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화. 귀갓길
볼 때마다, 최재훈은 여자 고객들에게 작업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문제없이 잘 넘어가는가 싶더니,
언제부턴가 그 얼굴에 피곤과 불쾌가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근무가 끝나고 PC방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이 특히나 지쳐 보였다.
충분할 정도로 최재훈을 신경 써 준 김하은과 김아솔이었다.
그런데도 둘은 자기가 너무 신경을 못 써준 건가 싶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둘은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는 건물 입구 단층에서 내려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둘이 부르자 그가 몸을 돌려 둘을 응시했다.
'와….'
'하….'
그가 가진 특유의 눈빛.
뭔가에 취한 듯 몽롱하면서도 능청스러운 눈빛은 밤하늘 조명 아래에서 더더욱 고혹적이며 신비로웠다. 둘은 단번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내 정신좀 봐. 두 분한테 인사도 안 드리고 그냥 나와 버렸네."
그가 멋쩍은 듯 웃었다.
그가 웃는 모습은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입은 열심히 움직이는데, 눈가는 미동도 안 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그가 가진 신비한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오늘 두 분, 정말 고마웠어요. 두 분 덕분에 그나마 사람 구실 할 수 있었습니다."
아닌가?
그가 덧붙여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스위치가 눌린 것처럼, 둘의 얼굴에도 단번에 웃음이 피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여자에게 영향을 주는 남자였다.
"아이, 아니에요! 오늘 얼마나 잘 하셨는데!"
"그러니까요! 그, 진상들 어? 그거 얼마나 잘 대처하셨는데."
둘은 새삼 깜짝 놀라고 있었다.
둘이 최재훈을 만나는 건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둘은 오후 알바고, 최재훈은 야간 알바였으니.
인수인계를 할 때마다 대면해서 대화를 나눴었다.
그런데, 오늘 같이 강렬한 인상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는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솔직히 그거, 저희 둘만 있었으면 그렇게 잘 안 풀렸을걸요?"
"남자랑 여자 둘 다 저희가 감당 못 할 수준이였어서…."
"그러니까! 오히려 저희가 재훈 씨 덕을 본 거죠!"
"에이."
최재훈이 입이 움직여 표정을 만들 때마다, 둘의 표정이 격변하는 수준으로 반응했다. 마치 그의 입이 둘의 표정을 조종하는 컨트롤러 같았다.
"말씀만이라도 고맙네요."
최재훈은 둘과 한 번씩 눈을 마주치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다시 한번, 오늘 정말로 감사했고요. 수고 많으셨어요. 저는 이만, 두 분도 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아, 재훈 씨도요!"
그가 몸을 돌리자 둘은 격한 아쉬움을 느꼈다.
차마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밑져야 본전.
"저기, 재훈 씨."
"네?"
"이렇게 같이 일하게 된 것도 인연이고, 마지막일 텐데 쫑파티라도 어떠세요?"
"쫑파티요?"
"오, 그거 좋네!"
한슬아가 열정적으로 추임새를 넣었다.
"아, 혹시 이 뒤로 약속 있으세요?"
"약속은…."
'제발.'
'제발!!!'
"없긴 한데…."
'나이스!'
'예쓰!'
김하은이 만면에 화색을 띄우고 말했다.
"그러면 제가 괜찮은 데 아는데. 어떠세요?"
"하은이 이 새끼, 완전 돼지 새끼라 주변 맛집 다 알아요."
12시부터 아무것도 못 먹고 5시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배가 안 고프려야 안 고플 수가 없었다. 최재훈은 관심이 동해서 물었다.
"어, 뭐, 어떤 덴데요?"
"그, 일본식 꼬치 엄청 기가 맥히게 하는 곳이 있거든요. 거기 양꼬치 상태가 진짜 좋은데, 그거랑 사케 같이 어때요?"
"크, 미쳤다 미쳤어! 난 당연히 콜!"
최재훈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아, 맞다. 술. 마시면 이따 집 가서 레오레 못하는디….'
그런 속내를 모르는 한슬아는 최재훈 몰래 김하은의 옆구리를 쳤다.
