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가 게임을 잘함-137화 (134/361)

137. 쇼핑

최재훈 일동은 평소 그가 이용하는 대형마트까지 제나의 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권지현에겐 세 번째였다.

자신의 눈앞에서 최재훈이 다른 여자의 차를 타는 것은.

최재훈과 가장 먼저 알게 되고, 가장 가까이 사는지라.

차를 태워줄 기회는 자신이 가장 많았을 텐데도!

권지현이 여유가 충분한데도 차를 마련하지 않았던 건.

한평생을 뚜벅이로 살아오며 불편함이나 필요성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직업 활동이 집에서 게임이고, 여가 활동도 집에서 게임인 그녀에게 차가 필요할 이유가 어딨겠는가.

그런데 근래 들어 권지현은 그 필요성을 더는 없을 정도로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고, 그게 지금 이 순간 마침내 폭발했다.

그녀가 집순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조만간 꼭 산다….'

최재훈을 다른 여자 차에 태우기 싫다.

최재훈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다.

최재훈에게 차(능력)가 없는 여자라 여겨지기 싫다.

수천만 원을 지불하기엔 실로 하찮은 이유였지만.

'여자'라면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헤헤헤…."

그녀는 차를 사기 직전 여느 뚜벅이들처럼.

호감을 갖고 있는 남자를 조수석에 태운 채 석양이 지고 있는 바다를 따라 달리는 상상을 하며 행복에 젖었다.

"…."

그 모습은 마치 간식을 바라보는 골든리트리버 같아서 귀엽기도 했지만.

동성인 제나의 눈엔 기분 나쁠 뿐이었다.

그녀가 표정을 찡그리며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동시에-

-삐빅.

저 멀리에서 제나의 차가 존재감을 표출했다.

뒷 트렁크에 스페어타이어가 달린 유명 SUV 브랜드의 노란색 차종이었다.

"미국스러운 거 보소."

최재훈의 말대로.

미국의 포장되지 않은 거친 황야에서 달리는 모습이 더욱 어울리는 차량이었다.

저런 차를 굳이 전국에 포장되지 않은 도로가 없는 한국에서 탄다니.

여러 가지로 제나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차량이었다.

"어디 탈래?"

"운전석."

제나가 약간의 기대를 담아 한 질문에 최재훈이 답했다.

"오, 니 운전할 줄 알아?"

걷어 올려진 소매.

입에 물린 주차권.

핸들 위에 올린 왼쪽 팔.

그 상태로 몸을 돌려 뒤를 확인하면서 주차를 하는 남자.

남자가 여자 대신 운전을 하는 일이 드문 만큼 보기 힘든.

그래서 더욱 희소하며 가치 있는 여성들의 판타지였다.

권지현과 제나는 최재훈의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면 꽤 큰 대가여도 기꺼이 지불할 의향이 있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기똥이 차지."

"오."

"오!"

"카트레이서 무지개 장갑임."

"…."

"…면허는?"

"무지개 장갑이 면허보다 더 쩌는 건데?"

"알겠으니까 조수석으로 꺼져."

제나는 실망- 하지 않고 오히려 내심 쾌재를 불렀다.

자연스럽게 최재훈을 조수석으로, 그러니까 자신의 옆자리로 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제나가 만족스럽게 운전석에 앉아 최재훈을-

"어?"

기다리는데, 그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선객.

꽃다발이었다.

"이거 뭐야?"

최재훈이 이건 뭐냐며 제나를 바라봤다.

그러자 제나가 소스라치게 당황했다.

그녀가 알기로 최재훈은 능구렁이같이 능청스럽고 또 요망한 남자였다.

저 꽃다발을 보고 단번에 원래 자신을 주려고 준비한 거라고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시치미를 떼고 있다.

십중팔구, 자신을 놀리려고.

"…신경 꺼."

제나는 열이 확 올라서 귀가 빨개지는 걸 느꼈지만 실상은 그 이상이었다.

