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컷
최재훈은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 주이'인 '고전주의'.
"라임 개오지네."
자신에게 완벽한 패배를 안겨준 그와의 재회를.
패배를 설욕할 기회를.
그 바람이 이루어진 지금.
최재훈은 아주 복잡한 심경이었다.
'하필이면….'
고전주의는 분명 최재훈이 가장 만나고 싶은 상대 1순위였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너무나도 많은 게 걸려 있는 이 마지막 판에서.
고전주의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거대한 장애물, 변수였다.
'게다가 진드라라니….'
진드라는 초반 라인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라인전 초강캐였다.
최재훈은 고전주의의 라인전을 떠올린 뒤, 거기에 진드라를 더해 보았다.
텁!
하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흐에!!!!!"
짝짝!
[ㅁㅊ 깜짝이야]
[급발진 뭐고]
[양쪽 뺨에 동시에 모기 앉았음?]
[제가 대신 패 드릴까요?]
최재훈은 그 답답함과 함께 날아가라고 기합을 내질렀다.
하지만 답답함은 그대로.
답답함을 떨쳐내기 위한 또 다른 수단으로 고전주의를 분석한다.
전적 사이트에 그 닉네임을 검색했다.
그렇게 떠오르는 전적창.
[와 파란 거 봐 ㅋㅋㅋ]
[쟤 ㅈㄴ 잘하더만 정신 나갔네]
전적 검색 사이트에 표시되는 최근 10게임이, 전부 파랗게 칠해져 있었다.
프로들이 대거 포진된 그랜드마스터 ~ 챌린저 게임에서 최근 승률 100%.
TC1 팀원들에게나 익숙한 기행이었다.
시청자들이 경악했다.
최재훈도 마찬가지.
"…어?"
허나, 그의 경악은 다른 곳에서 비롯됐다.
'로블랑?'
설마.
최재훈은 떠올렸다.
고전주의의 말도 안 되는 실력을.
거기에.
프로들이 포진된 그랜드마스터 ~ 챌린저 게임에서 승률 100%이 가능한 로블랑에, 진드라를 더한다.
납득이 안 되는 실력.
그리고 특히나 능숙한 로블랑과 진드라.
그렇게 나오는 하나의 가정.
아니-
확신.
"…스"
최재훈이 스스로에게만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머?]
[머라한 거임?]
[야스?]
[ㅗㅜㅑ]
솔로랭크 게임에서만큼은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하고 있던 최재훈이었다.
논외로 치는 '그 사람'을 제외하곤 말이다.
그렇기에.
전면대결을 피하고.
그러니까, 1:1 대결에선 도저히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네 명을 공략하는 로밍으로 승리해 '승부에선 졌지만 게임은 이겼다'고 자위하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사실은.
최재훈에 자존심에, 자존감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그는 그 어떤 프로를 상대하면서도 '전면전으론 절대 안 된다'는 상황에 처한 적이 없었다.
항상 승리하거나, 승리를 노릴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최재훈에게 있어 로밍은 언제나 능동적인 전술이었다.
이처럼 '전면전으론 절대 안 된다'는 상황에 처해 도망치는 형태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최재훈은 완벽한 승리를 원했다.
1:1대결에서 승리한 뒤, 그 뒤에 로밍을 가던가 하고 싶었다.
그래서 첫번째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집스럽게.
저도 모르게.
다시 또 고전주의에게 전면전을 걸어 버릴 것만 같았다.
자존심과 자신감을 위해.
하지만, 자존심과 자신감을 목표로 삼는 행동은 대개 안 좋은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최재훈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고전주의가 '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자존심의 최재훈 : 아 ㅋㅋ 센세면 ㅇㅈ이지]
'그 사람'.
페이스를 상대로 '전면전으론 절대 안 된다'는 상황에 처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레오레에서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페이스와 전면전에서 동등한 입장에 서는 것.
