면, M HIGHER쪽에서 저를 얼마나 알아봐 주시는지, 들어 볼까요?"
"네?"
"계약 조건이요."
"예? 아~ 듣기로는, 제로제로 쪽에서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던데."
"네?"
"그, 숨컷 씨를 게임 캐릭터로 출시하는 거요."
"오옹?"
최재훈은 설마 싶었다.
"그런 별거 없는 게임에서 그거 해 봐야, 방송이 얼마나 홍보되겠습니까."
"응?"
하지만 곧바로 싸한 기분이 든다.
"저희 라티안 전기에서도, 숨컷 씨의 캐릭터를 만들어서 출시해 드리겠습니다."
제로제로 때와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작지만 아주 결정적인 차이.
대가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아니.
듣자 하니, 한유리는 그 자체를 대가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게임 캐릭터로 출시해 주는 것 자체를 말이다.
겨우 한 시간 일하는 거로 우리 유명한 게임에 출연시켜줘서 홍보 효과 누리게 해주겠다~
어딘가 생색내는 것처럼 들리는 한유리의 말을 정리하자면 그러했다.
"저희 회사가 보통 일러스트 외주 작업 맡길 때 S급 일러스트레이터 분들에게 맡겨서, 일러스트 비용이 어마무시하게 들어가는데. 이것도 저희 측에서 부담하겠습니다."
어느 쪽이 숨컷의 가치를 더 잘 알아봐 주는지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면, 한유리 팀장님 말씀대로. 제 가치를 더 잘 알아봐 준 쪽에서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잘 생각하셨습니다."
한유리가 승리자의 오만함이 담긴 표정으로 최태이를 내려봤다.
최태이는 울상이 되었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최 듣보님."
"어?"
최재훈은 그런 최태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에?"
한유리의 눈썹이 찌그러졌다.
"그게 무슨…?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한유리 팀장님께서 제 가치를 더 잘 알아봐 주는 쪽에서 일하라 하셨잖습니까. 그대로 하는 중인 거죠."
"아니, 하. 그러니까. 하. 그딴 게임에 출연하는 게, 우리 게임에서 출연하는 것보다 낫다 이거죠?"
아무래도 착각을 해도 단단히 하고 있는 듯했다.
최재훈은 구태여 정정해주지 않기로 했다.
"아."
최태이는 뒤늦게 깨달았다.
최재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녀가 뒤늦게 표정을 피고.
한유리에게 받은 것을 되돌려줬다.
그러니까, 승리자의 거만한 표정으로 한유리를 보고 피식 웃었다.
한유이의 표정이 더는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뭐. 최 대표가 따로 뭐 더 챙겨주기로 했습니까?"
"예, 뭐. 낭낭하게. 예. 그렇게 됐네요."
"하. 끽해봐야 라이센스 비용 챙겨주는 정도라 얼마 되지도 않을 건데. 숨컷 씨. 충고 하나 하는데, 길게 보세요. 길게. 푼돈 쫓아가다간, 푼돈이나 버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태도를 유지하려곤 하지만.
흥분해서 약간 이성이 흐려진 나머지, 거무칙칙한 속내가 새어 나온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최재훈을 아랫것 대하듯 여기며 훈수를 하고 있었다.
최재훈은 새삼 불쾌해하지 않았다.
같이 일하던 동료를 저렇게 무시하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이라고 오죽하겠는가.
이미 저런 사람이라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그나저나 푼돈이라니.
최재훈은 이번 제로제로와의 협업으로 챙기게 될 추정 이익을 되짚어 보았다.
홍보가 매우 많이 성공적이었으니, 거기에서 훨씬 더 오를 이익을.
"그게 푼돈이면, 푼돈이나 버는 인생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
입으론 웃어도 눈으론 죽이려 든다.
"숨컷 씨."
"예?"
"마지막으로, 잘 생각해 봐요. 이 업계. 좁습니다. 선배로서 충고해 드리는데, 줄 제대로 타야 앞길이 편해요."
"어… 저 이 업계 사람 아닌데요. 그리고-"
최재훈은 주위를, SGF 회장을 둘러봤다.
"딱히, 좁아 보이진 않습니다만."
"계속 말장난이나 치시고, 저한테 감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말장난 아닌데.
게다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최재훈은 입이 근질거렸다.
"솔직히, 지금 그쪽이 하고 있는 거. 포르노 찍는 거나 다름없어요."
"워메."
"그쪽이 광고주라면. 남자애들 헐벗고 나온 게임 홍보한 사람한테 일감을 맡기겠습니까. 아니면 건실한 중견기업 게임 홍보한 사람한테 일감을 맡기겠습니까. 진심으로,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해 드려야 하는 겁니까?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어쩌실래요."
최재훈은 감탄했다.
