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가 게임을 잘함-81화 (78/361)

081. 여파의 여파

외부의 빛이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다.

조명도 꺼져 있다.

어둡고 넓은 방안.

책상 앞에 앉은 이린, 그녀의 모습을 모니터의 빛이 스산하게 밝히고 있었다.

안경 아래에 퀭하게 풀려 있는 눈.

그 밑에 진하게 드리운 다크서클.

관리의 흔적이라곤 머리띠로 앞머리를 뒤로 넘긴 게 전부인 더벅머리와 창백한 피부는 기름으로 반들거린다.

티셔츠는 목이 늘어나 쇄골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런 모습으로, 어두운 방 안에서.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게임 방송을 시청한다.

영락 없는 한심한 폐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미남, 미녀는 어떤 모습을 해도 개성이라는 부당한 이치에 따라.

그리고 이린의 직업에 따라.

세간에서 그런 그녀의 모습은 '스타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미튜브 편집자.

그게 바로 이린의 직업이었다.

정확히는, 게임 방송 전문 편집자.

그녀가 편집을 담당한, 혹은 담당했었던 게임 방송인들의 채널엔 공통되는 특징이 존재했다.

첫 번째론, 그녀가 편집자로 부임한 뒤로 꾸준한 성장을 거두었다는 점이 있으며.

두 번째론, 그러다가 결국 '초'가 붙을 정도의 대형 채널이 되었다는 점이 있었다.

그게 가능한 건 이린의 편집자로서 엄청난 직업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린은 그저 열성적인 팬으로서 활동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외국 영화, 만화, 소설가 등의 번역을, 같은 능력을 가진 번역가 중 해당 작품의 팬인 쪽이 맡으면 더 결과가 좋은 것과 같은 이치랄까.

물론, 단순히 팬심만 갖고 있다고 해서 그런 결과가 나오진 않는다.

한 번이면 몰라도 그녀는 십수 명의 초대형 미튜버를 탄생시킴으로써 단지 자신의 능력이 요행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보통 수 시간에 해당하는 기나긴 게임 방송 영상.

거기에서 정확히 핵심을 간추려 내어 압축할 수 있는 감각과 집중력이 있었다.

그렇게 간추려내어 압축한 부분을 세련되게 다듬을 수 있는 감각적인 편집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편집 속도가 ㄷㄷ 도대체 편집 노예 몇 명을 돌리길래. 세 명 이상 돌리나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빠르게 해내는 특출난 작업속도가 있었다.

그것들이 가능한 건 열정이 있는 덕분이었으며.

그 열정의 원동력이 열렬한 팬심이긴 했다.

때문에, 그녀는 열렬한 팬심이 식으면 아무리 큰 채널의 편집자 자리라도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미련 없이 떠나는 이린을 미련 없이 보냈다가, 그녀의 부재가 치명적으로 다가오자 뒤늦게나마 다시 데려오려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사람도.

처음부터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어 그녀를 붙잡으려 한 사람도.

그녀의 마음을 바꾸진 못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이 아닌데, 어떻게 돈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런 연유로 현재, 이린은 그 누구의 편집자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의 행동은.

며칠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주구장창 인터넷 방송만 시청하는 그녀의 행동은, 그녀 나름의 구직활동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인터넷 방송 시청은 새로 몰두한 방송인을 찾기 위해서였고.

새로 몰두한 방송인을 찾는 순간 편집 활동이, 직업 활동이 시작될 테니.

그런 그녀가

"옐로우TV에서 '숨컷'이라는 닉네임으로 방송 중입니다."

새로운 방송인에 관심을 갖게 됐다.

* * *

처음이었다.

이린이 남자 방송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외모 때문은 아니다.

잘생긴 남자 게임 방송인은 많았다.

무엇보다, 게임 방송인에게 있어 외모는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게임 방송과 게임 영상 시청 목적이 잘 생긴 사람 구경하려는 데에 있는 건 아니잖은가?

게임 구경하는 데 있지.

그렇기에, 게임 방송인이라면 특출나서 그 자체만으로도 컨텐츠가 되는 게임 실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라는 게, 이린의 생각이었다.

