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정모 3
"오."
서울 중심지 번화가의 한복판.
거리를 왕래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런데도 최재훈은 저 멀리서 오고 있는 여자가 편집자, 이린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통화로 들었던 사무적이고 이지적이여서 딱딱한 목소리와 딱 들어맞는 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재훈은 이린이 통화 당시 방구석 폐인 모습 그대로였다면, 그녀를 절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원래는 관리 안 되어 너저분한 인상을 주던 더벅머리였다고 믿어지지 않는 단정한 올림머리.
목이 늘어난 데다가 얼룩이 묻은 흰 티셔츠에 검은 팬티(갈아입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냄새 한 번 맡아 보고 결국 갈아입음) 차림의 패션은 깔끔하게 수트업을 마친 상태였다.
망토처럼 어깨에 걸쳐진 코트 아래, 맞춤형으로 제작된 수트가 그녀의 몸매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치마가 아닌 바지.
하이힐이 아닌 정장 구두.
마지막으로 가죽장갑에 칼같이 각진 사각 테 안경까지.
방에서의 모습과 완벽하게 정반대되는 각잡힌 모습.
"아니, 세상에 시발 누구세요."
만약 최재훈이 방에서의 모습을 먼저 접했다면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하게 했을 이중적 모습을 가진 이린이, 최재훈에게 다가갔다.
"…."
가까워지는 이린의 무감정한 표정에 금이 가려 하고 있었다.
최재훈, 숨컷을 실물로 접하는 게 기뻐서?
아니.
그녀 스스로는 '방송인 만나는 게 처음도 아니고.'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최재훈 옆에 서 있는.
동생으로 추정되는 여자들이었다.
[제 동생도 좀 데려가도 되나요?]
숨컷의 그 문자를 본 이린은 곧바로 납득했다.
숨컷이 오늘 겪은 일을 고려해 보면.
여동생 입장에서 만류하거나 동행하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무슨 단체로….'
그런데 세 명이나 오는 건 과연 어떨까 싶었다.
수틀리면 집단폭행이라도 하려는 생각일까.
심지어 최재훈을 닮았다고 해야 하나.
하나 같이 미인-
'어?'
이라 생각했는데.
점점 가까워지며 얼굴이 자세히 보이게 되자 이상을 느낀다.
숨컷의 동생 같은 걸 일전에 봤을 리가 없는데, 여동생 중 두 사람이 익숙했다.
낯익었다.
그게 이상했다.
'방민아랑 권지현?'
편집자라 쓰고 인터넷 방송 죽순이라 읽는 그녀였기에 더욱 가까워지자, 단번에 알아보고 일치시킬 수 있었다.
두 사람과,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두 방송인을 말이다.
'방민아랑 권지현이 숨컷의 동생이었다고!?'
같은 멍청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저 인간들이 왜 여깄어.'
최재훈의 바로 앞에 선 이린은 그런 의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최재훈이 이해한다는 듯 쓰게 웃으며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편집자 님 맞으시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손을 내민다.
악수를 위해 곧장 내민 이린의 손이 가는 도중 멈추곤 다시 돌아왔다.
쓰윽-
장갑을 벗고 악수하기 위해서였다.
'기본적인 예절이니까.'
라고 스스로는 생각했지만.
그녀가 이러한 기본적인 예절을 지키는 건 몹시 드문 일이었다.
"반갑습니다, 숨컷 님. 편집자 이린이라고 합니다."
"이, 린이요?"
"이, 린 입니다."
"아아~ 이름 멋지네요."
숨컷이 씨익 웃었다.
반면에 이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는데, 맞잡은 손을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흔들고 있었다.
그러고 있자니 적대적인 쪽으로 강렬한 시선이 느껴진다.
출처는 진짜 여동생으로 추정되는 미녀였다.
그제야 이린은 손을 놓았다.
"뭔가 떼거지로 몰려와서 놀라셨죠?"
"예."
무표정한 얼굴로 무례하다 느껴질 정도로 단호하며 솔직하게 말한다.
그런데도 무례하단 느낌을 받지 않는다.
최재훈을 비롯한 네 명은 이린의 캐릭터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최재훈이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이린이 선수를 쳤다.
"일단. 들어가시죠."
"네? 아, 예."
* * *
이린이 지정한 식사 장소.
그녀가 평소 자주 방문하는 고급 일식당에 들어선다.
가게 내부 곳곳에 목재 특유의 색감과 질감이 곳곳에 묻어 있다.
덕분에 일본 전통 가옥 특유의 아늑함을 자아냈지만, 그러면서도 세련미를 물씬 풍긴다.
""오왕….""
대놓고 고급을 표방하여 인테리어에서부터 고객(의 지갑)을 압도한다.
그러한 식당에 방문해 본 경험이 극히 드문 최재훈 남매가 영화 세트장에 견학을 온 학생들마냥 빛나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다른 이들은 그런 둘을 각기 다른 표정으로 흐뭇하게 바라봤다.
안내에 따라 예약실에 들어선다.
커다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자리.
최재훈과 최재은이 나란히 앉았고.
