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코어 아이템
"얘들아…."
"넵!"
"누구 아이디어였니?"
"점다!"
김희은이 씩씩하게 자수했다.
"하…."
그 모습을 보니 두 배는 더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
"희은아…."
"넵!"
"아니, 얘들아…."
"넵!"
"내가 니들을 그렇게 어? 뭐라고 해야 하지? 억압했니? 너희들한테 철저한 금욕을 요구했니?"
도리도리.
"수도승의 삶을 강요했어?"
도리도리.
"그렇지? 아니잖아. 내가 누누히 말했지? 아무거나 해도 좋아!"
다만.
"이야기가 안 나오게 해라! 연애!? 당연히 되지!"
하지만.
"이야기가 안 나오게 해라! 게임에서 어떤 새끼랑 키배 뜨고 싶어!?"
그래!
"들키지만 않으면 돼!"
마치 속력을 내듯, 갈수록 흥분한다.
"사람 죽이고 싶어! 그래!!!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냥!!! 들키지만 마!!! 어!?!"
"오, 들었냐."
"개꿀, 뒤졌다 김희은."
"오늘부터 작업 들어간다."
"감독님, 저희가 죄송함다. 좀 진정하시는 게 어떻겠슴까."
"하… 그래. 미안하다. 요즘 안 그래도 힘들어서… 못 볼 꼴을 보여 버렸네."
한바탕 쏟아낸 한시영은 훨씬 더 지쳐 보였다.
그녀는 최근 업무와 관련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덩달아 숙소 생활을 해야할 것만 같은 살인적인 업무량 때문에?
아니.
도저히 진척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업무 때문에?
아니!
소속사에서 졸라게 쪼인트를 까이고 있던 탓이다!
도대체 뭘 했길래?
선수 관리를 못 했는가? 아니.
구설수가 나왔는가? 아니.
팬들에게서 안 좋은 이야기가 안 나왔는가?
"아니!!!"
결국 방금 게워냈는데 다시 또 폭발해 버린다.
"내가, 어!? 2위를 했다고- 아니지. TC1을 못 잡았다고 쪼인트를 까여야 돼!?! 아아아악!!!!!!!"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히스테리성 비명을 내질렀다.
저번 렐드컵에서 TC1은 챔피언 타이틀 사수에 실패했다.
그에, 구단주가 말하길-
"TC1 폼이 떨어진 것 같으니 이번 시즌은 당연히 우승 노려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 이게 말이야 발이야!?! 너넨 어떻게 생각해? TC1 폼이 진짜 떨어진 것 같아?"
"설마요."
"TC1 폼 떨어지려면 페이스 팔도 하나 떨어져야 할걸요."
선수들이 되려 감독의 멘탈을 케어해주는 기묘하고도 따듯한 광경이 팀BAY의 숙소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TC1 문제가 아니라 중국 새끼들 문젠데!!!"
작년 렐드컵 개최국은 중국이었다.
중국은 한국만큼, 어쩌면 한국보다 더 E스포츠를 사랑하는 나라였다.
게임팬들의 애정은 몰라도 차원이 다른 자원이 투자된다!
그런데 어째서 항상 한국에게 지는가?!
자신들이 개최국으로 참가하는 렐드컵에서까진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를 위해 작년, 중국은 말 그대로 자원을 쏟아부었다.
전세계에서 'SSS급' 인재들을 도저히 거절하지 못할 액수로 데려와.
단 하나의 일정도 없이, 1년 내내 오롯이 렐드컵만을 보고 준비시켰다.
보통 렐드컵에 진출하려면 리그에서 성적을 거둘 필요가 있어 단 하나의 일정도 없이 렐드컵을 준비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지만.
개최국에게 지급되는 시드권이 그걸 가능하게 해줬다.
그렇게, 단 한 번의 렐드컵만을 위해 준비된.
페이스가 없다는 것 빼곤 완벽한 역대급 슈퍼팀이 탄생했다.
TC1이 진 건, TC1의 폼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TC1 상대로 5세트까지 가고 2등 한 거면 충분히 대단한 거 아니냐고!!! 내가 왜 책임을 지고 실적을 내야 하는 건데!!!!!"
"음… 이거 우리 돌려까이고 있는 건가?"
"2등은 패배자라더니. 2등은 패배자라더니."
"뭐야, 니 왜 두 번 말해. 뭐야, 니 왜 두 번 말해."
"어른들의 사정은 복잡하구만."
