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남녀 역전 세계
(잔액 : 165, 500)
"끼아아아악!!!!!!!!!!"
나는 서랍에서 권총을 꺼냈다.
내 머리에 총구를 겨눈 뒤,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빵!
총구가 불꽃을 내뿜었다.
총알이 머리를 터뜨리며 사방에 피와 살점을 흩뿌렸다.
그런데도 난 멀쩡히 살아 있다.
나한테 권총 같은 건 없었으니까.
분노의 종착역이 허탈인 건지, 아니면 허탈이 분노를 이겨 버린 건지.
급작스럽게 몸에서 힘이 쭈아압 하고 빠져나갔다.
"헤헤…."
얼빠진 소리가 새어나왔다.
혹시나 싶어 다시 계좌를 확인해 봤다.
(잔액 : 165, 500)
"히히히…."
다른 계좌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잠깐은 해 봤다.
근데 최재훈2 이 새끼 나랑 똑같아서 계좌를 하나만 쓰네?
이 철두철미하게 거지 같은 새끼 같으니.
'시발 도대체가 16만 원이 이 새끼야, 말이야 발이야.'
그래.
학생인데.
돈이 없을 수도 있지.
자취하는 대학생이 생계에 쪼들린다는 사실은 자취를 하고 싶어하는 대학생 말고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최재훈2야….'
너 월세가 50만원이고, 그거 다음 주에 내야 하잖아요.
초등학생도 니보단 계획적으로 자산을 설계하지 않을까요?
초딩들조차 준비물 살 돈으로 군것질하면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걸 아는데, 니는 시발?
이 대책 없는 새끼의 생각이 너무나도 궁금해서 기억을 뒤져 봤다.
[최재훈2의 기억 : 지불일 2일 전날에 월급 나옴.]
월급?
[최재훈2의 기억 : PC방 야간 알바 뜀.]
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최재훈2의 기억 : 어젯밤에 나갔어야 함.]
오.
시발.
니 알바따위 내 알 바 아니다.
때마침 떠오른 라임 개 오지는 말로 모르쇠를 두고 싶었다.
하지만 시발, 이 최재훈2라는 새끼는 미친 스릴 중독자 새끼였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존나 아슬아슬한 방식을 채택했다.
이번 달 월급을 못 받으면 당장 월세도 내지 못한다.
월세가 뭐야, 생활비도 충당이 안 될 거다.
이번 월급에 지 목숨을 건 거다.
그런데 어제 알바를 안 나간 거고.
다급히 핸드폰을 확인한다
엄멤메 연락이랑 카톡 존나게 많이도 와 있네.
이거 왠지 좀 설레는데.
카톡이랑 연락이 한 가득이니, 왠지 인싸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가 있었다.
동시에 얼마나 X됐는지도 느낄 수가 있어서, 곧바로 연락을 확인한다.
이전 타임 알바가 오후 10시부터 수차례 연락한 내역이 있었다.
연락 간격이 갈수록 짧아지는 데서, 토요일 오후 10신데 교대가 안 와서 전전긍긍하는 알바의 다급함과 X같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켄삐유아앙거.
30분까지는 이전 타임 알바가 연락하고, 그 이후로 20분 정도는 사장이 연락을 시도하려다 포기한 듯했다.
다음은 라톡 확인이다.
지금 보니까 라톡 대화창 목록이 원래 내 거랑 확연히 다르다.
어제 분명 봤을 텐데, 왜 이상을 못 느낀 걸까?
'왜긴 시발.'
[어 대화창 목록이 평소랑 좀 다른 것 같은데? 이거 아무래도 다른 세계로 전이돼 버린 것 같은걸? 하하 X됐군~]
내겐 그런 엄청난 사고가 가능하게 해 주는 기가 맥히고 코가 맥히는 비범한 사고방식이 없었다.
나 같이 평범한 사고 방식를 가진 놈에겐 그냥 기분 탓인가 하고 넘기는 게 최선이다.
이전 타임 알바, 김혜영이 보낸 톡 내용은 예상 외로 무난했다.
[최재훈 씨 오늘은 좀 늦으시나요?]
