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1호 탄생
"하아… 하아…."
쿠퐁워먼 김이연.
그녀는 아침에 강했다.
그런데 막 상체를 일으켜 잠에서 깨어난 그녀의 표정이 어두웠다.
꿈을 꾸었다.
학창시절과 관련된 꿈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악몽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김이연이 방구석에 놓인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기능성 언더웨어만 입은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쳐다봤다.
아니, 확인했다.
중요 부위 외에 훤히 드러난 그녀의 신체는 정갈하다는 표현이 맞아 떨어졌다.
꾸준한 운동과 관리로 다져진 장신의 신체는 군살 하나 없이 탄탄했다.
뚱뚱했던 학창시절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랜다.
김이연은 자신의 양쪽 뺨을 짝짝 두드린 뒤 화장실로 향했다.
"출근 준비해야지."
* * *
수화물을 들고 어제와 같은 배송지, 최재훈의 집 문 앞에 선 김이연.
그녀는 문을 두드리려다 어제의 일을 떠올리고 굳어 버렸다.
최재훈과 처음 만난 날.
김이연은 집으로 돌아가 예전에는 거들떠도 안 봤던 [남자와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방법]영상을 찾아서 정독했다 이성과 대화하는 법을 '공부'했다.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
그녀 스스로도 아주 잘 아는 바였다.
'공부'라니.
그것도 미튜브 영상으로.
이성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로선 과연 어떨까 싶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마땅히 떠오르는 게 그뿐이니.
적어도 평소 즐겨보던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참고하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그리고 어제, 바로 그 혹시 모를 나중이 찾아왔다.
수화물 중 하나의 배송지가 그 남자의 집이었던 것이다.
최재훈.
이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배운 대로, 최재훈을 대했다.
[인싸 : 전에 봤을 때와 달라진 점을 발견해서 좋게 언급해 주세요.]
'달라진 점이라….'
처음 봤을 때, 최재훈은 나체에 반바지만 걸치고 있었다.
'꿀꺽.'
지금은 멀쩡하게 잘 입고 있다. 그러니까-
"아, 네 안녕하세요! 그, 어… 아! 오늘은 제대로 입고 계시네요? 하, 하하!!"
어색해진 분위기.
아싸의 의지로 인싸의 행동을 행한다.
상극의 성질을 지닌 둘이 조화를 일으킬 리 만무했다.
그렇게 일어난 인지부조화가 야기한 부작용이었다.
김이연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황한 그녀는 곧바로 다른 가르침을 떠올리고 행했다.
[인싸 : 분위기가 어색하다면 가벼운 유머로 말문을 터 보세요.]
"혹시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중학교가 어딘지 아세요?"
참상이었다.
'으, 으!!! 그걸 믿은 내가 병신이지….'
당황을 넘어 경멸마저 느끼는 듯한 최재훈의 태도에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었다.
어제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제의 일을 오늘 만회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이 상태라면 눈도 마주치기 힘들 터.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문을 두드렸다.
"네!"
쿵!
최재훈의 목소리가 들리자 심장이 그렇게, 크게 한 번 뛰는 기분이었다.
"택배 왔습니다!"
'그나저나-'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에 자연스럽게 택배물 위에 붙여진 운송장이 들어왔다.
어제의 요청사항은 '비싼 마이크가 타고(burning아님ㅎ) 있어요.' 였고, 오늘의 요청사항은 '비싼 웹캠이 타고(burning아님ㅎ) 있어요.'다
저 뭐 같은 괄호 개그도 미남이 하면 귀엽다 생각되는 건 차치하고, 두 단어에 관심이 갔다.
마이크와 웹캠.
자연스레 인터넷 방송을 연상시킨다.
'인터넷 방송이라도 하시는 걸까? 그렇지. 저렇게 잘생기셨는데, 안 하면 오히려 손해지.'
김이연은 화면 안에 있는 최재훈을 상상했다.
자신의 컴퓨터 모니터 안에 있는 최재훈을.
그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보고 싶다.'
'어디서 방송하시지?'
문득 첫 만남이 떠올라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설마 벗방 같은 거 하시나? 안 되는데….'
뭐가 안 된다는 걸까.
안 되는 게 있다면 그건 낯선 이성을 벗방과 엮어 버리는 김이연의 무례한 상상력이었다.
철컥.
문이 열리자 김이연의 사고가 멈추는 동시에 심장이 또 한 번 크게 뛰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고생 많으십니다~"
"어, 아! 네! 감사합니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최재훈의 인사에 김이연이 쭈볏거리며 택배물을 건넸다.
그리고 안도했다.
목소리로 판단컨데, 그는 어제의 일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어제도 그렇다.
첫 만남 때의 일을 신경 쓰지 않았다.
상당히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구나 하고 생각했다.
생각했는데, 문득 아침의 일이 떠오른다.
오늘 꿨었던 악몽이 떠오른다.
학창시절.
김이연은 최상중이라는 남자 동급생을 좋아했었다.
짝궁에서 시작된 인연이었다.
최상중은 다른 남자들과 달리 김이연을 경멸하지 않았다.
그녀를 편견 없이, 친절하게 대했다.
김이연의 유일한 이성 친구였다.
한창때인 김이연은 최상중에게 갈수록 호감을 느꼈다.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서.
이성 친구가 아닌 연인이 되고 싶었다.
어느 날.
김이연은 마침내 최상중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그러자 최상중은 여지껏 한 번도 안 보여 줬었던 표정을 지었다.
최상중에게선 못 봤지만, 다른 남자들에게선 많이 보았던 표정.
