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화. 남자의 적은 1
비효율적이지만 스스로 고민해서 최재훈의 취향에 맞는 식당을 찾아내고, 센스 좋은 여자라는 평가를 받기.
그냥 최재훈에게 취향을 물어보고 식당을 고르기.
그 둘 사이에서 고민하던 권지현을 결국 그 중간에서 타협하기로 했다.
자신이 골라 놓은 식당들 중에서, 최재훈이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게 하는 것이다.
"후…."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그녀는 적어 놓았던 톡을 보냈다.
[지금 대화 가능하세요?]
[5분 정도는 가능할것 같네요]
다행히 바로 오는 답장.
[아 혹시 바쁘신데 제가 톡드린 건가요]
[아뇨]
[그냥 10분뒤 알바들어가서 그래요]
[지금은 시간 널널해요]
[아]
그녀는 기존의 목적도 까먹고 새로운 주제에 관심을 빼앗겨 버렸다.
[무슨 알바 하세요?]
[PC방 알바요]
'와 PC방 알바남이 재훈 씨라고… 개쩌네.'
꼭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가 볼까…?'
[혹시 놀러가도 되나요?
그녀는 다 작성해 놓은 문자를 두고 고민했다.
갑자기 친한 척하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진 않을까?
"…에이, 씨. 모르겠다."
'먼저 식사까지 제안해 주셨는데, 이 정돈 받아주시겠지. 아니면….'
아니면 뭐 어쩌겠는가.
많이 슬퍼할 수밖에.
그녀가 문자를 보내기까지 고뇌한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답변은 곧바로 도착했다.
[별거 없을걸요 ㅋ]
[그냥 평범한 피방인데]
[그래도 괜찮으면 오세요]
[제가 쏨 ㅋ]
"예쓰!"
그녀는 흥분해서 격한 움직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렇게 평소 가볍게 외출할 때처럼 캐쥬얼한 복장을 하고 전신 거울을 봤는데-
"…."
방금 봤었던 방민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했다.
돌연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복장, 화장, 헤어스타일.
권지현은 최재훈에게 PC방 위치를 듣고 10분 정도 걸릴 것 같다고 말했었다.
그녀는 톡을 보내 정정했다.
한 시간 내로 가겠다고.
* * *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히들 들어가세요."
"네 재훈씨도 수고하세요!"
"화이팅!!"
일이 막 끝나서 힘들 텐데도 날 보더니 활기차게 웃어 주는 하은 씨와 슬아 씨.
인수인계를 마친 두 사람이 PC방을 나섰다.
그렇게 카운터에 혼자 남은 좌석을 둘러보았다.
"와…."
일요일 오후 시간대 알바를 해서 그런지, 지금 피씨방의 전경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일요일 꾸역꾸역 들어차 있던 좌석들은 지금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평일 야간 시간대의 PC방은 이처럼 한적했다.
…
…
"…?"
아닌가?
'시발?'
아니네?
뭐지?
자세히 보니까 존나 많은데?
아니, 일요일 오후랑 비교하면 분명 적은 게 맞다.
하지만 그건 시발 일요일 오후가 너무 말도 안 되게 미어터져서 그런 거고.
억만장자가 백만장자가 됐다고 거지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듯, 지금 피시방 인구 밀도는 일요일 오후에 비교해 봤을 때 분명 적은 게 맞았지만, 여전히 많은 편에 속했다.
야간 PC방 알바가 업무가 힘들지언정 손님 수 자체는 널널한 거 아니었나?
[최재훈2의 기억 : 나 보러 야간에 오시는 여자들이 꽤 있음.]
오.
지랄났군.
잘생겼기에 생기는 불편함도 있다니.
못생긴 분들은 이걸 알고 계셨을까?
나는 몰랐다.
잘생긴 놈들도 나름대로의 고충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 사실을 안다면 못생긴 분들의 억울함이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아닌가?
뭐, 세레브한 미남이 된 와타시랑은 상관없는 일인 데스.
"데프프픗."
나는 일단 업무에 착수했다.
쌓여 있는 요리와 음료의 주문을 확인하고 그것들을 차근차근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그런데,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주문을 둘 해결하고 돌아와서 확인해 보면 새로운 주문이 하나 더 들어와 있었고, 그렇게 주문을 하나 더 해결하고 돌아와서 확인해 보면 주문이 둘 쌓여 있었다.
에바와 쎄바가 손잡고 쌈바 추는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정말로 나 혼자서 이 많은 고객과 주문을 해결할 수 있을까?
