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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게임을 잘함-22화 (22/361)

022화. 진상'남'

쨍그랑!

"꺄아아아악!!!"

라면 그릇이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매우 여성스러운 비명의 주인은 남자였다.

이때 나는 이미 솟구치는 아구충동 (특정 대상의 아구창을 가격하고 싶은 충동ㅎ)을 세 번이나 참은 상황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나는 맡은 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쟁반 위에 라면을 얹어 16번 좌석으로 향했다.

고객은 이번에도 헤드셋을 끼고 있었지만, 이번엔 남자였다.

16번 좌석은 코너의 첫 번째 자리.

나는 그 옆으로 두 발짝 정도 떨어진 자리에 섰다.

아까도 그렇고, 이런 라면 같은 걸 들고 있을 땐 안전거리 확보가 중요하다.

저 만리장성보다 높은 등받이가 갑자기 휙 돌아도 아무런 문제 없도록.

"고객님, 라면 나왔습니다."

언젠가 봤거나 아니면 들은 건데.

여기서 '라면 나왔습니다'가 아니라 '라면 나오셨습니다'라고 해야 된다나?

전자는 반말하는 것 같다고.

맞지.

반말하는 거.

라면한테 반말하는 거지.

내가 몸값이 있는데, 피시방 프리미엄 붙어도 6천원이 한계인 라면한테 존댓말을 할까.

나한테 존댓말 듣고 싶으면 치킨 정도는 데려와야 한다.

규촌은 안 됨.

존댓말 하기엔 닭이 너무 어려 보여서.

근데 시발, 여기는 알바가 부르면 일단 대답을 안 하고 보는 게 국룰인가보다. 다 존나 제갈량인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내가 최소한 세 번은 애타게 불러 줘야 만족을 하나?

깔깔깔.

나는 안중에도 없고 화면을 보며 깔깔대는 남자.

깔깔.

진짜 그렇게 웃었다.

매우 발랄하게.

'시발.'

나는 깨달았다.

'여자'가 된 여자를 보는 건 사실 진짜 X도 아닌 일이었다고.

'남자'가 된 남자를 보는 것.

그거야말로 진정한 존나 악몽이었다.

전자가 15세 관람가였다면, 이건 19세 관람가였다.

아니지, 국내 상영 불가 판정이다 이건.

이걸 상영하기에 우리 대한민국은 아직 그렇게 개방적인 나라가 아니다.

남자의 허우대랑 상판은 지극히 평범했다.

패션도, 머리도 평범하다.

그런데 방금 그런 소릴 낸 것이다.

굵은 목소리로, 콧소릴 내며.

소녀 같은 웃음소릴 낸 것이다.

귀가 썩고 눈이 썩고 뇌가 썩고 아무튼 가엾은 눈과 귀와 관련된 모든 기관이 썩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부탁 받은 대로 라면을 가져다 줬을 뿐인데,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걸까? 너무 서러워서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고객님, 라면 나오셨습니다~"

혹시 이 남자가, 하찮은 알바따위가 하늘 같은 고객님이 간택한 라면에게 예의를 표하지 않아 침묵으로써 불만을 표출하는 것일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굴욕을 참고 라면에게 경의를 표하며. 말했다.

방금보다 크고 또랑또랑하게.

역시나 대답이 없다.

도대체 이 새낀 또 무슨 게임을 하길래 음량을 개조져서 속세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단 말인가.

서든샷?

요거는 인정.

'근데 시발, 시대가 어느 땐데 아직도 서든샷이나 붙잡고 있는 거지?'

치밀어 오르는 의문을 뒤로 하고, 방금 전 했던 대로 남자의 시선 한 켠에 쟁반이 들어가도록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뭘 하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행동을 취했다.

"아 하지 말라공~"

또 귀를 통해 뇌를 잠식하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놀랍게도, 이는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었다.

툭~

남자가 양손을 앙증맞게 모아서 옆에 앉은 여자의 팔뚝을 쳤다.

