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롈룡인
"진짜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무히려 좋아."
"아, 그 이상한 말투 좀 쓰지 말라니까."
"엄."
"아니, 근데 농담이 아니라. 리그에서도 이 새끼 솔킬 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그니까."
"구단주님 제발요!!! 저 사람 영입 좀 해주세요!!!"
"지갑 좀 열어줘요!!! 통장에 5조5천억 있잖아!!!"
"감독이든 코치든 미드 주전이든 뭐든 좋으니까 영입 좀!!!"
"저 그럼 TC1이랑 종신계약 맺을게요!!!"
"뼈를 묻겠습니다!!"
팀원들이 농담식으로 페이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팀원들의 모습에도 페이스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고민에 잠기더니, 이내 고갤 끄덕인다.
"확실히. 라인전 기량만 보면, 우리 팀 주전으로 뛰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긴 해."
"오!"
"오!?!"
"오!!!"
팀원들이 눈을 밝힌다.
말을 이어가던 페이스가 그녀들을 쳐다보더니, 눈을 껌뻑이곤 말했다.
"그런데 이거 농담 맞지?"
"아."
"예."
김이리.
적 미드뿐만이 아니라, 분위기를 죽이는 데에서까지 정점인 그녀였다.
팀원들에게서 나온 감상은, 숨컷이 잘생긴 남자라서 다소 과장된 면이 있었다.
"그런데, 진짜 잘하긴 해. 다른 챔피언은 어떻게 하나 궁금하네."
하지만 페이스, 그녀에게서 나온 감상은 성별과 외모의 여하를 떠나 순수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선수.
부모님과 치킨 다음으로 존경하는 존재.
그런 존재가 자신에 대해 그렇게 평가했다는 걸 알았다면 최재훈은 그 즉시 감동을 받아 환희에 울부짖으면 팬티를 찢었을 것이다.
"후…."
하지만 알 길이 없다.
지금 그는 환희가 아닌 답답함에 울부짖으며 팬티를 찢고 싶은 기분이었다.
인정한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의 실력은 분명 비범하다.
최소한 프로 1군이겠지.
하지만.
그래도 납득할 수 없다.
솔랭에서 만큼은!
자신이 라인전에서 누군가를 이기지 못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더군다나, 자신은 쟈드고 상대방은 주이다.
적이 페이스라도 되지 않는 이상,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라인전에서 저 주이를 완벽하게 이겨야 한다!
더는 없을 정도로 강렬한 투쟁심!
그게 최재훈의 사고를 지배했다.
그렇게, 그의 이성은 다소 흐려졌다.
최재훈의 라인전은 분명 프로씬을 통틀어서도 손에 꼽지만, 그의 진정한 강점은 라인을 벗어났을 때에 비로소 발휘됐다.
최재훈에게 라인전은, 라인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과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페이스.
그녀에게 있어 라인전은 시작이자 끝이였다.
다른 편법 따윈 필요 없다.
절대적인 실력으로 초지일관 상대방을 찍어누른다.
최재훈은 대전 룰을 잘못 고른 것이다.
알아서 자신의 영역에서 나와, 상대방의 영역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만약.
최재훈이 상대방 미드가 페이스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자신이 라인전에서 상대방에게 안된다는 사실을 순수히 인정하고.
자존심에 사로잡혀 고집을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패배!>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듣도 보도 못한 이에게 라인전으로 승부를 걸었지만 패배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앍!!!!!!!!!!!!!!"
그 사실에.
최재훈은 분함에 몸서리쳤다.
[저격 없으면 뭐요? ㅋㅋ]
[현지인한테 라인전 졌누 ㅋㅋ]
[그것도 쟈드로 주이한테 ㅋㅋ]
[??? : 어쩔 수 없잖아. 이 구간에서 우리 둘이 듀오하면 거의 생태계 파괴 수준이니까]
[생태계를 파괴시키는 데엔... 참 다양한 방법이 있네요. 견문이 넓어지는 기분입니다.]
[숨아가는 아가야... 지켜줘야돼]
[숨컷 힘내!!!]
