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화. PC방 대회 1
대리 업자가 대리 기사에게 요구하는 계정 인증은 일종의 신용 보증이었다.
그렇기에 생각했다.
신용 보증이 아니라 아예 보증금을 맡기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당연히 신용 보증보다는 보증금 자체를 맡기는 게, 더 확실한 보증 수단 아니겠는가?
합리적 사고가 불가능한 게 아닌 이상 대리 없자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인증 문제는 해결됐고, 다음은 신상 문제였다.
계좌로 송수금을 하게 된다면 실명의 노출을 피할 수 없다.
내 실명이 대리 기사로 누군가에게 알려진다면, 만약 내가 나중에 방송으로 성공해서 유명해졌을 때 그로 인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그러한 문제 또한, 지금 동생의 계좌를 빌림으로써 해결됐다.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이제는 당초 목적대로 대리를 시작할 일만 남아 있었다.
남아 있었는데….
"…."
'역시, 대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미뤄 두자.'
성실하고도 정직하게 살아가는 가족들의 모습에 결심이 무너져 버렸다.
나중에 성공했을때.
어떻게 해서 두 분의 빚을 갚아드릴 수 있었는지.
어떻게 해서 니 옷이랑 핸드폰 사주고 대학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는지.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가족들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렇게 대리 대신 재은이가 말했던 대회가 떠올랐다.
'BJ허니뱅이랬던가?'
BJ니까 아마리카TV 쪽이겠지.
아마리카TV 사이트에 들어가서 검색하니 바로 BJ허니뱅의 방송국이 나왔다.
-베스트 BJ허니뱅X라논PC방 미드빵 대회-
개업한지 얼마 안 된 PC방의 홍보를 위해 개최된 대회 같았다.
참가 인원 제한은 PC방의 좌석 수와 동일한 150명.
참가 조건은 당일 PC방에서 구입 가능한 7천 원 상당의 입장권을 구비하여, PC방 좌석 중 하나를 배치 받는 것.
개최지는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아 대중 교통으로 무난하게 왕복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개최일은 재은이 말대로 내일.
'개최 시간이….'
좀 애매하다.
'참가할 수는 있는데, PC방 야간 알바 출근 감안하면….'
아슬아슬하게 되기는 하겠다.
상금은 재은이가 말했던 대로였다.
3등 10만 원, 2등 20만 원.
그리고 1등 100만 원.
거기에 두 개의 특별상으로 각 10만원 씩.
'100만원이라….'
나는 이미 머릿속으로 100만원으로 뭘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1위를 못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다름아닌 미드빵이다.
프로씬에서 내 모든 장점을 상쇄시키던 모든 제한이 미드빵엔 없다.
1군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팀의 주전 미드가 나오는 게 아닌 이상 반드시 이길 자신이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자기 전까지 시간을 어떻게 때울까 고민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냥 시간을 보내더라도 생산적인 일이 하고 싶었다.
그렇게 떠오른 다이아4 계정 점수 올리기였다.
일반인이 들었다면 '그게 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수면제 과다복용을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하지 않겠나요?' 라는 말이 절로 나왔을 발상이다.
하지만 현실이 아닌 데이터 쪼가리에 인생을 갈아 넣은 겜창인 나로서는 지극히 합당한 발상이었다.
겜창에게 있어서 게임 점수는 곧 자신의 거울이자, 신분증이자, 계급장이었다.
그렇게 다4 계정으로 접속했다.
"고렇지."
어제 오늘 하도 액땜을 많이 해 놔서 그런가.
게임이 무난하게 잘 풀렸다.
팀에 화 잔뜩 난 정신병자가 하나도 없었다.
팀원들이 아무리 부진해도 그 정도면 게임이 무난하게 잘 풀린다 할 만했다.
"그렇지."
"너무 쉽고."
"아, 쓰… 아쉽네."
"아, 이건 역시 아닌가?"
아침에 AP애즈를 했던 게 재밌어서 다시 해봤더니, 잘 안 됐다.
덕분에 다이아4에서 승률 50퍼를 찍는 기염을 토해냈다.
레오레 유저에게 있에서 승률50퍼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대충 [니 시간 날림 ㅄ아 ㅋ] 그 정도가 되겠다.
그렇다면 전 프로게이머이자, 전 챌린저 1100점인 내게 있어서 다이아4 승률 50프로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뒤지자 그냥, 왜 사냐.]
정도가 되겠다
나는 빡집중 모드에 돌입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슬슬 시간이 됐다.
잠에 들기 전 오늘 전적을 확인했다.
18승 2패.
다이아4이었던 티어는 다이아 2가 되어 있었다.
어떤 격언이 떠올랐다.
'게임에 문제가 있다면 일단 애즈리부터 욕해라.'