그렇기에 페이스를 상대로 '승부에선 졌지만 게임은 이겼다'라고 자위하는 것 또한.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으면, 오히려 대단한 일이었다.
애당초, 페이스를 제외한 모든 게이머에게 요구되는 방침이었다.
'페이스에게 이길 생각은 추호도 말고, 어떻게 해야 게임이라도 이길 수 있는지 강구해라.'
최재훈은 그걸 할 뿐이다.
상처 입었던 자존심이 언제 그랬었냐는 듯, 완전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미니언이 생성되었습니다.>
"자, 드가자."
그의 마음가짐은 굴욕을 느낀 패배자가 아닌.
포기하지 않는 도전자가 되어 있었다.
* * *
최재훈의 텔론과 페이스의 진드라.
둘의 라인전에서 주도권은 진드라에게 있었다.
페이스의 라인전 실력도 실력이지만, 기본적으로 상성 탓이었다.
텔론의 스킬 콤보 완성은 Q스킬인 '그들식의 외교'로 마무리되는데.
그 Q스킬은 칼을 세운 채 상대방에게 돌진하는 스킬이었고.
진드라의 E스킬인 '염동력 밀치기'는 적을 밀쳐내는 스킬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드라가 E스킬을 찍는 건, 모든 스킬 콤보의 기본이 되는 Q스킬인 염동력 구체 생성을 찍은 뒤.
그러니까, 2레벨이었다.
페드라를 상대로 전면전을 걸어선 안 된다.
하지만, 시도해볼 만하다면, 시도를 해야 했다.
수비만으론 버티지 못한다.
공격의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듯.
최재훈은 1레벨부터 거리낌이 없이 거센 페드라의 견제를 버텨가며-
기회를 잡았다.
먼저 도달한 2레벨!
최재훈의 설계에 따라, 그의 모든 것이 페드라에게 작용했다.
최재훈 텔론의 2레벨 킬각.
아마추어들은 물론이며, 프로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다.
알고 경계해도 "어? 어?"하는 새에 죽어 버린다.
"어!? 어!?"
그 소리를, 페이스가 아닌 옆에서 지켜보던 팀원들이 대신 내질렀다.
정작 당사자인 페이스의 표정은 담담했다.
담담했지만, 그녀 또한 내심 놀란 상태였다.
말 그대로 간발의 차.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와, 이리 화면에서 이렇게 보니까 확실하게 알겠네. 저 사람, 그냥 말도 안 되는데?"
"그러니까, 방금 거 나였으면 100% 뒤졌을 것 같은데."
그건 한마디로 페드라를 죽일 뻔한 거였다.
관전자인 TC1의 선수들이 순수한 감탄을 표했다.
하지만, 어찌 됐건 최재훈의 노림수가 먹히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했다.
모든 걸 쏟아부은 노림수가 말이다.
"아깝네, 방금 거 땄으면 몰랐는데."
"끝났네."
진드라의 레벨이 2가 되고, E스킬이 활성화 되어 본격적인 지옥이 시작됐다.
* * *
[와 시발 뭐야 ㅅㅂ]
[나 가슴 답답해]
[우릴 보는 부모님의 심정이 이랬을까요...?]
[우린 도대체... 지금까지 무슨 짓을...]
시청자들이 고통스러울 정도의 답답함을 호소했다.
숨컷과 페드라의 라인전을 3자 입장에서 보고있을 뿐만으로 말이다.
[숨컷 괜찮누?]
그런데 당사자는 오죽할까.
하지만 숨컷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미칠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
페드라의 라인 관리로 인해.
라인은 철저히 숨컷에게 악의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아주 기본적인 행동을 할 때마다.
그러니까, 클릭 한 번 할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했다.
단 한 번의 거리조절 실패가, 스킬 피격이 데스로 이어질 수 있었다.
매 행동마다 아래로 용암이 들끓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최재훈은 거침없이 외나무다리를 나아가고 있었다.
단 한 개의 CS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페드라의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무리해가면서까지 CS를 챙기는 게 아닌가.
