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가 게임을 잘함-71화 (68/361)

071화. 주작을 잡아라 13

한예지가 최재훈을 노려봤다.

"…."

그녀의 핏발 선 눈은-

"마지막 경기, 바로 가시죠."

최재훈이 말로써 현실을 자각시키자, 단번에 전의를 상실한다.

현실.

자신의 모든 것이 달린 3선승제 대결에서 이미 2패를 기록했으며, 그 2패는 심지어 자신이 가장 잘 다루는 챔피언으로 임한 경기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한예지는 절벽 끝에 서 있었다.

아니.

이미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이번엔 제가 챔피언 고르면 되는 건가요?"

그럼에도 그녀는 발버둥친다.

"아, 아니죠!"

"왜 아, 아니죠? 그쪽이 한 번 골랐고, 또 한 번 골랐으니 이번엔 내 차례죠."

"아니죠! 두 번째 쟈드는 그쪽이 제 부탁 받고 고른 거지, 제가 고른 건 아니잖아요! 내 말 틀려요?"

억지를 부림으로써 말이다.

최재훈이 그에 픽 웃으며 답한다.

"아니 뭐, 그러세요, 그럼. 전 뭐든 상관없으니까. '또' 그쪽이 원하는 거 골라요."

[예지야 농담아니고 진짜 추하다 존나 추해서 천근추라고 해도 되겠어]

[박수칠 때 떠나자...]

[박수를 누가 쳤는데 ㅋㅋ]

[한예지 ㅉㅉㅉ(박수소리임 ㅎ)]

[아 ㅋㅋ ㅉㅉ가 짝짝이였냐고 ㅋㅋ]

조롱의 채팅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게임 끝났네. 전 이만 볼일 보러 가볼게요~"

장연화가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예지는 그저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절박한 심정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

[니가 젤 잘하는 챔피언으로 발려놓고 또 뭘 하자고]

누군가의 지극히 합당한 지적.

'저 새끼도 쟈드를 제일 잘 다루는 거일 수도 있잖아?'

한예지는 그런 식으로 반박한다.

'맞다, 그러고 보니!'

"잠깐 화장실 좀…."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에 향했다.

물을 틀어놓고 전적 검색 사이트로 들어가서 최재훈의 아이디를 검색한다.

'역시!'

기억 대로.

최재훈의 최근 전적에서 쟈드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쟈드는 최재훈의 모스트 챔피언이다.

최재훈은 쟈드를 제일 잘 다룬다.

최재훈은 쟈드 말고 다른건 시원찮다고, 한예지는 생각했다.

'이거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와 최재훈에게 말했다.

"핏스 골라요."

한예지가 최재훈의 전적을 샅샅이 뒤져서 찾아낸, 그는 못 다루나 자신은 잘 다루는 챔피언이었다.

최근에 플레이하지 않았다고 해서 못 다룬다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 그녀는 기꺼이 그렇게 믿는다.

최근에 핏스를 플레이하지 않은 이유는 핏스를 전혀 다룰 줄 몰라서라고.

그러니 핏스를 고르면 내가 이길 거라고.

아까부터 거듭되는 비약 논리.

그녀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게.

비약 논리라는 걸 인정해 버리면 모든 게 끝나 버린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게 돼 버린다.

그러니까 그녀는 감히 의심하지 않는다.

억지를 부린다.

게임이 시작된다.

진정한 의미로 이 한 판에 한예지의 모든 게 달려 있었다.

이 판에서 패배하면 그녀는 정말로 모든 것을 잃는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듯이 뛴다.

자리에 앉아있는데도 전력으로 뜀박짐을 한 것처럼 호흡이 거칠어진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승리했다.

한예지가 드디어 첫 승을 거두었다.

"아, 씨!"

그 증거로써 들려오는 최재훈의 탄식소리.

"…."

그럼에도,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기 때문에?

아니.

지금 그녀의 사고는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운 건 최재훈이 보여준 퍼포먼스 때문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쟈드로 보여준 것보다 강렬한 퍼포먼스였다.

그는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적팀 타워, 한예지 쪽 타워의 공격권 안에 들어가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타워에게 공격당하다가, 타워 근처에 서 있던 한예지의 옆에서 그냥 죽어 버렸다.

한마디로, 자살을 한 것이다.

고의로 패배한 것이다.

"뭐야, 시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무슨 의도인지 파악하기 위해 최재훈을 쳐다봤다.

그는 팔을 있는 힘껏 벌리고 있었다.

그렇게 당황스러운 제스쳐를 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하고, 당황스럽다는 듯 말한다.

"하, 이걸 이렇게 지네. 까비!"

그렇게 말하는 것과 달리, 표정은 전혀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척 하는 것도 연기였었다.