눈앞의 여자는 진심으로 자신이 선심을 써 준다 생각하며, 기회를 준다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그의 시선이 한유리의 뒤로 향하더니-
씨익.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포르노 홍보하는 방송인 찾나 안 찾나, 지금 알아보죠."
"예?"
한유리가 최재훈의 시선을 따라, 뒤돌았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참가 업체의 관계자임을 증명하는 명찰을 목에 걸고서.
"무슨 일이시죠?"
최재훈에게 어떻게 말을 붙여야 될까 고민하고 있었는지.
그가 먼저 말을 걸어주자, 화색을 띠고 말한다.
"그,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시간이 남을 경우 가능하면 저희 게임도 플레이해 줄 수 있으신지 여쭤보고자. 이렇게 찾아뵀습니다. 이건, 저희 측에서 챙겨드릴 수 있는 조건입니다. 원하신다면 향후 차차 지급해 드리는 거로. 어찌, 가능할런지…."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
그녀도 최태이와 같았다.
간당간당한 목숨줄.
이번 SGF의 구석에 쳐박힌 부스에 사활이 걸린, 영세 업체의.
게임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누구 못지않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부족한 개발자였다.
그녀는 제로제로의 사정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제로제로에게 일어난 일이 얼마나 기적적인 건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염치없이 보일 것을 감수하고도 숨컷에게 찾아와 부탁한다.
자신들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걸며.
그 진심을 느낀 최재훈.
그는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고, 실행하고 싶었다.
일단 '이거'부터 해결하고.
"포르노 홍보하는 방송인, 찾으시네요."
한유리가 울컥, 여자의 명찰을 확인했다.
"딱 봐도 스마트 최 같이 듣도 보도 못한,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회산데. 저희 같은 회사들이랑 일할 기회 버리고, 평생 이런 회사들이랑 같이 일하시겠다고요?"
"한 팀장 님. 제로제로 해본 적 있으십니까?"
"뭐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제가 해 봤는데, 재밌던데요. 회사가 듣보잡이던 뭐건, 무슨 상관입니다. 게임만 잘 만들면 됐지. 어차피, 다 듣보잡에서 시작하는 거 아니에요? 거, 허리케인도 처음엔 조그마한 듣보잡 회사였을 거 아닙니까."
"하, 그래서. 그쪽, 최태이 회사가 허리케인만큼 클 거라고요?"
"당연히 그건 아니죠."
"그러니까-"
"그래도! M HIGHER만큼 클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싶네요."
"하. 저희 회사가 우습습니까?"
"그렇게 애사심 투철하신 분이."
다른 회사를 그렇게.
라고, 최재훈은 구태여 말하는 대신 쓰게 웃었다.
한유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저는 지표 보고 말씀드린 겁니다."
최재훈은 핸드폰을 조작해서 한유리에게 내밀었다.
[실시간 모바일 랭킹]
1. ZERO ZERO - SMART CHOI
2. 라티안 전기 - M HIGHER
"…."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정작 더 이상 입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최재훈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른 두 개발자를 잠깐 노려본 뒤.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구질구질하게 중얼거리며.
그녀를 뒤따라왔던 부하 직원.
"그, 숨컷 님?"
"네?"
"팬인데, 사진 한 장만 같이…."
"아, 예."
사진을 찍은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더니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저 인간 성격이 워낙 개지랄 맞아서. 아, 최 대표 님?"
"네?"
"그때, 못 도와드려서 죄송합니다. 저희 팀원들 엄청 후회하고 있어요. 그때 못 나선 거.
아니, 안 나선 거."
"아…."
"물론, 지금 와서 이렇게 말해 봤자 변명 밖에 안 되겠지만."
멋쩍은 듯 머리를 긁더니 말을 잇는다.
최태이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에요. 전적으로 처신 못 한 우리 잘못이죠.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제야 표정이 풀린다.
"하하, 나중에 잘 되시면 저희들 좀 거둬주십사, 이렇게 말씀드리네요. 한유리, 저 인간이랑 제로제로 때문에, 라티안 전기 오래 못 갈 것 같거든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최태이 또한 똑같이 웃었다.
"그럼, 저는 이만. 숨컷 님도 그렇고, 최 대표 님도 그렇고, 거기, 개발자 분도. 다 흥하세요!"
칙칙해져 있던 분위기가 한 번에 살아났다.
그래.
이게 게임 페스티발이다 싶었다.
사람들이 이곳에서 느끼고 싶어하는 건 개발자들의 이런 순수한 열정이었다.
그렇게 두 개발자와 최재훈, 그리고 이린만이 남게 됐다.
"편집자 님."
"예."
"제가 하나 떠올린 게 있는데요-"
최재훈이 방금 막 떠올린 계획을 이린에게 설명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계획을 들은 이린.
그녀의 입꼬리는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올라가 있었다.
"멋진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