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화. D-1
"흐흐흐흐흐…."
"큭큭큭큭큭…."
달리기를 멈춘 최재훈과 권지현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아니. 아, 미안해요. 놀러오라 해 놓고 이게 무슨…."
"큭큭큭, 아녜요.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웃는 건지, 숨을 갈무리하는 건지.
권지현은 크게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신 뒤 말을 이었다.
"재훈 씨는 괜찮으신 거예요? 이 상황."
아르바이트가 근무시간 도중에 탈주하는 행위.
속칭 런을 해버린 최재훈이 권지현은 걱정됐다.
최두산 또한 걱정되었지만, 눈 앞에서 그의 패악질을 목격한 탓에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최재훈의 마음 또한 후련하긴 해도 마냥 편하진 않았다.
사장에 대한 죄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죄악감은 먼지 털듯 곧바로 떨쳐낼 수 있었다.
최재훈이 최재훈2의 기억을 되짚어 본 바, 최재훈2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최두산에게 부당한 취급을 당하면서도 이렇다 할 항의나 반항을 하지 못했다.
최두산이 자신이 보기에나 우습지, 최재훈2에겐 정말로 무섭고 기 쎈 '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최재훈2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아무런 시도도 안 한 건 아니다.
어느 날 참다 못 한 최재훈2는 없는 용기를 쥐어짜 사장에게 상의를 했다.
사장은 알았다며 조치를 취해주겠다고 했다.
'지랄 났네.'
그 조치가 뭔지 알게 된 최재훈이 속으로 비죽였다.
그 조치.
바로 최재훈2와 최두산을 한 자리에 불러서 서로 잘 지내라고 독려한 것이다.
무슨 안 좋은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료끼리 친하게 지내야 하지 않겟냐면서.
영악한 최두산이 가식적으로 웃으며 악수를 건네는데 어쩌겠는가.
최재훈은 못마땅해도 그 손을 맞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 사장은 잘 해결돼서 다행이라고 좋아라 했다.
해결되긴 커녕, 최두산의 괴롭힘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말이다.
오히려 좀 더 은근해지고 음습해진 형태로.
'시발 뭔 왕따 가해자랑 피해자 불러다가 화해시키는 병신 같은 선생도 아니고….'
방식이 잘못되었다곤 하나 제 딴에는 좋은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최선이라 생각한 해결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섣불리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존중하지도 않을 뿐.
'그리고 시발, PC방 야간 알바 꿀이라고 들었었는데, 어떤 정신 나간 새기지? 매우 존나 힘들구만.'
그렇게 최재훈은 생각했다.
그냥 이 김에 때려쳐야겠다고.
다른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골머리가 아팠지만, 뭐가 됐든 여기에서 계속 일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니 나중에 생각하면 될 일이다.
최재훈이 기지개를 핀 뒤 후련한 기분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원래 그만두려고 했으니까. 이런 식으로 된 건 둘한테 좀 그렇긴 하지만, 뭐 자업자득이니까."
"아…."
당사자가 그렇다니까.
권지현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자, 그럼. 어쩔까요."
"네?"
"다른 PC방이라도 갈까요?"
"아."
'이거 혹시 데이트 각인가?'
권지현은 떨리기 시작한 기분으로 답했다.
"전 뭐든 좋아요. 재훈 씨가 원하는 대로 하죠."
"제가 원하는 대로라…."
최재훈은 잠깐 고민한 뒤 말했다.
"권지현 씨 뭐 촬영하고 오셨댔죠?"
"예? 아, 네."
지금의 힘들인 치장을 납득 시키기 위해 했었던 변명.
'저걸 갑자기 왜 언급하시지?'
권지현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고-
"그러면 좀 쉬고 싶으실 텐데, 사실 저도 오늘 좀 바빴어가지고, 지금 좀 지치거든요. 시간도 늦었고 하니 그냥 해산할까요?"
그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아-"
사실 촬영을 안 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의 차림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애시당초, 최재훈이 지쳤다는 말을 한순간 끝난 게임이긴 했다.