귀에서 피어오른 불이 얼굴 전체로 퍼졌다.

새하얀 피부가 붉게 물들어 푸른 눈과 대조되었다.

그녀는 권지현이라도 못 보도록 재빠르게 꽃다발을 회수해 트렁크에 봉인시켰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헹."

짓궂게 웃는 권지현과 눈이 마주쳤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

최재훈이었다.

그는 자리에 되돌아온 제나를 보며 음흉하게-

웃지 않았다.

최재훈의 성격에 '남자'였다면 지금 분명 더는 없을 정도로 짓궂게 제나를 놀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남자였다.

여자의 자동차에 있는 꽃다발이 응당 자신의 것이라 유추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 방도가 없는 제나였다.

저 요망- 아니, 능청스러운 남자가 웬일로 가만히 있는 걸까.

도리어 제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트에 도착할 때까지 제나의 상기는 가라앉지 않았고, 특별히 예민하고 또 신경질적이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최재훈은 그냥 평소처럼 지랄병이 터졌구나 생각했다.

* * *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갖는 판타지는 대부분 일상생활과 관련된 것이었다.

지금 이 상황은 분명 그 판타지 안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남자와 함께 마트에서 카트를 끌며 장을 보는 상황!

최재훈의 양옆에 선 두 여자가 판타지 실현의 설렘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반대편에 있는 여자만 없었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뭐, 드시고 싶은 거라도 있으세요들?"

잘생겼으며 남성적으로 매력이 있다는 점 외엔.

'남성'적인 부분이 전무한 걸 넘어서 가끔은 '남자'의 탈을 쓴 '여자'처럼 느껴지는 최재훈이었다.

그를 접하는 여자들은 간혹 기에 눌려 자신이 '남자'가 되어 버린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그런 이미지 때문에, 그녀들은 그의 음식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직접 요리를 하는 모습조차도 상상이 안 되는데, 그가 능수능란하게 요리를 하는 모습은 오죽할까.

그렇기에 최재훈이 자신들을 위해 요리를 해주고 그걸 먹을 수 있다는 데에 의의를 둘 뿐.

그의 손에서 탄생하는 요리가 먹을 만한 정도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할 줄 아는 거 뭐 있는데."

정말 일말의 기대도 느껴지지 않아 무시하는 거라 느껴질 정도의 어조였다.

"나? 뭐, 엘릭서나 만병통치약 같은 거 아닌 이상 어지간해선 다 할 줄 알지."

"하."

최재훈의 자신감에 제나가 거침없이 비웃었다.

"뭐지. 무엇을 암시하는 '하'지. 맞짱이라도 까자는 것인가."

"니가 어지간해선 다 할 줄 안다고? 시리어슬리?"

"못 할 거 뭐 있나, 인터넷에 뭐뭐 만드는 법 검색하면 물 건너 유럽에서 장사하는 3스타 셰프인 호든 다람지 레시피 나오는 세상인데."

그쵸?

최재훈이 그런 표정으로 권지현에게 동의를 구했지만, 돌아오는 건 쓴웃음이었다.

"지현투스 너마저."

"전 재훈 씨 요리라면 뭐든 맛있게 먹을 자신 있습니다!"

"나대지 말고, 할 줄 아는 거나 해~"

기대라곤 1도 느껴지지 않는 그 반응에 최재훈은 오기가 느껴지는 웃음을 지었다.

"그럼 두 분, 못 드시는 거라도 있어요?"

"브로콜리."

"싫어하는 거 말고 못 먹는 거, 임마. 알레르기 같은 거."

"브로콜리."

"뒤졌다, 브로콜리 잔치다. 지현 씨는요?"

"전 딱히 없어요!"

"오케이, 그러면…."

여자들의 표정이 차츰 어두워져 갔다.

최재훈의 카트의 행동반경을 넓게 잡은 탓이었다.

