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편집자 채지윤 3
좀 더 험악해진 표정과 목소리.
그에 최재훈은-
"아."
뭔가를 이해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제가 그쪽을 놀렸다고요?"
"말 돌리지 마시고요. 놀린 게 아니면 뭔데요 그게."
"아 그거 말하시는 거구나. 지원서 아주 인상 깊었다고. 채널 관리 맡겨드릴 의향 있다고."
"그거 말고요. 아니, 그거도 맞긴 한데."
"채널 맡겨드릴 의향 있다고 한 거 기분 나쁘셨어요?"
"아니, 당연히. 그런 식으로 말하시면 기분이 나쁘죠."
채지윤은 걸려들었다며 집요하게 추궁하고 들었다.
하지만.
최재훈이 시치미를 떼고 있어서 느끼지 못한 것일 뿐, 걸려든 건 그녀 자신이었다.
"아… 농담하신 게 아니었구나."
"뭐요?"
"아니, 저한테 그렇게 적어놓으셨잖아요. 기억 안 나요? '채널 관리해드릴 의향 있다' 대놓고 재수 없는 말이라 당연히 농담하신 건 줄 알고, 그대로 따라한 거였는데… 기분이 나쁘시다고 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양 시치미를 떼고 있던 그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듣기에 기분 나쁜 말을 진심으로 저한테 하신 건데…."
그렇게 피식하고 조소를 지었다.
'이렇게 말하면 뭐라 씨부릴래?'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위압적이고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해도, 조금도 겁먹지 않는 최재훈에게.
채지윤은 더이상 당황하지 않았다.
'시발놈, 안 맞을 거 알고 드럽게 깝치네.'
대신 생각했다.
간혹 있다고.
이런 부류.
여자가 자기 떄리지 못할 걸 알고 깝치는 사내놈들.
채지윤은 최재훈에게 겁을 주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적어도 지금 이 장소, 공공장소에선 말이다.
그녀가 돌변해서 익살스럽게 웃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농담~이겠죠? 에이, 하나도 안 놀라시네, 재미없게."
최재훈이 싱긋 웃었다.
농담이 재밌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닌 듯 했고.
채지윤에겐 "븅신." 그렇게 말하는 듯 느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정색할 것만 같아서 말을 돌린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평소 작업 멘트의 운을 뗀다.
"일단, 저에 대해선 알고 계시죠?"
"사실, 잘은 모릅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설명해 드려야지. 자 여기 보시면-"
채지윤은 핸드폰 화면에 개헤엄들의 채널을 하나하나 띄워가며 최재훈에게 보여줬다.
"여기 이, 미튜버 분들 이미 알고 계시는 분들일 거예요. 맞죠?"
넘치는 자신감.
채지윤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하지만 최재훈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글쎄요…."
"예? 이분들을 모르신다고요? 아~ 재훈 씨 막 방송 시작해서 이쪽 업게 아무것도 모르시는구나~ 뭐, 사실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요. 중요한 건, 이겁니다."
채지윤이 핸드폰을 거두고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시킨 뒤 말한다.
"구독자 적게는 20만에서 많게는 50만까지 보유한 이 초대형 미튜버 분들. 다 저를 만나기 전까지는, 지금 재훈 씨처럼 구독자가 없거나 아예 채널 자체가 없었단 거죠. 그러니까, 이 채널들. 다 제가 키운 겁니다. 어때요?"
"오, 대단하시네요."
최재훈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 채널의 주인들.
그러니까, 개헤엄들에게.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우쭐거리던 채지윤이 만족스럽게 고갤 끄덕였다.
"그 대단한 사람이, 이제부터 재훈 씨의 채널을 관리해드리려고 합니다. 어떠세요?"
"저야 영광이죠. 그러면 그, 임금. 계약 조건 같은 건 어떻게 되나요."
"아~ 그, 재훈 씨는 보통 편집자 게약 조건 같은 거에 대해 잘 모르고 계실 것 같은데. 맞죠?"
'아니, 존나 잘 알고 있는데?'
권지현과 방민아에게 조언을 듣고, 직접 조사까지 해 본 최재훈이었다.
그런 그가 말했다.
"조사해서 어느정도 알고 있기는 한데…."
짐짓 자신없는 분위기로 말했다.
