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가 게임을 잘함-129화 (126/361)

129. 고전주의

NETPLUS는 LKL의 열 팀 중, 8위에 해당하는 팀이었다.

명백하게 하위권에 속한다.

PPG는 그런 팀의 미드였다.

그렇다면, 그녀 또한 당연히 하위권에 어울리는 미드라이너인가?

아니.

전문가들이 평가하길, PPG는 개인 기량으로만 따지자면 LKL의 미드라이너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흔히 말하는 소녀 가장.

그녀는 NETPLUS를 지탱하는 에이스였다.

사람들은 말했다.

PPG가 있기에, 그나마 이번 시즌에 8위를 한 것이라고.

"하…."

그런 그녀였기에, 적잖은 충격을 받고 만다.

숨컷.

남자인 그에게 밀리고 있다는 사실에 말이다.

사실, 1:1 구도인 라인전에선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진 않았다.

열세긴 해도, 이 정도면 비등비등하다고 쳐줄 수 있는 수준.

하지만.

그렇게 크지 않은 차이로 차근차근 이익을 쌓아 라인 밖으로 나갈 기반을 마련한 숨컷이, 라인 밖으로 벗어나자 이야기는 급변한다.

도대체 그동안 얼마나 근질거렸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기세로, PPG팀의 빈틈을 빠르게 공략해나간다.

그럼으로써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빠른 속도로 벌어지는 격차.

그 모습에 프로인 그녀조차 혀를 내두르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게임이 체계적이고 또 치밀하게 진행되는 프로 게임에서라면 몰라도.

이곳, 솔로랭크 게임에서 그의 암살을.

폭주를 막는 건 자신조차도 불가능하다고.

그녀는 순수히-

<패배!>

를 인정했다.

하지만.

한 번 졌다고 포기할 정신력이면, 자존심이면.

프로라고 할 수 없다.

'로밍 위주로 게임을 푸니까 챔피언을….'

'플레이를….'

다음번에 만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충분히 이기는 것도 가능하다.

이번 패배로 미션 성공 가능성이 많이 낮아졌지만.

아직은 괜찮다.

그녀는 현실에서 숨컷 같은 미남과 진지하게 게임 이야기를 나누는, 자신이 가진 판타지를 실현시킬 생각에.

그리고 프로게이머로서의 자존심을 회복시킬 생각에.

승부욕과 열정을 불태우며 바로 저격을 재개했다.

"아, 이런."

하지만 보이지 않는 숨컷.

그래도, 다른 저격 대상이 있긴 하다.

숨컷에게 설욕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아마도 현지인일 상대팀 미드를 가볍게 제압하고 얻을 2점으로 만족하자.

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게임에 임한다.

게임이 시작되고 머지않아 PPG의 라인인 미드에서는.

한 쪽 미드가, 다른 쪽 미드를 상대로 승리하는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니지.

승리한다는 말론 부족하겠다.

속된 표현을 빌려서.

한 쪽 미드가, 다른 쪽 미드를-

바르고 있었다.

그 정도로는 표현해줘야 적당한 상황이었다.

PPG가 예상했던 대로다.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그 발리는 대상이 상대팀 미드가 아닌 PPG, 그녀라는 점이었다.

숨컷에게 패배할 때에도, 패배한 뒤에도.

끝까지 전의를 상실하지 않았던 그녀다.

그런 그년데.

지금 단 1데스를 했을 뿐으로, 전의를 완벽하게 상실헀다.

숨컷 때에는 힘겹게나마 그려졌던 '승리'가.

저 미드를 상대로는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빈틈이 없기에 완벽.

완벽하기에 공략불가.

압도적을 넘어서 절대적인 실력차.

절대적인 실력자.

PPG는 느꼈다.

자신은 절대로 '저걸' 이길 수 없다고.

LKL의 5위권 안에 드는 미드인 자신도 '저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프로라면 가져선 안 될 나약한 생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져 버린다.

그럼에도 그녀는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저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고전주의'

닉네임은 알아볼 수 없지만.