댕장꿍이나 김치찌개 정도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최재훈은 상당히 거창한 재료들과, 낯선 향신료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야, 야. 무리하지 말라니까. 재료들 아깝게."

둘의 불안 담긴 염려를 무시하고 최재훈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녀들이 뭐라건, 그는 지금 자신의 방송을 있게 한 식구들에게 최선을 다해 대접할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상도덕의 신에게 천벌을 맞아 대가리가 쪼개져도 할 말이 없었다.

첫 번째 희생자- 아니, 재료.

최고 등급을 뜻하는 (PRIME) 마크가 붙은, 선홍색 보석.

소고기 모든 부위를 통틀어 가장 비싼 부위 중 하나인 안심 덩어리였다.

"하…."

제나가 곧 희생될 고급 식재료에게 한숨으로써 애도를 표했다.

"고기는 이쯤이면 됐고-"

차례대로 손질된 연어의 살덩어리와, 손질 되지 않은 싱싱한 새우를 담았다.

"아이고…."

어째서 하나 같이 어려워 보이는 식재료들만 고르는 걸까.

권지현은 사고 현장을 보는 듯한 추임새를 넣었다.

그때였다.

"어!"

어떤 남자가 접근했다.

"그, 혹시 삼피 씨… 오! 삼피 씨 맞죠!?"

그는 삼피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와 맞네 맞아! 라고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다.

그에 삼피는 대놓고 귀찮은 티를 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의 삐딱한 성격을 당연한 듯 여기는 걸 보니 정말로 팬인 듯했다.

삼피는 귀찮아하면서도 순수히 그와 사진을 찍어 주고 악수도 해줬다.

"와 대박!!! 실물 진짜 대박!!! 얼굴 완전 작아!!! 콧대 완전 높고, 어떡해!!!"

꺄아악!

남자의 너무나도 '남성'스러운 반응에 최재훈은 오감을 차단하고 속으로 불경을 외웠다.

삼피는, 권지현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에 권지현이 발끈해서 남자에게 말했다.

"저기! 저는 모르시나요?"

권지현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애절하게 쳐다봤다.

"어… 아, 아! 그-"

"네!"

"아! 네! 그!"

남자가 어지간한 인싸인지 눈치 좋게 받아쳤지만, 그와는 별개로 너무 티 났다.

삼피가 코웃음을 쳤고, 권지현의 얼굴에 굴욕에 젖었다.

"와 근데… 누나도 진짜 와… 예쁘시다. 이런 분을 제가 왜 몰랐지~?"

"아, 저도 삼피 님이랑 같은 플랫폼에서 방송하는 권지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녀가 특유의 수더분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하자 남자의 얼굴에 호감이 터졌다.

"아, 그래요!? 아, 미안해요. 제가 방송은 안 보고 미튜브만 봐서. 혹시 미튜브도 하시면 돌아가서 바로 구독할게요!"

그가 권지현과 사진을 찍은 뒤, 그제야 최재훈에게도 관심을 줬다.

"혹시 그쪽 분도…."

"아, 예. 저도 리치TV에서 방송하는 숨컷이라고 합니다."

"와… 대박…."

그가 숨컷의 얼굴을 이 각도 저 각도에서 살펴보더니 둘을 볼 때와는 다른 의미로 감탄했다.

"저기요 형, 아,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어림도 없는 소리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사탄아.'

"물론이죠."

최재훈은 바로 앞에서 '남성'스러움을 뽐내는 남자의 자세에 반쯤 정신이 혼미해져서 답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자'가 덜 남성스럽다는 사실이었다.

키도 작고 화장도 진하고 목소리도 얇아서 얼핏, 아주 잘 얼핏 보면 여자 같았다.

덕분에 남자의 '남성'스러운 태도가 비교적 덜 껄끄러웠다.

"저기요 형, 화장품 뭐 쓰세요?"

