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정모 2
재은이는 끝까지 내가 채지윤을 참교육시켰다는 말을 믿지 않아 채지윤에 대한 분을 억누르지 못했다.
여동생이 오빠가 여자한테 일방적으로 쳐맞고 돌아왔다 착각하고 화내고 있는 상황.
오빠 된 입장에서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저게 다 나를 위해 화내주는 거라 생각하니.
'우리 재은이 씩씩해진 거 보소.'
결과적으론 귀엽고 기특해서 뿌듯할 따름이다.
"아, 맞다. 혹시 엄니랑 아버지한테도 말했어?"
"아니, 일단 나만 알고 있었지."
"두 분껜 뭐라 말씀드리고 온 건데?"
지금 시각 7시.
겨울이라 밖은 벌써 어둡다.
"잠깐 너 보고 온다고. 아무튼. 니 괜찮은 것 같으니까, 나 간다."
"어딜 가 이 자식아~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땐 어림도 없지."
"아~ 쫌!!!"
가려는 재은이를 또다시 낚아챘다.
대롱대롱.
"아 뭔데. 뭐 어쩌자고. 아니 근데, 얘 힘 왜 이렇게 쎄. 너 진짜 복싱 배운 거야?"
"온 김에 자고 가 이 자식아. 캄캄한 밤에 어딜 위험하게 싸돌아댕기려고."
"아, 뭘 또 위험하대. 겨우 7신데."
"히히 못 가."
"하, 씨."
대롱대롱.
"일단 좀 내려놔 봐."
"자고 간다 하면 내려주지~"
"아, 알겠으니까 좀."
손맛이 너무 쌉오져서 몇 번 더 대롱대롱해준 뒤에야 내려줄 수 있었다.
똑똑똑!
"재훈 씨!"
그때, 또다시 들려오는 노크와 목소리.
다시 험악해진 얼굴.
"누구세요."
재은이가 가서 문을 열고 공격적인 어조로 말했다.
저거 나 지켜주겠답시고 저러는 건가?
귀여워 죽겠네, 진짜.
"어, 에?"
지현 씨였다.
여기서 현관 쪽은 보이지 않지만,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예상이 되는 목소리였다.
"그쪽은 누군데요."
잠시 뒤.
따라서 공격적인 어조가 된 지현 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기 싸움.
중재할까 하다가 일단은 그냥 냅두기로 했다.
여자들이 나 두고 싸우는 상황은 언제 봐도 짜릿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아싸찐따가 권력을 갖게 되면 이리도 음습해진다.
"자기 집에서 나온 사람이 불청객한테 누구인지를 밝혀야 돼요?"
이게 왜 니 집이야.
내 집이지.
아 잠깐, 이제 내 집도 아니지 참.
"그르르르르…."
"그쪽 집이요? 어…."
낙심한 수준으로 기세가 꺾인 지현 씨의 목소리.
"그래서, 누구시냐고요."
"저… 윗집 사는 권지현이라고 하는데요…."
"그래서요. 윗집 사시는 분이 무슨 볼일이세요."
갑작스럽게 무너진 균형.
재은이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형태가 되었다.
"아, 그… 재훈 씨 걱정돼가지고…."
"뭔 걱정이요. 우리 오빠랑 무슨 사이신데요."
"우리 오빠…."
의미심장하게 되새긴다.
"예?"
"아니, 그… 저… 이상한 사이는 아니고… 그냥 이웃입니다."
"그냥 이웃인데 이렇게 밤에 불쑥 찾아온다고요?"
"아니, 그…."
재은이 개쎈 거 보소.
목소리를 들으면 끙끙거리는 골든리트리버가 연상될 정도로 지현 씨를 몰아붙인다.
양심에 찔려서 슬슬 중재에 나서기로 했다.
"어, 지현 씨! 웬일이세요."
"재훈 씨."
상상한 대로의 얼굴.
"아뇨 그… 여친 분 오해 풀어 드리는 중인데…."
그런 얼굴로, 상상치도 못한 말을 해 왔다.
"네? 여친이요?"
그 단어에 재은이가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끼며 재은이의 팔짱을 꼈다.
"자기야."
"으아아악!!! 미친놈아!!!"
기겁해서 팔을 빼는 재은이.
"어…?"
그런 우리 둘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본다.
"지현 씨, 여쪽은 제 동생 최재은. 재은아, 이쪽은 내 윗집 사시는 권지현 씨. 나 방송할 때 많이 도움 주신 분이야. 인사드려."
"뭐?"
재은이가 날 노려봤다.
'기가 차네, 그걸 왜 이제서야 쳐 말하는 건데.'라는 소리가 들리는 얼굴이었다.
"동생이요?"
눈을 몇 번 깜빡깜빡.
"아!"
그러더니 확연히 밝아진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아, 전 또. 워낙 미인이셔가지고 당연히 재훈 씨 여자친구 분이신 줄…."
"우리가 잘 어울리긴 해요."
"아 씨, 꺼져."
헤헤헤.
긴장이 풀렸는지 특유의 웃음을 짓는 지현 씨.