살아생전 시신경의 온전함이 야속하게 느껴질 날이 올 줄이야.

그런데 놀랍게도, 이 또한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었다.

남자가 저 두 가지를 하려고 몸을 옆으로 돌린 다음에, 벌떡 일어섰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주로, 앉아 있던 바퀴 달린 게이밍 체어가 말이다.

간단하다.

뉴턴 가라사대 존나 밀려난다.

나를 향해.

'이런 개새-'

라면 그릇 올려진 쟁반을 든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고-

퍽!

쟁반에 의자의 등받이가 쳐박혔다.

쨍그랑!

쟁반이 앞으로 쏠리며-

촥!

떨어진 라면 그릇이 테이블 위를 자신의 색깔로 물들였다.

면발, 형형색색의 야채 조각들, 은아 씨가 정성스럽게 올린 계란 노른자, 그리고 아주 얼큰해 보이지만 지금은 얼마나 존나 끈끈할까 라는 걱정 밖에 안 들게 하는 라면 국물.

테이블 위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라면 국물이 안 튄 곳이 없었다.

키보드.

면발이 그 위에 널려 있는데, 마치 내장이 터져 버린 것 같았다.

모니터.

국물이 화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이, 마치 모니터가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저건 사장님의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아…."

참혹한 광경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그릇이 쟁반 위에서 떨어져 테이블을 친 다음 땅에 쳐박히는 소리는 꽤 소란스러웠다.

총성음 뒤의 적막은 고요하게 느껴진다.

피시방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꺄아아악!!!"

불러온 사람으로 하여금 걷히는 정적.

테이블 위를 확인한 남자가 영화에서 살인 장면을 목격한 여자처럼 비명을 질렀다. 뭉크의 절규가 떠올랐다.

사람의 고막과 정신을 파괴하는 힘이 담긴 그 목소리엔 비탄이 묻어 나왔다.

사장님을 위한 건 아니었다.

우리 알바들을 위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 있던 물건이 하나가 더 있었다.

남자의 지갑이었다.

남자의 비명은 지갑을 위한 진혼곡이었던 것이다.

"어떠케 어떠케!!!!!!"

남자가 오두방정을 떨며 집게손가락으로 지갑을 집었다.

그리곤 국물 털어내겠답시고 열정적으로 휙휙 흔드는데, 어떠카긴, 일단 X같은 국물 좀 다 나한테 존나 튀기지 좀 말아 줄래.

"괜찮으세요 손님!? 안 다치셨나- 읍."

튀기지 말라고 시발아.

지갑으로부터 떨쳐나온 라면 국물들이 내 안면을 강타했다.

[한숨, 욕 : 문 열어 시발!!!]

입이 근질거렸다. 표정관리가 안 된다.

사방의 이목이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하은 씨와 슬아 씨가 달려왔다.

"손님 분이 실수로 의자를 밀치셔가지고… 제가 지금 정리하겠습니다."

마음 같아선 니가 싼 똥은 니가 치우라며 대걸레랑 행주를 던져 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PC방의 알바생 신분.

상황을 크게 벌리면 나머지 두 알바생과 사장님만 곤란해진다.

나만 참으면 된다.

그러니까 참을란다, .

시발.

보라고, 간단하잖아.

그 누구도 상처 입지 않는 세계의 완성이다.

나는 행주와 대걸레를 가지러 카운터로 향하려 했다.

"뭐라고옷!?!?"

그런데 남자가 목소리를 째며 내 발을 멈춰 세웠다.

"지금 너 뭐랬어!?"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하며 표정과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다시 고개를 남자에게 향했다.

"무슨 일이시죠?"

"아니, 방금 씨부린 말 다시 한번 해 보라고."

"뭘 말씀하시는 건지…."

"방금 내 탓이라고 했잖아!"

그럼 시발아 누구 탓인데.