닉네임보다도 상징적인 플레이로 확신할 수 있었다.

레오레에서 저런 수준의 라인전을.

저런 수준의 로블랑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프로라고 해도 용서되는 일이었다.

그녀를 상대로 승리하길 포기하는 것은.

프로라고 해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모스트 챔피언인 '로블랑'을 플레이하고 있는 그녀를 상대로 감히 이길 생각을 하는 것은.

페이스.

"아니, 야. 좀 살살해라."

그녀가 게임하는 걸 옆에서 지켜본 TC1의 팀원이 말했다.

"얘 무슨 여기서 로블랑 들고 빡겜을 하고 있어."

방금전 숨컷과의 게임.

라인전에서 자신이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숨컷이 라인전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게임을 고집했다면 게임의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그녀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자극을 받았다.

불이 붙어졌다.

그렇게 전력을 다해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아, 나는 여기서 나가리인 듯?"

"나도, 저격이 너무 안 걸렸다."

"하, 나는 김이리 이 새끼 적으로 만난 게 두 판이나 돼서 조졌네."

"야, 김이리. 너는 어떠냐."

"나? 글쎄."

"아, 뭐한 거야. 계산도 안 하고. 있어봐."

팀원이 전적 검색 사이트에 김이리의 닉네임인 '고전주의'를 검색했다.

오늘 플레이 전적이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의미하는 바, 승률 100프로였다.

그랜드 마스터 ~ 챌린저 구간.

심지어는 프로들이 포진되어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첫판에 숨컷을 만난 이후 줄곧 로블랑만을 플레이하고 있었다.

리그에서도 90%대의 승률을 유지하는 '페블랑크'.

팀원들은 그녀의 말도 안 되는 승률에 딱히 놀라지 않았다.

"어디 보자 이러면 점수가… 오! 감독님, 얘 사실상 미팅권 딴 것 같은데요?"

TC1의 감독인 김한희 또한 여느 감독들과 같이.

선수들에게 반드시 미팅권을 확보할 것을 지시했다.

'이런 탐욕스러운 인간을 봤나!'

팀BAY의 감독인 한시영이 알았다면 필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리그 1위를 한 거로도 모자라서 '어떤 일'에까지 손을 댈 생각이라니.

숨컷을 차지할 생각이라니!

허나, 어쩌겠는가.

김한희는 그녀의 제자인 김이리 마냥 완벽주의적인 경향을 갖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한희.

그녀가 김이리의 뒤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생하셨습니다, 구단주 님."

"…."

김이리는 진지한 어조로 말해진 김한희에 농담에 반응하지 않았다.

"이미 점수 충분하고, 또 아침부터 해서 힘들겠지만. 마지막 한 판까지 힘내 보자,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네."

"고맙다."

툭툭.

머지않아 서칭되는 게임.

"어!?"

적팀 1픽이 텔론을 골랐다.

지난 며칠간 숨컷의 방송을 시청해 온 TC1의 선수들은.

그 텔론이 숨컷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캬~"

"아, 이걸 만나네."

"이 부러운 새끼."

"어쨌거나, 이걸로 마지막까지 저격 성공해서 미팅권 확정인가?"

"나이스."

팀원들끼리 하이파이브를 하며 자축한다.

김한희의 표정 또한 밝아진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가 말했다.

"다들 배고프지? 이거 끝내고 고기 먹으러 가자."

고기.

언제 들어도 짜릿한 그 말에 전율하던 선수들-

"이런, 미친 뭐해!"

중 한 명이 갑자기 기겁을 했다.

"어?"

"왜, 뭔데."

"아니 이 새끼 로블랑 하려고 하잖아."

"뭐?"

"아니 이런 또라이싸이코패스새끼를 봤나!"

"미쳤어!?"

"…?"

김이리가 팀원들의 유난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적팀에서 전판 '페블랑'라는 재앙을 직접 겪었던 이가 [적팀에 개미친 싸이코있음]이라 말하며 로블랑을 벤했다.