'꼬치가 뭐야, 꼬치가. 병신아!'
대충 그런 의미였다.
"아, 나 생각해 보니까 거기, 얼마 전에 가 가지고 좀 그런데."
"아, 그래? 그러면 거기 말고 음…."
김하은은 수능 때도 발현시키지 못한 고도의 집중력으로 생각했다.
'남자가 좋아하는 거… 남자가 좋아하는 거….'
딱!
그녀가 손가락을 세차게 튕겼다.
"저 옛날에 'TV'에 나온 '파스타랑 피자' 잘하는 가게 어딨는지 아는데. 거기 갈까요? 방송 탄 지 꽤 돼서 웨이팅도 별로 없을 텐데."
김하은은 두 가지 키워드를 강조하며 말했다.
'TV에 나온 맛집.'
'파스타랑 피자.
남자들이 환장하는 것들 아니던가.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있었다.
"오!"
한슬아도 '이 빡대가리 새끼가 오늘 모든 지성을 태워가며 최후의 찬란한 빛을 발하는구나' 라고 감탄하며 진심을 담아 탄성을 내질렀다.
둘이 최재훈의 반응을 살폈다.
고민을 하던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갤 끄덕였다.
'예쓰! 그렇지! 역시 남자는 치즈지!'
'남자가 TV에 나온 맛집에 안 가고 배겨!? 못 배기지!'
둘은 세기의 난제를 푼 수학자라도 된 양,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스러워했다.
'피자랑 파스타면 와인? 아니, 뭔 와인이야. 맥주? 맥주도 좀 오바지. 피자 파스타랑 맥주 먹는 미친놈이 어딨어. 음. 그러면 술 안 마셔도 되겠네.'
머릿속에 레오레만 들어 있는 최재훈의 속내를 알 방도가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둘의 마음은 이미 식당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지금 바로 갈까요?"
"저 근처에 차 있어요."
김하은이 눈빛을 보냈다.
'웬 차?'
한슬아가 김하은만 보이게 입술을 움직였다.
[아빠 차]
[그때 그 BNW?]
끄덕.
끄덕.
척.
척.
둘이 등 뒤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따봉을 교환했다.
그리고 최재훈을 보는데, 이상했다.
그가 여전히 고민 중인 것이 아닌가.
둘은 안 좋은 예감을 받았다.
"아, 그…."
안 좋은 예감이 더욱 강해졌다.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적중했다.
둘은 솜사탕을 받았다 뺏긴 아이 같은 표정이 됐다.
'시발, 뭐지. 뭔 말실수 했나?'
'지뢰 밟았나? 뭔데 갑자기.'
둘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되짚어 보았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수고였다. 둘이 백날을 자아 성찰해 봐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계좌에 16만 5천 원 있는 거 깜빡했네, 십거. 모래 월급이 나오긴 하는데… 시발. 월세 내면 그렇게 남는 것도 없잖아. 최소한 두 달 생활비가 모일 때까지는 거지로 살아야 되네. 외식 시발, 그게 뭔데 씹덕아.'
원인은 그들이 아닌 최재훈의 통장에 있었으니 말이다.
더 정확히는 최재훈2의 통장에 말이다.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둘은 몸에 불이라도 붙은 듯 다급했다.
"거기 디저트도 진짜 잘 하는데…."
"아! 혹시 재훈 씨 회 좋아하세요? 야, 거기 있잖아."
"아! 그, 재훈 씨 혹시 오마카세라고 아세요? 일본식 코스 요리 같은 거거든요? 이게 진짜 좋은 게, 좌석이 진짜 적어서 무슨 전세낸 것 같이 분위기가 조용하고 좋거든요."
"진짜 별의별 게 다 나오고, 셰프님이 설명해주고. 진짜 재밌는데."
최재훈이 곤란하다며 쓴웃음 띄운 얼굴로 말했다.
"저도 진짜 궁금하고, 가고 싶긴 한데-"
"가고 싶으면 가셔야죠!"
"같이 가요~"
"지금 제 지갑 사정이 많이 안 좋아가지고, 외식할 여유가 안 되네요. 미안해요. 깜빡하고 있다가 말하던 와중에 떠올랐네요."