그러자 채지윤이 웃었다.
제딴에는 친절해 보이도록 지은 웃음이겠지만.
어딘가 음흉하게 느껴졌다.
"에이, 그 인터넷에서 말하고 다니는 애들 다 알지도 못하고 얘기하는 거예요."
"아, 그래요?"
"솔직히, 걱정하셨죠. 편집자 임금 생각보다 쎄서."
"예, 뭐."
"편집일이 보기엔 간단해 보여도~ 엄~청 힘든 거거든요. 방송인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게임하면서 놀기만 하면 되는데, 이거 편집은.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화면만 보고 있어야 되거든요."
"그렇게 따지면 방송인들도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화면만 보고 있는데 얼빠진 것아."
채지윤의 말을 들은 최재훈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 버릴 뻔했다.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화면만 보고 있다니.
그런 식으로 말하면 편집자나 게임 방송인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물론.
최재훈도 이미 알아 존중하고 있는 바였다.
편집이 얼마나 고되며 전문적인 직업인지.
안 그런 직업이 어딨겠냐마는.
사실, 채지윤의 발언에서 정말로 문제 있다고 느낀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방송인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게임하면서 놀기만 하면 되는데.'
악의를 갖고, 듣고 기분 나쁘라고 의도해서 한 말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의도하지 않고.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저런 발언을 했다는 게 되니까.
방송일에 대한 근본적인 멸시가 느껴지는 발언을 말이다.
방송일에 대한 멸시가 사고방식 기저에 철저히 깔려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채지윤에게.
다른 일도 아니고 방송 전문 편집 일에 종사하는 그녀에게, 과연 그건 어떨까 싶었다.
방송인을 멸시하는 편집자라니.
'보면 볼수록 신비로운 새낄세.'
"미튜브 채널 수익 나오기까지 한참 걸리는데, 그때까지 일일이 돈 주기에 아깝다고 생각하셨죠?"
"아니 뭐 그렇게는…."
"에이, 아니긴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저는 어디까지나 팬으로서! 방송인분들을 도와드리는 겁니다. 그렇기에! 돈은 일절! 받지 않습니다."
최재훈이 깜짝 놀랐다.
이번은 연기가 아닌 진심이었다.
'뭐지?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싶었다.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쓰셔도! '저 혼자서!' 다 해 드리는 겁니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예 괜찮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편집이 얼마나 수고로운 일인데."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오…."
최재훈 안에서 채지윤에 대한 인상이 차츰 바뀌어가고 있었다.
태도가 심히 맛탱이가 가서 그렇지, 본질 자체는 바른 사람이라고.
아니.
바른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멋진 사람이라고.
팬심 하나만으로 조건도 안 보고 일하겠다니.
그 자체만 놓고 보자면 너무 이상적이라서 이상할 정도의 편집자였다.
그런 최재훈의 반응에.
채지윤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정하고도 다감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일도 제가 '혼자서' 다 하고 채널도 제가 '혼자서' 다 키워드릴게요."
"재훈 씨는 그냥, 이름만 빌려주시면 되는 겁니다. 바지사장 같은 거죠. 이해하셨죠?"
"그러니까, 재훈 씨는 아무것도 안 주셔도 돼요."
"그냥 인정만 해 주시면 됩니다."
"'혼자서' 채널 다 키운 제 노력을 인정해 주시고, 채널에 대한 지분만 나눠주시면 되는 겁니다."
"어때요?"
특정 단어가 강조, 반복되는.
마치 최면과 같은 장문의 말이 드디어 끝났다.
"아…."
그러자 최재훈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정신이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친절해 보이던 채지윤의 미소.
다시 보니 더없이 음흉해서, 마치 약을 탄 음료를 건네는 범죄자 같은 얼굴이었다.
'이렇게 하는 거였구만.'
이게 채지윤의 방식이었다.
함정을 보기 좋게 꾸며서 사냥감을 유인한듯이.
유창한 말 솜씨로 미튜버 유망주들을 속여서 유인한다.
그렇게, 차지한다.
채널의 지분을.
최재훈이 알게된 바.
미튜브 영상 편집의 단가는 영상 길이에 따라 적게는 5만 원에서, 크게는 수십만 원까지 간다고 한다.