"집에 있는 거 대충이요."

라고 하면 경험상 '뭐야~? 재섭성'이라는 반응이 돌아올 게 분명했다.

최재훈은 방송인이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네티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다.

그는 품명과 브랜드를 애써 떠올려 성심성의껏 얼버무렸다.

"오… 그게 이렇게 좋았구나. 아 혹시 형, 설마, 지금 화장 안 한 거예요?"

"예…."

"와… 근데 뭔 피부가… 형 피부 관리 어떻게 하세요?"

이번에도 그는 성심성의껏 얼버무렸다.

그냥 되는 대로 말한 것뿐인데도 남자는 눈을 반짝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 대박. 별로 기대 안 했는데 이렇게 자세히 말해 주시다니. 형, 엄청 친절하시다. 역시 잘생긴 사람들이 마음씨도 착하다니까!?"

"아, 하하하…."

"헐, 근데 형 설마 지금 화장 안 한 거예요?"

"예, 뭐…."

"헐, 그런데 눈썹이 그렇게 진해요!? 그거 혹시 눈썹 문신하신 거예요?"

"네? 아… 그건 의사 선생님이 아니라 저희 부모님께서 애써주셨습니다."

"네? 아핰핰핰!!! 개웃겨! 와, 형 진짜 방송인이긴 방송인이시구나! 와, 이렇게 잘생겼는데 재밌기까지. 진짜 유전자 이기적이다~와~ 형 그러면 무슨 방송 하세요? 그, 뷰티 같은 거 하시는 건가?"

"아뇨. 저 게임합니다."

"게임이요!? 와, 저도 게임 좋아하는데. 동물의 왕국도 하세요!?"

최재훈은 남자의 '남성스러움'과 '인싸력'의 콤비네이션에 마침내 정신이 혼미해졌다.

대놓고 무례했다면 권지현은 몰라도 최재훈과 삼피가 나서서 내쫓았겠지만.

그는 순수한 호의와 호기심으로 셋을 몰아쳤다.

방송인으로서 가장 상대하기 껄끄러운 부류가 아닐 수 없었다.

단체 샷을 찍은 뒤에야 그 기세는 가라앉았다.

"그런데 세 분은 무슨 관계예요?"

"아, 저희 같은 방송인 크루요."

"크루? 아, 팀 같은 거구나. 와~ 비쥬얼 대박. 어떻게 그렇게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끼리만 모였대요? 그대로 아이돌 진출해도 되겠어요. 아 맞다."

그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장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만 원짜리 지폐 세 장을 꺼내 건넸다.

그에 세 방송인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지.

"그 뭐냐, 미튜브 영상 보면 방송할 때 막 시청자들이 후원 같은 거 하자나요?"

"아."

그러니까.

돌발행동의 정체는 바로 후원이었던 것이다.

후원.

팬들이 방송인에게 성의를 표현하는 가장 간단하고도 확실한 수단.

그 액수가 얼마든 간에, 팬들의 구체적인 호의는 방송인들을 기쁘게 만든다.

남자가 내민 삼만 원.

아마도 각각 일만 원.

방송에서였다면 기쁜 마음으로 시그니쳐 리액션을 보이며 성심성의껏 호응할 큰 액수였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렇게 받으니-

기분이 심히 이상했다.

남자의 눈은 순수하게 호의로 반짝이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 괜찮아요. 마음만 받을게요."

"네!? 에이~ 부담스러워하시지 말고~ 아몰랑~"

세 명이 단순히 부담스럽거나 아니면 형식상 거절하고 있는 거라 생각한 남자.

그는 최재훈의 카트에 돈을 올려놓고는-

"형~ 저 진짜 지금부로 형 팬 됐어요! 제 친구들한테도 다 추천하고 다닐게요! 방송 화이팅! 아자아자!"

홀연히 사라졌다.

혼이 쏙 빠진 셋이 정신을 차리기까진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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