[현지인한테 발리는 숨컷이지만 그래도 사랑해!!!]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발!!!!!!!!!!!!!!!!!!!"
최재훈은 자신의 부족함을, 상대방의 뛰어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한다.
자신의 패배였다.
상대방의 라인전은, 자신의 라인전보다 뛰어났다.
그러니까.
다음번에 만나면 라인전을 고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강점을 십분 살려 상대할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불이 붙었다.
최재훈이 곧바로 게임 서칭에 시작했다.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렇게 게임이 서칭되고.
최재훈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어? 우리 계속 듀오하는 거야?
게임에 져서 또다시 최재훈의 눈치를 보느라, 저도 모르게 말투가 유해진 삼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맞당."
서칭을 취소했다.
-아.
괜히 말했다!!!!!!!!!
그런 외침이 들리는 듯한 외마디였다.
타임 앤드와 포빌라의 듀오 저격에 응수하기 위해 결성한 듀오다.
타임 앤드와 포빌라의 저격 확률이 낮아졌는데도 계속 듀오를 이어간다면, 미션에 성공할 경우 딴지를 거는 불편충이 등판할 공산이 높았다.
더군다나.
솔로 랭크 게임은 서칭 인원이 많을 경우 형평성을 위해 듀오는 듀오끼리 서칭해주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듀오를 해제한다면 타임 앤드 포빌라 듀오를 맞닥뜨릴 확률이 줄어든다.
"어? 잠깐."
-응?
심지어는 저번 판 만났던 미드 정글 듀오를 맞닥뜨릴 확률까지.
"하…."
리벤지를 바라고 있던 최재훈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가장 우선시 해야할 건 미션이니까.
사적인 감정 때문에 우선순위를 헷갈려 일을 그르쳐선 안 된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또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
-웬 한숨? (나랑 헤어지는 게) 그렇게 속상해?
방금 전의 한숨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언제 눈치를 봤냐는 듯.
또 다시 평소의 기고만장한 어조로 되돌아온 제나가 말했다.
"응."
속상했다.
제나랑 헤어짐으로써 방금 전 미드를 만날 확률이 낮아지는 게.
-어….
그걸 모르는 제나로선 당황할 따름이었다.
"지금까지 진짜 수고 많았어. 꼭 보답할게. 나중에 보자. 아, 잠깐. 너도 나 저격한다 했었나?"
-어, 응….
"그래? 그러면, 게임에서 다시 만나자고. 기왕이면 적으로다가."
최재훈이 화면을 향해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안 보이는 곳에서 얼굴이 빨개진 제나가 묵묵히 듀오를 해제하고, 게임 서칭에 시작했다.
최재훈도 마찬가지.
이내, 서칭되는 두 번째 게임.
"크~ 클린띠."
대저방충이 아군에도 적군에도 보이지 않자 최재훈은 흡족하게 박수를 쳤다.
게임이 참으로 클린하다며 좋아했다.
"?????"
하지만 잠시 뒤.
"아니, 오늘 게임 상태 왜 이러지?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되고 머지 않아.
최재훈을 비롯한 '정상급'플레이어들이 지금 이 구간대에 일어난 이변을 본격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게임마다 양팀에 한 명씩은 끼어 있는 정체불명의 실력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설마…?'
정체불명의 실력자들.
그들끼리 서로를 상대해야 하다 보니 정체를 숨길 수 있을지언정, 실력까진 숨길 도리가 없었다.
공식 일정으로써 수시로 다른 프로팀들과 연습 경기를 하는 정체불명의 실력자들, 프로들이었다.
한 번이면 몰라도 연달아 두 번.
연관성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출되는 결론.
LKL.
대한민국 레오레의 정상.
이는 곧, 세계 레오레의 정상을 뜻하기도 했다.
그런 집단에 소속되어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만큼, 다른 소속원들을 존중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그녀들이.
남성 스트리머 한 번 만나 보겠답시고 우르르 몰려든 동종업계 종사자들의 행태에 탄식을 쏟아냈다.
"""""" 이런 미친 성욕의 노예들을 봤나. """"""""
예외도 있었다.
숨컷 저격에 성공한, LKL 8위 팀인 NETPLUS의 미드 라이너 PPG였다.