무슨 개수작인가 싶었다.

그리고 그게 무슨 개수작인지-

"어쨌거나, 이젠 제가 챔피언 고를 차례네요?"

한예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제가 이번에 고를 챔피언! 어디보자… 이번엔 좀 색다르게… 아! 그래. 그걸로 합시다!"

그는 과장된 동작과 말투로 말했다.

쟈드.

그 단어가 최재훈의 입에서 나오자, 한예지는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구?"

최재훈이 그런 한예지를 보며 말했다.

"엄청 급해 보이시네. 또 화장실이신가?"

"…."

"아 괜찮아요. 편히 다녀 오세요. 제가 미리 게임 만들어 둘게요?"

"…."

"후딱 갔다 와서 우리 예지 씨가 좋아하는 쟈드로 재밌~게 합시다."

"시발."

"네?"

"니 아니지?"

"…네?"

한예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혹은 부정하기 위해.

아까부터 억지를 부렸었다.

이번에도 그렇다.

그녀는 억지를 부리려 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 * *

창문은 커텐으로 가려져 있다.

불도 꺼져 있다.

그런데도 적당히 넓은 방 안은, 적당히 어두웠다.

적당히 밝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방의 절반을 가득 매운 거대한 책상.

그 위에 병렬된 무수히 많은 모니터가 발하는 빛 때문이었다.

통제실을 방불케 하는 모습.

모든 모니터는 켜진 상태로 각기 다른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방의 주인인 여자의 시선은 그 무수히 많은 모니터 중 하나에, 아까부터 쭉 고정된 상태였다.

아메리카TV BJ인 한예지의 방송.

지금 그녀의 방송에서 한창 흥미진진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시발.

-네?

-니 아니지?

-…네?

여자는 그걸 보며 중얼거렸다.

설마.

-니 대회 우승한 최재훈 본인 아니잖아. 이제야 알았네. 니가 걔 대리해 주고 대신 조작해 준 새끼지?-

"와 진짜, 막나가네."

그녀의 말대로, 한예지는 막나가고 있었다.

게임의 패배가 확정되자 판 자체를 엎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막무가내로.

개구리 가면을 쓴 남자가 잠깐 멍하니 있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린다.

-아니. 이제와서요?

"그러니까."

여자가 남자의 말에 추임새를 넣었다.

남자를 쳐다보는 여자의 아주 드물게 웃음기를 띄고 있었다.

최재훈.

여자가 아주 오랜만에 보는, 실로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그녀는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이제 와서고 자시고, 니 그럼 뭔데. 그 가면. 당당하면 그딴 거 쓸 이유가 없잖아?

-아니, 이딴 거 쓸 이유가 왜 없어요. 인터넷 방송에서 자기 얼굴 노출하고 싶어 하는 일반인이 얼마나 된다고.

-니가 일반인이야?

-그럼 내가 시발 국회의원이라도 되냐?!?!

최재훈이 답답함에 소리쳤다.

"큭큭큭큭. 아, 진짜 미치겠네. 아니, 진짜. 이 사람. 캐릭터 진짜 좋은데? 남자 쪽에서 이런 캐릭터가 나올 수도 있나?"

최재훈을 바라보는 여자는 흥미로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장연화 선수가 보장해 줬잖아. 어? 그걸로 끝난 얘기 아니였어?

-어떻게 알아. 장연화가 니네한테 말 맞춰준 건지.

"뒤가 없네."

-장연화 선수가 우리한테 말 맞춰준 거라고?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그러니까 니 말은, 장연화 선수가 지금 우리 편 들어준답시고 여기 레오레 시청자랑 유저 수만 명을 기만했다 이거지?

여자의 말 대로, 최재훈의 말 대로.

방금 한예지의 발언은 정말로 뒤가 없는 발언이었다.

그 발언은.

장연화를 사적인 이유로 레오레 방송 시청자와 유저들을 기만하는, 사리분별 안 되는 병신이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TC1의 레전드이자 LKL의 레전드.

모든 레오레 유저와 관계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NAVY'를 말이다.

사실, 여자도 한예지의 저러한 행동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금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뒷일을 신경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신경 쓸 뒷일 자체가 사라져 버릴 테니까.

지금 상황을 해결하지 못해서 올삭을, 그러니까 레오레, 미튜브, 아메리카TV 계정 삭제를 진행해야 한다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더이상 방송인도 뭣도 아닌데, 한예지 눈치 볼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말이다.

저것보다 더 스마트한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여자는 생각했다.

"하긴."

그러나 곧바로 떠올린다.

최재훈이 한예지가 냉정한 사고라는 복잡한 행동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박살내 놓은 것을.

그럼으로써 이해한다.

그런데-

"어?"