[저 괜찮으니까 천천히 오세요]
이게 9시 55분까지의 톡
[그… 무슨 일 있으신가요? ㄷㄷ]
이게 10시의 톡.
괜찮으니까 천천히 오라며 이 자슥아.
물론, 형식상 한 말이겠지.
[연락이라도 좀 주시면...]
[저 저녁에 약속 있어서 ㅠㅠ.]
[저 어쩔 수 없이 일단 사장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사장님께서 와주신다네요]
[큰일 아니길 빌게요 ㄷㄷ]
교대가 말도 없이 출근 빼먹고 연락까지 안 받으면 육두문자까진 아니어도 언짢은 말투로 딜교를 시도할 법도 한데, 이 스윗한 톡은 뭐지?
[최재훈2의 기억 : 내가 미남이고 성격도 깍듯해서 여자들이 좋아함.]
시발 그게 실화고?
최재훈이 미남인 세계관이 존재한다고라?
그러고 보니 어제 거울을 봤을 때 묘하게 잘생겨졌단 느낌을 받았었는데 나는 즉시 화장실로 가서 면상을 확인했다.
'엄멤메 기분 탓이 아니었네.'
어제 '새끼, 오늘 좀 까리하네.' 라고 거울을 보며 생각했었는데, '오늘'이 아니라 '오늘부터'였던 것이다.
다크서클마저 보기 좋게 만드는 새하얗고 티 없이 매끈한 피부 진해진 눈썹.
선은 얇아졌으나 선명해진 이목구비.
뭔가 얼굴 골격 자체가 역변하진 않았는데, 느낌이 엄청 다르다.
최재훈의 얼굴이란 틀을 최대한 발전시켜 놓은 버전 같았다.
소위 '씹상타취'에 해당하는 외모에 깍듯한 성격인 '남자'.
그걸 그대로 내 안의 성 관념에 대입시켜 보니까 '여자'들이 친절하게 대해 주지 못해 안달인 게 금방 납득이 됐다.
'아, 그래서….'
어제 만났던 여자들의 별난 행동들까지도 한 번에 이해가 됐다.
잘생긴 여자 혹은 '남자'는 진작 이런 개꿀빠는 인생을 살아오고 있던 건가?
누가 세상이 공평하다 그랬어.
분명 그 새끼도 잘생긴 여자('남자')일 것이다.
[지현씨 무슨 일 있어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알바도 그렇고 사장도 그렇고, 다 최재훈2가 그냥 정신이 나가서 런했을 거란 생각은 못 한다. 아니, 안 한다. 잘생긴 '남자'는 이쯤 되면 하나의 특권계층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오늘 야간은 제가 볼 테니 문제 잘 해결하시고]
[되는대로 연락 주세요]
되는 대로.
그 되는 대로가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게 있다
나는 절전 모드가 되어 있던 컴퓨터를 켰다.
어제 레오레를 켜 놨던 그대로다.
여기에 최재훈2의 기억을 덧씌웠다.
[최재훈2의 기억 : 본캐는 다4, 부캐는 즐겜용으로 골드1.]
본계랑 부계까지 역전돼 버린 건가?
시발 진짜 종잡을 수가 없는 개좆대로인 규칙성이구만.
좌우지간, 이해는 됐다.
내가 어제 닥닥이들 양학한답시고 했던 부캐는 이 세계에선 본캐로, 다4였던 것이다.
'다4라….'
어쩐지 평소보다 특히 게임 수준이 낮다 싶더라니만.
'근데 시발, 최재훈 이 새낀 게임 몇 판을 했는데 다4로 바뀐 걸 이제 눈치 채는 거지?'
하긴, 봤어도 무슨 렉이나 버근가 했겠지.
[어, 왜 티어가 다4에서 다1이 된 거지? 렉이나 버그일 리는 없으니까, 아무래도 남녀 역전 세계로 전이돼서 제멋대로인 역전성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듯하군. 상태창!]
이 지랄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곧 있으면 회수당하는 슈퍼 계정은, 애초에 내가 프로였던 적이 없어서 받지 못한 거고.
내 본계정은 즐겜용 계정이 돼 버려서 골드1이 돼 버린 거고.
"하, 시발…."
부캐가 다4가 된 건 별거 아니다.
다4에서 다1은 금방이니까.