최재훈2는 평소에 이런 걸 해냈던 건가?
[최재훈2의 기억 : 야간 알바 나 말고도 한 명 더 있음.]
"아, 역시."
어쩐지.
이 상황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 나 말고도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진심으로 안도하는 동시에 존나 얼탱이가 털려 버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내 옆에서 같이 라면 말고 있었어야 할 또 한 명의 노예 새끼는 도대체 어디로 증발해 버린 것이지?
[최재훈2의 기억 : 최두산이라고, 개새끼가 내가 PC방 알바 시작한 이후로 한 번도 제때에 온 적이 없음.]
음.
아무리 개새끼라 해도,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몰상식한 짓을 저질렀을 거라 생각되진 않는다.
두산이에게도 뭔가 사정이 있지 않을까 싶다.
가령, 어릴 적 여건상 가정교육 과정을 독학으로 수료할 수밖에 없는 딱한 사정이 있었다던가 말이다.
그렇다면 가정 교육을 통해 익혔어야 할 필수적인 기본 예절들의 누락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시발 이건 최재훈2한테도 문제가 있다.
존나 PC방 알바 이후로 한 번도 제때에 온 적이 없긴 시발, 니가 뭔가 제스쳐를 취했어야지.
기억 되짚어 보니까 이 새끼, 현피를 신청하긴커녕 따끔하게 한마디 한 적조차 없다.
[최재훈2의 기억 : 알바 선배라 텃세 부리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음.]
존나 '사내놈'같은 변명일세.
알바 선배면 뭐 시발, 마나랑 내공이라도 쓸 수 있나.
끽해봐야 음식 좀 더 빨리 만들고, 키보드랑 마우스 좀 더 잘 닦는 정도일 텐데, 왜 지레 쫄아서 굽히고 들어가는 거지?
그 재빠른 손놀림이 그리도 무서웠나?
[최재훈2의 기억 : 기 존나 쎈 쌍놈이라 무서운 것도 있고.]
기는 또 뭔 놈의 기.
거 뭐, 기 쎈 언니, 그런 거냐?
그놈의 최두산이 어떻게 생겨 먹은 년인지, 아니, 놈인지 최재훈2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떠올리려고 할 때였다.
손님이 한 명 더 왔다.
'안 돼, 시발. 다른 곳으로 꺼져.'
머리 갈색으로 물들인, 멀쩡하게 생긴 수컷 인싸였는데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대뜸 말한다.
"늦어서 미안해요~"
'뭐?'
그리곤 싱긋 웃는데.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저놈이 바로 그놈의 최두산이었던 것이다.
상상도 못했다.
10분이나 쳐 늦었다.
진짜로 미안하지는 않아도, 미안한 척이라도 하는 게 맞다.
다급한 척이라도 하는 게 맞다.
그런데 저렇게 여유 넘치는 느긋한 발걸음이라니?
게다가 그 사과는 또 어떤가?
너무 상쾌하고 미안함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서 처음엔 무슨 굿모닝 에브리원이라도 씨부린 줄 알았다.
진짜 무슨 간단하게 인사한 줄 알았는데, 그게 연락도 없이 10분이나 지각한 데에 대한 사과였던 것이다.
카운터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조급함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 느긋하고 여유로운 걸음걸이란.
우아할 정도였다.
나는 확신했다.
두산이에겐 그게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쳐선 안 된단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쳐 놓고 존나 당당해서도 안 되고 존나 띠꺼워서도 안 된단다.'
어릴 적, 가정교육을 통해 그러한 기본 예절들을 주입시켜 줘야 했을 가정교육 선생님이.
라면을 서빙하고 카운터로 돌아온 내 눈에 보이는 건,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는 두산이였다.
요즘 세상에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리 많다지만, 그 안에 PC방 아르바이트의 업무는 포함되지 않았다.
'아닌가?'
사실은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PC방 아르바이트 업무가 존재하나?
뭐, 라면 대신 끓여 주는 앱이라도 있나?
과학 발전이 벌써 그런 경지에 이른 건가?
두산이의 너무나도 당당하게 양심이 터져 버린 행동에 내 사고관이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정말 행동 하나하나에 체제를 부정하는 사상을 담는 새끼가 아닐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는 정시에 출근하여, 업무에 정시 착수해야 한다?
부정.
아르바이트는 성실해야 한다?
부정.
돈을 받았으면 일해야 한다?
부정.
사람이라면 염치가 있어야 한다?