운동법칙이 존나 불만이면 나한테 지랄하지 말고 니가 천국 가서 그 양반들이랑 직접 담판지어라. 만든 사람이랑 정의한 사람 둘 다 있을 거니까.

아, 과학쟁이들은 천국 못 가던가.

"제가 말 실수를 했나 보네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치워드릴게요."

내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남자는 하! 콧방귀를 뀌며,

"시발 개 짜증나."

그렇게 다 들리도록 중얼거린 뒤 말을 이었다.

"됐어요, 치우던 말던. 어차피 여기 다신 안 올 거니까. 이거, 보상이나 해 줘요."

남자가 집게 손에 들린 지갑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아, 시발.

그건 아니지.

내가 이 만큼이나 양보해줬는데도 기어코 선을 넘고 마는구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힘들 것 같네요."

"니가 힘든 건 내 알 바 아니고, 보상 하라고. 고소하기 전에! 아니 누나, 어떻게 좀 해봐아앙!"

남자가 옆에 서 있던 여자에게 땡깡을 부렸다.

덩치가 꽤 되는 여자였다.

키는 나보단 작지만 여기 있는 여자들 중에선 가장 큰 편이었다.

170 후반쯤 되려나.

뼈대가 크거나 근육이 있는 건지, 살집도 꽤 있고.

동네 돌아다니다 보면 간간히 보이는 덩치 큰 양아치의 남녀역전 버전쯤으로 보였다.

여자가 귀찮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이 여자랑 괜히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 표정을 풀고 쓰게 웃어 줬다. 무서워서 그런 거 아님. 진짜. 챌린저 계정 걸고.

그러자 여자는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다.

시선의 목적지를 내게서 하은 씨로 바꿨다.

날 볼 때와는 상반되는 살벌한 표정으로 여자는 말했다.

"그, 좋게좋게 넘어갑시다. 그 우리도-"

날 한 번 쳐다보곤-

"일 복잡하게 만들기 싫으니까. 석훈아 거, 얼마냐."

"이거 원래 70 정돈데 한정판이라 지금 구하려면 100은 줘야될 걸?"

"그러면 그, 30만원만 주십쇼."

큰 덩치에 투박하고 사투리 섞인 말투까지 더해지자, 그 분위기가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하은씨와 지선씨가 위축되어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 누나~~~ 웬 30이야."

"거, 니 오래 썼잖아."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거 50은 받아야 된다니까?"

뭐, 우리 오빠가… 아니, 우리 누나가 니들보다 쎄거덩? 이건가?

남자가 한껏 기세등등해져서는 우쭐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키웠다.

슬쩍 내 눈치를 보던 여자와 또 시선이 마주쳐서, 나는 또 한 번 쓰게 웃어 줬다. 입꼬리가 올라가나 싶더니 입술을 깨물어 표정을 숨긴다. 그렇게 표정을 재정비한 여자는 남자를 쳐다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니, 니도 뭐 실수한 게 있을 거 아니야. 아니면 이 지랄이 났겠어?"

"누나 지금 이 새끼 편 드는 거야?"

"아니 석훈아, 여기 지금 니 편 내 편이 어딨냐. 서로 좋게좋게 해결해야 하는 편에. 하 씨, 누나 진짜 쪽팔리게 할래?"

여자가 찌릿 째려보자 그제서야 찌그러지는 남자.

뭔 상황이지?

나도 이 여자가 내 편을 들어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째서?'

지 남친 놔두고 왜 생판 남인 나를?

그때, 여자가 날 쳐다본다.

칭찬이라도 바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자, 여자가 내게 보였던 일련의 반응이 떠올랐다.

'설마?'

이 여자, 진짜 내 편을 들어 주는 건가?

그것도,

'나한테 뻑 가서?'

내가 잘 생겼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하.'

어이가 없다.

얼떨떨하기도 하고.

적어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편리한 상황이 아닌가.

순간, 안 어울리게 숫기 없는 표정이 된 여자가 황급히 표정을 되돌렸다.