최재훈을 앞 둔 권지현의 자신감으론 요원하기만 한 일이었다.
지쳤다는 최재훈을 데리고 뭔가를 주도하는 건 말이다.
"그러죠 그러면."
권지현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그러면 시간도 늦었고 하니까 댁까지 바래다- 아, 맞다. 윗집에 사시지.
피식 웃은 최재훈이 손짓하며 말했다.
"가실까요?"
그 에스코트에 권지현은 저도 모르게 설레 버리고 말았다.
여자가 돼서 남자한테 에스코트를 받는 상황에 말이다.
"아, 네."
그런데도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좋은 쪽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긴 남자던 여자던,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둘은 그렇게 나란히 밤거리를 걸었다.
'어색한 건가?'
같이 있는 이가 최재훈이기 때문일까.
권지현은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는데도, 이건 이것대로 좋다 생각했다.
편안한 침묵이랄까.
"아, 권지현 씨."
그걸 깬 건 최재훈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권지현이 생각햇다.
아, 역시 이게 더 낫다고.
"네?"
"어, 음…."
잠깐동안 망설이던 최재훈은 뭔가를 결심한 듯 말햇다.
"제가 그, 방송을 시작해 보려고 그러거든요. 인터넷 방송."
"오, 정말요?"
자신의 잘 아는 주제가 공통 주제로 거론되었다는 사실에 권지현은 들떴다.
"네 그, 저번에 권지현씨랑 방송했던 게 상당히 인상적이었거든요."
"저랑요?"
게다가 자신과의 경험이 그에게 유의미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 권지현은 흥분에 가까운 상태로 말했다.
"인상적이었다니,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뭔가 뿌듯하네요. 아, 어떤 게 특히 인상적이었나요?"
권지현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응시하자 최재훈은 잠깐 또 고민하더니 말했다.
"이거요."
이거.
그가 엄지와 검지를 맞붙여 동그라미를 그렸다.
"푸흡."
솔직함을 넘어서 노골적이기까지한 대답에 권지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속물적인가?"
최재훈이 실실 웃으며 하는 말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솔직한 거죠."
권지현은 최재훈의 이러한 숨김 없는 털털한 성격이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지금 그녀에게 그의 뭐가 매력적이지 않겠냐마는.
"30분동안 방송한 걸로 통장에 50만원이 꽂히는데 와…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요."
"큭큭큭- 아, 그런데 그건 좀 특이한 경우라서… 막, 시급 100만원! 미쳤네! 이렇게 생각하신 거면-"
"에이, 저도 그 정돈 알죠."
"아, 그런데 최재훈 씨가 방송하면 정말로 가능할 지도 모르겠네요."
"제가요?"
"예 뭐. 워낙 잘…생기셨고- 성격도! 재미있으시고. 뭣보다 게임도 잘 하시잖아요? 이야, 깜짝 놀랐어요. 챌린저 이기고 우승하시다니."
"우승이요? 아, 대회 보셨구나?"
'아!'
분위기 타서 무심결에 말해 버렸다.
대회하는 걸 어떻게 알고 찾아 보곤 말한단 말인가.
'스토킹이라던가, 그런 쪽으로 생각하면 어떡하지.'
권지현은 당황했다는 사실이 들키지 않게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신경 써서 말했다.
"아, 그게 그- 허니뱅 애청자인 친구가 말해줘서요. 결승에 최재훈 씨 나온다고. 그래서 그때부터 봤어요."
"아~"
'휴.'
반응으로 보아 천만다행이도 '어떻게' 대회를 봤는지에 대해선 별 관심 없는 듯했다.
"아, 이거 괜히 쑥스럽네. 어쨋든, 제가 다른 건 몰라도 게임엔 좀 자신이 있긴 해요. 그런데, 그, 방송이라는 게. 사람들이 재미가 있어야 보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제가 워낙 아싸인 지라 재미랑은 거리가 먼 놈이라서… 영, 걱정이 되네요."
쓸데없는 걱정 집어치우세요.
당신 같은 남자면 방송 키고 깔깔유우머집 낭독해도 여자들이 좋아 뒤지며 지갑을 열 겁니다.