이 자리를 주선한 이린이 주저 없이 최재훈과 마주 앉는 자리를 차지했다.
다음으로 최재훈과 가까운 그 옆자리는, 최재훈과 최재은을 안락한 승차감으로 장소까지 데려다준 방민아가 차지한다.
북치기 박치기 저질 비트박스를 한 권지현은 자연스레 외딴 자리에 유배당한다.
"와, 그런데."
의외로 가장 먼저 운을 뗀 건 방민아였다.
붙임성 충만한 인싸 아니랄까 봐 초면인 이린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붙인다.
"여기, 어떻게 예약하셨대."
방민아가 알기로 이 식당은 국내 일식 마니아들에게 성지에 가깝게 취급되는 곳이었다.
일식의 주재료인 해산물의 질이 부득이하게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서울의 지리적 특성에도, 일본 현지의 탑클레스 식당들과 비견되는 일식당.
더 이상 신규 고객을 받지 않아 기존 고객들을 대상으로만 운영되는데도.
예약이 최소 3달은 밀려 있는 식당이었다.
수차례 이곳에 방문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한 전력이 있는 방민아가 뜻밖의 부수입에 들떴다.
"개인적으로 연이 있는 식당이라."
"오…."
그런 방민아가 호들갑을 떤다 느껴질 정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이린에 모습이 순수하게 감탄한다.
"헤에엑."
그러던 와중 옆에서 들러오는 소리.
최재은이 메뉴판을 보고 낸 소리였다.
-오빠.
-엉.
속닥거리기 시작하는 둘.
-튀자.
-엉?
-여기 가격 정신 나갔음.
-뭐, 얼만데.
-아니, 진짜 정신 나갔음 그냥. 일식당이라 엔 써서 그런가, 공이 하나씩 더 붙어 있어. 이것 봐.
채지윤이 메뉴판을 보여주자 최재훈이 여유롭게 피식 웃더니 말한다.
-아, 뭐. 이 정도야.
-오오옹?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여동생.
최재훈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존나 조땠다.'
그가 봐도, 메뉴판엔 공이 하나씩 더 붙어 있었다.
'우리 둘에 민아 씨랑 지현 씨 것까지 계산하면….'
[자산관리의 최재훈 : 그래. 몇 달 동안 매일마다 치킨 먹을 바에는 이런 데에서 한 끼 조지는 게 훨씬 합리적인 소비지. 니 의견을 존중하고, 앞으로 잘해 봐라. 난 목매달아 뒤질 거니까]
내면의 비명이 뇌에 울려 퍼졌다.
그때, 둘을 말없이 바라보던 이린이 툭하고 내뱉는다.
"숨컷 님."
"네?"
"계산 제가 할 예정이니까 부담 느끼지 말고 편하게 식사하세요."
"…네? 아, 아니. 그건 좀."
옆에서 최재은이 귓가에다 쎄게 속삭였다.
-뭐해!? 빨리 감사합니다 하고 머리박아!
-아니, 이 비싼 걸 어케 얻어먹어… 염치가 있지….
-염치는 있는데 돈은 없잖아!
-힝.
"제가 권했으니까, 제가 대접하는 게 도리죠. 이 이야긴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죠."
그런 둘의 속닥거림을 또 단호하게 종결시킨다.
"오…."
이린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던 최재은이 속삭인다.
-이 사람 오빠가 말한 대로 믿을 만한 사람 같은데?
-오빠는 너의 믿을 만한 사람 판단 기준이 걱정스럽구나 덩상아.
-아니, 이런 비싼 걸 흔쾌히 사 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겠어? 당연히 믿을 만한 사람이지.
솔직히, 돈 없는 착한 사람 보다, 돈 많은 나쁜 사람이 낫다. 인정?
-캐피탈리즘 안에서 이루어지는 풍요롭지 못한 라이프가 너를 몬스터로 만들었구나. 오빠가 빨리 성공해서 구해줄게, 조금만 기다려.
"아. 두 분에게도 해당되는 얘깁니다."
이린이 옆의 두 분, 방민아와 권지현에게도 말했다.
"네? 하, 저는 됐어요."
"아, 저도 정중히 사양하곘습니다."
방민아와 권지현이 여유롭게 거절했다.
돈도 '여자의 가오'도 부족하지 않은 둘이었다.
둘에게 숨컷 앞에서 다른 여자에게 얻어먹는 일이란 있을 수 없었다.
최재훈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지만 둘과 같이 '여자의 가오'가 부족하지 않은 그였다.
그는 생각했다.
'난 걍 닥치고 있어야지.'
'여자의 가오'즉, 남자의 자존심이었다.
그것의 무게는 지갑의 무게와 비례했다.
지금 최재훈의 지갑의 무게는, 실리를 위해 자존심을 기꺼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웠다.
* * *
코스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식사.
"으으음~"
속을 전부 고급 참치 회로 채운 호화스러운 김밥.
두 피스 중 남은 하나를 입에 집어넣은 최재은이 입을 오물거리며 기분 좋은 소릴 낸다.
