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치팅
"어, 저기-"
권지현이 가리킨 곳에서 팬미팅 참가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 빽빽한 인파에서 어떻게 한눈에 보고 팬미팅 참가자인 줄 알아볼 수 있었느냐.
그녀는 전세계 게이머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 게임단인 TC1의 원딜러.
SIGHT였다.
하지만 지금 그건 조금도 상관없었다.
그도 그럴게.
"다그닥, 다그닥."
최재은이 다가오는 참가자의 모습을 보며 그런 추임새를 넣었다.
그렇다.
지금 그녀는 유니폼을 입고 있지도 않았을뿐더러, 말 머리 탑을 뒤집어써서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워낙 페이스 원맨팀 성향이 강한 TC1이다.
SIGHT가 팀 내에서 차지하는 관심의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팀인 TC1이었다.
향해지는 관심이 엄청나다.
그중 지분이 얼마 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대단하다.
마치 대기업에서 1% 지분을 소유할 뿐으로 대주주라 불리는 것처럼.
감독은 그녀에게 되도록이면 정체를 숨기길 당부했다.
SIGHT가 TC1의 일원으로서, SGF에서 있을 공적인 행사에 참가하기 전에 남성 스트리머와 개인적인 만남을 갖고 오는 건 그리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으니.
"안녕하세요!"
최재훈이 먼저 다가가서 반갑게 인사했다.
현실에서 처음으로 만나 보는 팬.
그것도 자신을 만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열성 팬.
하물며 그게 페이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재훈의 환영에선 열기마저 느껴졌다.
숨컷 같은 남자의 진심 어린 환영.
여자로서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SIGHT가 호쾌하게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곤 경쾌하게 흔든다.
"이야, 실물이 더 잘 생기셨네!"
그리곤 목소리 톤을 평소완 다르게 해서 말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그렇게 SIGHT라 생각하기 힘든 목소리가 나왔다.
마찬가지로, 페이스라 생각하기도 힘든 목소리가.
그럼에도 최재훈은 실망하지 않는다.
아직 한 명 남았으니까!
"어. 야, 저거 아니냐?"
이번엔 제나가 가리켰다.
그곳엔 마찬가지로, 단번에 시청자임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 또한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은 있을지언정,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영화 속 악역!
바로 데스베이더의 탈을.
하지만 무슨 탈을 쓰던, 지금 최재훈의 눈엔 페이스로 보였다.
"아아아아아앍!!!!!!! 센세!!!!!!!!!!!"
최재훈은 그렇게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 것만 같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렸다.
그 반동으로 과하게 차분해진 모습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두근두근.
그가 떨리는 가슴으로, 페이스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내-
"안녕하세요, 숨컷 님. 진짜 팬이에요!"
발랄한 어조.
"…."
그러나 우중충한 목소리.
최재훈은 기술의 발전을 느꼈다.
쿠우-
쿠우-
다스베이더의 트레이드마크인 거친 숨소리.
그리고, 다스베이더 그 자체인 목소리.
고작 저런 장남감 가면에 음성변조 기능이 달려 있다니.
'아니 그런데 음성변조라고?'
말 탈도 솔직히 좀 오바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음성변조라니.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에바 쌈치-
'아.'
다 싶다가도.
그는 떠올린다.
이 참가자가 정황상 누구일지.
페이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수많은 시청자들이 시청하는 방송에 출연한다.
페이스라면 철저하리만치 정체를 숨기는 게 당연했다.
안 그러면 상당히 귀찮은 일이 될 테니.
개쌉유명인은 개쌉피곤한 법이었다.
어쨌거나, 최재훈은 확신했다.
이 사람이, 페이스라고.
그리고, 그 사람은 말했다.
자신의 팬이라고.
소름이 돋았다.
페이스가 자신의 팬이라니.
"저도 팬입니다!!!"
최재훈은 저도 모르게 안아버릴 뻔했다.
위험하다.
그는- 아니.
그녀는 더 이상 동성이 아니었다.
최재훈은 가까스로 손을 내미는 거로 만족했다.
데스베이더가 흠칫 놀라더니, 조심스럽게 맞잡는다.
그러더니 최재훈은 반대쪽 손도 그 위로 겹치고 격하게 위아래로 흔든다.
방실방실 웃으면서.
다소 격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얌전한 거였다.
'페이스 기운 받았닭아아아아아예아오우예아아아아앍!!!!!!!!!!'
속으론 아주 미쳐 발광을 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끈적한 악수.
너무나도 격렬한 환영!
그에 데스베이더-
'오… 팬서비스 쩔어….'
김희은은 감동했다.
* * *
"여기 이 분은, 저희 크루원인 권지현 씨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죠? 여기 이 분도 마찬가지로 크루원인, 제나 웨스트. 삼피. 이 분도 알고 계시죠? 여러분, 기뻐하세요. 오늘 이 유명 방송인 두 분도 저희와 함께합니다!"