그 슬픈 사연에, 두 사람은 속으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기쁨의 눈물을.
"그러면 제가 내 드릴게요!"
"저도 같이! 더치페이!"
"열~"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몰라 전전긍긍했는데, 이렇게 간단한 문제였다니!
툭-
둘이 신나서 주먹을 맞댔다.
최재훈은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순수한 웃음이었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여자'를 보며 괜찮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성적인 감각은 아니었다.
재미있는 동성 친구 놈들을 보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그는 더더욱 거절할 생각이었다.
'이놈… 아니 년들아, 형이… 아니, 썅 몰라. 아무튼 이 형이 다 니들 위해서 그러는 거야. 어? 여자랑 저녁 먹으려고 무리하면 다음날 잔고 보면서 하, 시발. 이 돈이면 구빱이 몇 그릇이야 후회하면서 피눈물 흘릴 거, 알 만큼 알 놈들이 도대체 왜 이러실까. 하. 그래. 내가 잘 생긴 게 죄지. 최재훈이 죄 많은 새끼.'
그는 불쌍한 놈들을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굳게 먹고, 단호하게 말했다.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고마워요."
"아."
"넵."
찬물을 끼얹듯, 두 명의 흥분이 단번에 진압되었다.
둘은 술에서 깬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의 행동을 격렬하게 후회하고 있었다.
'하, 시발 끕이 다른데 당연하지 병신아… 눈치가 왜 이렇게 없어?'
'아 시발… 개 쪽팔리네… 뭐 한 거지… 자살하고 싶다… 자살해서 인생 리셋하고 존나 예쁘게 다시 태어나고 싶다….'
최재훈은 그런 둘을 보고 괜스레 죄악감을 느꼈다.
같은 남자? 로서 현재 둘이 느끼고 있을 심정도 이해가 갔고.
그는 자신의 행동이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어장관리처럼 느껴지지 않길 바라며. 여친한테 차인 친구 놈을 달래는 기분으로 말했다.
"하, 진짜 미안해요. 원래 같았으면 저녁 사줘야 되는 건 제 쪽인데."
"아, 아니에요!"
"예, 예! 괜찮습니다. 부담 느끼지 마세요! 저희가 그러고 싶어서 말한 거니까."
"그, 흐… 제가 저녁은 못 사 드려도 편의점에서 뭐 음료 같은 거라도 하나씩… 아, 이건 너무 구질구질한가?"
그가 멋쩍게 웃었다.
"아니요! 구질구질하다뇨!"
"아 마침 목말랐는데!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슴다!"
그렇게 둘은 구원받았다.
'진짜 우리한테 미안해서 거절한 건가?'
그런, 정신 승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 기세로 번호를 따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둘은 곧바로 떠올린다.
PC방에서 최재훈의 번호를 따려고 했던 여자들, 자신들보다 훨씬 예쁘고 잘난 여자들이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지.
최재훈이 그 여자들이 안 보는 곳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었는지.
'음료수로 만족하장.'
'뭐 먹징.'
둘은 주어진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렇게 셋은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러던 와중 최재훈은 무의식적으로 평소 자신이 가던 편의점에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차 싶었다.
"아 맞다. 두 분, 이 방향 괜찮으세요?"
"에? 아, 네. 괜찮아요."
"저희도 원래 이쪽으로 가요."
"아… 다행이네."
사실이 아니었다.
지금 둘은 평소 퇴근하는 방향의 정반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존나 아무래도 좋을 부분이었다.
이 남자와 이렇게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만 있다면, 에베레스트 끝까지라도 동행할 생각이었다.
짤랑.
그래서인지, 목적지까지가 너무나도 짧게 느껴졌다.
하지만 욕심은 충분히 부렸다.
이제는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어서오세요… 어."
그런데 그 꿈이 옮기라도 한 걸까?
칼같이 기장을 맞춘 노란 단발머리와, 저절로 눈을 깔게 되는 사나운 눈매가 인상적인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최재훈을 보더니, 멍한 얼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