선수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김이리를 쏘아봤다.

"야, 미친-"

그녀들이 기겁했던 이유.

그녀들이 알기로.

페이스가 로블랑을 고르는 순간 숨컷의 패배, 미션 실패, 공약에 의한 방송 은퇴는 기정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니 저 사람 방송 인생 쫑내게!?"

"이거 진짜 완전 싸이코패스 아니야!?"

"제발 다른 사람의 고통과 감정을 헤아려 주세요…."

"100100101011101010110101 이렇게 말하면 되냐?"

이내, 김이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용케 난처함을 표했다.

"그러니까-"

"응?"

"지금 나 보고 일부러 져주라는 거야?"

팀원들의 태도는 자신이 이기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았고.

이기지 말라고 하는 건, 져 주라고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 융통성없고 기계적인 사고를 마친 페이스의 반응에 팀원들이 피곤하단 듯 한숨을 내쉬었다.

틀린 해석은 아니었지만-

"너는 중간이 없냐."

그러면 자신들이 프로 입장에서 어뷰징을 사주한 게 돼 버리지 않나.

"임마, 우리 말은. 저쪽 입장 고려해서 융통성 있게, 요령껏 하라는 소리지."

"…그게 져주라는 소리 아니야?"

"하… 아, 그래. 그때처럼 하라고."

"그때?"

일전에 자선행사 때의 일이다.

김이리는 투병 생활 중인 팬과 1:1 미드빵을 해 주었고.

져주었다.

'페이스를 이긴 영웅'으로 만들어 주어.

병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팬은 정말로 병을 이겨냈고.

페이스의 둘도 없는 팬이 되었다.

"그때랑은 상황이 다르지."

김이리의 말 대로.

그때랑은 당연히 상황이 달랐다.

"아니, 우리도 알지."

병에 걸린 팬-

"그때는 솔로 랭크 게임이 아니라 1:1이었잖아."

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 여자 말은.

솔로 랭크였으면 병에 걸린 환자도 봐주지 않고 무참히 짓밟았을 거란 말이었다.

"와…."

"세상에…."

"그분도. 이런 어뷰징 같은 건 원하지 않으실걸?"

팀원들은.

눈앞의 레전드가 갖고 있는 너무나도 청렴(?)한 사고방식에 경의와 어이없음을 표했다.

자신들이 설득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라 판단하고-

"감독님, 뭐라고 말 좀 해주세요."

"음…."

김한희에게도 숨컷이 패배해서 방송을 은퇴하게 되는 건 곤란했다.

선수들과 같이 팬의 입장에서가 아닌, 감독의 입장에서였다.

숨컷이 방송을 은퇴해 버리면 계획에 차질이 생겨 버린다.

미팅권이 생겨 봤자 '어떤 일'에 있어서 아무런 쓸모도 없게 돼 버린다.

'그렇다고 또 이리한테 져주라고 하기엔….'

프로들이 숨컷의 이벤트에 참여했다!

그 소문은 이미 팬들 사이에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팬들은 숨컷과 저격들의 전적을 토대로, 정체 불명 실력자들의 정체를 유추하고 있었다.

'고전주의'가 페이스라는 걸 알아차릴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은, 이번 게임에서 일부러 져줄 경우 페이스의 완벽한 커리어에 오점이 생길 가능성이기도 했다.

자신의 제자의 완전무결한 커리어.

'어떤 일'.

잠시간 고민에 빠져서 그 둘을 저울질하던 김한희가 말했다.

"이리야."

"네."

"니 알아서 해라."

끄덕.

그녀는 '진드라'를 선택했다.

리그에서의 승률 자체는 로블랑보다 낮지만.

라인전 승률만 따지자면, 100%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수치를 자랑하는.

그녀가 로블랑 다음으로 잘 다루는 모스트 챔피언이었다.

"하…."

"미친…."

팀원들이 탄식을 내질렀다.

그렇게, 김이리에게 원망을.

숨컷에겐 애도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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