"오…."
"와…."
세 여자의 예상대로.
두 시청자의 반응은 더없이 뜨거웠다.
두 여자는 괜히 자기들이 다 무안하고 미안했다.
"자, 그럼! 오늘 한 번 재밌게 놀아 봅시다!"
최재훈이 기운차게 출발! 을 외치며 섹스코 쪽을 가리켰다.
"…."
그러자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그건 줄이라 하기엔 너무나 빽빽했다. 엄청나게 많고, 두껍고, 무겁고, 그리고 조잡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덩어리였다.
"갑자기 흥이 팍 식어 버리네."
"진심, 뉴클리어 런치 디텍티드 마렵고."
"저 중심에서 눈누 궁 쓰고 싶다."
"그만 징징대고 빨리 서기나 해."
"어, 저거 방송하는 사람들 아냐?"
최재은이 앞의 줄에서 셀카봉을 들고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지금 개장을 기다리고 있는 건, 여기에서 줄을 서고 있는 관람객들뿐만이 아니었다.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게이머들.
그들 또한, SGF가 시작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넷 방송을 켜놓고 말이다.
즉.
가장 먼저 입장해서, 가장 먼저 방송을 킨 사람이.
그 많은 게이머들을, 시청자들을 선점하는 쌉이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 선점 효과를 반드시 누리고야 말겠다는 일념이 느껴지는 위치였다.
도대체 얼마나 빨리 나와서 줄을 선 걸까.
최재훈은 갑자기 궁금해져서 리치TV에 SGF 태그를 검색해 봤다.
그러자 무수히 많이 나오는 방송들.
그 중, 벌써 수만 명의 시청자를 끌어모으고 있는 방송들이 있었다.
아직 SGF 개장도 안 했는데 도대체 뭘로 시청자를 끌어모았는가 하면-
[SGF 1번 대기방 출입구 바로 앞임 ㅋㅋ]
[SGF 위치 보니 2번 대기방입니다~]
아무래도, 줄의 위치.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더 빨리 SGF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어필된 듯했다.
"오…."
최재훈은 감탄했다.
저런 식으로도 할 수 있구나 하고.
동시에 자신의 미숙함을 욕했다.
왜 진즉 저걸 생각하지 못한 걸까 하고.
어쩔 수 없다.
이번 SGF 컨텐츠는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진행됐다.
준비 기간이 겨우 3일에 불과하다.
방송 신입인 그가 준비하고, 정보를 모으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입장권-I 헤프닝까지 있었으니.
사실.
저건 안다 해도 따라 할 수 없는 거긴 했다.
"저기 줄,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쟤네 어제부터 기다리고 있었을걸? 텐트 치다가."
"리을리?"
"예. 저도 방송 막 시작했을 때 똑같은 생각하고 새벽 4시엔가 나왔었는데, 이미 줄이…."
"한겨울에…."
"또라이들이네. 저건 솔직히 인정해 줘야지."
최재은의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갤 끄덕였다.
그건 열정과는 다른 종류의- 광기였다.
"게다가-"
"응?"
"저거 진짜 할 짓이 못 되는 게, 다 의미 없는 개지랄이 될 수도 있거든."
"뭔데?"
"가끔씩 있는, 치팅 쓰는 비치 년들 때문에."
감정이 담겨 있어서 특히나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치팅? 뭐, 아무튼. 어쩔까요. 저희도 지금부터라도 방송 켜고, 뭐라도 할까요? 그냥 기다리기도 뭐하니."
최재훈의 당초 목적은 입장해서, 상의한 업체로부터 입장권-I를 받고 나서 방송을 켜는 것이었다.
시청자들에게 몇 시간 동안 줄이나 서는 걸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방송의 짜임새와 텐션 등을 고려해서 나온 결과였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짜임새고 텐션이고.
일단 방송을 켜고 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 이미 늦었어. 지금 켠다고 뭐 달라지나. 그냥 느긋하게 기다리기나 해."
일단 알겠다 답하면서도 아쉬움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저거 시청자 유입 개오질 것 같은데….'
그가 아쉽다며 입맛만 다지던 때였다.
"숨컷 님?"
"네?"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아까부터 핸드폰에 정신이 빠져 있던 이린이 동행을 요구한다.
"어디 가?"
줄에서 멀어지려 하자 제나가 혼자 멀뚱히 서서 눈썹을 구기며 묻는다.
"설명 드리기엔 다소 복잡한 일이라. 일단 동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짜증에 가까운 표정으로 항의하지만 최재훈이 설득하자 마지 못 해 따라나선다.
그렇게 그들은 건물 전면의 출입구에 들어서는 줄에서 한창 멀어져, 건물의 측면에 도착했다.
거기에, 또 다른 출입구가 있었다.
줄 없이 아주 한산한.
하지만-
'관계자 외 출입 금지'
"뭐 하자고?"