그녀는 지금 동종업계 종사자들에 대한 아낌 없는 실망을 내비추는 대신.
"아니."
숨컷에 대한 아낌 없는 당황을 내비추는 중이었다.
"뭐지?"
숨컷.
그가 잘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허나.
매우 일반적인 사고관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기에, 그 사실에 편견이 끼어 있었다.
'남자치곤'이라는 편견이.
그러니까, 숨컷을 '남자치곤' 잘한다고 알고 있는 PPG였다.
그런데-
'이 정도였다고?'
그녀가 직접 만난 숨컷은.
페이스와의 대결로 한창 달아올라, 초지일관 자신의 페이스로 몰아치는 최재훈은.
단순히 '남자치곤'잘하는 게 아니었다.
"이건 아니지, 시발."
도저히 인정하기 싫었지만.
강제로 인정을 주입시켜 버린다.
<승리!>
"후…."
최재훈은 서로의 플레이를 접할 기회가 많은 프로들과 달랐기에.
아직 사태 파악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게임 수준 갑자기 왜이렇게 됐냐 ㄷㄷ]
현재 구간의 평균적인 수준이 상승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급격히.
[삼피쉑 팽하니까 바로 이기누 ㅋㅋㅋ]
[나 삼핀데 ㅇㅇ 내잘못 맞다 ITS THE FUCKING MY FAULT]
[아 ㅋㅋ 기왕이면 적으로 만나자 한 이유가 이거였냐고]
[아니 근데 게임 수준 갑자기 높아진 것 같은데?]
[그니까]
[이번판도 적팀 미드 장난 없던데 ㄷㄷ]
[타임앤드 포빌라 상대할 때랑은 또 다르네]
그 말대로.
솔로 랭크 게임에서만큼은 프로들 못지 않은 실력자인 타임 앤드와 포빌라를 상대할 때와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이는 대리 기사와 프로게이머의 게임을 임하는 태도의 차이였다.
대리 기사는 돈을 벌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농락하고.
프로는 무수히 많은 관중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최고가 되기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관람자 입장에서 둘 중 어느 쪽의 플레이가 더 재밌을지는 굳이 비교할 필요도 없었다.
"하."
플레이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타임 앤드와 포빌라를 할 땐 기계와 게임을 하는 것 같았는데.
이제야 좀 게임에서 사람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게임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최재훈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 이게 게임이지. 이게 게임이-"
아군3- 뽀뽀뽀뽀
"-냐?"
* * *
"시발…."
BULLS 듀오와 만난 키스키스 듀오.
결과는 너무나도 당연한 듯이 키스키스 듀오의 참패.
[전체] : 정직하게 돈 법시다 ^^7
[전체] : 그렇게 해서 돈 벌겠어요? ㅋㅋ
둘의 전적을 검색하고, 현지인이 아닌 부캐 대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불쾌한 기분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부캐라는 걸 알았지, LKL 3강팀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숨컷에 이어서 '어차피 자신보다 못한 상대'에게 거듭 져버렸다.
그녀의 짜증이 극한에 달하려던 찰나-
"어?"
아군1 - 치킨킹치킹
기대도 않고 있던 저격이 성공했다.
'쳐발라'서 주제파악을 시켜줄 수 있도록 적팀으로 저격했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겠지만.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다.
아군으로 저격에 성공한 이상 숨컷은 반드시 지게 되어 있었-
"…."
는데 닷지를 해 버리는 숨컷.
-♪♪♪
동시에 훌리는 휴대폰.
딱 봐도 숨컷.
받을 이유가 없었다.
-어 존나 닷지하면 되지롱~~~ 설렜지 쌉븅신딸딸쌀싸리야~~~~ 약오르지롱~~~
정말로, 받을 이유가 없었다.
최재훈은 반드시 방플을 하고 있을 키스키스에게 방송으로 말하면 그만이었으니.
최재훈이 캠을 향해 중지를 번갈아 내밀며 엉덩이를 씰룩이고 있었다.
'시발놈….'
이것도 나쁘지 않다.
닷지하면 점수도 깎이고, 5분 동안 게임 서칭이 제한되니까.