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꿀잠에 들 수 있었다.
* * *
버스와 지하철을 타는 내내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다.
여자들이 안 들키도록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데, 모르는 척해주는 게 고역일 정도였다.
그냥 돈 내고 대놓고 쳐다보라고 말하려던 걸 겨우 참았다.
"저기, 혹시-"
지하철에서 나와 걷다보니 인싸로 보이는 여자가 따라와 번호를 물었다.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고양이가 꼬리를 흔들듯 자연스럽게 거절부터 나온다.
지금의 난 외모 기득권층 그 자체였다.
못생긴 것들이 내게 죽창을 들이대며 단두대로 끌고 가도 '그래, 언젠간 이렇게 될 줄 알았어.'라며 체념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 시발 그럼 이제 평생 여자한테 안 끌리는 건가?'
그렇다고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최재훈, 이 세계에 오고 고자가 되어버린 건가?
평생 '여자'들을 멀리하다 혼자 말라비틀어 뒤지는 건가?
타의적으로 여자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을 때보다,
자의적으로 여자를 멀리하는 지금 상황이 더 걱정됐다.
'시발,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번호를 따려는 여자를 세 번쯤 더 만나고 PC방에 도착했다.
'웜메~'
PC방에 들어서자 마자 속으로 그런 소리가 나왔다.
우리 PC방이 상당히 크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PC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최저시급 받고 이런 데서 일하는 흑우 없제? 있으면 편집 배워서 나랑 같이 일해 보지 않을래?
'어.'
PC방을 둘러보는데 문쪽을 쳐다보고 있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우리 재은쉑.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달려갔다
"아이고 우리 동상! "
* * *
최재훈은 반가운 마음을 가득 담아 동생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반가운지.
그만큼 헤드락은 거셌다.
"아씨! 꺼져!"
"아니, 오빠 봤는데 처음 하는 말이 꺼져라고?"
"니는 그럼 여동생 처음 봤는데 하는 게 헤드락이야?"
"마음의 상처가 몸의 상처보다 아픈 법이야."
"아 제발 좀 꺼져~~!!"
최재은은 최재훈을 떨쳐내며 적잖게 당황했다.
'뭔 힘이 이렇게 쎄?'
밀쳐내는데 무슨 여자 같이 묵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재훈은 마냥 좋은지 실실거리며 최재은의 머리를 격하게 쓰다듬었다.
"아, 진짜! 머리 망가져!"
"니 머린 진작에 망가졌잖아.
"아, 지랄 좀 그만하고 빨리 가서 입장권이나 사 와. 입구 컷 당하기 싫으면."
"아, 맞다. 오키."
최재은은 가서 입장권을 사 오라고 했다.
정말로 사서, 다시 오라는 의미는 아니고, 입장권 사서 대충 아무 자리에나 앉으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최재훈은 정말로 입장권을 사 왔다.
사, 온 것이다.
주변에 자리가 없는데도.
무슨 생각인지는 곧바로 밝혀졌다.
"저기, 아무것도 안 하시는 중인 것 같은데 저 여동생이랑 같이 좀 앉게 혹시 자리 좀 양보해 주실 수…."
원래의 최재훈 같았으면 하지 못 했을 뻔뻔한 일이다.
이성에게 귀찮은 일을 강요하다니?
하지만 지금의 최재훈은 스스로가 외모 기득권층이라는 입장을 완전히 파악한 상태였다. 이성에게 개 쌉 억지를 부려도 어느 정도 먹혀든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자는 몸을 돌려 최재훈을 쳐다봤다.
그러자 거절하기 위해 귀찮은 티가 팍팍 담겨 있었던 얼굴이 돌변했다.
웃음기 팍팍 담긴 얼굴로.
"아, 비켜드릴까요?"
"그냥 무시하세요."
"아~ 괜찮아요. 가족끼리는 같이 앉아야죠~"
여자는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몰랐다.
그냥 최재훈의 얼굴을 보고 마냥 좋아하며 자리를 비켜 줬다.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쫓겨나는 여자는 시종일관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아니 진짜 개 민폐야. 뭐하는 짓이야 이게."
"오빠가 부끄러?"
"존~나 부끄러워."
아무리 싫은 말을 해도 최재훈의 기분은 나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
최재은의 입에서 진심어린 한숨이 나왔다.
"왜 따라 왔어? 니 와서 뭐 하려고."
"어제 현피 까러 찾아간댔잖아."
"미친 건가?"
"구라고, 뭐 하러 오긴. 대회 열리는 데 뭐하러 왔겠냐, 당연히 대회 참가하러 왔겠지. 따라오긴 뭘, 이거 완전 도끼병 아니야. 이쉑, 이쉑."
"아, 쫌!"
