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화. 주작을 잡아라 4
남녀가 같은 밀실, PC방 커플룸 안에 있다.
여자는 술에 취해 잠든 상태.
역시 술에 취했지만 잠들지는 않은 남자는 여자를 깨워 본다.
여자는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경우, 남자의 다음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지현 씨에게 손을 뻗었다.
그렇게, 지현 씨를 등에 업었다.
집에 데려다 드려야징.
"어이고."
키가 꽤 커서 그런가.
생각보다 무거운 지현 씨를 업고 커플룸을 나섰다.
카운터로 가는데,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이목이 하나둘 씩 쏠린다.
뭐요.
잘생긴 남자가 떡 된 여자 업고 있는 거 첨 보쇼?
내가 이 '여자'한테 뭐라도 할까봐?
그런 일은 존나 없을 거니까 걱정 마쇼.
그런 생각이 들려던 와중 떠오른다.
'아, 맞다.'
남녀역전.
지금 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광경을 내 관점으로 치환해 보자면, 여자가 떡이 된 남자를 업고 있는 건가?
지현 씨 입장에선 술에 떡 돼서 여자한테 업혀 있는 거고?
"…헤헿."
리치TV에서 레오레 방송하시는 25세 권지현 씨.
이거 나중에 알면 쪽이 꽤나 팔리시겠어.
과도한 음주가 이렇게 위험합니다.
"뭐야, 저거."
"남자? 가 여자를 업고 있네?"
"이야~ 고생 많으시네."
거기에 킥킥큭큭 거리는 웃음소리들.
카운터에 가기까지 들은 소리들이다.
"풋."
카운터에 가자 마자 들은 소리다.
"안 무거우세요?"
직원이 웃음을 참으며 말한다.
"그냥 평범하게 무겁네요."
"이야, 남잔데 힘 쎄시네."
남자니까 힘이 쎄지.
아, 아니지.
그러게.
나 남잔데 힘 왜이렇게 쎄지?
'으응?'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 와서.
그러니까, '남자'가 된 이후 딱히 내 근력이 떨어졌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네.
최재훈2가 원래 힘이 쎘던 건가?
'아몰랑.'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이 세계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고.
"힘내세요~"
계산을 마치곤 격려를 보내오는 전 직장 동료와 전 직장을 뒤로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 * *
공기가 차가워졌다.
그래서 몸에 닿는 무언가의 따스함이 더 기분 좋게 느껴진다.
둥둥 떠다니는 기분.
권지현은 주기적인, 적당한 흔들림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한다.
'…미친.'
최재훈에게 업혀 있는 상황.
그러니까, 여자인 자신이 그에게 업혀 있는 상황을 인지한 그녀의 첫 소감이었다.
"저거 뭐야."
"누나 저것 봐."
"여자가 업혀 있네?
"안 힘든가?"
"그보다 안 쪽팔린가."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녀의 얼굴이 본격적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남친 분 무겁겠다~ 일어나요~"
지나쳐가던 여성 무리 중 한 명이 말했다.
'니가 말 안 해도 그려려고 했어!'
그런데-
"아~ 우리 지현 씨 깨우지 마세여~ 나 괜찮으니까."
최재훈의 말에 또 다시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이열~~~"
"멋지다~"
"와, 개부럽네."
"나도 내 남친 잘생겨져서 나 업어줬음 좋겠다."
"으휴 븅신."
우리 지현 씨.
남친.
실로 듣기 좋았다.
권지현은 우월감을 느꼈다.
건장한 여자로서 잠든 척 남자의 등에 업혀 있으면서 말이다.
'미친년, 좋아할 때야?'
지금이라도 일어나려고 하는데-
"아, 씨."
힘든 지, 최재훈이 제자리에 멈춰 숨을 신경질적으로 몰아쉬었다.
그 소리에 권지현은 실수라도 지적당한 듯 심장이 내려 앉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일어나서 최재훈을 마주할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그렇게 또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어떡하지….'
실눈을 뜨고 상황을 살피는데, 주위를 둘러보던 최재훈의 시선이 근처 층계에 고정되는 게 보였다.
'내려주세요!'