그렇게 가까스로 스스로를 달래는 키스키스에게-
"어?"
-어? 시발!?
아군2 - 치킨킹치킹
두 번째 행운이 찾아왔다.
닷지 두 번째부터는 무려 10점이 차감되며, 30분동안 게임이 제한된다.
외통수였다.
닷지를 하든 말든, 웃는 건 결국 키스키스였다.
입꼬리가 올라간 그녀가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응?
최재훈이었다.
"아, 아까 연락주셨었는데 못 받아서요. 무슨 용무신가요?"
한껏 거들먹대는 목소리.
-와, 이거 진짜 얼탱이 없는 싸이코 새낄세.
최재훈이 기가 차서 코웃음을 쳤다.
[개역겹네 대리충 새끼]
[^^ㅣ발년 진짜 뭐하냐 아이엇 저 벌레 새끼들 안 잡아가고]
[아 이제야 좀 재밌어지려고 하는데]
쏟아지는 비난.
허나, 지금의 키스키스에겐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좋았다.
승리자의 입장에서 듣는 패배자가 짖는 걸 듣는 기분이었다.
-하… 시발….
아랑곳 않고 진행되며 시작에 다가가는 게임.
진퇴양난에 빠진 최재훈이 힘없이 웃었다.
-어쩔 수 없네요. 이거 저 때문에 저격당한 거, 팀 분들까지 지게 할 수 없으니까 그냥 제가 닷지할게요. 죄송합니다.
결국 조금이라도 나은 패배를 선택한다.
패배자의 모습이 된 최재훈.
그에 승리감을 느낀 키스키스의 얼굴이 희열에 젖었다.
받았던 걸 되돌려주기 위해, 그녀가 본격적으로 입을 털려던 찰나였다.
"어?"
동시에, 최재훈이 닷지를 하려던 찰나였다.
키스키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녀가 닷지를 한 것이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전개.
"너, 뭐하냐?"
최재훈이 그렇게 전화기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
키스키스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못했다.
그녀의 사고는 정지된 상태였다.
화면에 떠오른 창을 보고 그렇게 되었다.
<계정 비활성화>
-비정상적인 게임 이용 내역이 확인되어 플레이어 님의 계정이 비활성화 되었습니다.
계정을 복구하시려면 [여기]를 확인해 주세요.
세상은 당연한 듯이 부당하고 불공평하다.
그런 이치에 따라, 교묘하게 활동하는 대리 기사인 키스키스의 제재는 요원하기만 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런 이치에 따라, 프로게이머들은 레오레에서 일반 유저들과 비교하여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 특별한 대우 중 하나.
'리포트 최우선 검토 대상'이었다.
프로들의 리포트는 최우선적으로 검토된다.
지난 5분 간.
그렇게 최우선적으로 검토된 리포트만 약 수십 개였다.
그건 이미 'LKL의 뜻'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런 LKL의 뜻이, 정의를 원하고 있었다.
귀한 시간을 할애해서 이벤트에 참여하는 '높은 분'들의 시간을 빼앗은 죄는 컸다.
키스키스는 "설마."를 되내이며, 자신의 본 계정에 접속해 보았다.
<계정이 정지되었습니다>
-사유 : 대리 게임, 어뷰징, 고의 트롤.
-기한 : 1, 000년.
삼피 때와는 달리 담백하며, 단호한 통보였다.
"…."
창을 본 키스키스가 망연한 표정으로 굳어 버렸다.
[플레이어님의 리포트가 검토되었습니다.]
[대상 - 키스키스]
[검토 결과 - 계정 1, 000년 이용 제한]
"천년~~~이 가도~~~ 넌 접속할 수 가 없어~~~ 대리 어뷰징 없음 이기지도 못하는 병신이기 때 문에~~~~"
창을 본 숨컷이 기쁨에 겨워 열창했다.
[개사 조까치 하네]
[ㅈㄴ 못부르누]
[오빠 제발 입을 안 열면 안 될까?]
게임의 수준이 높아졌다.
대리 어뷰징 없음 이기지도 못하는 병신들이 낄 수 없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