게임 실력에 관하여 지나치게 높은 안목.

이린이 지금까지 남자 게임 방송인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한 가장 큰 이유였다.

성별을 초월한 게임 실력을 가진 남자 게임 방송인은 극도로 적었고.

그 극도로 적은 남자 게임 방송인 중에서 이린이 느끼기에 매력적인 남자 방송은 없었다.

숨컷이 처음이었다.

여자 만큼- 아니.

어지간한 여자보다 더 훌륭한 게임 실력.

거기에 여자로 하여금 동성 친구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친근하고도 털털한 분위기.

마치 게임을 잘하는 여자가 남자의 가죽을 뒤집어쓴 듯 특이한 캐릭터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목소리도 좋다.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음 채널이…."

숨컷에 대해 조사한 바.

그는 옐로우TV에서 방송한 지 며칠이 안 된 신입 PD였다.

미튜브 채널은 일단 개설은 됐지만 편집 기술도, 편집자도 없는지.

올라와 있는 영상이라곤 편집되지 않아 장장 몇 시간에 달하는 조악한 영상 몇 개가 전부였다.

이린은 그런 영상들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숨컷에 대해 좀 더 자세히 파악해 볼 생각이었다.

1.25배속으로 건너뛰기 기능을 사용하며 영상을 대략적으로 훑어본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영상에 빠져들어 있는 자신을 보고.

이린은 숨컷의 편집자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안 적어 놨네…."

숨컷 채널의 정보를 확인한 그녀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편집자 지원을 하려고 확인했는데 연락처가 기입되어 있지 않았다.

"하긴."

주요 목적인 비즈니스인 연락처 기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건 채널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이후니까.

결국 현재 이린이 숨컷과 개인적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미튜브에 비밀 댓글을 남겨놓는 것뿐이었다.

그걸 위해 그녀는 숨컷이 가장 최근에 올린 영상에 들어갔다.

'내가 처음이네?'

댓글이 하나도 없는 댓글창을 보고 정체불명의 만족감을 느끼며 지원서를 써 내려간다.

msunkn - 팬입니다

편집자 구인 중이시거나 생각 있으시면 가벼운 마음으로 연락 한 번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경력 다수 보유중이며,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 있어요.

스타 미튜버만 십수 명 키워 낸 경력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한 지원서.

그녀는 좋아하는 방송인이 자신을 '엄청난 경력을 가진 편집자'가 아닌 '본인의 팬인 편집자'로 생각해줬으면 했다.

경우에 따라 경력을 밝히는 경우도 있긴 하다.

이미 편집자가 있거나, 경쟁자가 있는 경우.

주 편집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숨컷의 채널은 구독자 31명의, 막 개설된 채널로 편집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거면 충분할 것이다.

라고 생각한 이린은-

-뭔데. 저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데.

지금 숨컷의 방송을 보며 깨닫고 있었다.

어제의 자신이 너무 안일했음을.

숨컷이 방송에서 비춘 그의 채널.

구독자 31명이 하루도 안 돼서 1100명이 되어 있었다.

하루도 안 돼서, 너무나도 작은 채널이 아니게 돼 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채지윤 - 안녕하세요, 저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하고 최근 행보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채널 관리해드릴 의향 있습니다

생각 있으시면 메일 적어놓을테니 연락주세요^^

p.s-채널 소개란에는 영업용 연락처 하나는 적어 놓는 게 좋아요 ㅎ

경쟁자가 나타났고.

[좀 유명한 편집자 있음]

[하꼬 몇명 정도 대기업으로 키운 애 ㅇㅇ]

[미튜브 안하는 하꼬 애들 미튜브 관리해줘서 대기업으로 만들어준 애 ㅇㅇ]

[쟤가 관심보인거면 숨컷이 곧 뜨겠누 ㄷㄷ]

-그래?

숨컷은 자신이 아닌 그 경쟁자에게 관심을 표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자신 말고 경쟁자를 선택한 숨컷 때문에?

저 경쟁자를 지지하는 시청자들 때문에?

아니.

저 경쟁자, 채지윤 때문이었다.

