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화. 저마다의 길
"후…."
목욕을 마친 이서연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정확히는, 타블렛 앞에 앉았다.
이서연은 명문 대학의 재학생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어머니의 회사에서 일을 배우고, 장차 비전을 물려받는다.
그게 이서연의 부모가 그녀에게 바라고, 요구하는 진로였다.
이서연은 부모의 뜻을 따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었다.
자아가 여물기 전까지는 그저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다.
옛날부터 아름다운 풍경과 사물, 그리고 인물을 그리는 걸 좋아하는 이서연이었다.
그녀는 부모에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원조 없이 1년 안에 유의미한 결과를 낼 것.
부모와의 관계가 파탄 나지 않는 선에서 얻어낸 최대한의 타협점이었다.
그렇게 7달이 지났다.
이서연은 아직까지도 유의미한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FIXYV'를 비롯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녀의 그림은 반응이 꽤 좋았다.
하지만, 유의미한 결과에는 미치지 못했다.
갈 길이 멀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서연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서연이었는데도, 타블렛 펜을 잡은 지금 그녀는 몹시 산만했다.
2시간 정도 들여 마무리만 하면 되는 그림이, 여전히 미완성인 그대로였다.
드물게도, 지금 그녀는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드물게도, 그림 말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탓이었다.
어제 편의점에서 봤던 남자.
어제부터 쭉 그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녀는 결국 미완성인 그림을 미완성으로 놔둔 채, 새로운 창을 띄웠다.
그렇게 떠오른 백지에 새로운 걸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전에는 없을 정도로 좋은 느낌이 들었다.
* * *
"오…."
한산한 편의점.
이서연은 노트북으로 FIXYV를 둘러보며,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에 참고가 될 만한 작품들을 찾아보는 중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게 힘들지 않고 즐거우며, 또 기대되는 게 얼마 만이던가.
아마도 7개월 만이었다.
짤랑~
완전히 몰두한 그녀였지만, 업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녀는 즉시 관심을 핸드폰에서 새로 온 손님에게로 돌렸다.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어서오세요… 어?"
그리곤 멍한 얼굴이 됐다.
어제부터 머릿속에 쭉 그려오던 남자.
그가 거기에 있었다.
언젠간 다시 만나겠지, 막연하게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이야.
그런데도 그녀는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의 곁에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두 명이나.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지.
저렇게 매력적인 남자 곁에 여자가 있는 건.
'무슨 사이지? 두 명이니까… 여친은 아니겠지?'
여친이면 어쩌고 아니면 또 어쩔 건데?
그런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는 걸 가까스로 무시하며, 그녀는 남자를 관찰했다.
불순한 의도의 관찰이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그림을 그릴 때 참고하기 위함이었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등을 돌린 채 냉장진열대를 살펴보고 있는 남자를,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가며 최대한 많은 시점에서 눈에 담았다.
관찰은 그가 카운터로 오기 위해 몸을 돌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세 명이 각기 다른 캔 음료를 내려놓았다.
"이거, 이렇게 결제해 주세요."
"아, 그, 오천삼백 원입니다."
"예? 오천삼백 원이요?"
"네? 무슨 문제라도…."
남자가 놀란 기색으로 묻자, 어제 일이 떠올라 차마 마주치지 못하고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었다.
"아니 그, 혹시 영수증 좀…."
"아, 잠시만요."
아무래도 떠올리고 상상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미화가 있었나 보다.
남자는 이서연이 머릿속에 그렸던 모습과는 다소 달랐다.
그런데도 이쪽이 더 좋았다.
이서연은 어제부터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기록하고 또 그린 무수히 많은 자료들을 미련 없이 지우고, 새로 만들어 나갔다.
"여깄습니다."
접객하는 순간엔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다.
그녀는 영수증을 건네며 최대한 효율적으로 남자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어제 일을 떠올린 최재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서연은 그 모습을 기록해 두기 위해 머릿속 연필을 바삐 움직이며 자신도 미소로 화답해야겠다 생각했고, 행동했다.
씨익-
이서연이 웃는 방식은 최재훈과 비슷했다.