"이해 안 되네."
"그러게."
"잘 하다가 이 판은 왜 저러는 거지."
게임 보는 안목이 탁월한 몇몇 시청자들과, 화면 너머에서 게임을 지켜보고 있던 팀BAY의 선수들이 의문을 표했다.
숨컷의 지금 체력과 마나는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무리해가면서까지 CS를 빈틈없이 챙기려 한 결과였다.
"너무… 급하게 게임하는데."
그게 LKL의 3강 중 하나인 팀BAY의 종합적인 결론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숨컷은 지금 게임을 너무 급하게 하고 있었다.
마치 쫓기듯.
레오레에서 최상의 덕목 중 하나는 안정성이었다.
저런 괴물 같은 진드라를 상대할 땐 더더욱 그랬다.
뭐 하려 하지 말고, 최대한 버틸 생각만 해야 했다.
CS를 포기하고, 체력과 마나를 온존하며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지금 숨컷의 플레이는, 팀BAY의 팀원들.
뿐만이 아니라 게임을 지켜보는 프로 게이머들의 종합적인 판단에 완벽하게 반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지금 진드라의 플레이.
게임을 지켜보는 프로게이머들의 판단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아니, 부합하는 정도가 아니다.
"아니."
"와…."
매 행동마다 자신들의 수준을 넘어선다.
그렇게 감탄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야, 그런데 저 진드라…."
"혹시…."
아무리 말도 안 되는 플레이라도, 그 주인이-
"그년이네."
'그년'이 된다면.
그건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플레이가 아닌, 당연한 플레이가 된다.
숨컷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 그녀들이, 또 다른 결론을 내렸다.
아.
이번 판.
"그 미친 새끼 진짜, 적당히 좀 하지."
숨컷은 패배하겠구나.
반드시.
"아!"
그때였다.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대포 미니언 타이밍.
이번에도 최재훈이 CS를 무리해가며 챙기려 한다.
그렇게 대포 미니언까지 꼼꼼하게 챙기긴 했지만-
"아…."
참사가 발생헀다.
"하, 왜 저렇게 급하게 게임하는 거야…."
누군가가 아쉬운 마음에 지적했다.
그녀들은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잘하던 숨컷이 게임을 왜 저렇게하는지.
대책 없이, 불안정하게.
그러니까, 급하게 하는지.
페이스를 몇 번이고 상대해본 그녀들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페이스를 이기려면 저렇게 해선 안 된다.
페이스를 이기려면-
"…."
어떻게 해야 되지?
그녀들의 사고가 정지했다.
믿음직스러운 팀원들이 없는 상황에서 1:1로 페이스와 적으로 마주했을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가.
그녀들조차도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가 없었다.
그때.
최재훈이 정확히 모인 1000골드로.
정확히 1000골드 아이템을 구매하며 말했다.
-오케이.
그 모습은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렇게."
라고.
* * *
페이스를 상대로 이기려면 라인이 아니라, 라인을 이탈해서.
그러니까 로밍으로 풀어야 한다.
이는 기본적이며 절대적인 전제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로밍의 시작을 어떻게 끊어야 하는가?
[그냥 차라리 지금 로밍가는 게?]
페드라의 거센 압박에 참다 못한 이들이 의견을 표한다.
안 된다.
페이스를 로밍으로 이기려면, 단 한 번의 로밍도 실패해선 안 됐다.
그렇기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에 따라.
첫 로밍은 페이스가 읽지 못하도록.
설령 읽더라도 대처하지 못하도록.
체계적이지만 변칙적이며,
빨라야 했다.
<기동력의 신발을 구매했습니다.>
비전투 상태의 챔피언의 이동속도를 기하급수적으로 상승시켜주는, 로밍의 필수 아이템.
그 가격은 천 골드였다.
지금 이 순간, 진드라를 제외하고 1천 골드 이상을 모은 이는 없었다.