하지만, 대형 채널이 아닌 이상 평균적인 단가는 약 10만 원대에 머문다.
채지윤의 제안은 그런 10만 원대의 노동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달콤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배풀어 놓고 선심 쓰듯이 챙겨가는 대가.
채널의 지분.
한마디로 채널 수익에 대한 지분이었다.
"그러면 그 수익 배분은 어떻게 되는 거죠?"
"재훈 씨가 아무리 바지사장이라지만 그래도, 사장은 사장이잖아요?"
"아무리 제가 채널을 혼자서 다 키웠다고 해도! 최재훈 씨는 제 사장이 되는 겁니다."
"아니지, 공동 창립자라는 표현을 쓰겠습니다."
"그러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반만!"
"겨우 반만 챙겨주시면 됩니다."
"일은 제가 다 하는데, 그 수익의 반을 재훈 씨가 챙겨가는 거죠!"
"어때요!?"
참, 말 유창하게 잘 한다.
말만 들으면 정말로 그런 것 같다.
말만 들으면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해 놓고.
아무 대가도 안 치르고.
채지윤이 '혼자서 키운'채널의 지분을 반이나 '나눠 받는' 엄청난 기회인 것 같다.
하지만.
거기엔 의도적으로 고려되지 않은 사항이 있었다.
바로-
'내 영상 소스는?'
그래.
채지윤은 철저히 편집을 창작행위인 양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편집은 어디까지나 가공행위였다.
영상이라는 원재료를 가공하는 행위.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지금 채지윤의 말은.
'내가 앞으로 재료를 무상으로 가공해 줄 테니, 니 회사의 지분 절반을 넘겨라.'
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말장난이었다.
유창한 말솜씨로 아주 잘 꾸며진 말장난.
혹은 암시.
혹은 최면.
'이런 식으로 해 먹고 있었고만.'
물론.
채지윤의 제안은 정말로 매력적일 수도 있었다.
구독자가 낮은 채널의 경우엔, 오히려 10만 원대의 편집비용을 지불하는 것 보다.
차라리 영상 수익의 절반을 떼주는 게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최재훈은 이 채지윤이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너무 자세하게 알아 버렸다.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새끼 같은데.'
애초에 낮은 구독자로 그칠 이들에겐 접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재훈은 채지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분명 영리했다.
거기에 훌륭한 안목에 유창한 말솜씨까지 갖고 있었다.
최재훈이 느끼기에 그녀는 확실히 훌륭한-
장사꾼이었다.
그것보다 쎈 표현이 더러 떠올랐지만, 그냥 장사꾼이라 정의하기로 했다.
채지윤이 개헤엄들에게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재훈이 구하고 있는 파트너는 편집자였다.
장사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최재훈은 채지윤을 장사꾼이 아닌, 편집자로 대하기로 한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예?"
"지윤 씨 같이 대단한 편집자 분 공짜로 부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서요. 그냥, 임금 지불할게요. 시세 말씀해주시면 더 알아보고 그에 맞춰서. 어떠세요?"
"아니, 괜찮아요 저는. 저 신경 쓰지 말고-"
"아뇨, 제가 안 괜찮아요."
일이 잘 풀릴 거란 예감에 화색을 띠었던 채지윤의 표정이 굳었다.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러지?'
방금 전까지의 저자세가 신기루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단호한 태도로.
최재훈은 말했다.
"어떻게 하실래요."
채지윤은 아무런 답도 못 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시간이 흐르자.
씨익하고 웃는 최재훈.
"아무래도 의견이 맞지 않는 듯하니, 이야기는 여기까지인 걸로 하죠. 먼 길 와주셨는데, 죄송해서 어째요? 그래도 제 '팬'으로 와주신 거니까. 제가 쏠게요. 돌아가는 길에 드시라고. 뭐로 시켜드릴까요?"
그 일련의 행위에.
채지윤은 생각했다.
'이 새끼-'가.
다 알면서도 나를 떠본 거였다고.
나를 갖고 논 거였다고.
"개같은새끼가…."
그녀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극히 피해망상적인 생각.
그러나 놀랍게도.
이번 역시, 완벽한 정답이었다.
최재훈이 히죽 웃었다.
"여기에서 그런 것도 팔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