그나저나, 진작 방송 안 하고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얼굴로.
말풍선처럼 떠오른 말들을 순화시키고 압축시켜서 말한다.
"잘 될 거예요. 걱정 마세요."
"그래요? 아, 이거~ 방송으로 대성한 대선배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또, 자신감 과잉이 돼 버리는데~"
"에이, 대성이라니… 그 정돈 아니에요."
"이야~ 겸손하시기까지~ 뭐,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방송을 시작하려 하는데, 혹시 가능하다면 몇 가지 여쭤볼 수 있을까 해서요."
"아, 예. 제가 알고 있는 거라면, 뭐."
허가도 떨어졌겠다, 최재훈은 뻔뻔하리만큼 적극적으로 질문을 이어갔다.
방송 장비 선택 기준.
방송할 때의 마음가짐이나 주의사항.
미튜브 관리.
편집자와의 관계.
인터넷에서는 구할 수 없는 양질의 정보들이 권지현의 입에서 나와 최재훈의 귀를 통해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빌라에 들어서-
"바래다 드릴게요."
2층을 지나쳐 3층, 자신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최재훈의 에스코트는 마지막까지 철저했다.
여자인 권지현으로선 과연 복잡한 기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야, 정말로 유익한 정보들. 감사합니다. 진짜, 이걸 어떻게 보답해 드려야 할 지…."
"에이, 보답이라뇨. 부담 느끼지 마세요. 제가 원해서 한 거니까."
애초에, 열중한 최재훈의 대화 상대가 되는 것보다 나은 보답이 있긴 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 권지현에게 최재훈이 목례를 했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볼게요. 쉬세요~"
그리곤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권지현은 저도 모르게-
"저기!"
그를 불러 세웠다.
중간까지 내려간 최재훈이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최재훈.
권지현은 한참을 망설인 끝에 말했다.
그렇게 몇 마디의 대화가 더 오가고, 최재훈은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대화하다 보니 자신감도 붙었겠다, 권지현은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워 뭐라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어, 그게… 어… 어!? 디서 방송하세요!? 언제 한 번 보러 가게요."
그딴 소리나 하고 있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최재훈이 방송하는 플랫폼과 아이디를 알아낸 권지현.
"으으으… 씨… 찐따 새끼."
그녀는 문 앞에 쭈그려 앉아 자신의 위업을 격렬히 자축했다.
* * *
집에 돌아오자마자 컴퓨터에 앉아 권지현 씨가 준 정보들을 정리한 뒤, 자기 전까지 다이아2 계정 점수나 올릴까 싶어서 접속했다.
"잉?"
친구 요청에 50++ 이 적혀 있었다.
최소 50명 이상이 내게 친구추가를 보냈다는 표시였다.
"뭐지? 아."
대회에 이 계정으로 출전했었지 참.
"모두 와타시의 매력에 메로메로 되어 버린 데스우?"
이걸 보니까 우승 소감 말할 때 내 방송이랑 미튜브 채널을 홍보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아, 그건 좀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위인가?'
뭐 어찌됐건,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그려려니 하고 게임을 시작했는데-
-어 재훈이다
-치킨퀸치퀸님 재훈이죠? 허니뱅 대회에서 우승한
-이름이 재훈이 ㅋㅋ
-레전드 ㅋㅋ
"오매 십거?"
=어 재훈이다
=재훈오빠 ㅎㅇ
나는 시발 어느새 일약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그건 상관없는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 치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었던 마이 네임이 처음 만난 놈들 입에서 개껌마냥 희롱당하고 있었다.
-누나가 마스터까지 찍어준다
=재훈아 누나가 봇듀오 해줄까?
이름이 재훈이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 이 지랄이라니.
혜지 씨.
당신은 도대체 어떤 싸움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그러던 그때-
'호옹이?'
좋은 생각이 났다.
이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받아들이자, 이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적으로 활용한 방도가 보였다.
'마침 내일 마이크도 도착하겠다….'
내일 방송.
아무래도, 기대해도 될 듯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