내가 나긋하게 웃어줬더니 보인 반응이다.

대충 뭐 [편 들어줘서 고마워요~]라는 느낌으로 보여준 미소였다.

사실, 여자가 편을 안 들어줬어도 결과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었을 테지만.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었으니 나는 생각해 두었던 말을 꺼냈다.

"그, 차라리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이목을 모은 뒤 말했다.

"저희 CCTV 있죠?"

"아, 아! 네."

"네, 네. 있어요."

"아, 맞아! CCTV!"

남자가 옳다구나 하고 끼어들었다.

"CCTV 확인하면 되겠네!"

'아니, 병신아.'

니가 왜 신나는데?'

생각보다 훨씬 답 없는 놈이었다.

"CCTV 확인하면 되겠네! 내가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제 생각은요.

니는 생각을 하면 오히려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멍청해져서, 뇌가 방어기제로써 평소에 생각한다는 행위 자체를 사전에 차단시키고 있었던 것 같아요.

세기의 발견이라도 한 듯 들뜬 석훈이가 날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뒤졌다.' 대충 그런 의미가 담긴 것 같았다.

그렇지.

뒤졌지.

누군가는 진짜 뒤지긴 할 거야.

"CCTV 지금 보여줄 수 있죠?"

석훈이가 은아씨를 째려보며 물엇다.

'띠껍다'라는 단어를 처음 발명한 사람이 저 면상을 보면 좀 더 창의적이고 강렬한 표현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아, 잠시… 사장님한테 좀 여쭤 볼게요."

"아, 은아 씨."

"네?"

은아 씨가 핸드폰을 꺼내려던 걸 말렸다.

"사장님 지금 주무시고 계실 텐데. 어제 밤새 가게 보시느라…."

"아…."

나 때문에 밤 새고 겨우 집에 돌아가서 막 잠들었을 텐데, 나 때문에 또 일어나야 할 판이다.

이거, 사장님한테 너무 면목이 없어서 '그냥 30만원 줘아하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깨닫는다.

30만원은 내 전재산의 두 배 되는 존나 거액이라는 사실을.

최재훈 2가 22년 동안 모은 재산의 두 배 되는 액수.

최재훈 2가 저 돈을 갚으려면 44살까지 알뜰살뜰 돈을 모아야 한다.

진짜 개거지쉑.

"아니, 뭐 하자는 거야~ 지가 이야기 꺼내 놓고. 이거 완전 빡대가리 아니야?"

'석훈아 제발….'

니가 다른 사람한테 빡대가리라 하는 건,

프레디 머큐리가 일반인 노래 듣고 나보다 노래 잘한다고 하는 수준의 겸손이야.

"사장님 허락 없인 안 되나요?"

"허락을 못 받으면 안 된다기보다는…."

"CCTV 쪽은 저희가 잘 몰라서, 혹시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하은 씨와 슬아 씨가 어떡하지? 라는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핸드폰을 꺼내 검색해 봤다.

'PC방… 아니지, 알바가… CCTV… 확인.'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알바가 CCTV를 확인했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는 사례를 발견했다.

이것보다 좀 더 확실한 근거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니들 그냥 쫄려서 그런 거잖아~ 뻘짓 그만하고 그냥 돈 내놓고 사과해. 경찰 부르기 전에."

그러기엔 내 인내심이 바닥나 버렸다.

석훈이가 저 특유의 낮은 목소리를 높은 톤으로 말하는 발성으로 내 신경을 몇 번만 더 긁는다면, 나는 석훈이의 죽빵을 날려 버릴 수밖에 없다.

뭐, 문제 없겠지.

이럴 때 쓰라고 설치해 놓은 CCTV 아니겠어?

'그렇지.'

지금 같은 떄 활약 못하면 CCTV는 무슨 낙으로 살겠어?

나는 확신을 느끼고 말했다.

"무슨 일 생기면 제가 다 책임질 테니까, 그냥 확인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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