상황이 갑자기 이상해진다.

시청자들이 한예지의 편을 들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어째서?

저런 논리도 뭣도 없는 한예지의 발언에 힘을 실어 주는 거지?

답은 간단했다.

[그럴 수도 있지 ㅋㅋ]

[아 ㄹㅇ ㅋㅋ]

[한예지 말도 일리가 있네 ㅋㅋ]

[너 누구야!!! 정체를 밝혀!]

[치킨퀸치퀸은 가면을 벗고 정체를 밝혀주세요!]

최재훈의 얼굴이 궁금해서였다.

"하 진짜…."

집단 광기라는 말 외엔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는 채팅창을 보고 기세를 잃은 최재훈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지금은 일개 시청자일 뿐이었다.

그러니, 기대할 수 밖에 없다.

최재훈이 어떤 대처를 보여줄지.

또 어떤 기막힌 캐릭터성을 보여줄지.

-아니 이런 억지가 어딨어!

방민아가 분개해서 끼어든다.

-한예지 씨, 이건 선 넘은 것 같은데요….

친구가 모욕당하자 강연승도 언짢음을 숨기지 못한다.

-뭔 선을 넘어~?! 선은 그쪽이 넘었지! 사기꾼들아!!!

한예지의 남자친구가 소리를 지른다.

그로 인해 현장은 단번에 아수라장이 된다.

한예지의 남자친구에 이어, 한예지의 두 동료 BJ도 언성을 높인다.

방민아 측도 부득이하게 언성을 높여 대립한다.

헤이러와 남성BJ는 현명하게도 몸을 사린다.

아랑곳 않고, 탄력을 받고 기세가 등등해진 한예지는 소리친다.

"사기꾼 새끼들! 꺼져 시발 이거 무효야!"

아수라장.

그런 아수라장 안에서 무언가를 골몰히 고민하는 최재훈.

"오케이!!!"

그의 짧고 굵은 한마디가 상황을 진정시켰다.

뒤이어, 방민아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 최재훈.

뭐라 하는지 자세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방민아의 "네? 괜찮겠어요?" 라는 말 만은 확실히 들렸다.

이윽고, 손에 무언가를 쥔 최재훈이 캠 앞으로 다가온다.

"자 여러분, 이거 화면 보이세요?"

손에든 무언가를 캠에다가 접근시킨다.

핸드폰이었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띄워져 있지 않았다.

[ㅇㅇ 보임]

[왜?]

"보인다고요? 오케이. 잠시만요."

그가 핸드폰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캠의 각도를 아래로 내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엥?

-어?

-어, 재훈씨!?

그리고 잠시 뒤,

내려져 있는 캠에 다시 핸드폰이 근접한다.

이번에도 무슨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다.

익숙한 목소리.

다름아닌 방민아였다.

영상이 촬영되고 있는 현장은 아마도, PC방 같았다.

방민아와 PC방.

그 두 가지 키워드로 어떤 영상인지 유추가 되려던 순간-

영상속 카메라의 앵글이 이동한다.

그렇게, 영상 속 어떤 남자의 모습을 담는다.

지금처럼 청바지에 후드 차림이지만, 지금처럼 개구리 가면은 뒤집어 쓰지 않은.

"최재훈입니다."

그가, 웹캠의 각도를 다시 들어올렸다.

웹캠이 영상의 최재훈이 아닌 현실의 최재훈을 비추도록.

영상과는 달리 가면을 쓰고 있는 현실의 최재훈.

그가-

"최재훈입니다."

가면을 벗으며 영상과 최대한 똑같이 말했다.

4만 명이 시청하고 있는 방송의 채팅창.

방송이 시작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쉴 새 없이 갱신되던 채팅창이, 지금 멈췄다.

최재훈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가 말한다.

"보셨다시피 대회 우승자랑 동일인물 맞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웹캠을 향해 삿대질한다.

"옐로우TV에서 '숨컷'이라는 닉네임으로 방송 중입니다. 얼굴 캠 안 키고 손 캠만 키는 순수 레오레 실력 방송인데, 관심 있는 사람들은 뭐-"

그가 웹캠의 각도를 아래로 내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보러 오던가 말던가."

멋쩍은 걸까.

말에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그렇게 끝나는가 싶더니 '아참'하고 말을 덧붙인다.

"2부 방송은 방민아 씨 방송으로 진행됩니다. 2부 방송 컨텐츠는 뭔지… 다들 말 안 해도 아시죠?"

피식.

그런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

넋을 잃은 여자.

이윽고 그녀는-

"하!"

짧고 굵은 웃음을 터뜨렸다.

최재훈.

숨컷.

그 두 이름이 여자의 뇌리에- 아니.

방송을 지켜보고 있던 모든 이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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