그런데 시발, 챌린저 천 점 대에서 골드 1이라니?
이거 시발, 100연승은 해야 원래 점수 복구하는 거 아닌가?
'곧 시즌 끝나지 않나?'
시즌 다이아 마감.
그건 겜창 이창욱 씨한테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대충 이 세계를 관조하는 성좌 같은 게 있다면 예수가 부활했을 때 한 번, 히틀러가 개지랄을 했을 때 한 번, 그리고 내가 다이어를 찍었을 때 가장 크게 한 번 놀랄 것이다.
'저 게임 밖에 할 줄 아는 게 병신이 겨우 다이아면 도대체 어디다 써먹지?'라며 말이다.
레오레 빼면 아무것도 없는 내 인생 최대의 오점이 되어, 나를 평생 괴롭힐 것이다.
"하…."
앞길이 막막하다.
그래도 일단은 챌린저를 복구하는 것보단, 생계비를 확보하는 게 먼저다.
내가 아무리 레창이라지만 점수가 낮다고 죽는 건 아니다.
반면에 돈은 없으면 진짜로 뒤지는 수가 있다.
이 날씨에 굶으며 노숙한다? 2일 컷 당할 자신이 있었다.
나는 곧바로 내 생명줄을 쥐고 있는 고용주, 사장님에게 연락했다.
-오, 재훈 씨!
-죄송합니다!!! 어제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가지고, 지금에야 연락을 드리네요.
-아이고, 역시 그랬구나. 몸은 이제 괜찮으세요?
-예! 쌩쌩합니다!
-아이고 다행이네요.
연락도 없이 출근 안 한 알바에게 과분할 정도로 친절한 응대였다.
이것도 내가 잘생긴 '남자'라서 그런 건가?
아니, 그냥 이 사장님이 특별히 친절하신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할란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어제 제가 출근 못 해서 많이 곤란하셨을 텐데.
-아이고~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너무 괘념치 마요.
-흐, 죄송합니다. 정말로.
-그 이야긴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고. 그, 최재훈 씨. 가능하면, 혹시 지금 나와 줄 수 있겠어요?
-지금이요?
-원래 주말 이 시간대엔 가게 나와서 상황 확인할 겸 같이 봐 주거든요. 워낙 바쁘고, 정신이 없는 때라. 그런데 하필 어제 밤을 새버려가지고….
목소리에서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수준의 피로가 묻어 나온다.
-아!! 네!!! 저 때문에 그러신 건데, 당연히. 지금 당장 나가겠습니다!
-아이고~ 고마워요~ 아~ 제가 10년만 젊었어도 끄떡 없었을 텐데. 아무튼, 기다릴게요~
사장님은 40대 중반 여성이시다.
그런데 40대 중반 남성과 이야기 하는 기분이었다. 말투나 어조가 영락없이 남자였다.
패션을 실내용에서 알바용으로 바꾸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어제 대강 봤을 땐 못 느꼈는데, 옷이 꽤 많이 늘어나 있었다.
화려한 옷들도 종종 보인다.
이 세계 '남자' 기준으론 여전히 적은 편이고, 수수한 옷들이긴 하다.
그리고 세상에 존나 다행인 건, 치마가 없었다.
이 세계에서 '남성스러운 것'과 '여성스러운 것'의 경계는 상당히 모호하며 희미하다.
그래서인지 이 미친 새끼들 가끔 치마도 입는다는데, 시발.
그냥 그거 말곤 할 말이 없었다.
시발.
'그나저나 피방 알바 하러 갈 땐 어떻게 입어야 되지?'
최재훈2의 기억을 참고해 보자.
[최재훈2의 기억 : 터틀넥 니트에 슬랙스면 무난.]
그게 뭔데 씹덕아.
청바지랑 후드로 갈아입었다.
[최재훈2의 기억 : 머리는 드라이기로 볼륨 좀 준 다음에 스프레이로-]
뭐라는 거야 시발.
물 좀 묻혀서 뒤로 넘겼다.
[최재훈2의 기억 : 화장은-]
화장 조까..
[최재훈2의 기억 : 외투는 트렌치 코-]
'응~ 패딩이 존나 더 따뜻해~'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