이린은 채지윤이 누군지 알았다.

그렇기에, 자신에 비해 급이 낮아도 한참 낮은 편집자란 걸 알았다.

능력으로 보아도, 커리어로 보아도.

그런데도, 이린보다 유명했다.

그게 어이가 없었다.

자신보다 한참 급이 낮은 채지윤이 자신보다 유명한 게?

아니.

편집자 주제 유명세를 떨치는 게.

이린이 알기로 채지윤은, 편집자라는 직책으로 담당 방송인 혹은 미튜버의 방송과 미튜브 채널에서 온갖 어그로를 끌고 다니는, 소위 말하는 관심병자였다.

편집자란 오롯이 방송인을, 담당 미튜버를 빛내주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직업 철학에 따라.

철저히 자신의 존재를 감추는 이린이 보기에 그런 채지윤은, 편집자라는 직책을 이용해서 방송인이 독차지해야 할 관심을 좀먹는 기생충이었다.

혐오스러웠다.

그런 인간이 자신 대신 최재훈에게 선택받는 상황을, 이린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열심히 채지윤을 찬양하는 채팅창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거액을 후원하며 자신을 어필하려다가- 말았다.

생각해 보니 돈 아깝네.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아니다.

이건 숨컷의 방송이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의 방송에서 자신이 관심을 끄는 건, 역시 그녀의 직업 철학에 반하는 일이었다.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방송에 직접적인 영향이 가지 않는 선에서 모든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숨컷 미튜브 채널에 비밀 댓글로.

숨컷 옐로우TV 방송국에 비밀 글로.

채지윤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자신의 커리어를 증명하는 증거를 제출했다.

그리고, 자신은 돈을 보고 일하는 게 아니라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이라도 하는 듯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그렇게 자신을 어필했다.

마지막으로 또, 자신에게 관심이 쏠리지 않도록.

자신의 커리어를 시청자들에게 알리지 않길 당부했다.

유난스럽다.

굳이 그렇게까지?

누군가가 직업 철학에 기인한 그녀의 행동을 봤다면 응당 그런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재가 일반 기준에서 이해하기 힘든 고집을 갖고 있는 괴짜라는 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모든 조치를 취한 그녀는 그제야 안심하고, 숨컷의 방송을 즐길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했다.

"후."

무려 12시간이 넘게 진행된 숨컷의 방송.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한 흔적이 지금 이린의 주변에 남아 있었다.

숨컷은 방송을 종료할 때 자러 간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도 지금 취침하는 게 맞다.

내일 숨컷이 언제 방송을 켜든, 내일도 생방송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할 수 있도록.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녀는 시청과 동시에 녹화해 두었던 숨컷의 오늘 방송분에 해당하는 영상을 재생시켰다.

그리고 기록해 두었던 하이라이트 부분을 캡쳐하고 부분 움짤로 만든 뒤, 그걸 정리했다.

그렇게 완성한, 오늘 숨컷의 놀라운 활약이 담긴 자료.

숨컷 선전용 자료.

그걸 익명으로서, 일개 시청자로서 레오레 커뮤니티에 퍼트렸다.

이린의 예상이 맞다면 이로 인해 옐로우TV라는 변방까지 관심이 미치진 않겠지만 미튜브 채널에는 충분한 관심이 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영상분에 대한 편집을 진행한다.

'내일 바로 영상 올리면 깜짝 놀라겠지?'

마음은 이미 숨컷의 편집자가 된 이린이었다.

* * *

제목 : 님들 숨컷이란 분 아세요?

내용 : 와 보는데 ㅋㅋ

남자가 마스터티어

게다가 엄청 잘생기셨더라고요 ㄷㄷ

왜 저 얼굴로 캠방 안 하고 겜방하시지? ㅋㅋ

ㄴ : 그러게요 ㅋㅋ

ㄴ : 잘 생긴 남자는 겜방말고 반드시 캠방해야되요?

ㄴ : 하여간 인벤토리 새끼들 ㅋㅋ 멀쩡한척하면서 성차별 ㅈ대누

ㄴ 글쓴이 : 아니 뭔 ㅋㅋ 그런식으로 해석을 함 니들 데베충이지?