속으로 그렇게 외치자 최재훈이 말했다.
"아니, 더러워질라."
그러더니 계속 간다.
더러워질라.
십중 팔구, 자신을 신경 써서 한 말일 거다.
'끄아아앙! 괜찮은데!'
권지현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양심이 아프다.
최재훈의 상냥한 배려가 따듯하다 못해 뜨거워서 양심을 불태우는 것 같았다.
'병신아! 그냥 지금 말하면 되잖아!'
되는데, 그걸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이 상황을 당당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하기사 누구에게, 어떤 여자에게 그런 자신이 있겠는가.
술에 취해 잠들었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호감을 갖고 있는 남자에게 업혀 있는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권지현의 반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이상한 쪽을 따지자면 여자가 취해서 잠들었다고 그걸 업어서 데려다 둘 생각을 하는 남자, 최재훈이었다.
아무리 여성스럽기로서니, 이 정도일 줄이야.
"후우… 후우…."
그렇게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권지현을 내려놓지 않고 빌라에 도착한 최재훈이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거칠지만 정갈한 호흡에 맞춰 지체 없이 한 계단 한 계단 정복해 나간다.
아무리 여성스럽기로서니, 이 정도일 줄이야.
권지현은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깜빡하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힘… 남잔데 엄청 쎄시네….'
아니지.
남잔데 엄청 쎄시네가 아니었다.
남자 치고 쎈 정도가 아니었다.
권지현은 생각해 보았다.
최재훈이 그랬듯 자신도 PC방에서 그를 업고, 단 한 번도 내려놓지 않고 여기까지 도달해서 이렇게 계단을 오를 수 있을지.
'…가능한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최재훈이라는 남자의 신체 능력은 여자인 자신보다 뛰어났다.
굴욕적인 사실이다.
굴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권지현은 그 대신 묘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밀착한 최재훈의 등으로부터 거센 심장 소리가 들려온다.
땀으로 축축해지기 시작한 옷에서 섬유 유연제 향기가 뒤섞인 땀 냄새가 난다.
등은 따듯하고 딱딱했다.
자신의 허벅지를 받친 손길이 듬직하다.
권지현은 저도 모르게 떠올려 버린다.
자신을 힘으로 억누른 최재훈이 그 특유의 능청스럽고도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그 듬직한 손길로-
'….'
여성스러운 남자.
강한 남성.
최재훈의 등 위에서 권지현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떠 버렸다.
"하아! 으, 후우!"
어느새 3층에, 자신의 집 앞에 도착한 최재훈이 거세게 호흡을 갈무리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권지현.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을 저지른 지 깨닫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남자에게 자신을 집까지 업어 오게 하다니.
'시발, 왜 사냐. 죽자….'
"지현 씨."
'…일단, 집에 들어가고.'
여기까지 뻔뻔하게 버틴 거, 끝까지 뻔뻔하기로 했다.
"흠냐흠냐…."
"후… 엄청 곤히도 주무시네… 내가 그리 흔들림 없이 편안한 에이슨가."
"풋."
"엉?"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기여?"
"흠냐… 흠냐…."
권지현이 일어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하는 최재훈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갤 갸웃거렸다.
"아 근데 비번 어쩌지. 지현 씨~ 이거 비번 뭐에여?"
"비…번?"
"네, 비밀번호요! 집 비밀번호."
"일…."
"일."
"이…."
"이."
"삼…."
"다음이 사는 아니겠지."
"…사."
"와, 이 아가씨 프리한 거 보소. 사랑은 열린 문이 아니라 이 아가씨네 집이 열린 문이었네."
"흠냐흠냐…."
비밀번호도 알았겠다.
최재훈은 권지현네 집의 문을-
"…."
노려봤다.
비밀번호를 알면 뭐 하나.
비밀번호를 누를 손이 둘 다 권지현의 허벅지를 받치고 있었다.
"아."
이윽고 뭔가를 떠올린 최재훈이 몸을 90도로 숙였다.
그러자 권지현이 그의 등에 얹히는 모습이 된다.
이 상태에서라면, 손으로 그녀를 받치지 않아도 됐다.