티를 안 내려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혐오와 불쾌가 느껴지는 표정.
그런 표정으로 최상중은 말했다.
너를 여자로 본 적 없다고.
둘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었다.
연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내에 소문이 퍼졌다.
김이연이 최상중에게 고백을 했다고.
뚱뚱한 찐따 김이연이, 범생이 최상중에게 고백을 했다고.
찐따끼리 왜 안 사귀느냐.
잘 어울리는데 왜 찼냐.
누가 찬 거냐.
둘은 눈 깜짝할 사이 교내의 농담거리가 되었다.
최상중이 수업시간 도중 울음을 터뜨렸다.
더 이상 최상중은 놀림의 대상이 아니었다.
놀림의 대상은 남은 하나, 김이연뿐이었다.
김이연이 사람을 멀리하고 서브 컬쳐를 가까이하게 된 계기였다.
트라우마였다.
김이연이 학교를 졸업해도, 악착같이 운동해서 살을 빼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구석으로 밀려날 뿐.
그게 아침의 악몽으로 인해 지금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고, 김이연은 생각했다.
남자가 털털한 성격인 게 아니라고.
알몸을 보여 줬다는 사실에 아무런 신경도 안 쓰는 건.
자신이 무슨 추태를 보여도 관심 없는 건.
그냥 자신을 여자로 보지 않아서라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라서 그렇다고.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것 외엔 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기분 대로 하려고 했다.
"어제 그거 재밌었어요."
그 말이 김이연을 붙잡아 세웠다.
"뒤늦게 피식했어요."
"…."
뭐라도 말하고 싶었는데, 김이연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근데-"
김이연이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뭐지?'
최재훈이 택배물을 내려놓곤 그녀의 양팔을 잡았기 때문이다.
남자치곤 뭔가 우악스러운 손길이었다.
언니 같은 손길이랄까.
"나니까 재밌어해 준 거지, 다른 데 가선 하지 말아요. 알겠죠?"
김이연이 소극적으로 고갤 끄덕였다.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음부턴 할 거면 이렇게 하세요. 일단 고개 들고-."
그 말에 김이연은 저도 모르게 고갤 들었다.
"어깨 펴고."
어깨를 폈다.
"눈 마주치고."
눈을-
"…."
마주치지 못한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요?"
"못하겠어요."
"왜 못하겠어요."
"…부끄러워서요."
"뭐가 부끄러워서요?"
"어 그…."
김이연이 말을 잇지 못하자, 최재훈이 대신 말했다.
"부끄러워할 게 어딨어요. 미인이시고, 번듯한 직장도 갖고 계신데."
"…."
김이연의 눈동자가 천천히 굴렀다.
그렇게 마침내 최재훈과 눈을 마주쳤다.
최재훈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장난스럽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눈에 힘주고."
눈에 힘을 준다.
"당당하게 말해요. 번호 줄 수 있냐고."
깜빡깜빡.
김이연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무슨 상황인지 사고가 따라가지 못했다.
그런데도,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녹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것들이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홀가분하게.
그리고 활기차게 그녀는 말했다.
"번호 좀 주십쇼!"
최재훈이 만족스럽게 고갤 끄덕였다.
자식을 바라보는 부친- 아니지.
친동생을 격려한 언니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 그렇게. 훨씬 보게 좋네."
"아뇨!"
"응?"
"정말로 여쭤본 거예요! 번호 주실 수 있겠냐고."
최재훈이 김이연을 쳐다봤다.
김이연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해요. 제 취향 아니세요."
"아…."
김이연은 낙담했다.
낙담한 그녀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넵! 실례했습니다!"
최재훈이 만족스럽게 고갤 끄덕이며 그녀의 한쪽 팔을 툭하고 쳤다.
"실례까진 아니고. 어제 오늘, 배달해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아, 저기!"
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최재훈을, 이번엔 김이연이 불러 세웠다.
그가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용무냐고.
"그, 어디서 방송하시나요!"
"네?"
'아!'
방금 김이연은 심경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 자체가 갑자기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과정을 건너뛰고 결론만 말한다.
불쑥 튀어나와 버린 본인의 여전한 찐따 특유 화법에 김이연은 당황했다.
방송하는 걸 어떻게 알고 갑자기 묻는단 말인가.
스토커로 비추어지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다급히 부연설명을 했다.
"그게, 이상한 게 아니라! 어제는 마이크 시키셨고 오늘은 캠 시키셔서. 아! 그걸 어떻게 알았냐면 요청사항에 그렇게 적어 놓으셔 가지고. 그래서 마이크랑 캠이면 방송하시지 않을까 해가지고."
게다가, 부연설명을 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택배기사가 업무 과정에서 얻은 고객의 개인정보로 사생활을 유추해 낸 것이다.
그걸로도 모자라 대화 주제로 꺼내 버렸다.
택배기사인 그녀의 징계 사유로써 부족함이 없었다.
자신감이 부족해도 문제고 충만해도 문제였다.
"아."
그러나 이번에도 최재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갤 끄덕인다.
말한다.
"레오레 하세요?"
"예? 아, 네! 합니다!"
안 한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말해 둔다.
"옐로우TV에서 숨컷으로 방송하는데, 기회 되면 언제 한 번 찾아보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화이팅!"
"아, 네! 화이팅!"
활기찬 손짓이 오가고 마침내-
끼익.
닫힌 문.
한동안 그 앞에 멍하니 서 있던 김이연은 후련한 표정으로, 후련한 몸짓으로.
그 앞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