그 팻말과 옆에 서 있는 경비원을 본 제나가 피식, 비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어?"
"이린 씨?"
혼자 경비원에게 다가가는 이린.
대화를 나누다가, 뭔가를 품에서 꺼내 보여준다.
그리고 잠시 뒤- 경비원이 문을 열고.
일행이 얼떨떨해하며 그녀의 뒤를 따라 섹스코에 들어섰다.
"어?"
그렇게, 이중으로 대기하고 있던 경비원과 대면한다.
경비원이 일행을 위아래로 쓱 훑더니 말한다.
"여러분,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또 대화를 나눈 뒤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자-
"…."
다시 또 문을 열어주는 경비원.
일행은 이번에도 얼떨떨해하며 이린을 따라나섰고-
"와…."
누군가가 감탄사를 흘렸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게임, 프렌차이즈, 회사의 이름이 걸려 있는 다양한 부스들이 일정 간격을 둔 채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마치, 초고급 뷔페에 들어선 기분.
장관이었다.
허나, 그보다 더욱 장관인 것.
"한적한 거 보소…."
원래는 콩나물시루처럼 사람으로 빼곡했어야 할 SGF 내부는.
아직 정식 개장을 하지 않아 한산했다.
이린과 두 여자를 제외한 모두가 그런 SGF 내부를 날아다니는 드래곤이라도 본 것처럼 쳐다봤다.
일반인 입장에서 한산한 SGF는 드래곤 만큼이나 판타지스러운 것이었다.
"아니 뭐, 어떻게 한 거야?"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제나를 시작으로, 이린에게 설명을 부탁하는 시선이 집중됐다.
그에, 이린은 덤덤하게 답했다.
"개장 직전 2시간 동안, 관계자들의 원활한 평가를 위한 선행 체험이 허가됩니다."
일행이 요구하던 답은 아니었다.
심지어,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하지만, 구태여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복잡해질 것 같았다.
"어, 잠깐."
최재훈이 머리 위에 전구가 떠오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이린 씨."
"예?"
"설마 이거… 지금 방송 켜도 되나요?"
"지금은 안 됩니다."
"아, 역시."
"어제 상의한 업체의 부스로 가서 입장권-I부터 챙기셔야죠."
"예?"
그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까지 잠깐.
"가능하다고요? 이게?"
이린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숨컷 님에 한해서, 가능합니다. 두 분께는 죄송하지만-"
"아, 됐어."
"감히 기대도 안 했습니당."
그에, 최재훈은 떠올린다.
아까 제나가 했던 말을.
-게다가
-저거 진짜 할 짓이 못 되는 게, 다 의미 없는 개지랄이 될 수도 있거든.
-가끔씩 있는, 치팅 쓰는 비치 년들 때문에.
최재훈은 깨닫는다.
지금 자신이 그 치팅 쓰는 비치 년이 되었음을.
"오우, 쒯."
현실 치팅이라니.
짜릿했다.
* * *
-♪♪♪
"여보세요."
-경훈아, 너 어디야.
"어, 누나. 나? 지금 미용실. 머리랑 메이크업 받는 중."
-지금 몇 신데!
"뭐야. 왜 그래?"
당황한 허나이가 바보처럼 느껴지도록, 김경훈은 태연하게 답했다.
-지금 선행 체험 시작됐잖아. 왜 바로 와서 안 기다리고 있었어.
"아, 그거 뭐 어차피. 내가 조금 늦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
업계 핵심 관계자들의 편의를 위한 선행 체험이 허락되는 스트리머는.
SGF의 대형 부스 중 하나인 리치TV 부스의 책임자인 허나이라는 든든한 백을 갖고 있는 김경훈뿐이었다.
그가 선행 체험에 30분 늦어 봤자, 다른 스트리머들과 비교하면 1시간 30분 빠른 것이다.
오직 그만을 위해 준비된 시간.
김경훈에게 여유가, 자만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에 봤었던 대기방이니 뭐니 하는 바보 같은 곳에 쏠려 있는 수만 명의 시청자.
결국엔 다 자신의 차지였다.
-아니, 알겠으니까! 지금 빨리 와서 방송 켜!
"이씨, 뭐야. 짜증 나게 왜 그러는데."
이어진 허나이의 말에, 김경훈은 표정을 와락 구기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리치TV에 접속하여 검색한다.
SGF.
검색 결과 그 최상단에 위치한 방송의 정보.
방송인, 숨컷.
방송 제목, [미래에서 왔습니다, 지금 SGF 안임]
그리고 시청자.
"…."
41, 301명.
심지어, 실시간으로 오르는 중이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게 가능한 이유.
방송 제목에 이미 나와 있었지만, 그는 구태여 방송에 들어가서 직접 확인한다.
숨컷.
그가 그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색다르게 SGF를 누비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김경훈의 시간을 침범했다.
"씨발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