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가 게임을 잘함-21화 (21/361)

021화. PC방 남자 최재훈

PC방은 상당히 붐비고 있었다.

과연 일요일 아침이라고 해야 할까.

'와 근데….'

대부분이 여자였다.

고추밭으로 대표적인 장소 중 하나인 피시방의 성비가 말이다.

세계가 개판이 났다는 걸 새삼 실감하며 신기한 기분으로 구경하고 있자니-

"아이고 재훈씨~ 와 줘서 너무 고마워요!"

카운터에 서 있던 사장님이 만면에 화색을 띄우고 날 반겼다.

40대 중년 여성이, 40대 중년 남성처럼 말하는 모습은 눈앞에서 보니 더욱 이질적이었다. 이제부터 내가 익숙해져야 할 모습이었다.

"감사는 제가 감사하죠. 재차 죄송합니다. 어제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가지고…."

사장님이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아이구야, 그러게요. 표정이 많이 안 좋네."

원래 표정인데요.

최재훈2 이 새끼, 평소 얼마나 생기발랄한 얼굴로 다녔길래 이런 소리가 나와?

최재훈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구만.

니 주제를 파악하란 말이야.

니가 아무리 잘생겨 봤자 넌 겜창 찐따야.

보니까 친구도 없더만.

[최재훈2의 기억 : 본인은 자발적 아싸임.]

[최재훈의 생각 : 본인이 자발적 아싸라는 놈들 특 = 본인만 자발적이라 생각함.]

"이거 어떻게. 내가 괜히 불러낸 거 아닌가 몰라."

"아이고, 아닙니다. 사장님이 이렇게 편의를 봐 주셨는데, 이 정돈 당연히 해야죠."

내가 한 거라곤 무단으로 결근하고 뒤늦게 땜빵하러 온 것뿐인데.

사장님은 세상 감동받았다는 얼굴로 날 쳐다본다.

이게 잘 생긴 '남자'의 삶인가?

'아, 이거 너무 꿀인디?'

위험하다.

이 세계를 향한 혐오와 증오가 희석되어, 이 세계가 나에게 한 짓을 잊어버릴 것만 같다.

떠올려라 최재훈.

계약금, 전세금, 계좌, 챌린저.

"크르르르…."

"재훈 씨?"

"아, 네."

"갑자기 왜 그래요, 어디 몸이라도 안 좋아졌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사장님."

"음?"

"계속 제 안색이 안 좋다 하시는데, 지금 사장님 안색이 훨씬 더 심각하신데요."

얼굴이 퀭-하다.

상황 해결하려고 끌려 나오다시피 출근한 거겠지.

지금 몸의 수분 절반이 커피와 에너지 드링크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주말이라 술 약속 거르고 온 거일 수도 있고.

아, 그렇다면 이렇게 친절할 수가 없으려나.

40대 중년 남성에게 술 약속은 인생의 전부라고 들은 적이 있다.

"어여, 들어가서 쉬세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예? 아, 하하하하!!! 그래요? 아 하긴, 그렇겠지. 내가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 참."

하하하하하!

아주머니, 아주 호탕하게도 웃으십니다.

아니, 진짜 존나 호탕해. 아줌마의 탈을 쓴 아저씨라 해도 믿겠어.

아, 맞구나. 아줌마의 탈을 쓴 아저씨.

"그나저나, 재훈 씨. 진짜 괜찮긴 한가 보네. 평소보다 기분이 많이 좋아 보여? 이렇게 농담도 하고. 그리고, 어떻게…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하실까."

후….

사장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아들도 재훈 씨 반만 닮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굴도 성격도 집사람을 닮아가지고…."

후….

전보다 더 진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재요.

아니, 아지매요.

그 발언은 과연 어떨까 싶은데요.

남편분이랑 아들분이 들으면 속상해 하는 정도론 안 끝날 텐데.

가장의 소소한 일탈이라 생각하자.

나는 머릿속에서 방금 사장님의 발언을 지웠다.

"애가 중학교 들어가더니 나한테 그렇게 모질게 굴 수가 없다니까요."

그보다 이 아줌마. 졸리다며. 왜 갑자기 쐬주 한 잔 까야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지?

"뭐, 사춘기 땐 다 그런 거죠."

이 아줌마를 어떻게 집에 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사장님….”

카운터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여자 알바가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과 목소리로 헬프콜을 날려 왔다. 나이스 타이밍. 레오레였으면 핑 여섯 번 찍고 따봉 이모티콘까지 줬을 것이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미안해요, 미안해. 내가 바쁜 사람 붙잡고 있었네. 그럼, 재훈 씨. 부탁 좀 드릴게요?"

"들어가세요."

나는 즉시 카운터에 합류했다.

최재훈2의 기억은 단편적인 것들이었다.

특정 행동을 할 때 참고 삼을 수는 있어도, 강령이 되어 주진 못했다.

무슨 소리냐면, 'PC방 알바생 최재훈1'은 존나 돈만 축내는 병신이라는 소리였다.

PC방 알바는 말이 PC방 알바였다.