부정.
곤란.
"뭐 하세요?"
'일 안 하냐 시발아?'
가까스로 진심을 억누르고 말했다.
그러자 두산이는 눈길도 안 주고 산뜻한 어조로 말한다.
"보면 몰라요~?"
보면 알지 시발아.
핸드폰 하고있는 거.
그래서 존나 묻는 거 아니야.
니가 시발 아르바이트지 핸드퍼너(핸드폰 하는 게 직업인 사람을 뜻하는 명칭. 진짜 있는진 모름ㅎ)냐?
쟁반을 세로로 세워서 인중을 찍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 새끼를 인사불성 상태로 만들면 저 많은 고객들을 나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지금 주문이 좀 많이 밀려 있어서 저 혼자 하기엔 힘든데요."
그러자 두산이가 들으란 듯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와드릴게요."
진짜 그렇게 말했다.
'도와''드린다고'.
마지못해 선심이라도 써준다는 양, 생긋 웃으며 말이다.
'시발?'
이 새끼는 아르바이트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 왜 그걸로 생색을 쳐 내는 것이지?
이거 혹시 개꿀잼 몰카인가?
사실 최두산 이 새끼는 아르바이트로 위장한 이 PC방 프렌차이즈의 CEO가 아닐까?
사실 지금 언더커버 CEO를 촬영 중인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됐다.
'모르겠다.'
현재로선 도무지 해소할 방도가 보이지 않는 의문과 빡침을 뒤로하고 업무를 재개했다.
일요일에 느꼈다시피, 나는 아직 일을 능숙하게 하는 편은 아니다.
그 능률은 베테량인 슬아 씨와 하은 씨의 반절 수준.
그런데 이 두산이 십새끼는, 그런 나보다도 일을 못 했다.
아니, 못 한다가 아니라 안 한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여유가 느껴지는 동작과 산만한 태도에선 일에 대한 의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쌓여 있던 주문이 차근차근 줄어들어 진척이 생기고 있었다.
그 사실을 위안 삼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이거 딱 슬아 씨랑 하은 씨가 나 데리고 일했을 때 상황이었다. 제 구실 못 하는 놈 하나 때문에 더 고생해야 하는 상황.
물론, 나는 두산이와 달리 열과 성을 다한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결과였다.
내가 열과 성을 다해도 하은 씨와 슬아 씨가 나 때문에 고생했다는 결과엔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내게 친절하게 대해 줬다.
그 미덕을 본받기로 했다.
그렇게 마침내, 주문을 모두 해결했을 때였다.
소란이 들려왔다.
고객들의 이목이 집중 되고 있는 소란의 근원지로 향했다.
"아니 말을 그렇게 재수 없게 해!"
"손님이 잘못을 인정 안 하시니까 그렇죠."
두산이가 여자 손님이랑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내가 아는 두산이 십새끼는 손님이랑 다이다이를 쳐도 이상할 게 없는 미친놈이었기에, 다급히 끼어들어서 말했다.
"손님, 무슨 일이시죠?"
"아니 아르바이트 말고 사장 불러오라-"
날 본 여자의 얼굴이 굳었다.
이 반응이 나왔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무슨 문제시죠?"
"아니 그, 짜장 라면을 시켰는데 그냥 라면이 나와 가지고."
"아니, 내가 제대로 확인했다고요. 그냥 라면인 거. 그쪽이 잘못시킨 거라니깐요."
옆에서 두산이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여자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한다.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제가 바로 짜장 라면으로 갖다 드릴 테니까-"
"아 됐어요."
"네?"
"그쪽 얼굴 봐서 참을 테니까, 저 알바한테 다음부턴 조심하라고 해 주세요."
그렇게 말한 여자는 시선을 피하듯 화면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최두산은-
"…."
그전까지 가득했던 음흉한 웃음기가 싹 빠진 표정으로 날 쏘아 본 뒤 신경질적으로 자리를 떠났다.
아니, 시발.
이번엔 또 뭐가 문제지 도대체?
니가 일으킨 문제 대신 해결해 줬잖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최재훈2의 기억을 샅샅이 뒤지다시피 한끝에 마침내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최두산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왜 최재훈2이랑 나한테 엿같이 굴지 못해 안달인 건지.
지금 행동뿐만이 아니라, 그간의 모든 행동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최재훈2의 기억 : 나한테 외모 쪽으로 열등감 갖고 있는 것 같음. 주로.]
"지랄 났네."
진심으로, 잘생겨서 존나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