1천 골드를 모으려면-
거의 모든 CS를 놓치지 않고 모아야 했다.
일반적인 라인전에서도 힘든 일이었다.
헌데, 최재훈은 그걸 페드라에게 버텨가며 해낸 것이었다.
대포 타이밍에 지나치게 무리를 해서 죽었다.
의도된 바였다.
대포를 놓쳐서 다음 웨이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아예 먹고 죽는 게 더 빠르다.
또한, 죽으며 동선이 초기화되어 움직임을 읽기가 힘들어진다.
변칙적이게 된다.
지금 최재훈은 체계적으로 최단 시간 안에 변칙성과 기동성을 모두 손에 얻었다.
"어?"
"뭐야?"
"저거 왜 저깄어?"
"언제 간 거야?"
"벌써 기동신이 나왔어?"
김이리의 화면을 지켜보던 TC1의 선수들이, 최재훈의 로밍에 당황했다.
이가 의미하는 바.
최재훈의 로밍은 충분할 정도로 체계적이고 변칙적이며, 빠르다는 사실이었다.
TC1의 선수들에게-
"…."
심지어는 페이스에게 먹힐 정도로.
최재훈의 로밍이 성공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 * *
최재훈의 로밍은 거듭 성공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득을 통해 최재훈이 진드라보다 강해지는 건 아니었다.
라인을 포기하고 얻은 킬이었으니까.
지금 최재훈의 방식은 라인전 패배로 1의 손해가 발생하면.
다른 곳에서 1의 이득을 봐 상쇄시키는 식이었다.
-+0.
반면에 적팀은 -1.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적팀을 약하게 만든다.
그 약하게 만들 수 있는 적팀에 진드라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최재훈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적팀을 약하게 만들 때-
페이스는 묵묵히 라인을 지키며, 자신을 강하게 만들었다.
최재훈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침수시키는 게릴라성 호우라면.
페이스는 국지성 소나기였다.
누가 먼저 적팀을 침수시키느냐.
<승리!>
최재훈이었다.
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캠을 바라봤다.
특유의 미소를 짓더니 이내-
"끼요오오오오오옷!!!!!!!!! 아아아아아앍!!!!!!!! 이이이이잌!!!!!!!!!!!!!! 끼아이아이악!!!!!!!!!!!!!!!!!!!"
광란했다.
그가 한바탕 기쁨의 난리 부르스를 친 뒤, 뒤늦게 무게를 잡으며 캠을 향해 말했다.
"보셨나요?"
[네 발작 일으키시는 거 잘 봤습니다]
[조울증인가요 뇌경련증인가요 뭐든 완치되길 빌겟습니다]
아랑곳하지 않고 거만한 미소를 짓는다.
"이게 접니다."
[방금 그게 진짜 너라니...]
[저런...]
[힘내십쇼...]
[ㅋㅋ 근데 뭐 겜 한판 이긴거 가지고 새삼스럽게 호들갑임]
시청자들은 최재훈 만큼 열광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페드라가 패배했다.
그것도 이 남자에게.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아마, 최재훈이 말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이거죠."
지난 며칠 동안, 하루에 2/3를 컴퓨터 앞에 앉아 보냈다.
허락되는 단 하나의 행동, 솔로 랭크 게임.
언젠가부터 마음 편히 식사도 할 수 없었다.
마음 편히 잘 수도 없었다.
그게 끝났다.
그것도 무려, 페이스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외곬의 최재훈 : 그렇게 이기고 자위하면 좋냐?)
'어!!!!!!!!!!! 존나 좋아!!!!!!!!!!!!!!!!!!!!!!!!!!!!!"
이보다 완벽한 마무리가 있을까!
기름이 올라오고 있는 피부와 머리카락.
더욱 퀭해진 눈가.
하지만, 반짝거리는 눈.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캠을 향해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말한다.
"1주일 안에 챌린저 도달 미션-"
컷!!!!!
시원한 외침과 함께-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