"맛있어?"
"나 치킨보다 맛있는 거 첨 먹어 봐."
"그 정도야? 그래, 많이 무거라."
최재훈이 두 피스 중 남은 하나를, 비어 있는 최재은의 접시에 갖다 줬다.
"오, 앗싸."
아무런 생각 없이 입에 집어넣고 냠냠거리는 최재은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최재훈.
자연스러운 아빠 미소.
이상적인 부친, 남편감의 모습을 반대편이 앉은 여자들이 또 각기 다른 표정으로 흐뭇하게 바라본다.
지금의 최재은에게 자식의 모습을 투영시키는 아가씨까지 있었다.
그녀들은 상황을 대강 이해했다.
최재훈은 엄청난 여동생 바보다.
그러므로 최재은, 그녀의 마음을 공략하는 게 곧 최재훈의 마음을 공략하는 게 될 것이다.
"재은 학생. 여기, 제 것도."
김밥을 다 씹어 넘긴 뒤 아쉬운 얼굴로 빈 그릇을 바라보는 최재은.
방민아는 이때다 싶어 김밥 한 피스가 남은 그릇을 그녀에게 건넸다.
"괜찮은데요."
하지만 정색을 하며 선을 긋는 최재은.
열렬한 팬을 자처했었던 피시방 대회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다고 이리도 차가운 태도.
오늘 채지윤 건 때문에 한창 날이 서 있는 상태에서.
오빠와 방민아의 관계가, 방민아가 방송인의 입장을 이용해 집적대고 있는 거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앗, 넵."
방민아가 시무룩해져서 김밥을 입에 넣었다.
"…."
상황을 살피던 권지현도 조심스럽게 나머지 김밥을 입에 넣었다.
지금까지 느낀바, 최재은이 방민아와 자신을 똑같이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재은에 철벽에 두 여자가 좌절하고 있을 때!
이린이 옆의 미닫이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대기하던 직원을 부르곤 말한다.
"방금 후또마끼 한 줄 통째로 갖다 주세요."
"오오옹…."
거침없는 이린의 모습을 두 명을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온도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눈을 빛내는 최재은.
그리고 그런 최재은을 흐뭇하게 쳐다보는 최재훈.
"자, 그럼. 숨컷 님."
"아, 저 편하게 불러 주시면 됩니다!"
아마도 최재은에게 잘 해 줘서겠지.
최재훈이 적극적이고도 호의적인 자세로 이린을 대한다.
'아.'
'으.'
둘은 그런 흐름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자신들은 철저한 불청객.
이곳은 철저하게 이린의 플레이 그라운드.
손가락 빨며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괴로웠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감사합니다."
"아, 옙."
"슬슬, 이야기를 진행할까 해서요."
"아, 네."
"자리 비켜드릴까요?"
방민아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말고 볼 일 보십시오."
분명 사무적이고 냉정한 태돈데, 왜일까.
호쾌하게 느껴졌다.
'태도의 냉정함이 경지를 넘어서면 쿨함이 되는 건가.'
최재훈이 저도 모르게 고갤 끄덕였다.
"일단 숨컷 님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넵, 뭐죠."
"향후 제 업무 방침에 관하여입니다. 숨컷 님께선 일부 편집자들이 업무를 직책에 따라 편집에 한정시키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방송인의 성장을 돕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도리도리.
"간단하게 말하자면, 매니저형 편집자를 말하는 겁니다."
"아."
"왜 이 이야기를 꺼냈냐면. 저 또한 매니저형 편집자로서 편집에 그치지 않고 다방면으로 숨컷 님을 서포트해드리길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 일을 해결해 주셨던 것처럼요?"
"그렇습니다. 오늘 일처럼, 업무 관계를 편집에 한정시키지 않고. 미튜브 채널과 방송까지 확장시켜서. 그에 관하여 서로 의견을 나누고 논의하는 형식으로 말입니다."
"솔직히 저야 좋긴 한데…."
음.
최재훈이 생각과 말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그 경우, 계약 조건이 어떻게 되나요. 주로 임금 문제에 관해서요."
"여기-"
서류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건넨다.
"계약서 가져가서 자세히 검토해 보신 뒤, 의견 말씀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아, 네."
계약서를 받으면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이내, 위화감의 정체를 눈치챈다.
남녀역전에 이은 고용역전.
고용주는 난데 오히려 내가 계약서를 건네받은 것이다.
뭐.
고용주 입장에선 이게 더 편하긴 하다.
누구 고용해 보는 건 재은이한테 심부름시키고 용돈 줘본 게 전부라, 고용주 입장이란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무튼 편함.
"그리고 허락만 해 주신다면, 아직 계약이 성사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숨컷 님께 의견 드리고 싶습니다만. 괜찮으실까요?"
"아, 네. 물론이죠.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동시송출을 잠시 미루셔야 할 것 같습니다."
허가가 나오는 동시에 무덤덤하게 풀악셀 밟는 특유의 화법으로 해 오는 말에, 최재훈이 눈을 꿈뻑였다.
"…머라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