최재은은 옆구릴 콕콕 찌르는 최재훈을 피해 거리를 벌렸다.
"아니 근데 어이없네, 니가 웬 대회?"
"오빠가 대회 참가하는 게 어이가 없을 정도야?"
"어."
"왜. 오빠도 너랑 같은 다딱이인데."
"하."
최재은은 진심으로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요 다4 예티 씨. 어디 가서 저 같은 다2한테 같은 다이아라고 하지 마세요. 진짜 나라서 참지, 칼침 맞는 수가 있어."
"네 다음 다딱이~"
"하."
아직 대회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진이란 진은 다 빠져 버린 최재은이었다.
가만히 최재훈을 쳐다보던 그녀의 한쪽 눈썹이 구겨졌다.
"그런데 니 분위기 좀 변했다?"
"분위기?"
"성형했냐?"
"아, 내가 이세계의 최재훈이라 그렇게 느껴지는 거야."
"이 세계?"
"다른 세계의 최재훈이라고."
"하, 씨. 오타쿠 색. 진짜 뭐라는 거야."
그때, 입구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어, 왔다."
연예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장신의 미녀.
BJ 허니뱅이 거기에 서 있었다.
* * *
BJ허니뱅, 방민하는 셀카봉처럼 생긴 야외봉을 흔들며 거기에 달린 핸드폰 카메라로 피씨방 내부의 모습을 담았다.
베스트 BJ인 방민아의 평소 시청자 수는 5천 내외였다.
엄청난 수다.
그런데 지금은 그 엄청난 수의 거의 두 배 되는 시청자가 방송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지금 떨리고 있었다.
좋은 의미로 말이다.
"언니들, 반갑습니다. 이렇게 대회의 탈을 쓴 제 팬미팅에 참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팬미팅은 무슨~ 상금 내놓을 준비나 해~"
[ㅋㅋㅋㅋ 개소리 바로 컷 들어오네]
[공짜 음성 후원 ㄷㄷ]
[개꿀이네 ㅋㅋ]
[아 나도 갈걸 ㅋㅋ]
[근데 대회 참가비가 7천원이라 ㅋㅋ 저래도 창렬임]
"아 대회 참가비가 7천 원이라 창렬이다! 참가자 언니들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네!!!!"
“존나 비싸요!!!”
"그런데도 언니들은 온 거야! 왜냐? 내가 좋아서! 이게 팬미팅 아니면 뭐야?"
"지랄하지 마세요~~~~"
누군가 외치자 피시방과 채팅창이 'ㅋ'로 가득 찼다.
장난 섞인 야유가 쇄도했다.
"아, 언니들, 진정하세요. 당연히 농담이지. 내가 설마 진짜로 대회 참가비로 7천 원 꿀꺽하겠어? 언니들, 놀라지 마십쇼. 오늘 12시까지, 피시방 전부 자유롭게 이용 가능합니다. 음료? 요리?"
방민하가 카메라를 향해 총을 쏘는 시늉과 함께 윙크를 날렸다.
"방민하와 라논PC방이 쏩니다."
-와!!!!!!!!!!!!!!!!!
-방민하!
-방민하!
[방민하!]
[방민하!]
[방민하!]
"자 이렇게 화끈한 분위기 속에서 라논 PC방이 후원하는 BJ허니뱅 배 PC방 미드빵 대회,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미드빵 국룰 아시죠?"
미드빵.
레오레의 실력을 평가하는 무수한 요소 중 하나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한 라인전 능력만을 겨루는 1:1승부 방식이었다.
승리 조건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1. 먼저 상대방을 죽일 경우.
2. 먼저 미니언 스코어, CS 100을 달성할 경우.
3. 상대방과 CS를 50개 이상 벌릴 경우.
4. 상대방보다 먼저 포탑을 파괴할 경우.
통칭 국룰, 국민룰에 해당하는 규칙이었다.
"오케이, 그럼 다 아는 거로 알고. 다들 레오레 접속하신 뒤에 바탕화면에 있는 녹화 프로그램 켜 주시고, 그 옆에 있는 메모장 참고해서 비밀방 만들고, 들어가서 바로 시작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어느새 조용해진 PC방 실내에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만이 흘렀다.
"아 그리고 언니들, 영광스러운 1호 탈락자를 가려내기 위해. 자기가 제일 빨리 진 것 같다! 전혀 부끄러워 할 것 없이 바로 손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끄러운 일이 맞긴 하지만."
웃음의 파동이 한 번 일었지만 곧바로 다시 진중해지는 분위기.
방민하는 좌석 사이를 돌아다니며 진지한 참가자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렇게 잠시 뒤.
-아, 시발!
누군가 손을 들었다.
"오, 언니들! 대망의 첫 탈락자가 벌써 나왔습니다! 바로 인터뷰하러 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