"그나저나, 지현 씨. 웬일이세요."
"아, 그. 저 재훈 씨 걱정돼가지고…."
"아."
지현 씨 귀에도 들어갔나 보다.
"아이고…."
내 뺨을 쳐다보더니 탄식을 터뜨린다.
"괜찮으세요?"
"영상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괜찮습니다. 잘 해결됐어요."
고개를 끄덕인다.
"다행이네요… 아, 동생분은 오빠 분 걱정돼서 찾아온 거고요?"
"그렇다네요."
"아이씨, 머리 만지지 마."
왠지 모르게 안도한 듯한 얼굴의 지현 씨였다.
그때.
탁탁탁탁-
다급하게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설마.
"재훈 씨!"
이번엔 민아 씨가 두두둥장 했다.
버스터 콜을 조지지도 않았는데 삼대장이 모여 버렸다.
나는 무슨 천룡인이라도 되는 건가.
"어?"
재은이를 보고 잠시 멈췄다가 이내, "아!"하는 표정을 짓는다.
"재은 학생! 오빠 분 걱정돼서 오셨구나!"
"방민아?"
니가 왜 여기서 나오냐는 반응이었다.
"여기엔 웬일이세요?"
얘 민아 씨 팬 아니었나.
날이 선 태도로 대한다.
"아니 그, 재훈 씨 소식 들어서 걱정돼가지고…."
재은이가 그런다고 또 주눅 들어서 답하는 민아 씨.
"걱정된다고 집에 찾아왔다고요? 왜요? 아니, 그보다. 어떻게요?"
"아니 그게…."
"예전에, 올삭빵 할 때. 잠깐 서로 돕고 도왔었잖아."
이번에 또 재은이가 추궁하고 민아 씨가 발리는 그림이 되자 중재에 나섰다.
"아니, 아는데. 그거랑, 집에 찾아오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뭐, 약속이라도 한 거야? 만나기로?"
"그건 아닌데."
"그러면 뭐야. 민아 씨."
"예?"
대회 때와는 확연히 다른, 거리가 느껴지는 태도.
"우리 오빠한테 관심 있어요?"
"어…."
"시청자한테 개인적으로 그렇게 접근해도 되는 거예요?"
"어………."
그러게.
어………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나도 도와주고 싶은데, 뭐 어떻게 할 말이 없네.
'지현 씨 표정 보소.'
그런 둘의 모습을 좋아라 구경하는 권지현씨.
역지사지 못 하는 양반일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 맞다.'
편집자 님이랑 대화 중이던 게 떠올랐다.
이런 명분이 있으니, 나는 무책임하게 핸드폰 세계로 도피하기로 했다.
[죄송해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됐습니다]
[이린 : 아 네]
[이린 :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린 : 지금 방송 킨다고 하셨잖아요?]
[옙]
[이린 : 일단 보류해 주셨으면 해서요]
[네?]
[이린 : 숨컷 님, 지금 혹시 시간 되시나요?]
[시간이요?]
[이린 : 자세하게 설명 드리고 싶고]
[이린 : 그 외에도 나눌 이야기가 많아서]
[이린 : 가능하면 한 번 찾아봬서 업무상 이야기 자세하게 나누고 싶어서요]
[이린 : 오늘 경황이 없어서 아직 저녁도 못 드셨을 텐데]
[이린 : 기왕이면 식사하면서]
[이린 : 어떠신지]
"어…."
아까 임금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 때처럼 또다시 채지윤의 일이 떠올라 PTSD가 도졌다.
이거 뭐, 국룰이라도 되는 건가.
편집자는 얼굴 마주 보고 이야기해야 하는 거.
'뭐, 그래도.'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띠껍기까지 한 채지윤도 만났는데.
믿음직스럽고 일 잘하는 우리 편집자님 못 만날 이유가 있겠는가.
[지금 만날 수 있으려나요?]
그나저나, 지금 시간이 되려나.
7신데.
[어디서 만나실 건데용?]
지정된 장소는 서울의 중심지라고 할 법한 번화가였다.
이곳에서 아주 가깝지는 않지만, 아주 멀지도 않다.
[그럼 한 시간 정도 뒤 거기서 뵙시다]
그렇게 만남이 성사됐다.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와서.
"그러고 보니 그쪽, 권지현 씨도. 생각해 보니까 방송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네?"
"그쪽도 우리 오빠 시청자로 만나서 사심 갖고 접근하는 거예요?"
"…넹?"
어쩌다가 다시 또 재은에게 뚜까 맞고 있는 지현 씨.
그리고 안 어울리게 잔뜩 위축되어 경청하고 있는 민아 씨.
세 사람에게 말했다.
"여러분?"
이목이 쏠린다.
"저, 잠깐 약속 생겨서 어디 좀 다녀올 테니. 제 집에서 사이좋게 영화라도 보고 계실래요? 치킨이랑 피자시켜 드림."
"…."
"…."
"…."
세 명이 시선을 마주친다.
"아니, 야."
"어?"
"뭐. 뭔 약속."