물 끓이고, 커피 끓이고, 음료 섞고, 물 올리고, 불 올리고, 팬 가열시키고, 기름에 뭘 지지고 존나 볶고 그냥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요리와 관련된 창작행위가 이곳, PC방 카운터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니 이런 시발.

PC방 알바라면서요.

난 PC방 알바라길래 대충 뭐 그냥 카운터 자리 지키며 간간히 '어서옵셔~' '어서갑셔~' 고개나 까닥거리면서 계산이나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요. 가끔 라면이나 끓이고.

그런데 이 안은 그냥 오해의 여지가 없는 주방이었다.

여기서 호든 램지의 나이트메어 키친을 촬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정도면 구인할 때 PC방 알바가 아닌 주방장 혹은 요리사와 바리스타라는 직책을 구하는 게 맞다.

물론, 나도 한 요리 하는 남자다.

자취 경력 수년 차.

어디가서 요리 못 한다는 소리는 안 듣는다.

그런데 시발 여기서는 존나 상관이 없는 스토리였다.

내가 자취를 하며 얻은 요리 스텟은 정밀도다.

그런데 여기서 정밀도 따위는 X도 관건이 아니었다.

정밀도는 요리를 아주 개조져 놓지 않을 만큼의 소량만 요구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스텟은 신속도이었다.

작업곡 틀어 놓고~

빵댕이 흔들면서 간간히 핸드폰으로 레서피 확인하고~여유롭다 못해 근본이 없는 자취식 요리 방식으로는 절대로 습득할 수가 없는 스텟.

나는 옆의 두 알바 못지 않게 개빡집중 해서 요리를 했다.

그런데도 둘이 음식 두 개씩 완성시킬 때, 나는 겨우 한 개 완성시켰다.

저 둘이 빠른 게 아니다.

그렇다면 저 둘이 최저 시급의 두 배를 받던가 했겠지.

그런데 저 둘은 나랑 똑같은 최저 시급을 받고 일한다.

그러니까, 내가 몸값을 못하는 거였다. 그것도 절반 수준으로.

내가 고용주였다면, 나 같은 쓰레기한테도 최저 시급을 준수해 줘야 한다는 사회 시스템의 허점을 용납하지 못해, 노동법을 등지고 반정부 주의자나 테러리스트나 조커가 되었을 것이다.

"최재훈 씨 그 볶음밥…."

"아으, 거의 다 됐는데. 미안해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최재훈 씨. 그냥 여기 저희가 맡을 테니. 주문 정리랑 서빙 쪽 맡아 주세요."

[그만 걸리적거리고 꺼져!]

엔딩이었다.

두 팔을 천수관음처럼 움직이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두 사람한테 미안해서 손발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내가 손발을 존나 덜덜 떨어도 두 명 같이 위대한 천수관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냥 손만 졸라게 떠는 병신이겠지. 손을 떨어서 병신이 아니라, 병신인데 손까지 떠는 새끼인 것이다.

"으, 죄송합니다."

저 둘이 자살을 종용한다면 적극적으로 고려해 버릴 것만 같았다.

"아유, 괜찮아요~"

"몸 상태 안 좋으시다고 들었는데. 괜찮아요. 좀 쉬엄쉬엄 하세요. 힘든 건 저희가 할 테니까."

원래는 인상 팍 구겨진 둘에게 싫은 소리 들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힘들어서 이미 인상이 구겨져 있는 둘은 날 보더니, 거기서 얼굴을 더 구기기는 커녕 오히려 환한 미소를 보여줬다.

순도 99% 정도 되는 호의가 느껴지는 반응이었다.

'와 세상에….'

도대체 이 맹목적이기까지 한 호의는 어디에서 오는 겁니까.

무상의 행복은 없다고 들었는데, 바로 여깄네.

좀 더 프니프니 해 주는 레후.

나는 라면이 담긴 그릇을 쟁반 위에 올려놓고 그걸 조심스럽게 들었다.

"포커…싱…."

내 손이 조금이라도 떨리면

[니 손은 너무 엿같이 떨려서 드릴이 보면 열등감에 목매달을 정도다 병신아!]

라고 호통을 치듯 즉시 그릇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하는 호든 '라면 국물' 램지 선생님 때문에, 쟁반을 든다는 행위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ㅎㅎㅎ.'

그런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보니까 둘이 날 보며 흐뭇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보니까 저건 아마도 아빠 미소의 이 세계 버전인 '엄마 미소'쯤 되시겠다. 날 진짜 어지간히도 귀엽게 보나 보다.

제구실 못 하는 짐 덩어리를 곱게 봐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런데 별개로 기분은 좀 거시기하다.

동년배 여자에게 저런 취급을 받는 건 '남자'가 아닌 남자인 내게 꽤 굴욕스러운 일이었다.

저 둘이 여자가 아닌 '여자'라 해도 말이다.

하루아침 만에 익숙해질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하지만 제구실 못 하는 쓰레기 짐 덩어리니 나 따위에게 불만을 가질 자격 따윈 없었다.