띠띠띠띡-
그렇게 최재훈은 권지현을 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문을 여는데 성공했다.
'와….'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의지력이었다.
어쨌거나, 집에 들어왔으니 이 송구스럽고도 즐거운(?) 시간도 끝이었다.
싶었는데, 최재훈이 발을 꼼지락 거리지 시작한다.
신발을 벗은 것이다.
달칵.
현관의 센서등이 꺼지기도 전에 마치 제 집인 양 자연스럽게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켠다.
구조가 같은 바로 밑 집에 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침대 앞에 선 최재훈이 권지현을 아주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럼으로써 권지현은 설레여서 가슴이 콩닥거리는, 최재훈은 힘들어서 가슴이 콩닥거리는 여정은 막을 내렸다.
"후… 아이고야."
드디어 해방된 최재훈이 편하게 숨을 골랐다.
고르고, 또 골랐다.
인기척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권지현은 실눈을 뜨고 상황을 살폈다.
'어?'
최재훈이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내,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다.
다급히 눈을 감았다.
외투를 벗기는 섬세한 손길이 느껴진다.
'설마…?"
다음은 신발이었다.
두근두근.
'설마!?!?'
권지현은 설레서, 아니, 흥분해서 최재훈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최재훈의 다음 행동.
삐익- 철컥.
문을 닫고 나가는 거였다.
"아."
* * *
삐삐삐삑-
철컥.
마침내 집에 도착.
'아프리카 갤이랬지.'
PC방에서부터 신경이 쓰였던 걸 확인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으려고 했다.
털썩.
그런데 무의식적으로 흐느적흐느적 침대로 걸어가 그대로 다이브를 해버린다.
'술 마신 상태에서 너무 무리했나….'
아무래도, 좀 쉬었다가 해야겠다.
10분만.
10분만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서 하자.
눈을 감았다.
…
1분.
…
2분.
…
3분.
…
…
…
…톡!
라톡!
라톡!
연이은 라톡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
그리고 뒤이어 울리는 라톡 1:1 통화 벨소리에 눈이 뜨였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이 늦은 시간에…."
짹짹.
"머여."
이 늦은 시간에 참새가 우네.
그리고 해가 떠 있네.
"…인떠래스띵."
♪♪♪
일단 날 기상시킨 염병할 라톡 통화부터 확인해 본다.
'방민아? 뉘겨.'
모르는 사람이길래, 일단 통화 거절을 했다.
다음은 라톡 문자를 확인해 봤는데, 이 또한 방민아였다.
[안녕하세요]
[지금 대화 가능하신가요]
[저기요?]
[저기요??]
그리고 새로오는 톡
[안 계신가요?]
[어 톡 확인하셨네]
[바쁘셔서 통화 못 받으시나요?]
뭐지, 이 절박함은?
나도 모르게 마성의 매력으로 또 누군가를 이 몸의 포로로 만들어 버린 것인가?
두렵다!
최재훈!
'아니 그런데, 내가 연락을 달라고 했다고?'
"…아."
누군가 했더니, 허니뱅인가보네.
아마도 어제 내가 보낸 메일을 보고 연락을 준 걸 테고.
'그런데 왜 이렇게 급해?'
이번엔 내 쪽에서 통화를 걸었고 방민아는 말 그대로 '즉시' 그걸 받았다.
어제 피시방에서 레오레를 하며 들었던 말.
'아메리카TV 갤러리에서 니 대리 받고 조작한 숫사자래.'
그 말이 신경 쓰여서 집에 돌아오는 즉시, 아메리카 갤을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너무 피곤해서 그러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아무래도 좋을 일이 돼 버렸다.
통화가 연결되자 방민아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쏟아진 말 안엔, 아메리카TV 갤러리에서 왜 나에 대해 그런 말을 나왔는지에 대한 이유를 비롯해서 방대한 양의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 방대한 양의 정보를 요약하자면 예컨데, 이러했다.
니 인생 조졌다.
그런데 나는 더시발존나말도안될정도로개조졌다.
날 도와줄 수 있는 건 너뿐이다.
"진짜, 부탁드립니다. 뭐든 할 테니, 저 좀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