"하, 아무튼."
이번에야말로 한바탕 게워내고 개운해진 얼굴로 한시영이 말했다.
"감독님이 지금 이렇게 부당한 상황에 처해 있어서 많이 힘든데. 너네까지 날 힘들게 할 거라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너네'라고 하지만, 한시영의 시선은 김희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김희은이 팀원들의 눈치를 본 뒤, 시무룩해져서 고갤 끄덕인다.
"감독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슴다. 여기서 그만두겠슴다."
"하, 그래. 고맙다."
김희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어도 난처하게 만들진 않는 착한 아이였다.
한시영이 감독일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행운은, 그녀를 발굴해낸 것이었다.
덕분에 팀BAY안에서 한시영의 목숨은 꽤나 질겼다.
툭툭.
한시영이 흐뭇한 얼굴로 김희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도대체 뭔 일이냐 희은아. 뭐 때문에 애들 다 불러다가 이 난리를 피운 거야."
"그게…."
김희은의 이야기를 듣던 한시영의 귀가 쫑긋거렸다.
"잠깐."
"-넵?"
"누구라고?"
"어, 뭐가 말씀이심까?"
"그 미팅권 준다는 방송인 말이야."
"숨컷, 임다만?"
숨컷.
눈동자를 우측 상단으로 향한 채,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린다.
'어디서 들었더라 저-'
"어?"
이내 눈과 입이 동그래진 한시영이 숙소를 뛰쳐나갔다.
곧장 사무실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는다.
문서들을 뒤진다.
그렇게 발견한다.
숨컷.
화면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그 이름이 맺혔다.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한 얼굴이었다.
"이!!! 이!!! 기특한 자식들!!!"
"넵?"
"엥?"
다시 또 부리나케 숙소로 돌아온 한시영.
그녀가 선수들에게 달려들어 일일이 거세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특히나 김희은을 격히.
"아이고 사랑스런 내 새끼!!! 내 마음을 어떻게 그리 잘 아는 거야!!!"
"아아악!!! 왜 그러심까!!!"
"희은아!!!"
"네!?!"
"꼭 따라!"
"네!?"
쓰다듬에서 해방시켜준 뒤 말한다.
"꼭 따라고, 그거."
미팅권.
"…갑자기 무슨 일이심까…?"
"내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다!"
"지원, 임까?"
"일단, 내일 연습 다 캔슬! 자유시간! 그러니까, 오늘 그거 마음껏 해! 밤새워서 하고! 내일 푹 쉬어! 영화 보러 가고 싶다 했었지? 가! 뭐, 게장 먹고 싶다 했었나? 데려가 줄게! 좋다! 우리 오늘 이거 기분 좋게 성공시키고, 내일 놀러 나가자!!!"
"""오오오!!"
""
고대하던 일정이 담긴 자유시간의 언급에 선수들의 눈이 빛난다.
"그리고 그, 뭐냐. 너희 이번에 워크샵에 일본 가고 싶다 했지!?"
"어어어!!?!"
"설마!?!"
"이거 성공하면, 오케이! 내가 본사에 강력하게 건의해 볼게! 안 된다고 하면!!! 내 사비 털어서라도 보내준다, 일본!!!"
"와아!!!"
"대박!!!"
"기모찌이이!!!"
"축제다!!! 김희은을 매달아라!!!"
"갑자기 뭠까? 무슨 바람이 부신 검까?"
갑자기, 가 아니었다.
한시영.
그녀는 이번 시즌에서 '겨우' 2위 밖에 안 되는 '초라한' 성적을 거둔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어떤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한시영뿐만이 아니다.
리그가 끝나면 1등 팀을 제외한 대부분의 팀이 성적에 불만을 갖기 마련이다.
LKL 감독 중 눈칫밥을 먹고 있는 이는 한시영뿐만이 아니라는 소리다.
한시영을 비롯한 LKL의 감독 대부분이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그 '어떤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다른 감독들을 제치고 그 '어떤 일'에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어 부진을 만회하려면.
간당간당한 모가지를 부지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있었다.
숨컷.
그였다.
며칠 전.
'어떤 일'로 귀를 곤두세우고 눈을 밝히고 있던 감독들이.
숨컷이 삼피와의 합방에서 보여줬었던 매우 인상적인 플레이를 발견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길-
이거다!
숨컷만 있다면 '어떤 일'에서 다른 감독들을 제치고, 성과를 거두어, 부진을 만회할 수 잇다!