"새 편집자 님이랑 일 이야기 나누기로 해서."
"편집자?"
그 단어에 발작을 일으킬 듯 반응한다.
"아, 진정해. 채지윤 그 쉑 아니니까."
"아니, 야. 너는 도대체가 생각이- 오늘 그 일이 있었는데, 또 편집자를 직접 만나겠다고? 남자야?"
"여잔데요."
"하…."
재은이가 답답해 죽겠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 돼. 그냥 전화로 얘기해."
"…."
나까지 재은이한테 두들겨 맞게 됐다.
눈 앞에 창이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네.'
가 아니지.
"아니, 재은아. 이 사람은 괜찮아. 믿을 만한 사람이야."
"채지윤도 그런 생각으로 만났을 거 아니야."
"아니, 걘 처음부터 좀 시원찮았어."
"그런데 만난 거라고?"
"설마 정신 나간 미친 싸이코쏘시오패스패스 범죄자일 줄은 몰랐지."
"아, 됐고. 못 만난다고 해. 그 인간도 이상하네. 왜 굳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쟤."
"그러게요."
"저도 재은 학생-"
찌릿.
"이 아니라, 동생 분 말씀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 친구들 눈엔 내가 위기의식 없어서 위태로운 아가씨쯤으로 보이는 걸까.
어떡하지.
완고해 보이는데, 나 걱정된다는 사람들 때려눕히고 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
이러면 되려나.
[편집자 님]
[이린 : 네?]
[혹시, 그]
[제 동생도 좀 데려가도 되나요?]
[오늘 일 때문에 저 걱정된다고]
[혼자서 보낼 생각을 안 하네요]
[식사비는 제가 지불할 테니]
[이린 : 아]
[이린 : 네 그러세요]
[이린 : 편하신 대로 하세요 전 괜찮습니다]
"덩상아."
"어?"
"저녁 묵었니?"
"갑자기 왜."
"오빠가 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가자꾸나."
"뭐? 어딜?"
"저녁 먹으러."
"편집자랑?"
"응."
재은이가 날 물끄러미 쳐다봤다.
"진짜 그 사람은 괜찮은 거야?"
"쫄?"
"하, 그래. 가자. 가."
이, 이 단순하고 귀여운 쉑.
"아, 그…."
조심스럽게 끼어드는 민아 씨를 재은이가 쏘아 본다.
"동생 분, 괜찮으시면 제가 태워드릴까요?"
계속 쏘아본다.
"제 차 그건데…."
민아 씨 스포츠카의 차종이 언급되자, 재은이의 귀가 씰룩였다.
"타보고 싶지 않으세요?"
"저 운전해 봐도 돼요?"
"그건 좀… 제가 잘 모셔다 드릴게요."
민아 씨의 차가 스포츠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재은이의 철벽이 무너진다.
얘도 '여고생'이라 이건가.
'딱 기다려라, 오빠가 돈 많이 벌어서 사 줄게.'
그렇게 우리는 민아 씨의 차로 향했다.
우리.
지현 씨도 따라온다.
재은이가 째릿 노려보자, 지현 씨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트박스라도… 할까요?"
* * *
생각보다 대기시간이 길어져 다시 사건 해결 상황을 재검토하는 동시에, 편집을 하고 있던 이린.
라톡!
드디어 다시 들려온 그 소리에, 신속하게 핸드폰을 집어든다.
대화가 이어지고-
[이린 : 숨컷 님, 지금 혹시 시간 되시나요?]
이린은 편집을 시작하게 되면 항상 방송인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팬이 아닌 편집자로서 방송인에 대해 더욱 자세히 파악하는 동시에, 향후 협업의 방향성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오롯이 사무적인 이유에서였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라고, 이린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평소와 달리 들떠 있는 상태라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자를 확인했음에도 도저히 돌아올 생각이 안 하는 답장.
'부담스러운 건가? 아, 잠깐.'
이린이 뒤늦게 떠올렸다.
최재훈이 오늘 겪은 불미스러운 일이, 채지윤과 직접 대면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부주의했다.
이린이 드물게 당황해서 첨언하려던 찰나-
[지금 만날 수 있으려나요?]
[편집자 님 지금 어디신데용?]
그렇게 만남이 성사됐다.
[혹시, 그]
[제 동생도 좀 데려가도 되나요?]
[오늘 일 때문에 저 걱정된다고]
[혼자서 보낼 생각을 안 하네요]
[식사비는 제가 지불할 테니]
* * *
이린.
그녀가 외부 할동을 할 때의 사무적이고 단정한 이미지에 딱 맞는 검은색 대형 승용차를 타고 향한 곳은.
그녀의 단골인 고급 일식당이 위치한 건물의 주차장이었다.
그 건물의 앞이 약속장소다.
차를 주차하고 약속장소에 향하는 그녀를 멀리서 반기는 숨컷.
"…."
처음 접하는 숨컷의 실물에 이린은 넋이 나가서 생각했다.
와.
정말로.
동생이 많으시구나, 하고 말이다.
최재훈의 옆에는 여자 세 명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