나는 지금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시즌을 챌린저로 마감해, 유일한 자랑거리인 레오레 실력을 증명해 줄 계정은 더 이상 없었다.

그뿐인가?

전세집도 없고, 적금도 없고, 부모님 빚도 못 갚아줬고, 빚까지 있는….

"크르르…."

아, 진정하자.

분노로 쟁반의 평정이 깨지는 걸 느끼고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렀다.

라면을 시킨 고객은 대학생쯤 돼 보이는 평범한 여자였다.

헤드셋을 쓴 채 한창 게임에 몰두하는 중이다.

내가 바로 옆에 왔는데 눈길 하나 안 준다.

여자가 게임에 집중하는 모습은 남자를 흐뭇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여자'라도 남자인 내겐 일단 그랬다.

어디, 무슨 게임 하나 볼까.

흐뭇한 마음으로 화면을 쳐다봤다.

아주 익숙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협곡.

여자가 하는 게임은 레오레였다.

'이런 미친 새낄 봤나.'

레오레 하면서 라면?

맵 한 번 더 봐도 모자를 판에?

정신이 나간 건가?

설마 랭겜은 아니겠지?

-아니 뭐함?

-라면좀 먹느라

-라면? 정신나감?

-정신 말고 게임을 나가줄까?

-게임에 집중한다는 선택지는 없음?

=미드미셈 라면먹음

=이게 겜이냐?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여자'의 뒤통수를 후릴 뻔했다.

내가 라면을 이 여자 앞에 내려놓는 순간 고통이 시작될 팀원들에게 감정이 이입됐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객님? 라면 나왔습니다?"

아무런 대답도 없다.

"즈기요?"

음량을 도대체 얼마나 키워 놓은 걸까.

무슨 FPS라도 하십니까?

혹시 그거 그렇게 하면 수풀에 숨은 적팀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나, 시야 없는 곳에서 오는 적팀의 발소리라도 들리십니까?

나는 여자의 시야 끄트머리에 들어가도록 쟁반을 갖다 댔다.

"거기에 대충 놔요."

화면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말한다.

배려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명령조에 울컥했지만, 알바에게 이런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일일이 마음 상하면 못 버틴다.

여자의 말대로 모니터와 키보드 사이 공간에 라면을 내려놓았다.

"4, 500원 되겠습니다."

"고객님?"

시발아.

여자의 시야 끄트머리에 보이도록 얼굴을 들이댔다.

"아씨, 뭐야!"

이제야 여길 봐주는구나?

시발아.

불만이 목구멍을 타고 오르려는 걸 가까스로 억누르고 내 양쪽 귀를 툭툭 두드렸다.

'외람되지만 귀가 먹으셨나요, 시발아?' 이라는 의미로 한 제스쳐지만, 나한텐 정말 코딱지 만큼도 관심이 없는 이 여자는 '헤드셋 좀 벗어 주실래용?'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게임이 안 풀리고 있는지, 여자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아니면 내가 게임을 방해했다고 느낀 걸까? 그러면 진짜로 양심이 개 터져 버린 거다. 레오레 하는 도중에 라면을 시키고, 또 그걸 가져온 알바한테 짜증을 낸다니. 그건 이미 시발 사탄이 현세에 심어 놓은 재앙의 씨앗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불화와 분란을 조장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됐다.

다행히 그 정도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여자의 표정은 헤드셋을 벗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풀렸다.

아니, 가만 보니 표정이 풀린 정도가 아니다.

"무슨 일이시죠?"

'무슨 일이긴, 디질래?'

방금과는 극명히 대조되는 밝은 표정과 살가운 목소리로 말하는데.

그 모습이 진짜 영락없는 '여자' 그 자체였다.

보니까, 화를 내려다 내 얼굴을 보고 태도를 바꾼 것 같았다.

와 근데.

지금 나, 사고 과정에서 내가 잘생겼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대전제로 깔고 들어간 건가? 이게 하루 만에 이루어진 적응이라니.

아무래도 나는 천성적으로 미남의 소질을 타고난 것 같았다.

나는 미남의 여유를 담아 미소지었다.

씨익.

"4, 500원입니다, 고객님.'

아쉽게도 미남의 소질은 정신적인 부분에만 극한되나보다.

미남스러운 미소를 지어보려는데 잘 안 됐다.

눈가는 그대로인데 입가만 씰룩 움직였다.

그런데도 '여자'는 마냥 좋다는 얼굴로 바로 주머니를 뒤진다.

꾸깃꾸깃했지만 여자가 다시 정성스럽게 핀 만원 지폐와, 내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정량의 거스름돈이 오갔다.

"수고하세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

해맑게 인사하는 여자를 뒤로하고 카운터로 돌아간다.

뒤통수에 박히는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이거 16번 자리요~"

카운터에 돌아온 즉시 알바 하은 씨가 건네준 라면을 쟁반 위에 올려 이동한다. 방금 걸로 자신감에 요령까지 붙어서 이동 속도가 전과는 비교도 안 됐다.

이거, 이거.

PC방 알바.

좆밥이구만.

쨍그랑!

"꺄아악!"

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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