ㄴ : 근데 ㄹㅇ 잘생기긴 했더라

ㄴ : 겜 잘하는 남잔데 잘생기기까지 ㄷㄷ 너무좋아

ㄴ : 저분 어디서 방송함?

ㄴ : ㅁㄹ 옐로우TV인가 먼가라는데

ㄴ : 첨듣는 곳이네

ㄴ : 미튜브 채널 있던데 관심있으면 ㄱ

제목 : 님들 이거 보심?

내용 : [링크]

숨컷이란 분인데 와 ㄷㄷ

AKEP이라는 챌 2~30위권 유저랑 적팀 됐는데

채팅으로 팀원들한테 하나하나 오더내리면서

할 거 다하고 결국 캐리하는데 대박이네요

ㄴ : 저도 보고 깜짝 놀람

ㄴ : 저 오더가 대단한 거임?

ㄴ hip2hop : ㄴㄴ ㅋㅋ 그냥 개나소나 다 하는 거임 오더는 누가 못함

ㄴ 글쓴이 : 보면 저 AKEP이라는 챌린저 유저가 오더 정신 나갔다고 인정했다던데요?

ㄴ : ㅋㅋㅋㅋ 입롤이 또

ㄴ : 그래서 님 티어가? ㅋㅋㅋ

ㄴ hip2hop : 응 챌린저야 입렐새끼들아 ^^ AKEP 저 듣보새끼가 뭐라고 ㅋㅋ

ㄴ : 닉 까보던가 ㅋㅋㅋ

ㄴ : 챌27위가 듣보 ㅋㅋ 지가모르면 다 듣보죠?

ㄴ : 입렐을 누가 하고 있는 건지 ㅋㅋ 닉 절대못까쥬?

ㄴ hip2hop : ㅄ들 ㅋㅋ 남자라고 똥꼬 빠는거봐

ㄴ : 에휴 ㅄ 데베충새끼

제목 : 숨컷 오더

내용 : 어느 정도로 대단한 건지 아시는 분?

챌린저 이상급 있으시면 티어로 비유좀

EX) 마스터급이다

ㄴ : 아니 챌린저 이상급이 뉘집 갠가 ㅋㅋ 나와봐라~ 하면 나오게

ㄴ : ㄹㅇ ㅋㅋ 국내 300명인데

ㄴ : 전챌도 가능?

ㄴ 글쓴이 : ㅇㅇ 전챌인 님이 보기엔 어때요?

ㄴ : ? 나 전챌 아닌데

ㄴ 글쓴이 : ??

ㄴ : 그냥 물어본거

ㄴ 글쓴이 : ㅄ인가

ㄴ : 이이잉 기뭐어어링

인터넷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라면 반드시 존재하는 레오레 게시판.

다양한 커뮤니티 사이트의 무수히 많은 레오레 게시판에 숨컷이라는 방송인이 화두로 떠올랐다.

선풍적인 인기! 까지는 아니나, 적잖은 이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남잔데 마스터 티어라고?]

[이 얼굴이면 배우나 아이돌해도 되겠는데 ㄷㄷ]

[숨컷좌네 ㅋㅋ]

[올삭빵 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또 한건했네 ㄷㄷ]

하지만 무엇보다 화제가 된 건, 그의 신들린 듯한 키보드 오더였다.

[오더 개쩌네 진짜 ㄷㄷ]

[그냥 타자 빨라서 대단해보이는 거지 그저 그런것같은데]

정말로 숨컷의 오더가 대단한 건가.

아니면 그냥 단순히 타자가 빨라서 대단해 보이는 건가.

숨컷에 대한 관심이 식었음에도, 그의 오더에 대한 관심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게 유지된 '숨컷의 오더' 떡밥에-

"이 사람 오더가 음… 그러면 제가 이걸로 컨텐츠를 하나 준비해 볼게요."

몇몇 '대어' 들이-

"아니, 내 뇌지컬이 뭐가 구려. 하, 썅. 알았어. 니들이 그렇게 원하니, 이 사람 한 번 섭외해 볼게."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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