그녀도 웃을 때, 눈가가 움직이지 않는다.
최재훈처럼 입가만 움직였다.
하지만 결과물은 전혀 달랐기에 이서연은 계속 저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오매 무셔.'
최재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곧바로 눈을 깔았다.
그렇게 영수증을 보더니-
"누구야. 남들 다 천 원짜리 먹는데 기어코 혼자 개 비싼 에너지 음료 먹어야 되는 만수르 누구야!"
다시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던 여자들을 향하며 말했다.
"이 새낍니다."
한슬아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김하은에게 삿대질했다.
"어…."
"이, 이, 배은망덕한 쉑기. 재훈 씨가 지갑 여시니까 이때다 하고 아주 그냥 밑천을 털어먹으려고. 그냥 얘 버리고, 저 하나 더 사 주시죠?"
"아니, 어… 콜라인 줄 알고 그만 잘못 집어 버렸습니다."
"음, 반성의 여지가 안 보이네요. 피고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고 헵시 콜라 형을 선고하겠습니다."
짝짝짝.
"공명정대한 판결입니다, 판사님."
"아니, 판사님! 저는 사실 눈이 안 보입니다."
"장발장이 아니라 장님장이였네 이 새끼."
"눈이 안 보이면 코크 콜라라고 생각하고 먹으면 되겠네요."
세 명은 거의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며 편의점을 나섰다.
"…."
생각보다 유쾌한 사람이구나.
저렇게도 웃는구나.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본 이서연은 남자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새로운 환상이 생기는 것 또한.
새로운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곧바로 노트북에서 메모장을 켜고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나갔다.
퇴근하자마자 그릴 그림을 위해.
머릿속으로 열심히 밑그림을 그려 가며 말이다.
* * *
"저는 이제 이쪽으로 가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아, 저도 그쪽으로 가요!"
"와, 이런 우연이! 저돈데!"
지긋이.
"아, 생각해 보니 저쪽으로 가야 되는구나."
"잠깐 헷갈렸네."
"그렇죠.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천 가지를 잊어버린다니까. 전혀 이상할 거 없네요."
"그렇죠. 완전 하나도 이상할 거 없죠."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하하!"
"헤헤헤."
"히히히."
…
"전 진짜 가 볼게요. 두 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최재훈 씨도요! 이거 잘 마실게요!"
"당연히 잘 마셔야죠. 개 비싼 건데."
또다시 웃음이 오갔다.
의외였다.
아니, 놀라울 정도였다.
이렇게 잘 생겼는데, 이렇게 털털하고 유쾌할 수도 있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신비로울 수가 있구나.
보면 볼수록, 매력을 더해가는 남자였다.
그래서 아쉬움도 더해만 갔다.
이게 마지막이라 인정하기 싫었다.
"아 그 혹시-"
그래서 김하은은 내일 모래 월급 나오면 그때는 어떠냐고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한 차례 좌절하고 자신감을 잃어서인지, 말이 나오질 않았다.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늘 진짜 수고하셨다고요."
"아~ 감사합니다."
"오늘 진짜 재밌었어요~"
한슬아의 말에 최재훈은 피식 웃고는 등을 돌렸다.
저도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유유히 멀어져갔다.
둘은 최재훈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 * *
"으어어 시발…."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렇게 대자로 누웠다.
아는 천장이다.
"진짜 개 빡쎄네."
이 지랄을 매일마다 해야 한다니.
[최재훈2의 기억 : 원래 야근타임이고, 야근타임은 엄청 널널함.]
아, 그랬지 참.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이었다.
이곳에서 최소한 두 달 치 생활비 여유분은 만들어 놔야 하니까.
그거 모으기만 하면 시발 어?
'…어?'
모으기만 하면….
…
…?
모으면 뭐.
뭐가 있지?
'아무것도 없지 않나?'
이런 거지 같은.
뼈빠지게 일하고 퇴근하자 마자 하는 게, 미래 걱정 하며 존나 침울해지기라니.
'아니 근데, 진짜 어떡하지?'