지금 다른 감독들도 똑같은 걸 보고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터!
그녀들은 쫓기듯 신속하게 행동했다.
곧바로 수소문해 숨컷에게 연락을 넣었다.
제목 : 팀 BAY 감독 한시영입니다 비지니스 관련해서 문의 드립니다
제목 : 팀 BULLS입니다 숨컷 님께서 관심 가지실 만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목 : 숨컷 님께서 NETPLUS 이용자라고 들었습니다! 저희 팀 NETPLUS에서 문의드립니다!
제목 : 콜라의 HEPSI! LKL의 HEPSI입니다!
간절한 감독들로부터 메일이 빗발쳤다.
제목 : 팀 TC1 입니다
그중에는, 다른 감독들이 알게 된다면 '이런 상도덕 없는!' '탐욕스러운 인간을 봤나!'라고 반응할 메일도 있었다.
TC1은 반칙이지 않나!
게다가 눈칫밥도 안 쳐먹고 있으면서!
다른 감독들에게 답장이 오는 일은 없었다.
TC1 때문은 아니었다.
최재훈이 중요한 미션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이린의 때문이라 해야 할까, 덕분이라 해야 할까.
때문에 감독들은 안달이 나도 단단히 나 있는 상태였다.
혹시 다른 팀에서 채간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고도 직접적으로 숨컷과 대면할 수 있는 미팅권의 존재는, 침을 흘리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는- 아이템이었다.
단풍 이야기의 일비 표창도!
태풍의 나라의 해골 갑옷도!
키트라이더의 솔리드R4도!
월드 오브 워의 천하무적도!
린에이지의 집행검도!!!!
이만큼 갖고 싶지는 않았다!
감독들의 눈이 돌아갔다.
아주 특이한 날이었다.
"감독님 재량으로 너희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줄게!!! 제발 부탁이니까!!!"
"꼭!!! 꼭 따내야 된다!!!"
"진짜, 내 운명이 너희한테 달려 있다!"
"우리 진짜 여기에 목숨 걸어야 된다."
어느 순간부터, LKL의 프로팀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감독님."
"응?"
"게임 하면서 느꼈거든요."
"뭘?"
"이거 지금, 저희 말고 다른 애들도 참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쟤네 상대로 이기려다 하다 보면 모스트 챔피언 뽑아야 되고, 빡겜해야 될 것 같은데. 그러면 팬분들이 저희 알아보지 않을까요?"
"들켜도 돼!!!"
"그냥! 너희는 하나만 생각해!"
미팅권.
숨컷을 쟁탈하라!
'그렇고 그런' 차림으로 '그렇고 그런' 방송을 하는 방송인도 아니고.
아주 건전한 후드티 차림으로, 아주 건전하게 게임을 플레이 할 뿐인, 아주 건전한 방송인이다.
선수들이 그런 방송인의 팬으로서 만나길 희망한다고 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엄격한 팬은 없을 것이다.
뭐, 몇몇 남성 팬들은 불만을 표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일'을 위해서라면 그 정돈 감수할 수 있다!
"너희만 믿는다."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는 최재훈의 미션에 간절한 염원들이 얹혀졌다.
"아니, 진짜 지랄 났네."
최재훈으로선 속이 더부룩할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이 간절한 염원들을 대변하듯 높아져 버린 게임의 수준이.
하지만-
"뭐, 그래도-"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승리!>
지난 7일 간의 대장정.
할 수 있는 몸 고생, 마음 고생은 다 했다.
<패배!>
더 고생해 봐야 티도 안 날 만큼.
그러니.
기왕 힘든 거, 아주 끝까지 존나게 힘들어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과를 거두는 게 낫다.
저격들과의 구질구질한 드잡이질.
무난한 양학.
그리고-
<승리!>
정체불명 고수들과의 치열한 경기.
[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쳤다 무쳤어!!!]
[적당히 잘해 숨컷 ^^ㅣ발 역겨우니까!!!]
지난 7일간 공들인 작품의 마무리 데코레이션으로 뭐가 가장 좋은지.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어차피, 성공할 거니까.'
의식하지 않고 있지만.
최재훈은 어느새 호승심 가득 섞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높은 수준의 경기에 불이 제대로 붙었다.
도전 종료까지 앞으로 2시간.
그리고 +4승.
<승리!>
아니, +3승.
1판이라도 패배한다면 사실상 미션 실패.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