최재훈2는 잠깐 휴식을 갖기 위해 휴학을 신청했다.
그러니 곧 휴학이 끝나면, 다시 대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게 최재훈2의 계획이었다.
인생설계였다.
나는 그걸 따라가면 되는 건가?
'지랄?'
최재훈2가 다니는 대학교는 꽤 급이 있는 대학교였다.
세 음절로 묶어서 나누는 대학교 등급의 두 번쨰 계층에 속했다.
그렇지, 시발. 내가 게임 말고 공부했으면 이 정도라니까?
라는 자부심은 차치하고.
나는 중졸이다.
그런 내가, 그 대학교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적응할 수 있을까?
그런 명문대의 커리큘럼을 따라갈 수 있을까?
불가능하진 않겠지.
관심을 갖고 열정을 가진다면, 가능성이 전무하진 않겠지.
그런데도 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건 최재훈2의 길이다.
나는 내 길을 걷고 싶었다.
내 길.
나는 게임에 모든 걸 걸었었다.
모든걸 걸고, 프로게이머가 되었었다.
그렇다면 다시 또 프로게이머를 노려야 하는 건가?
'….'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이미 한 번 해 보기도 해 봤고 말이다.
하지만.
이미 한 번 해 봤다고 해서, 더 잘 할 수 있을까?
자신감과 열정이 온전했을 때도, 나는 한계를 느끼고 포기했다.
그렇게 자신감을 잃고, 열정을 되찾아야 하는 지금의 내가 됐는데.
그런 내가 다시 또 프로게이머에 도전한다면?
당시의 나는 머릿속에 성공만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머릿속에 이미 실패를 그리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다시 프로게이머가 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하…."
사실, 구태여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큭…."
그런데도 씁슬해서 혀가 다 저릴 지경이다.
술 땡기네.
기껏 술 약속 팽하고 왔더니.
…
"시발…."
내 모든 걸 게임에 바쳤다.
프로게이머가 되어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프로게이머로서의 커리어, 그 과정에서 얻은 수입들.
그것들은 나라는 놈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증표였다.
그런데 더 이상 없다.
다시 얻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난 뭐지?
아무것도 없는 난, 아무것도 아닌 놈이 되는 건가?
"아. 아, 시발!!!"
침대가 늪이 되어서 무기력하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벌떡 일어나 바닥에 엎어졌다.
병신 새끼 정신 좀 차리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요란하게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하나!"
시발, 그래.
"둘!"
다 사라졌지.
"셋!"
계정, 전세집, 부모님 빚 상환, 적금.
"넷!"
다 시발 조져 버렸지.
"다섯!"
그래서 어쩌자고.
"여섯!"
어~ 인생 진짜 개같네~ 비관하면서 술이나 쳐마실까?
술 퍼마시다 돈 떨어지면 자살이라도 할까?
"일곱!"
프로게이머 못 하면 뒤져?
"여덟!"
아니지.
시발 나는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야.
"일… 아, 몇까지 셌더라!!?"
그리고 자꾸 비참하게 은퇴한 것처럼 말하는데, 아니잖아.
"일곱!"
그땐 박수칠 때 떠났다고, 아 나 너무 멋진 거 아닌가 하고 자위했잖아.
"여덟!"
퇴물이 아니라고.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했잖아.
"아홉!"
그러니까 엿같은 패배의식에 그만 쩔어있고, 아직 살아 있는 능력으로 뭐라도 좀 해 보자고.
"아홉!"
지금 상황이 얼마나 개같은지 열심히 찡찡거려봤자, 기분만 더 개같아지기밖에 더 해?
"열!"
그러니까, 너무 개같아서 버틸 수가 없다면.
그 엿같은 상황을 어떻게 해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 엿같게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고.
"열 하나!"
그러니까 시발 생각해 보자.
"열 둘!"
프로게이머 말고 뭐가 있을까.
"열 하나!"
잘난 게임 실력으로 뭘 해야, 이 지랄난 상황을 조금이라도 덜 지랄나게 만들 수 있을까.
"열…."
…
팔이 멈췄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